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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선사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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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군 요동군
요서군 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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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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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
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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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 우문선비
전연 평주
전진 평주
후연 평주
북연
북위 영주 거란 고막해 실위 두막루
동위 영주 물길
북제 영주
북주 영주
유성군 말갈
연군
요서군
영주 송막도독부 요악도독부 실위도독부 안동도호부 발해 흑수도독부
오대 십국 영주 거란 발해
상경도   동란국 여진
중경도 정안국
동경도
동경로
상경로
북경로
함평로
동요국 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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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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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연방관구/러시아 극동)
한중 관계
한러 관계

실위(室韋, 병음:Shìwéi)는 실위(失韋)라고도 한다. 6세기에서 10세기까지 중국 동북부넌장 강, 아르군 강, 흑룡강 유역에 존재했던 종족이다. 실위의 일파인 몽올실위가 이후 몽골족의 뿌리가 되었다.

한문 사료에서는 흥안령산맥의 동·서지역에 흩어져 분포하던 많은 부락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동호(東胡)’ 라고 부르다가 ‘실위’라고 했고, 이후에 이들을 타타르(達靼)나 조복(阻卜) 등으로 불러왔다. 한편, 튀르크의 퀼테긴 비문에서는 한문 사료의 실위를 오투즈 타타르(Otuz Tatar, 30성 타타르)라고 부르고 있고, 빌게 카간 비문에서도 토쿠즈 타타르(ToquzTatar, 9성 타타르)로 부르고 있다.[1]

목차

각 부족편집

남북조 시대편집

북조에서 까지 실위는 5개의 부족으로 분열한다.

  • 남실위(南室韋)
  • 북실위(北室韋)
  • 발실위(鉢室韋)
  • 심말달실위(深末怛室韋)
  • 대실위(大室韋)…실위의 일부 부족이지만 다른 부족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당나라 시기편집

당나라 시대가 되면 다시 20개의 부족으로 분열한다.

  • 영서실위(嶺西室韋)…파와실위의 동쪽.
  • 산북실위(山北室韋)…오라호부(部)와 나례부(部)의 동북쪽.
  • 황두실위(黄頭室韋)…영서실위의 동남쪽. 군사력이 강하였고, 인구도 많았다. 동북쪽은 달구(達姤)와 접했다. 금발의 아리안족
  • 대여자실위(大如者室韋)
  • 소여자실위(小如者室韋)…산북실위의 북쪽.
  • 파와실위(婆萵室韋)…소여자실위의 북쪽.
  • 눌북지실위(訥北支室韋)…영서실위의 북쪽. 세력이 작았던 부락(部落)이었다.
  • 낙타실위(駱駝室韋)
  • 오색고실위(烏素固部落)…회홀의 동쪽.
  • 이색몰부락(移塞沒部落)…오색고부(部)의 동쪽.
  • 색갈지부락(塞曷支部落)…이색몰부(部)의 동쪽. 좋은 말(馬)을 산출(産出)하였고, 인구도 많았으며 제일 세력이 강했다.
  • 화해부락(和解部落)…색갈지부(部)의 동쪽.
  • 오라호부락(烏羅護部落)…화해부(部)의 동쪽.
  • 나례부락(那禮部落)…화해부(部)의 동쪽.
  • 오환국(烏丸国)…오라호(烏羅護)의 동북 2백여리. 오환족의 후손이었다.
  •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오환국 북대산(北之大山)의 북쪽.
  • 몽올실위(蒙兀室韋)(몽와부, 蒙瓦部)…후일 몽골.
  • 낙조실위(落俎室韋)(낙탄부, 落坦部)…몽올실위의 북쪽.
  • 동실위부락(東室韋部落)…오환구의 동남300리. 오환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역사편집

 
500년대의 당시 사회.

기원편집

탁발선비가 원거주지인 가샨동을 떠난 뒤 ‘실위’가 출현할 때까지 어떠한 북방 종족도 대규모로 이동해오거나 갔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위인은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 있던 탁발선비의 잔여세력으로 탁발선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다.[2]

오락후가 443년에 탁발선비의 후예가 세운 북위에 왔고, 후일 사서에서 명칭이 실위로 바뀐 뒤인 554년에도 동위(東魏)를 찾아왔다. 실위와 오락후가 북위와 동위를 찾아온 목적은 오락후의 서북쪽에 탁발선비의 조상 거 주지였던 ‘석실(石室)’ 유적이 있으며, 오락후 사람들이 항상 찾아가서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들은 세조(世祖) 탁발도(拓跋燾)는 443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 이창(李敞) 등을 오락후의 거주지로 파견해 정황을 살피게 했다.

이와 관련해 《위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 진군 4년에 내조 했는데, 그 나라 서북쪽에 국가 조상의 옛터가 있으며, …… 석실에는 신령이 모셔져 있고, 많은 백성이 그곳에서 기원을 드린다고 했다”[3], “진군 연간에 오락후국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했는데, 석묘가 옛날과 같고, 백성이 항상 기도하니, 신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전했다. 그해 중서시랑 이창을 석실에 파 견해 천지에 제사지내고, 황조(皇祖)와 선비(先妣)를 배향(配享)했다. …… 그 백성들이 더욱 이를 받드니, 모든 사람들은 위국(魏國)이 신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말했다”[4] 여기에 등장하는 ‘석실’과 ‘석묘’는 곧 가샨동(嘎仙洞)을 말하는데, 동굴 안 석벽에는 이창이 쓴 제문(祭文)이 새겨져 있다. 이때부터 북위는 사신을 파견해 가샨동 석실의 주인을 탁발선비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제사를 지냈다. 물론 자신들이 ‘석실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을 북위에 알린 실위의 목적은 그들이 북위의 조상을 잘 섬기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들이 탁발선비와 같은 계통이라는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위 또한 가샨동 석실의 존재를 확인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들의 선조들이 흥안령의 가샨동에서 출발한 수렵 유목민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석실에 제사를 지내온 이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계통임을 알게 되었지만, 탁발선비가 그들을 ‘선비’가 아닌 실위라는 명칭으로 부른 데에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일찍이 중원지역에 제국을 건설한 탁발선비는 변두리에 치우쳐 살면서 이적(夷狄)의 신분으로 조공하러 온 실위와 기원이 서로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가샨동에서 남하한 후에 선비족 탁발부 사람들은 생산방식, 언어와 생활풍습 등의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체질적인 측면에서도 초기 탁발부 사람과 차이가 발생했다. 따라서 이동한 탁발선비와 원거주민을 구별할 목적으로, 남북조시대에 음역 관례를 이용해 원거주지에 살고 있던 동족을 실위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주 1][5]

북조~수나라편집

동위무정(2년 554년) 4월, 실위의 사신들이 중국에 처음으로 조공하였고, 천보 원년(550년), 동위의 선양을 받은 북제가 성립하여 북제에게도 조공하였다.

이후, 실위는 남실위, 북실위, 발실위, 심말달실위, 대실위의 5개 부족으로 나뉜다. 부족장이 없고, 생활의 빈곤함 때문에 서쪽의 몽골 고원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돌궐의 지배를 받아 파견된 3명의 토둔(吐屯 : 감찰관)에 의해 관할되게 되었다.

당나라편집

무덕 연간(618년 - 62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였다. 정관 3년(629년)에도 사신을 보내 담비를 헌상했다.

무주 장수 2년(693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나라 장수 이다조에게 깨끗이 평정되었다.

경룡(707년 - 710년) 초, 다시 당나라에 조공을 시작하고 돌궐에 대한 토벌을 요청하였다.

개원(713년 - 741년), 천보(742년 - 756년) 사이에는 10번의 조공을 하고, 대력(766년 - 779년) 중반에는 11번의 조공을 하였다.

정원 8년(792년) 윤12월, 실위도독 10명이 당나라에 입조했다.

대화 5년(831년)에서 대화 8년(834년)까지 3회간 조공을 하고, 대화 9년(835년) 12월, 실위대도독 30명이 입조했다.

개성(836년 - 840년)과 회창(841년 - 846년) 중반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복 4년(904년) 9월, 거란이 흑차자실위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인 유인공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양자인 조패(趙霸)를 보내 이를 막았다. 야율아보기는 조패가 무주(武州)에 왔음을 알고 실위인의 모리(牟里)를 조패에게 보낸다. 야율아보기는 부족장임을 속이고, 평원에서 회담을 가졌다. 야율아보기가 먼저 도산(桃山) 아래에 복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패는 잡히고 그들은 전멸한다. 거란은 승리를 거머줬고 실위를 대파했다.

천우 2년(905년) 7월, 거란은 다시 흑차자실위를 토벌했다.

천우 4년(907년) 2월, 흑차자실위는 거란의 가한이 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침략을 받고, 거란에 항복했다. 10월, 흑차자실위는 거란에게 격파되었다. 그 해, 당나라 애제주전충에게 선양함으로써, 당조(唐朝)가 멸망했다. 이듬해(908년) 5월, 흑차자실위는 오환과 함께 정벌을 받는다. 그 이듬해(909년) 10월에도 거란 응군(鷹軍)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실위의 이름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맹고국(萌古國)편집

요나라 대강 10년(1084년) 2월과 3월에 맹고국(萌古国)이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요사』에 기록되어 있다.

풍속편집

실위로 불리던 이들을 모두 선비족의 후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 만, 언어와 풍습 등으로 볼 때 이들의 주류는 대체로 선비 계통이었다.[6] 한문사료에 등장하는 초기의 실위는 흥안령을 중심으로 쿨룬 부이르 초원, 거란의 북쪽과 눈강 동쪽 일대에 거주했다. 본래 실위는 주로 수렵, 어로와 목축경제 상태에 있었고, 약간의 농경도 하고 있었다. 실위의 거주지역인 흥안령산맥 일대에는 강과 호수가 발달해 있고, 산속 밀림에는 다양한 야생동물이 많았기 때문에, 수렵과 어로가 실위인들의 생업이 되기에 적합했다. 이것은 《위서》「실위전」과「오락후전」에서 실위인이 “사냥을 좋아하고”, “오직 돼지고기와 물고기를 먹으며”, “담비 가죽이 많고”, “남녀가 모두 흰 사슴 가죽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만들어 입었다”고 한 기록과도 일맥상통한다.[7]

의식주편집

남실위의 의복은 거란과 비슷하였고, 북실위는 여우, 오소리등의 모피나 물고기의 비늘껍질로 가공해 만들었다. 남자는 머리를 늘려 삭발하였고, 여자는 머리카락을 묶어서 상투를 둘렀다.

돼지나 소 등 가축과 물고기를 주로 먹었다. 남실위에서는 돼지와 소를 사육하지만 양은 키우지 않았고, 곡물로 국양주(麴釀酒)를 만들어 마셨다. 습속(習俗)은 말갈과 같았다.

저습지에서 모기가 많은 여름은 성에서 고상(高床) 주거형식의 집에서 거주하였다. 겨울은 수초(水草)를 쫓아 유목을 하였고, 돌궐의 전차(氈車)와 같은 거저(籧篨)로 하여금 가옥을 하였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북실위지역에서는 겨울을 구릉의 반지하 집에서 보낸다.

산업편집

남실위는 조, 보리, 피가 풍부하고, 겨울은 목축을 한다. 담비의 가죽을 잘 얻었다. 철광이 없어 고구려에서 약탈하여 철광을 얻고 있었다. 북실위는 사슴을 노획하여 얻은 고기를 주식으로 하였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고, 잡은 담비를 식생으로 하고 있었다.

언어편집

중국 사서에서는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비슷하였다. 후에 맹고국(萌古国)이 대두한 후로부터 몽골계로 추정한다. 『신당서』에는 실위의 언어가 말갈과 같다고 하였다.

혼인편집

남편이 죽으면 재혼하지 않는다.

장례편집

부모가 죽으면 시신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 위에(혹은 대붕(大棚) 위) 놓고, 사람들은 3년동안 상을 치른다.

부족장편집

실위에는 통일적인 부족군장이 없어, 각기 부족마다 족장이 있었다. 그 부족장을 「여막불만돌(餘莫弗瞞咄)」, 「걸인막하돌(乞引莫賀咄)」, 「막하돌(莫賀咄)」등으로 부른다. 부족장이 죽으면 그 아우나 아들이 후계를 잇는다. 만약 그에게 후계를 이을 후사가 없으면 부족에 있는 호걸을 천거하고 부족장에 세운다.

참고자료편집

  • 위서』(열전 제88권)
  • 수서』(열전 제49권 북적)
  • 북사』(열전 제82권)
  • 구당서』(열전 제149권 하(下) 북적)
  • 신당서』(열전 제144권 북적)
  • 신오대사』(사이부록 제3권)
  • 요사』(본기 제1권 태조 상(上), 본기 제2권 태조 하(下), 본기 제24권 도종 사(四))

관련 항목편집

노트편집

  1. 펠리오는 실위의 음역명 이 선비와 서로 같다고 보았다. 그는 『화라어고(火羅語考)』에서 “선비는 뒤에 음역한 실위와 본래 같은데, Serbi, Sirbi, Sirvi 등으로 대음(對音)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n을 -r로 음 역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단지 한나라 때와 그 이전의 음역법이 이와 같았고, 훗날에 와서는 치음으로 끝나는 글자를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鮮(心仙開三)과 卑(帮支開三)의 한나라 시기의 음가는 Si~an-pi~e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나라 이전의 한문 사서에 따르면, 중국어의 韻尾 -n은 북방 종족의 언어에서는 結尾 -r로 음역되는 경우가 있다. Si~an의 발음 -n을 음역하면 非漢族 언어의 尾音 -r이 된다. 곧 Si~an을 Siar로 쓸 수 있고, Pi~e는 bi, vi와 음이 같으므로 선비는 Serbi, Sirbi 또는 Sirvi에서 음역되었다는 것은 비교적 믿을 만하다. 失(또는 室:心質開三)과 韋(云微合三)의 남북조시대 음가는 i~et- i~u i로 추측할 수 있다. i~et를 Ser 등과 비교하면, 모음 와 S는 모두 맑은 마찰음이 나는 부위가 서로 비슷하다. 위진남북조시대 이후에 -t 등의 치음으로 끝나는 글자는 북방 종족 언어의 미음 -r로 음역했으니, 곧 i~et는 i~er로 쓸 수 있다. 또한 i~u i의 모음 는 발음이 아주 가벼운 설근마찰음(舌根摩擦音)이며, u i는 vi 또는 bi(b 의 약화가 v이다)와 거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실위도 Serbi, Sirbi 또는 Sirvi에서 음역되었다. 음운학의 측면에서 볼 때, 실위와 선비의 원문은 확실히 동일한 것으로서 ‘실위’가 곧 ‘선비’다.

각주편집

  1. 《퀼테긴 비문》·《빌게카간 비문》·林幹 著(2007), 『突厥與回紇史』, 內蒙古人民出版社
  2. 장지우허 지음, 북방사연구팀 옮김(2009), 『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 소나무, 60~73쪽
  3. 《魏書》 권100, 「烏洛侯傳」
  4. 《魏書》 권108, 「禮志1」
  5.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46~51쪽. ISBN 978-89-6187-305-5. 
  6. 亦鄰眞(1979), 「中國北方民族與蒙古族族源」, 『內蒙古大學學報』, 內蒙古大學出版社
  7.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51쪽. ISBN 978-89-6187-3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