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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기(辛允基, 1957년 3월 23일 ~ 1999년 9월 12일)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감독으로서는 특유의 성실함과 선수단을 장악하는 능력 및 경기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에 능했던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조직력에 중점을 두어 짜임새 있는 공격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신윤기
(辛允基)
Football pictogram.svg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Shin Yun-Gi
출생일 1957년 3월 23일(1957-03-23)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군
사망일 1999년 9월 12일(1999-09-12) (42세)
사망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172cm
포지션 감독 (과거 수비수)
청소년 클럽 기록

부산중앙중학교
영남상업고등학교
클럽 기록*
연도 클럽 출전 ()
1976-1982
1983-1984
서울시청 축구단
유공 코끼리

008 00(0)
지도자 기록
1985-1993
1992
1994-1995
1996-1998
1999
1999
1999
서울시청 축구단 (코치)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
서울시청 축구단
한일생명 축구단
부산 대우 로얄즈 (스카우트)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부산 대우 로얄즈 (감독 대행)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축구인 경력편집

선수편집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으로[3] 범일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영남상업고등학교를 거쳤으며,[4][5] 1975년 전국우수고교축구대회에서 감투상을 수상하였다.[6] 이후 1976년 1월 15일 서울시청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7] 1977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 여러 차례 득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8][9] 하지만 그 해 허리 부상으로 인해 2년동안 병원에서 부상 회복에 전념했으며, 1979년 선수로 다시 복귀하였으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다.[10] 그 뒤 198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대표 B팀인 충무팀에 포함되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했으며,[11][12][13][14] 1982년 팀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에 일조하였다.[15]

이후 1982년 12월 17일 유공 코끼리가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입단에 합의했으며,[16][17] 1983년 슈퍼리그 당시 포항제철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18] 그 뒤 같은 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하였으나 팀은 PSV 에인트호번가나 대표팀에 이어 3위를 기록해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으며,[19] 1984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20]

지도자편집

은퇴 이후 1985년부터 서울시청 축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5년 방글라데시에서 개최된 프레지던트 골드컵에 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다.[21] 이후 1986년 박종환 감독과 함께 팀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어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했으며,[22] 1989년 김수덕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후기 리그 우승을 견인한 뒤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하였다.[23] 그 뒤 1990년 팀이 타이완에서 개최되는 '차이니스컵'에 출전하자 팀의 코치로 참가했으며,[24] 1992년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다.[25] 또한 1994년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조직한 '실업 선발팀'의 코치로 임명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치러진 '실업친선축구대회'에 나섰으며,[26] 그 해 서울시청의 감독으로 승격되어 팀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1996년 1월 17일 강원도 춘천시를 연고로 하는 한일생명 축구단이 창단하자 원년 감독으로 합류했으며,[27][28]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전국실업축구연맹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대한 공로로 1998년 '강원도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감사패를 수여받았다.[29]

이후 1999년 팀이 해체되자 K리그 최초로 운용되는 부산 대우 로얄즈의 스카우트로 임명되어 임중용 등을 영입하기도 했으며,[30][31][32] 그 해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되었다.[33] 또한 1999년 6월 이차만이 총감독으로 승격되어 감독이 공석이 되자 대행을 맡았으며,[34] 데뷔전에서 첫 승을 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35] 얼마 뒤 천안 일화 천마와의 2연전에서 내리 패한 후 울산 현대 호랑이와의 경기에서도 승부차기 패배를 기록하며 3연패의 늪에 빠져 팀의 분위기가 가라앉게 되었다.[36]

사망편집

감독 부임 후 2개월 뒤 팀 사정과 맞물려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에 시달리다 위경련 및 복통을 앓았으며,[37][38] 1999년 9월 10일 검진 도중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뒤 합병증으로 뇌졸중 증세가 발병해 의식을 잃었다.[39] 이후 병원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았으나 9월 12일 세상을 떠났으며,[40] 유해는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인근 솔밭산 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41] 그 뒤 부산 대우 로얄즈 선수들 및 관계자들은 9월 18일 있었던 부천 SK와의 K리그 경기에서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나오며 조의를 표했으며, 경기 전 전광판을 통해 신윤기의 생전 모습을 방영하고 서포터즈 회원들이 추모의 글을 낭독하였다.[42]

기타편집

서울시청 축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하던 시절 인천전문대학 체육학과에 진학해 학업 활동을 병행하였으며, 1995년 졸업한 뒤 중부대학교 사회체육과에 편입하였다.[43]

부산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한 정신지체장애아 복지시설의 원장과 의남매를 맺고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지급하였다.[44][45]

이장수와는 절친 사이이며,[46] 안정환과는 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쌓아 많은 영향을 주었다.[47][48][49]

선수 및 지도자 기록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지도자편집

수상 경력편집

선수편집

감독편집

개인편집

각주편집

  1. “급성백혈병 타계 신윤기 대우감독”. 연합뉴스. 1999년 9월 12일. 
  2. “부산대우 이차만감독 전격 경질”. 부산일보. 1999년 6월 11일. 
  3. “부산대우 새감독 신윤기씨”. 부산일보. 1999년 6월 11일. 
  4. “嶺南商高(영남상고)”. 경향신문. 1973년 6월 7일. 
  5. “영광의 大統領金盃(대통령금배)는 어디로…20일부터 熱戰(열전)11일…48개팀 戰力(전력)을 點檢(점검)한다”. 경향신문. 1975년 6월 19일. 
  6. “우수高校蹴球(고교축구) 安養工(안양공)·淸州商(청주상) 공동우승 차지”. 경향신문. 1975년 8월 25일. 
  7. “서울市(시)축구팀 創團(창단)”. 경향신문. 1976년 1월 15일. 
  8. “實業蹴球(실업축구) 企銀(기은),商銀(상은)을擊破(격파) 李聖洙(이성수)강슛…決勝(결승)고울”. 동아일보. 1977년 3월 15일. 
  9. “서울市廳(시청) 大量(대량)득점 鐵道廳(철도청) 5대0꺾어 實業蹴球(실업축구)연맹전”. 경향신문. 1977년 3월 17일. 
  10. “부산대우 신윤기 감독 타계”. 부산일보. 1999년 6월 11일. 
  11. “忠武(충무)팀 트레이너 李重輝(이중휘)씨를 選任(선임) 選手(선수)18명確定(확정)”. 경향신문. 1980년 7월 29일. 
  12. “大統領杯(대통령배)축구대표 대학10·실업8명”. 동아일보. 1980년 7월 29일. 
  13. “메르데카 蹴球大會(축구대회) 忠武(충무)팀을 派遣(파견)”. 경향신문. 1980년 9월 16일. 
  14. “善隣商(선인상),北一(북일)에 추첨勝(승) 野球(야구)”. 동아일보. 1980년 10월 9일. 
  15. “우승문턱서 불나간 韓電(한전) 서울市廳(시청) 패권 전국 축구”. 동아일보. 1982년 11월 5일. 
  16. “油公(유공) 12월 프로蹴球(축구) 창단 할렐루야와 스카웃 熱戰(열전)”. 경향신문. 1982년 10월 2일. 
  17. “프로蹴球時代(축구시대) 본격화”. 경향신문. 1982년 12월 16일. 
  18. “축구 슈퍼리그 할렐루야,國民銀(국민은) 일축”. 동아일보. 1983년 5월 10일. 
  19. “대통령盃(배)축구 油公(유공),가나에 덜미잡혀”. 경향신문. 1983년 6월 10일. 
  20. “프로축구 부산 신윤기감독”. 경향신문. 1999년 9월 13일. 
  21. “85년 방글라데시 골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을때”. 경향신문. 1996년 7월 9일. 
  22. “朴(박)종환「토틀사커」우승"골인". 매일경제. 1986년 11월 22일. 
  23. “서울市廳(시청) 頂上(정상)에 올라”. 동아일보. 1989년 10월 18일. 
  24. “서울시청축구팀 11일 출국 臺灣(대만) 차이니스컵대회 출전”. 동아일보. 1990년 5월 4일. 
  25. “실업축구聯(연) 새집행부 구성”. 동아일보. 1992년 3월 7일. 
  26. “韓-濠실업친선축구 파견선수 선발”. 연합뉴스. 1994년 11월 16일. 
  27. “한일생명 축구단 창단”. 매일경제. 1996년 1월 17일. 
  28. “한일생명 보험업계 첫 실업축구팀 창단”. 매일경제. 1996년 1월 20일. 
  29. “스포츠 한마당”. 중앙일보. 1998년 2월 27일. 
  30. “신윤기씨, 대우 스카우트 임명”. 연합뉴스. 1999년 1월 5일. 
  31. “부산 대우 스카우터 신개념 도입”. 국제신문. 1999년 1월 4일. 
  32. “부산'연습생 신화' 임중용, 신감독 영정앞 오열”. 중앙일보. 1999년 9월 15일. 
  33.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2명 선임”. 연합뉴스. 1999년 6월 1일. 
  34. “프로축구 대우, 신윤기 감독대행 선임”. 연합뉴스. 1999년 6월 10일. 
  35. “안정환, 해트트릭 `원맨쇼'. 연합뉴스. 1999년 6월 23일. 
  36. “6개팀'PO 서바이벌게임'. 경향신문. 1999년 9월 11일. 
  37. “죽음 부른 벤치 스트레스”. 경향신문. 1999년 9월 13일. 
  38. “프로축구 부산 신윤기감독 위독”. 경향신문. 1999년 9월 11일. 
  39. “신윤기 부산대우 감독, 뇌사상태 빠져”. 연합뉴스. 1999년 9월 10일. 
  40. “신윤기 부산감독 타계”. 동아일보. 1999년 9월 13일. 
  41. “부산대우 신윤기 감독대행 타계”. 국제신문. 1999년 9월 13일. 
  42. “부산대우 `신감독 추모` 승전보”. 부산일보. 1999년 9월 20일. 
  43. '거액의 당근작전 우승밑거름'. 스포츠조선. 1997년 11월 16일. 
  44. “`안정환형과 만남 설레요`”. 부산일보. 1999년 8월 24일. 
  45. “안정환 선행도 MVP”. 부산일보. 2000년 4월 9일. 
  46. “이장수 감독이 본 中올림픽 축구팀”. 중앙일보. 1999년 9월 30일. 
  47. “올 프로야구-축구 최고스타 이승엽-안정환의'송구영신' "새천년엔 더 잘할 자신있어요". 동아일보. 1999년 12월 31일. 
  48. “은퇴 안정환' "선수로 누릴 수 있는 것 모두 누려 행복했다". 대한축구협회. 2012년 1월 31일. 
  49. “안정환의 지도자 꿈 접게 만든 故 신윤기 감독대행”. 매일경제. 2012년 1월 31일.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