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 1453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왕자이며 서예가이자 시인이며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세종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문종세조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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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安平大君
안평대군의 꿈 내용을 그린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 내용을 그린 《몽유도원도
지위
조선 세종의 왕자
부왕 세종
이름
이용(李瑢)
별호  : 청지(淸之)
 : 비해당(匪懈堂) · 낭우거사(琅玗居士)
  : 낭간거사(琅玕居士) · 매죽헌(梅竹軒)
시호 장소(章昭)
신상정보
출생일 1418년 9월 19일(1418-09-19)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453년 10월 18일(1453-10-18) (35세) (음력)
사망지 조선 경기도 교동군
부친 세종
모친 소헌왕후 심씨
배우자 부부인 연일 정씨
자녀 2남 1녀

개요편집

이름은 이용(李瑢), 본관전주, 는 청지(淸之), 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세조의 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기도 하다. 서예시문, 그림, 가야금에 능하였으며 한석봉과 함께 명필로 여겨진다.

1453년(단종 1년), 둘째 형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숙종 때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생애편집

출생과 왕자 시절편집

1418년(세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그는 1431년(세종 13년)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봉사손이 되었다.[1]

1428년(세종 10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에 봉해지고 14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수양대군과의 경쟁편집

그는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문종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정정치에도 간섭했으나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 일파와 경쟁하였다.

1453년 1월 28일(1452년 음력 12월 19일) 아들 이우량이 병사하였고 1453년 5월 31일(음력 4월 23일)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내가 불사(佛事)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소헌왕후문종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이우량(李友諒)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佛事)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는 것을 중단한다. 평소 부인 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했는데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실록에 의하면 "용(瑢)이 박대(薄待)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것이 이미 7, 8년이었다. 졸하게 되자 그 염(斂)하고 빈(殯)하는 여러 가지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도 또한 가서 보지 아니하니, 서인(庶人)의 죽음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였다.[2]

계유정난과 죽음편집

그러나 그는 수양대군의 무신세력에 눌려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18일 유배중에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으며 의춘군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평소에 하연(河演), 안견(安堅), 박팽년(朴彭年)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도 매우 뛰어났다. 글씨는 조맹부체로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서적(書蹟)으로는 경기도 여주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임영대군구묘표 등이 있다. 그의 주도로 1450년(문종 1년) 구리 동활자인 경오자를 주조하여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사후편집

아들 이우직은 강화도에서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양아버지인 성녕대군 사가의 재산 역시 몰수된다.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몰살되자 양어머니인 성녕대군 부인 창녕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되고, 오라비 성득식(成得識) 역시 거듭된 탄핵을 당했다. 그의 첩과 이우직의 처 역시 관비가 되었다. 양어머니 성씨는 1457년(세조 2)에 귀양에서 풀려나 친가에 있다가 사망한다.

이후 선원계보에서도 삭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때 복권되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실렸다.

가족 관계편집

기타편집

시문과 그림에 관심이 많아 안견, 박팽년, 김수온, 이현로 등과 교류하였다. 안평대군의 주도로 글과 그림이 어울려 이루어지는 서화합벽(書畵合璧)이 권축(卷軸) 형태로 다수 제작되었다. 이는 세종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 형식이다.[3] 대표적인 작품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들 수 있다.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는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이 작품들을 보지도 않고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4]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세종 12권,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7월 7일(정묘) 2번째기사 "소경공 종의 사우를 그 집의 북쪽에 지어 주도록 명하다"
  2.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4월 23일(경술) 3번째기사 "안평 대군 이용의 부인 정씨의 졸기"
  3. 정윤회. “〈몽유도원도〉 권축과 세종대 서화합벽 연구”. 
  4.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0월 25일(무신) 7번째기사 "세조가 이용과 이현로의 집에 있는 글을 모두 불태워 버리다"
  5. 실제 안평대군이 아니라 안평대군을 모티브를 따온 역할로, 극중 행적을 보아하면 안평대군+금성대군 모티브로 보인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