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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일본어: 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인들의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550년에 이르는 시대의 명칭이다.

조몬 시대에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서 일본으로 들어온 한반도인(통칭: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사용하며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 일본 열도 각지의 조몬인들을 정복하였다. 한반도의 색체가 뚜렸한 야요인들의 시대는 무려 550년에 이른다.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큐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였고 이 촌락은 일본 혼슈의 북부까지 퍼지게 된다. 한반도 지역에서 기원한 수도경작과 한반도 고유 묘제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건너가면서부터 조몬인들은 사라지게 된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1] :18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한반도에서 기원(起原)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들이 성립되었다.[2]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처음 한반도에서부터 큐슈 북부로 수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 체계가 전해지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큐슈, 시코쿠, 혼슈를 지나 토호쿠 북부까지 수도경작이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현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죠몬인들이 살던 죠몬 시대후기부터, 대규모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업과 수렵을 대부분이 하였고 밭에 심는 벼의 재배(陸稻耕作)은 매우 소규모로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彌生)시대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었다.

수도경작(水稻耕作)편집

수도경작(水稻耕作)은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한반도에서 기원한 경작의 형태로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이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도경작을 위한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3세기 중엽에 왜국의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대륙에 조공을 했다는 중국사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고사기와 외국사서 등에서는 히미코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무분별한 외국 조공 기록들에 의심을 가지고 있어서 히미코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실존자체가 확실치 않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국이라고 불렸다.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편집

한반도 야요이인 일본진출에 대해선 야요이 시대를 나타내는 묘제(墓制)의 용어에는 지석묘(支石墓),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라고 하는 이장시설의 외부구조로 구분하는 것이 있고 목관묘(木棺墓), 토광묘(土壙墓)같이 이장시설 내부에 있는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있다.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한반도도래인(韓半島渡來人)이라는 증거는 야요이의 묘제(墓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요이인의 묘제로서 목관묘는 한반도에서 도래된 묘제로서 야요이 시대 전기말(弥生時代前期末)까지 서일본(西日本)에 널리 퍼져 특히 기나이 지방(畿内)에 주로 방형주구묘 내부의 주체부로서 목관묘가 쓰여졌다.

일본에서 카메칸보(甕棺墓)라고 불리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후쿠오카시, 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규슈의 이토시마반도, 시마바라반도에 퍼져갔다.[3] 또한 한반도 남부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인의 방형주구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방형주구묘를 만들었던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여 일본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전파(傳播)되었고 방형주구묘는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슈 북부에서부터 방형주구묘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간사이 긴키 지방(近畿地方)까지 퍼져 긴키 지방에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방형주구묘가 일본열도의 주부 지방, 간토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도래하게 된다.[4]

야요이의 이름 유래

 
야요이 시대의 야요이 토기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초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처음엔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 상에서 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일본에 수전농경문화가 전파된 계기는 한반도 도래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시작된것이다.

농경편집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짧은 거리의 이동과 정주를 반복하며 수렵과 채집 그리고 목축을 하던 한(韓)민족들은 수도경작(水稻耕作)이라는 벼를 이용한 쌀 생산 수단을 창조해내고 수도경작을 시작하였다. 수도경작(水稻耕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만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무거동마전리 유적을 통해 기원전 7~5세기를 최상한 연대로 보았으나, 2015년 5월 세종시에서 약 4000평 가량의 논농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2~13세기(B.C.13~B.C.12)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이동하여 일본인들인 조몬인들을 몰아냈는데[5] 이들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水稻耕作)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또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고고학적으로도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수도경작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퍼졌는데, 현재 후쿠오카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퍼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몬인들을 정복한 야요이인(한반도인)들의 국가(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도호쿠 남부까지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에는 도호쿠 북부까지 한(韓)민족들이 출병하여 조몬인들을 북해도에 몰아내고 수도경작의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한반도식 농경인 수도경작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1] :18~19

수도경작과 더불어 한반도식 직물의 기술도 전파됐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일본으로 출병(出兵)한 한(韓)민족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선 당시 문자가 존재하지 않아 기록에선 찾아볼 수 없으나 유물들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 남부와 똑같은 고인돌이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에 있는 야요이시대 전기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야요이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의 일본인 인골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7]

석기편집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크게 조몬 시대에서 내려온 타제석기와 당시 한반도의 민무늬토기 시대로부터 전해진 마제석기 등으로 구분된다.

각주편집

  1.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2.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BC 3세기경에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弥生) 문화가 서(西)일본에서 일어나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3. 崎谷満『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勉誠出版 2009年)
  4. 「前方後円墳の成立と変遷」近藤義郎 『考古学研究』15-1、1968年
  5. 강성현 (2005).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가람기획. 156쪽. ISBN 89-8435-224-1.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 
  6. Dennis Normile (2003년 5월 30일). “Earlier Start for Japanese Rice Cultivation”. Sciencemag. 2013년 6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1일에 확인함. One theory holds that immigrants fleeing the turmoil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beginning about 450 B.C., took the technology overland to present-day Korea, then across the relatively narrow Korea Strait to Japan's Kyushu Island. An alternative theory is that seafaring traders carried the technique to lands bordering the Yellow and East China seas around 1000 B.C. or earlier. 
  7.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쪽. ISBN 89-86142-81-3.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지석묘가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