쇼니 요시요리

쇼니 요시요리(少弐 嘉頼, しょうに よしより)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으로, 쇼니 씨 13대 당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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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요시요리(少弐嘉頼)
시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출생 오에이(応永) 28년(1421년)[1]
사망 에이쿄(永享) 13년 1월 9일(1441년 1월 31일)[2][3]
개명 쇼호지마루(初法師丸)[4][5](幼名) → 요시요리(嘉頼)
계명 대웅본각(大雄本覚)[4]
관위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
씨족 쇼니 씨(少弐氏)
부모 아버지: 쇼니 미쓰사다(少弐満貞)
형제 스케쓰구(資嗣)、요시요리노리요리(教頼)、바바 요리쓰네(馬場頼経)、지쿠시 요리카도(筑紫頼門)

생애편집

에이쿄 5년(1433년)에 아버지 쇼니 미쓰사다(少弐満貞)와 형 스케쓰구(資嗣)가 오우치 모치요(大内持世)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요시요리는 동생 노리요리(教頼)와 함께 쓰시마 국(対馬国)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고,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의 비호를 받게 된다. 쓰시마에서 원복(元服)을 행하고 가독(家督)을 상속한 요시요리는 일족인 요코타케 요리후사(横岳頼房)나 쓰시마 소 씨(宗氏)의 원조를 받으면서 또한 오토모 모치타다(大友持直)와 협력하면서 쇼니 씨의 재흥을 목표로 하였다.[6]

에이쿄 6년(1434년) 6월, 지쿠젠 국(筑前国)에서 오우치 모치요와 교전하였다. 이 무렵 하코자키 신사(筥崎社)가 전란으로 불타버렸다.[7]。이듬해 에이쿄 7년(1435년) 8월, 오토모 모치타다와 함께 또 다시 모치요와의 전투에 나섰고 패전하였다.[8] 에이쿄 8년(1436년) 2월에는 막부의 명으로 규슈(九州)로 내려온 교고쿠 모치타카(京極持高)의 원군을 얻은 모치요와 교전하였고[9] 같은 해 6월에는 모치요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10]

에이쿄 12년(1440년) 、6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에 의해 요시요리 ・ 노리요리 형제와 모치요의 사이에 화친이 맺어졌고[11]、쇼니 씨의 존속을 인정받았다. 이는 모치요가 쇼니 씨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쓰시마 섬의 소 씨 집안이나, 궁지에 몰린 요시요리가 왜구(倭寇)를 일으켜 해적질을 벌인 대상이었던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에이쿄 13년(1441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21세.[4][5] 자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며, 요시요리 사후 쇼니 씨의 가독은 그의 동생으로 함께 쓰시마로 달아났던 노리요리가 맡았다.

각주편집

  1. 에이쿄 13년(1441년)에 21세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에서 역산하면 오에이 28년(1421년)생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사료종람》(北肥戦誌) 第7編之907 706頁
  3. 한편 《사료종람》에서는 요시요리의 사망을 「가키쓰 원년 1월 9일」이라고 하였으나, 가키쓰 원년은 2월 17일로부터 시작되므로 에이쿄 13년의 오기로 여겨진다.
  4. 《역대진서요략》(歴代鎮西要略)
  5. 《북비전지》(北肥戦誌)
  6. 한국의 《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 병진(1436년) 12월 26일 정해조에서는 쇼니 미쓰사다 부자가 오우치와 씨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요시요리 형제가 쓰시마로 도망친 뒤에 쓰시마에서 조선으로부터 수입해가는 쌀과 소금의 수효가 늘어나고, 오우치 씨가 조만간 군사를 일으켜 쓰시마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자칫 쇼니 씨가 조선으로 쳐들어오거나 망명을 요청해올 경우의 대책을 논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7. 《사료종람》제7편지907 637쪽.
  8. 《사료종람》제7편지907 652쪽.
  9. 《사료종람》제7편지907 657쪽.
  10. 《사료종람》제7편지907 661쪽.
  11. 《사료종람》제7편지907 697쪽.

출전편집

  • 《고하나조노 천황기》(後花園天皇紀, 에이쿄 6년 5월부터 6월까지, 에이쿄 7년 8월)
  • 《간문일기》(看聞日記)
  • 《역대진서요략》(歴代鎮西要略)
  • 《건내기》(建内記)
  • 《북비전지》(北肥戦誌)
전임
쇼니 스케쓰구
제13대 쇼니 씨 당주
후임
쇼니 노리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