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김씨
영동 김씨(永同 金氏)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영동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관향이다. 시조(始祖)는 고려 충숙왕 복위 시대 말기에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낸, 김영이(金令貽)라는 이이고, 분종(분파)으로는 영산 김씨(永山 金氏)가 있다.
이칭 | 영산 김씨(永山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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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 대한민국 |
관향 | 충청북도 영동군 |
시조 | 김영이(金令貽) |
원시조 | 김알지(金閼智) |
집성촌 |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충청남도 당진시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충청남도 서산시 전라남도 영광군 |
주요 인물 | 김수온, 신미, 김우성, 김낙성, 김용헌 |
인구(2015년) | 27,528명 |
역사
편집시조(始祖)인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인 김익광(金益光)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 김영이 그는, 고려 충숙왕 복위 시대 말기 때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내고 죽은 후에 공신으로 검교도첨의찬성사에 추증되고 영산군(永山君)에 추봉되었다.
김영이의 증손자인 김훈(金訓)이 1399년(조선 정종(定宗)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사사소윤(典祀寺少尹)을 지냈다.[1]
김훈의 아들인 김수온(金守溫)도 문과에 급제하여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성종 5)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2]
영동김씨와 영산김씨의 분화 배경
편집1) 행정구역 개편과 명칭 변화
편집- 고려 시대에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지역은 영산(永山)으로 불렸다.
- 조선 초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영산(永山)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영동(永同)으로 바뀌었다.
- 그러나 당시 가문들은 이미 영산을 본관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후손들은 그대로 ‘영산김씨(永山金氏)’를 유지했다.
- 반면, 조선 중기 이후 후손들이 새로운 행정명칭을 따르면서 ‘영동김씨(永同金氏)’라는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같은 지역 출신이라 하더라도, 후대에 족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영산김씨’, 일부는 ‘영동김씨’로 정착한 것이다.
2) 족보 정리 방식의 차이
편집한국에서 족보는 각 가문의 후손들이 정리하는 방식에 따라 본관이 달라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 어떤 후손들은 고려 시대 기록을 따르면서 영산김씨(永山金氏)라고 족보를 정리했고,
- 또 다른 후손들은 조선 시대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영동김씨(永同金氏)라고 정리했다.
즉, 본관 분화의 원인은 후손들이 본관을 기재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동김씨 항렬자(永同金氏 行列字)
편집세수(代) | 항렬자 | 음 | 사용 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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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 洛○ | 락 | 洛成(락성), 洛현(락현) |
25세 | ○相 | 상 | 민相, 도相 |
26세 | 應○ | 응 | 應俊(응준), 應哲(응철) |
27세 | ○均 | 균 | 재均, 민均 |
28세 | 商○ | 상 | 商浩(상호), 商勳(상훈) |
29세 | ○承 | 승 | 承昊(승호), 承宰(승재) |
30세 | 榮○ | 영 | 榮基(영기), 榮哲(영철) |
31세 | ○熙 | 희 | 珉熙, 東熙 |
32세 | 敎○ | 교 | 敎成(교성), 敎勳(교훈) |
33세 | ○善 | 선 | 賢善, 東善 |
34세 | 泳○ | 영 | 泳澤(영택), 泳俊(영준) |
35세 | ○植 | 식 | 泰植, 東植 |
36세 | 薰○ | 훈 | 薰勳, 薰彬 |
37세 | ○敦 | 돈 | 泰敦, 昌敦 |
38세 | 欽○ | 흠 | 欽哲, 欽洙 |
결론
편집영산김씨(永山金氏)와 영동김씨(永同金氏)는 본래 같은 본관에서 출발했다.
편집즉, 김영이(金令貽) 후손들이 고려 시대에는 ‘영산’을 본관으로 사용했지만, 조선 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동’이라는 명칭이 생기면서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영산김씨와 영동김씨로 분화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결국 두 본관은 같은 시조를 두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명칭을 쓰게 된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