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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변(중국어 간체자: 辛酉政变, 정체자: 辛酉政變, 병음: Xīn yǒu zhèngbiàn)은 1861년 신유년에 함풍제의 붕어 이후 청나라 황실에서 벌어진 궁중친위쿠데타다. 동태후, 서태후친왕 이힌이 주도하여 함풍제가 죽으면서 지정한 8인의 보정대신을 숙청했다.

제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면서 함풍제를 비롯한 황족 대부분은 만리장성 너머 열하로 도망가고, 황제의 동생인 호쇼이 궁너추커 친왕 이힌만이 북경에 남아 사태 수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덕에 이힌은 서양인들에게 어느 정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함풍제는 서양 군대가 물러간 뒤로도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다가 열하에서 죽고, 8인의 대신과 동·서 두 태후에게 어린 아들 자이슌보정체제를 맡겼다. 자이슌의 보정8대신을 고명팔대신이라고 하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태후는 이들 팔대신의 필두인 수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곧 권력다툼을 시작한다. 서태후는 자기보다 궁중 서열이 높은 동태후와 함풍제의 여섯째 남동생 호쇼이 궁너추커 친왕 이힌, 일곱째 남동생 호쇼이 굴루 친왕 이후완을 포섭한다. 이힌은 9월 5일 열하로 달려와 상가에 조문을 했고, 이때부터 서태후와 쿠데타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1]

9월 14일,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보정팔대신은 청나라에는 수렴청정 제도가 없다고 기각했고, 양 태후측과 팔대신 측은 격렬히 대립했다.[2] 10월 26일, 황실이 북경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자이유완과 두완후와는 양 태후와 함께 황제를 모시고 선발대로 출발하고, 수슌은 함풍제의 운구를 호종하여 하루 늦게 후발대로 따라갔다. 선발대가 북경에 도착하자 이힌이 즉시 쿠데타를 일으켰다.[3] 11월 2일, 양 태후와 황제는 보정대신들보다 먼저 자금성에 입궁하고, 뒤늦게 입궁한 자이유완과 두완후아는 입궁하자마자 쿠데타군에게 체포된다. 북경 북동쪽 밀운까지 왔던 수슌은 거기서 체포되었다.[4]

11월 3일, 쿠데타 세력은 구왈기야 쿠일량 등 5인을 군기대신에 임명하여 의정처군기처를 장악했다. 이힌은 의정왕(도르곤섭정왕보다는 격이 낮음)이 되었다. 11월 8일, 자이유완과 두완후와는 자살당하고 수슌은 참수되었다.[5] 나머지 다섯 보정대신은 실각 선에서 처벌이 그쳤다. 11월 11일, 황제가 즉위식을 올리고 보정팔대신이 올렸던 연호 "기상(祺祥)"을 폐하고 이듬해인 1862년을 동치 원년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자이슌은 동치제로 즉위하고,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에 전무후무한 수렴청정 실권자가 되었다.

각주편집

  1. 溥仪在《我的前半生》中记载:“相传奕䜣化妆成萨满,在行宫见了两宫皇太后,密定计,旋返京做部署。”
  2. 《越缦堂国事日记》记载:肃顺等人恣意咆哮,“声震殿陛,天子惊怖,至于涕泣,遗溺后衣”。
  3. 《清史稿·肃顺传》记载:此前,“肃顺方护文宗梓宫在途,命睿亲王仁寿、醇郡王奕往逮,遇诸密云,夜就行馆捕之。咆哮不服,械系。下宗人府狱,见载垣、端华已先在。”
  4. 《清穆宗毅皇帝实录》记载:“以醇郡王奕管善捕营事。”
  5. 《正说清朝十二帝》:“将行刑,肃顺肆口大骂,其悖逆之声,皆为人臣子所不忍闻。又不肯跪,刽子手以大铁柄敲之,乃跪下,盖两胫已折矣。遂斩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