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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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타카(일본어: 大内義隆 おおうち よしたか[*], 에이쇼 4년 음력 11월 15일(1507년 12월 18일) ~ 덴분 20년 음력 9월 1일[1](1551년 9월 30일))는 스오의 센고쿠 다이묘이다. 스오 오우치가의 제16대 당주이다. 오우치 문화를 꽃피운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편집
가독 상속편집
에이쇼 4년(1507년) 음력 11월 15일 스오, 나가토 다이슈인 오우치씨 제15대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가토슈고다이의 나이토 히로요리의 딸이다.
다이에이 2년(1522년) 성인식을 하고, 다이에이 4년(1524년)에 아키로 출진한다. 이와쿠니 요코지로부터 이쓰쿠시마로 들어가 스에 오키후사와 함께 아키 다케다씨의 사토카나 산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8월 아마고측으로부터 원군으로 온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해 퇴각한다. 그리고, 산인의 아마고씨와도 교전한다.
교로쿠 원년(1528년)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는다.
세력 확대편집
교로쿠 3년(1530년)에는 규슈로 출병하고, 기타 규슈의 패권을 놓고, 분고의 오토모 씨와 지쿠젠의 쇼니 씨와 대립한다. 그리고, 가신 스기 오키쓰라, 스에 오키후사에게 군을 맡겨 쇼니씨를 공격한다. 그리고, 히젠 마쓰라 씨를 복속시킨다. 더욱이 기타규슈 연안을 평정해 대륙 무역의 이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스기 오키쓰라에게 명령을 내렸던 쇼니 씨 공격에서 쇼니의 중신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실패로 끝난다.(다테나와테 전투)
덴분 원년(1532년) 오토모 씨가 쇼니 씨와 결탁해 침공해 오자, 조후(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진을 친다. 명분을 얻기 위해 요시타카는 조정에 다자이다이니 관직을 줄 것을 설득해보지만 실패한다.
덴분 3년(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씨로부터 이반케하고, 쇼니 세력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한다. 그 해 고나라 천황의 즉위에 맞춰 조정에 2천량을 기부하고 다음해 다자이다이니직에 임관되도록 요청한다. 천황은 일단 윤허하지만, 돈으로 관직을 사는 행태를 탐탁치 않아했기에 하루 만에 취소하였다고 한다. 덴분 5년(1536년)에 이르러서야 다자이다이니에 임관되어 9월에 히젠 다쿠 성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공격, 류조지 씨와 합세해 쇼니 씨를 멸문시키고 기타규슈 평정을 대부분 달성하였다. 이때, 류조지가의 본가 당주인 류조지 다네미쓰를 히젠 슈고다이로 임명한다.
덴분 6년(153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막부 정치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상경을 시도하지만, 산인을 통일하고 남하하는 아마고 씨에 저지당한다. 더욱이 령국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덴분 9년(1540년) 아마고씨에 복속해 있던 모리 모토나리와 아마고 하루히사가 요시다코오리 산성에서 충돌한다.(요시다코오리 산성 전투) 요시타카는 스에 다카후사를 총대장으로 원군을 보내 아마고 군을 격파한다.
덴분 10년(1541년) 아키 다케다씨, 도모다씨를 멸문하고 아키까지 세력을 뻗친다.
문치 체제편집
덴분 11년(1542년) 이즈모로 공격 방향을 돌려 갓산토다 성을 공격하지만, 지배하의 영주들의 배신으로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대패한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양자로 들인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었기 때문에, 요시타카는 정치적 관심을 잃게 된다. 예전부터 문예에 관심이 깊었던 요사타카는 문치파인 사가라 다케토 등을 중용한다.
이 때문에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와 나이토 오키모리 등과 대립하게 된다. 그런 와중 덴분 16년(1547년) 덴류지의 사쿠겐 슈료를 견명사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하고, 덴분 19년(1550년) 야마구치 온 프란시스코 자비엘과 면담을 가진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포교를 허락한다. 그리고, 야마구치를 교토풍으로 정비해 독자적 문화로 발전시킨다.(오우치 문화)
덴분 19년(1550년) 스에, 나이토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받아, 요시타카는 오우치 군을 이끌고 야마구치야카타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이네이지의 변편집
그러나 요시타카와 험악한 관계로 있던 무단파 스에 다카후사는 1551년(덴분 20년) 8월 말에 거병한다. 중신 나이토 오키모리도 이 사실을 묵인해 요시타카를 구원하지 않는다.
요시타카는 친척인 요시미 마사요리에게 부탁하려 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이네지로 가 그곳에서 농성한다. 요시타카의 중신 레제 다카토요가 분전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향년 45세를 일기로 자결한다. 죽기 직전에 읊은 구절은 「공격하는 자도 공격받는 자도 모두 하나이니,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如露亦如電 応作如是観)[2]이라」(討つ者も 討たるる者も 諸(もろ)ともに 如露亦如電(にょろやくにょでん) 応作如是観(おうさにょぜかん))라고 전한다.
친아들인 요시타카(義尊)도 스에 군에게 살해된다. 요시타카 부자의 죽음으로 사실상 스오 오우치씨는 멸문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때 스오에 묵고 있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장인 산조 긴요리를 비롯 많은 구게들도 이 모반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요시타카의 죽음으로 명나라와의 무역은 단절되었다.
인물·일화편집
- 오우치씨는 가독상속으로 몇 번의 내란이 발생했지만, 요시타카가 상속 받을 때는 예외였다. 아버지 요시오키의 힘도 있었지만, 오우치가 역대로 보면, 요시타카의 정권초기가 가장 안정적이었다. 그가 자력으로 상속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년에 문약해진 원인이 되었다.
- 요시타카는 문화적 관심이 강해, 문치주의적 센고쿠 다이묘로 알려져있다. 산조니시 사네타카 등의 문화인과 교류하고, 와카와 렌카, 문예등 구게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또, 조정에 헌상해 관직을 바랐으며, 관복차림으로 가마(마차)를 타는 등 귀족적 색채가 강했다.
- 학문에서도 고서를 좋아하는 등 복고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오우치가 역대로 본다면, 그러한 경향이 강하고, 결코 부정적 면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 불릴 만큼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정책에 관해서도 보수적이라 사치금지령과 지세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한다. 사찰과 신사의 부흥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이자이다이니로 되자 다이후(막부 또는 다이묘를 가리키는 경어)라 선포한다. 그리고, 가신단의 관위도 다른 센고쿠다이묘와 같이 자기 멋대로 관위를 부여한게 아니라, 조정에 주청해 받은 실제 관위였다. 이와 같이 복고적인 정치형태를 많이 볼 수 있다.
- 중국의 명나라, 조선과 무역을 했고, 더 나가 오우치씨는 관령가문인 호소가와씨와 싸워 명과 조선에 대한 무역을 독점한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해 독자적인 오우치판으로 다시 출판한다. 또, 요시타카는 야마구치를 교토풍으로 정비하고, 로마 가톨릭의 포교를 허락하는 등, 야심이 풍부하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결코 무능한 무장이 아니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시타카가 신임을 잃은 것은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가 강력히 밀어붙인 아마고 공격이었고, 그 전투에서 패한 것도 한 원인이라 생각된다.
- 다카후사와 대립한 원인은 문치, 무단파의 대립외에 스에씨가 이전에 횡령한 도다이지의 옛 영지를 반환하도록 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오우치씨는 후다이 가신이 영지를 다스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 영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 국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워험했다.
- 말년에 문약한 경향이 있어 바보같은 무장이라는 평이 많지만, 실은 문치파를 중용한 것은 다이묘 자신과 가까운 가신단에 의한 다이묘 권력의 강화를 꾀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강화했지만, 군사면은 슈고다이와 호족에 일임했기 때문에, 역으로 슈고다이의 독립성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었다.
계보편집
백제(百濟) 성왕(聖王)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 시조라고 전해진다. 단, 임성태자가 실존했는지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 정확히 임성태자가 시조라고 말할 수 없다. 일설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제련기술자 집단의 도래인이지 싶다. 그리고, 그 후손이 스오국 다타라하마(多々良浜)에 기착해 오우치무라(大内村)에 살았기 때문에 성은 다타라(多々良), 씨는 오우치(大内)로 했다고 전해진다.
가계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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