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양후 왕이 또는 왕태(始陽侯 王珆, ? ~ 1266년 음력 1월 22일)는 고려 시대의 왕족이다. 원종경창궁주 유씨의 아들이다.

시양후
이름
왕이 또는 왕태 (王珆)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고려
사망일 1266년 음력 1월 22일
사망지 고려
국적 고려
왕조 고려 왕조
부친 고려 원종
모친 경창궁주 유씨
묘소 미상

생애 편집

가계 편집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고려의 제24대 원종(元宗)과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 유씨(慶昌宮主 柳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王), 이름은 이 또는 태(珆)[1], 본관개성(開城)이다. 순안공 종(順安公 琮)의 친형이며, 충렬왕(忠烈王)과는 이복 형제간이다.

왕이의 어머니 경창궁주는 왕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현종(顯宗)의 아들 평양공 기(平壤公 基)의 7세손인 신안공 전(新安公 佺)이며, 어머니는 희종(熙宗)과 성평왕후 임씨(成平王后 任氏)의 딸인 가순궁주(嘉順宮主)이다[2]. 왕이의 친조모인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 柳氏)도 희종과 성평왕후의 딸이니, 왕이의 친조모와 외조모는 서로 친자매간이 되는 셈이다. 경창궁주의 유씨(柳氏) 성은 외가의 성씨를 따른 것이다[3].

왕자 시절 편집

1260년(원종 원년) 원종이 즉위한 후, 맏아들 왕심(王諶, 훗날의 충렬왕)을 왕태자로 삼으려 하자 모후 경창궁주가 이를 반대하면서 왕이를 태자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준(金俊)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왕이는 태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4].

이후 1263년(원종 4년) 음력 8월 13일 친동생인 순안공과 함께 작위를 받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수사공 상주국 시양군개국후(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守司空 上柱國 始陽郡開國侯)가 되었으며[5], 이때 식읍 300호와 식실 100호도 함께 하사받았다. 이후 왕이를 위한 부가 세워져 그 이름을 시양부(始陽府)라고 하였으며, 시양부에는 전첨(典籤)과 녹사(錄事)를 각 1명씩 두었다[6]. 그러나 왕이는 3년 후인 1266년(원종 7년) 음력 1월 22일 사망하고 말았다[7].

한편 이복 형제 충렬왕 즉위 후인 1277년(충렬왕 3년), 왕이의 모후 경창궁주와 친동생 순안공은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를 받아 경창궁주는 폐서인이 되었고, 순안공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8]. 당시 순안공은 부왕 원종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재산이 매우 많았는데, 순안공의 유배 후 그 재산을 모조리 차지한 것은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의 공주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였다[9].

가족 관계 편집

출처 및 각주 편집

  1. "珆"는 "이" 또는 "태"로 읽는다. 네이버 한자사전 Archived 2017년 9월 19일 - 웨이백 머신 참고
  2.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왕전〉
  3.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경창궁주〉”. 2016년 3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8월 1일에 확인함. 
  4.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시양후〉”. 2016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8월 1일에 확인함. 
  5. 《고려사》권25〈세가〉권25 - 원종 4년 8월 - 왕자들을 개국후로 책봉하다
  6. 《고려사》권90〈열전〉권3 - 시양후 왕이
  7. 《고려사》권26〈세가〉권26 - 원종 7년 1월 - 시양후 왕태가 죽다
  8. 《고려사》권91〈열전〉권4 - 순안공 왕종
  9. “《고려사절요》제19권 - 충렬왕1 1277년”. 2016년 4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0월 30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