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영남 만인소

(영남 만인소 사건에서 넘어옴)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는 영남에서 만인 정도가 상소한 것을 말하며, 시대에 따라 여러번 있었다.

1792년 정조 16년 윤 4월 27일에 올라온 상소는 만 명이 넘는 영남의 선비들의 이름으로 올려졌다.[1]
1881년 고종 16년에 유생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해서 올린 상소문으로 유생들이 전개한 위정척사 운동이다.
1884년 고종 19년에 유생 이재교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 유생들이 정부의 갑신 복제개혁에 반대해서 올린 상소문으로 유생들이 전개한 위정척사 운동이다.

배경편집

1880년 8월, 2차 수신사로 갔다온 김홍집이 일본에서 귀국하였는데, 일본에 있던중에 김홍집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黃遵憲, 황쭌셴)을 만나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받아 이를 유포하였다. 《조선책략》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유럽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앙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嗟夫, 俄爲遞狼秦, 力征經營, 三百餘年, 其始在歐羅巴, 繼在中亞細亞, 至於今日, 更在東亞細亞, 而朝鮮適承其弊, 然則策朝鮮今日之急務, 莫急於防俄, 防俄之策, 如之何, 曰親中國․結日本․聯美國, 以圖自强而己

조선책략의 유포로 국왕 고종과 대신, 관료들이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1881년 고종 16년에 유생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해서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과정편집

이에 위정척사론자들에게는 2차 수신사로 귀국한 김홍집 개인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개항 이후 무분별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는 빌미가 된다. 이에 김홍집의 귀국 1개월 뒤인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은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유원식을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시킨다. 그 후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리게 된다. (1만인의 상소라는 뜻)

이들은 상소의 머리글에서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이 유전(流轉)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 뒤에 청나라,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을 견제한다는 주장의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또한 유생들은 서학(천주교)에 종사하여 치재(致財)·권농(勸農)·통공(通工)에 진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는 고래로 양법(良法) 선규(善規)가 있으므로 서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황준헌이란 자는 중국인이라 하지만 일본의 설객이며 야소(耶蘇)의 선신(善神)이며, 그와 같은 사서(邪書)를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져 위정척사의 대도(大道)를 명시하라"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은 김홍집을 탄핵하는 글이기도 했지만, 정부를 공격하는 글이기도 했다. 이에 민씨 정권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는 이만손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3월에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결국 이만손을 체포하여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교외로 축출했다. 그러나 영남만인소로 촉발된 위정척사운동은 전국적인 유생들의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게 된다.

만인소편집

18세기 후반 1792년 처음 등장한 만인소는 총 7차례 씌어 졌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만인소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두 가지다. 만인소와 같은 연대에 서명상소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2]

1차 영남만인소편집

1792년 정조 16년 윤 4월 27일에 올라온 상소는 만 명이 넘는 영남의 선비들의 이름으로 올려졌다. 상소 하나에 1만명 이상이 서명한 사례는 조선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용은 사도세자가 영조에 충성했을 뿐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강력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 1788년(정조 12년) 8월부터 영남 선비들은 이인좌의 난에 영남인이 동조했다는 것에 대한 항변으로 연명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1만 5천명이 모여 복합 서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끝내 봉소(捧疏)해주지 않자 동년 11월 왕의 안동 도산서원 방문을 틈타 소두 이진동이 신문 밖에서 대전별감을 통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진동의 상소는 수십 년간 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을 언급한 내용으로 기사환국(1689) 이후 영남 남인의 형편과 무신란 당시 영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1792년 윤 4월 영남 선비들은 남인과 가까웠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만인소가 전달되는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전달하려면 관직에 있어야 되거나 근기지역 양반이어야 전달될 확률이 유력하였다. 또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소의 소두[4] 이우는 아버지가 참봉과 교관을 지낸 인물로,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문관 관원 김진동을 통해 상소가 정조에게 전달되면서 왕에게 보내는 상소의 소두는 최소 5품 이상의 홍문관, 예문관의 현직 관원이거나 전직 관원 출신이어야 한다는 전례가 깨지게 된다.

상소의 내용은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반란군과 투쟁하였으며, 반란군은 소론과 남인 과격파이고 영남과는 무관한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영남의 사림들이 임오의리 문제(사도세자 아사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나 노론의 탄압으로 비밀리에 간직하던 중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정조를 여악과 향락을 찾으러 갔다는 유성한의 흉소와 윤구종이 우리 노론은 경종에게는 신하의 의리가 없다는 망언을 전해 듣고 상경했으머,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으로 보아 정신이상자일 리가 없고 세자와 영조와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반역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이간질당하고 끝내 원통히 죽었으니 마땅히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역도들을 찾아내 처단, 처벌하여야 할 것이며, 임오의리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5] 영조가 금등 문서를 남긴 것처럼 그것은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차원 높은 효와 의리를 찾을 수 있으며,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잊지않고 권념眷念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사림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몸 바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선세자(先世子, 사도세자)를 위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변무하는 것이니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하는 것이며, 유성한·윤구종의 경종에 대한 불충은 선세자에 대한 불충과 다를 바 없으니 여러 신하의 주청대로 그들을 역률로 다스려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를 읽고 정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정조는 소두에게 상을 내리고 상소를 소중히 간직한다. 이는 노론벽파에게 충격적인 상소였다.

2차 영남만인소편집

1792년 정조 16년 5월 7일에 올라온 영남 만인소는 1차 영남 만인소에 정조가 깊이 공감하자 10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1차 영남 만인소에 정조가 감격하자 여기에 고무된 영남 유생들은 다시 1만 명 넘는 연명 상소를 올린다. 정조는 특별히 이우에게 참봉직을 제수한다. 그러나 정조는 김한동·이우들을 불러 대면하였으나 목이 메어 제대로 대화할 수 없었고 이들에게 여비를 주어 고향으로 되돌려보냈다. 결국 3차 상소를 준비하던 도중 유생들은 정조의 간곡한 설득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기타 만인소편집

1823년 순조 23년 경기, 호서, 호남, 영남, 해서, 관동의 유생 9,996명이 서얼(庶孼)도 차별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6]

1855년 철종 6년 이휘병을 소수(疏首)로 해서 사도세자 추존을 청원하는 내용으로 봉헌된 '만인소'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길이는 99.25m이다.

1881년 고종 16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의 유생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리게 된다. 이것은 김홍집의 귀국 1개월 뒤인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이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유원식을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시키자 올린 만인소이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정조실록
  2. 1만명 유생의 서명, 100m 상소문 ‘만인소’란?(역사스페셜)
  3. “영남만인소”. 2010년 6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월 4일에 확인함. 
  4. 대표자
  5. 영조는 자신의 사후 100년간 사도세자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조회에서 정조에게 유지를 내린바 있다.
  6. 만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