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정씨

온양 정씨(溫陽 鄭氏)는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온양 정씨 (溫陽 鄭氏)
관향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시조정보천(鄭普天)
집성촌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대덕리
황해도 연백군 도촌면 오산리
함경남도 갑산군
주요 인물정순붕, 정유, 정염, 정두경, 정창순, 정민시, 정만석, 정병하, 정상희, 정재은, 정창현, 정갑윤, 정용진, 정유경
인구(2015년)29,761명

역사편집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 정보천(鄭普天) 은 신라 52대 효공왕 4년(900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고려시대 정희공(貞僖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策錄)되었고, 고려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 태조(太祖)때에 부친인 정사맹(지백호 33세)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사도(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시고, 배위(配位)는 복씨(卜氏)로 부(父)는 복지겸(卜智謙)이시다. 정사맹(지백호 33세)의 2째 아드님이시다. (출처 : 東國鄭氏 原流上世紀)

((고려시대 : 온양정씨 시조 ~ 12세))

(시조) 정보천 : 호부상서, 정희공

(2세) 정작진(고려관 찬성사), 정작정(고려관 찬성사)

(3세) 정존구(고려등제 헌납공)

(4세) 정자준(고려 간의대부)

(5세) 정기산(고려등제 찬성사)

(6세) 정달존(고려등제 괴관 찬성사)

(7세) 정응인(고려등제), 정응휴(고려관 감찰어사)

(8세) 정 규(고려관 태의원 승동정)

(9세) 정 요(고려관 영해백겸 도순문사) : 아들 - (1) 년 (2) (고려관 중랑장, 대사성, 두문절사)

(10세) 정 년(고려관 정산감무) : 아들 - (1) 순 우 (2) 복 항 (3) 을 명 (고려관 중랑장) // 정 진(고려 검교, 보문각 학사, 두문절사)

(11세) 정순우(고려관 군기소윤, 좌우위보승랑장) : 아들 - (1) 득진(고려관 삼등현령, 보문각 학사, 두문절사) (2) 득전(관 순흥부사) (3) 득량 (고려 중랑장, 조선 판선공감사)

((高麗 忠臣 杜門節死 (1家 3代) : 온양 10대 정 희, 온양 11대 정 진 , 온양 12대 정 득진))

  • 두문절사 : 고려가 망한 뒤 조선조 초기 고려 신하들은 조선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서 은거하다, 이방원의 수하들이 나무와 짚으로 불태워 죽이고, 도망가는 자를 좇아가서 잔인하게 쳐죽인 사건.
  •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가 두문동 지역을 지나다가, 고려의 충신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서, 세상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두문동 피해 집안은 103건 정도가 알려져 있고, 우리 선조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뒤 이 고사가 임선미·조의생 자손의 가승(家乘)을 통하여 정조에게 알려져 1783년(정조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추모하였다.


*** 조선 시대 시작 ***

(12세) 득량 (조선 개국공신) : 아들 (1) 면 (2) 포 (3)대

정득량(鄭得良) (鄭氏 45세, 溫陽鄭氏 12세)

判事公, 고려 중랑장(中郞將), 조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후에 벼슬이 높이 올라

조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름.

1412년(태종12 임진) 7월 3일에 서거(逝去)

(3男 : 冕, 袍, 帶)

******************************************

조선왕조의 관직 품계는 1품에서 6품까지는 각 품계별로 4등급으로 구분합니다.

< 1품관 >

  정1품(상) : 대광보국숭록대부

         (하) : 보국숭록대부

  종1품(상) : 숭록대부

         (하) : 숭정대부

  *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삼정승에게 부여되는 품계입니다,

****************************************

온양 정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 : 주요 관직 분류 내용))

온양 정씨는 조선조에 상신 2명,공신 1명,장신 1명,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

역대 중요 인물( *장관급,시호를 받은 분).

시호(諡號) : 가문 명예, 조선시대 죽은 후 주는 최고의 영예

상신(相臣) : 명망 권력, 3정승으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판서(判書) : 실질 권력, 오늘날의 장관급


(시호를 받은분, 4분)

충정공 정뇌경 ; -조선, 시호 충정,

효헌공 정기안 ; -조선, 시호 효헌, 지중추부사.

충헌공 정민시 ; -조선, 시호 충헌, 이조판서.

숙헌공 정만석 ; -조선, 시호 숙헌, 우의정.


(상신-삼정승을 지낸분 : 2분)

정순붕 ; -조선, 우의정, 온양부원군

정만석 ; -조선, 시호 숙헌, 우의정.


(판서이상 오늘날 장관급 이상, 10분)

정 유 ; - 조선, 지중추부사.

정예남 ; -조선, 영중추부사.

정뇌경 ; -조선, 시호 충정,

정광진 ; -조선, 대사헌.

정기안 ; -조선, 시호 효헌, 지중추부사.

정유악 ; -조선, 형조판서.

정민시 ; -조선, 시호 충헌, 이조판서.

정광한 ; -조선, 예조판서.

정창순 ; -조선, 예조판서.

정태호 ; -조선, 이조판서.


조선시대 鄭氏 과거급제자 비교표

(1) 동래정씨(東萊鄭氏)

( * 상 신 17 * 대제학 2 * 문 과 198 )

(2) 연일정씨(延日鄭氏)

( * 상 신 5 * 대제학 3 * 문 과 119 )

(3) 온양정씨(溫陽鄭氏)

( * 상 신 2 * 대제학 0 * 문 과 43 )

(4) 청주정씨(淸州鄭氏)

( * 상 신 2 * 대제학 0 * 문 과 0 )

(5) 봉화정씨(奉化鄭氏)

( * 상 신 2 * 대제학 0 * 문 과 0 )

(6) 진주정씨(晉州鄭氏)

( * 상 신 1 * 대제학 1 * 문 과 59 )

(7) 하동정씨(河東鄭氏)

( * 상 신 1 * 대제학 1 * 문 과 58 )

(8) 초계정씨(草溪鄭氏)

( * 상 신 0 * 대제학 0 * 문 과 57 )


분파편집

((시대 개관))

정씨 2천년 변천과정

Ⅰ. 신라 및 통일신라 (B.C 68년 ~ A.D 935) = 鄭氏 생성 및 新羅 육부촌장 시기 =

鄭氏 도시조 智白虎(B.C 128년 탄생 ~ B.C 50년 서거)님 께서 고조선이 멸망하자, 고조선 지역의 백호족을 이끌고 현재 경주 남쪽 남산의 남쪽 산 언덕을 백운대라 칭하고, 그 주변 언덕 밑에 터를 잡아 신라 1천년 동안 신라의 6촌장 집안으로 정씨가 번영할 수 있었다.

공(公)은 B.C 68년 신라 6촌장과 신라를 건국하시고, 화백회의를 통하여 신라를 공동을 운영하시었다.

그 후 5대손인 동충에 이르러 서기(西紀) 32년(유리왕 9)에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封)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性)을 하사(下賜) 받어, 5대손부터 정동충이라 칭하였다.

서기(西紀)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되었고, 서기(西紀) 658년(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공(公)은 6촌장(六村長) 가운데 유일(唯一)하게 묘소(墓所)가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내남면(內南面) 노곡리(蘆谷里)의 백운대산록(白雲臺山麓)에 현존(現存)하고 있다.

((신라시대 : 1세 지백호 ~ 32세 정우성))(각주 참조)



Ⅱ. 고려 시대 (A.D 917년 ~ A.D 1392년) = 溫陽 鄭氏 분파 및 高麗 개국공신 시기 =

지백호 34세손이신 普天 公께서는 新羅 52대 효공왕(孝恭王)4년(西紀 900年)에 誕生하시고, 高麗 太祖 王建으로부터 정희공(貞僖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策錄)되시었고, 고려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公께서는 서기 900년 탄생하시여 일찍이 향년 35세 때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 17년(서기 934년)에 탕정후(湯井侯, 侯爵)에 책록(策錄)을 받으시고,

만년에 정희공(貞僖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策錄)되었고, 고려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또한 고려 태조(太祖)때에 부친인 정사맹(지백호 33세)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사도(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시고, 배위(配位)는 복씨(卜氏)로 부(父)는 복지겸(卜智謙)이시다.

정사맹(지백호 33세)의 2째 아드님이시다.

이처럼 溫陽鄭氏는 고려 개국과 더불어 분파하여 고려와 榮枯盛衰를 같이한 고려의 명문 집안이다.

따라서 고려의 멸망 시기에 우리 집안의 인재들이 고려의 유학의 본당인 성균관의 대사성과 보문각 학사로 조선의 개국을 저지하려고 ‘두문동에 3분의 참여’하여, 조선 개국 세력에게 고려의 충신집안으로 고려 황실, 우왕의 장인이신 최영장군 집안과 더불어 온양정씨 집안이 선산과 가산 그리고 생명을 몰수당하는 비극의 중심 집안으로 고려 시대를 마감합니다.

((고려시대 : 33세 정사맹 ~ 鄭氏 44세, 溫陽鄭氏 11세 정순우))(각주 참조)


Ⅲ. 조선 시대 (A.D 1392년 ~ A.D 1910년) = 조선 태조 절친 정득량(온양 12세손)의 개국공신 =

정득량(鄭得良) (鄭氏 45세, 溫陽鄭氏 12세)

判事公, 고려 중랑장(中郞將), 조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후에 벼슬이 높이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름.

1412년(태종12 임진) 7월 3일에 卒하시고, (3男 : 冕, 袍, 帶)


(( 李氏 王朝는 鄭鑑錄에의한 悲劇의 始作))

고려를 멸하고 이씨조선을 만들려는 이성계와 이방원은 고려 왕족들과 고려왕조의 충신인 최영 장군과 고려 왕실의 충성파들의 가족과 친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이씨 조선을 거부한 고려의 신진사류인 유생들 중 개성인근의 두문동에서 은둔, 두문불출한 고려의 충신 72현을 불태워 죽였다. 역사적으로는 선죽교에서 연일정씨의 정몽주를 이방원이 조영무에게 선죽교에서 쇠몽둥이로 두개골을 내리쳐 척살에 대한 기록만 남겼지만, 실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살육을 자행하였을 것이다.

이중에 온양정씨는 고려사와 조선 태조실록에 남겨진 온양9세 정요장군과 이성계의 대화에서 이씨 다음에 정씨 왕조의 등장을 싹부터 잘라야 겠다는 생각과 행동을 알 수 있다.

이성계와 이방원 이어서 이도(세종) 시대까지 철저하게 정씨를 억압하는 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것의 중심에 정감록이 있고, 두문동 절사에 一家三代의 온양정씨는 이성계와 이방원에게는 최대의 숙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온양정씨의 시조묘와 11대까지의 묘는 파해쳐지고, 온양에 거주하는 정씨 선조들은 모두 살해되고 사라지게 되었다. 이방원은 유언에서 두문동 집안은 향후 100년 동안 관료로 등용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戊寅靖社 (1938년)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의붓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 뿐이다.


((조선시대 개관))

조선 태조 이성계가 5째 아들 ‘이방원의 난‘이 없었다면, 최영 장군 밑에서 절친으로 지내고, 조선 개국을 위하여 혼신을 다한 정득량(온양 12세)의 자손들이 조선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조선 명문집안으로 지난 5백년도 온양 정씨의 명예를 드높였을 것이다.

허지만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좇아내고, 자신이 권력을 잡고서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천륜 때문에, 아버지의 공신들 모두를 살해하지는 못하였다. 아마도 정도전, 김종서처럼 자신의 실질적 정적이 아닌, 이름뿐인 정득량에게는 낙향할 것을 권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권유를 받은 득량 공께서는 두문동에서 절사한 친형 정득진의 아들 즉 조카들을 데리고 경기도 이천을 낙향하여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온양 정씨의 조선에서의 시작이다.

따라서 온양 정씨의 대과 급제의 첫 번째는 태종 이방원의 명을 철저하게 수행한 세종 때까지는 온양 정씨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세종이 죽은 해(세종32년, 1450년)에

********************************************

온양정씨에게 첫 대과의 기회가 주어졌다.

  • 경오문과 2명(정충기, 정 석)

******************************************

이방원의 손자 문종(1년, 1450년)은 온양 정씨 중 조선 개국공신의 정득량의 자손

첫 대과 합격자 : 경오문과 2명(정충기, 정 석)


허지만 이미 조선 개국 후 반세기가 흐른 조선 관료사회는 훈구파들의 기득권으로 고급관리 즉 당상관으로 들어가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허지만 그동안 왕권도 여러 번의 정변에 의하여 훈구대신들의 견제를 위하여 중종 때에 이르러,

고려의 충신집단인 개성에서 경상지역으로 낙향한 길재그룹의 일파인 사림파인 조광조일파를 등용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사실 정득량 자손은 훈구파 세력으로 조선 초 등용되었어야 하는 집안이나 중종의 사림파 등용 시 묻혀서 같이 등용된다.

**********************************************

조선 중종의 아들 명종을 지키는 공신

온양부원군 정순붕의 출현

문정왕후와 더불어 전주이씨 왕권 지킴 역할

돌아가신 후 조선의 망난이 왕 선조에 의하여

명예훼손을 당함.

**********************************************

이 분이 바로 조선 첫 대과 합격자 충기의 손자인 정순붕(16세)과 그 형제분 들이다. 이 분들을 등용하기 위하여 전주 왕손인 양녕대군의 손자 이종남의 따님과 혼인을 통하여 혼맥을 갖춘다. 나중에 우의정에 오르시고, 온양부원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그 후 선조 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비극을 맞이하나, 온양의 후손들은 포기하지 않고, 인조 때에 충정공 정뇌경의 활약으로 다시 조선의 명문집안으로 발돋음하고, 정조 시대에 사도세자를 지키려는 문인의 거두로 충헌공 정민시 대감이 시파의 거두로 한 시대를 풍미함으로써, 비로서 온양이 조선 최고의 명문집안으로 떠오르게 되고, 이어서 홍경래 난을 평정하고 나라의 청백리로 우의정에 오르신 숙헌공 정만석 대감이 조선의 시대의 명예를 드높이신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 조선시대를 선조님들이 슬기롭고 현명하게 지켜온 것에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Ⅳ. 대동 단결의 시대 (A.D 1910년 이후 ~ )

(1) 敵(日本) 치하에서의 생존전략

(2) 민족 분열(남과 북) 시기의 생존전략

(3) 민족 통일과 대동단결을 위한 지백호 정신

(대동 정씨로 대화합하여 새로운 발전 모색)


현재 온양의 후손들은 그 어떠한 시대보다 더 높고 더 깊이 세상을 보며 전진 또 전진하시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세상에 나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도 죽어서는 선조와 후손의 매개자임을 안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고, 항상 행복하고 진실되게 살게 될 것이다.

온양의 후손들의 건투를 빈다.


((조선시대 공파))

정득진(12세손, 두문절사) 三登公派

정득전(12세손) 府使公派

정득량(12세손) 少尹公派

정 포(13세손) 高城公派

정충근(14세손) 正郎公派

정예종(16세손) 水使公派

정인조(16세손) 禁衛公派

정순조(16세손) 通政公派

정충본(14세손) 司直公派

정충기(14세손) 持平公派

정수붕(16세손) 桂香堂公派

정백붕(16세손) 叢桂堂公派

정 염(17세손) 北窓公派

정 적(17세손) 琴松堂公派

정 담(17세손) 十竹軒公派

정구붕(16세손) 僉正公派

정충간(14세손) 校理公派

정 대(13세손) 判官公派

정 주(11세손) 展力公派

정 유(17세손) 溫溪君公派

정희번(18세손) 溫城君公派

정 희(10세손, 두문절사) 大司成公派

인물편집

  • 온양 정씨(溫陽 鄭氏) 인물 소개
    조선시대(朝鮮時代)에 2명의 상신과 43명의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다.
  • 정득량(鄭得良) (鄭氏 45세, 溫陽鄭氏 12세) : 조선의 개국공신
    判事公, 고려 중랑장(中郞將), 조선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후에 벼슬이 높이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름. 1412년(태종12 임진) 7월 3일에 卒하시고, 묘는 이천시 백사면 조읍리 子坐 配 貞敬夫人 晉州姜氏 (3男 : 冕, 袍, 帶)
  • 정수붕(鄭壽朋) 1474년(성종4년) 출생 ~ 1534년(중종29년) 12월 13일 임종, 동생 백붕, 순붕, 구붕의 맏형으로 1494년(성종24) 사마시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전직(傳直)하고 향년 61세로 卒하시다.
  • 정백붕(鄭百朋) 1478년(성종9년) 출생 ~ 중종 8월5일 임종, 동생 순붕과 같이 1504년(연산군 10년)에 문과 급제, 정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 온양부원군 정순붕(鄭順朋) 1484년(성종15년) 출생 ~ 1548년(명종3년) 임종, 연산군 10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공조(工曹), 병조판서(兵曹判書) 등(等)을 거쳐 중종(中宗)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歷任),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을 때 인종(仁宗)이 죽고 명종(明宗)이 즉위(卽位)하자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약했다.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승진(昇進)하여 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정순붕의 7대손인 정만석(鄭晩錫)은 평안도(平安道)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사(平安道慰使)로 나갔고 난후에는 평안도(平安道)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민생을 잘 돌보았으며 182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 정구붕(鄭龜朋) 字 希齡 1522년(중종220 을유(乙酉) 사마시에 합격, 관직은 行金化 현령 중직대부(中直大夫)
  • 일가삼선(一家三仙) : 정초(鄭礎) 1495년(연산1) ~ 1539년(중종34) 정염(鄭磏) 1506년(연산12) ~ 1549년(명종4) 정작(鄭碏) 1533년(중종28) ~ 1604년(선조37)
  • 정염(鄭磏)(정북창)
    정북창(鄭北窓)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때의 이인(異人)으로, 이름은 염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그는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온양(溫陽) 정씨(鄭氏) 집안에서 6남 5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父親)은 정순붕(鄭順朋)이고 모친(母親)은 태종(太宗)의 첫 왕자(往者)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曾孫女) 완산이씨(完山李氏)였다. 조부(祖父)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고 부친(父親)은 한림주서(翰林注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중부(仲父: 둘째아버지) 또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歷任)하는 등(等) 전형적(典型的)으로 문벌(門閥)이 혁혁(奕奕)한 유교적(儒敎的) 가문(家門)이었다.
    북창 정렴 선생과 용호비결 유불선 아우른 조선 도맥의 정수
    정북창은 조선 시기의 선도 인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이한 행적과 일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도교사에서 학술적으로 차지하는 비중도 크기 때문에 조선의 선도를 얘기하게 되면 우선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 바로 정북창인 것이다. 정북창은 본명이 렴, 별호가 북창(北窓)으로 조선 중종(中宗) 원년(1506) 온양(溫陽)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일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우의정, 중부(仲父)인 정백붕(鄭百朋)이 형조판서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는 본래부터 관심이 없어서 대과(大科)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추천으로 마지못해 관상감(觀象監)·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 등의 관리를 지냈는데, 이는 그가 천문(天文)·의약(醫藥)·음률(音律) 등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천(抱川) 현감을 끝으로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고 양주(楊州) 괘라리(掛蘿里)에 은거, 수련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뜨니 향년 44세, 때는 명종(明宗) 4년(1549)이었다. 짧은 생애에 높지 않은 벼슬, 그의 공적인 삶은 결코 화려하달 수 없지만 그의 내면의 삶, 도인으로서의 삶은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길고 풍성한 의미의 일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뛰어난 신통력과 예지력의 소유자 전설에 의하면 정북창은 "나면서 말을 할 줄 알았다(生而能言)"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가 선도를 공부하게 된 과정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김시습(金時習)에서 중 대주(大珠)로 이어진 조선 도교의 도맥을 계승함으로써라고 한다.
    그가 산사(山寺)의 고승들과 교유(交遊)하기를 즐겨했던 것을 보면 그의 선도 수행에는 불문(佛門)과의 관계가 적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소시부터 수련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온양 정씨의 가학(家學)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온양 정씨 문중에서는 정북창뿐만 아니라 그보다 9세 연장인 종형 계향당(桂香堂) 정초(鄭礎) 역시 선도 인물로서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어서 선도 수행은 정북창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가학의 한 경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자질로 수련에 몰두했던 정북창이 일찍이 그 신통력으로 도계(道界)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임은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산사에 들어가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연마, 사흘 만에 산 아래 백 리 바깥의 일을 가만히 앉아서 모두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정씨 집안에서 종을 시골로 심부름 보냈는데 귀가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오질 않아 걱정하다 못해 정북창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때 정북창이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말하기를, 그 종이 아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경한 짓을 해서 붙들려 맞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종이 도착하여 사실을 확인한즉 과연 정북창이 말한 바와 같아서 온 집안이 탄복했다는 이야기이다. 정북창은 또한 새·짐승의 말을 알아듣기로 유명하였다. 어느 날 잔칫집엘 갔다가 새 소리를 듣고 그 집 술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간파한 일, 그리고 이로 인해 고을 원님에게 붙들려갔다가 고을 원님이 사생아라는 내력을 역시 새 소리에 의해 알아낸 일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던 설화이다.
    정북창은 예언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유독 셋째인 십죽헌(十竹軒) 정첨(鄭石詹)의 부인인 구씨(具氏)를 존중함이 유별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인데 내가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과연 손자 대에 이르러 형제들이 무후(無後)하게 되자 십죽헌의 자손이 출계(出系)하여 대를 이었다. 정북창은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휘파람 불기, 즉 소법(嘯法)에 뛰어났다. 소법은 선도 수행에서 깊은 내단의 공력을 바탕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으로 중국의 경우 일찍이 위진(魏晉) 시기의 선인 손등(孫登)이 이 방면의 대가로 손꼽혔었다. 언젠가 정북창의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강원감사로 있을 때 금강산엘 놀러갔었는데 갑자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려 시중들던 산사의 중들이 놀라 용의 울음소리인가 여겼는데, 알고보니 정북창이 낸 소성(嘯聲)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고한 은일군자의 삶 정북창의 이런 신이한 행적은 당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부친 정순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찾아와 {고국에서 점을 치니 진인(眞人)을 만나리라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소문을 듣고 사신으로 왔던 각국 사람들이 객관(客館)으로 찾아왔는데 정북창이 각 나라의 말로 응대하니 모두들 경탄하고 천인(天人)이라 칭하였다.
    정북창은 짧은 생애 동안 그의 도력(道力)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만년에는 세상에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고고한 은일군자(隱逸君子)로서의 삶을 지켰다. 그의 풍채는 마치 구름을 탄 학처럼 탈속한 모습이었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고결한 인품, 심오한 학문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칭송이 자자하여 인종(仁宗)이 세자 때에 그의 명성을 듣고, 즉위하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정승을 시켜야 할 인물로 손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후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44세 되던 해 세상에 오래 있지 않을 뜻을 굳힌 듯 주위에 미리 이승을 떠날 날짜를 말하고 스스로 만사(輓詞)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生讀破萬卷書 평생에 만 권의 책을 읽었고, 日飮盡千鍾酒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셨다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 이전의 일만 얘기하고, 俗說從來不卦口 속된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지. 顔回三十稱亞聖 안회는 삼십에도 성인에 버금갔거늘,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길었던고.
    이 시는 그의 도인으로서의 삶의 요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4세의 수명을 어찌 그리 길었느냐고 자문(自問)하는 그의 마음 계제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시공간을 노닐고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가 조용히 좌화(坐化)한 날, 부근의 주민들이 그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백일비승(白日飛昇)의 설화가 후일담처럼 전한다.
    유·불·도 삼교에 박통한 학자 지금까지 길게 서술한 정북창을 둘러싼 갖가지 설화들은 그를 신통력을 지닌 선인으로서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정북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가 남긴 저작물을 통해 객관적·학문적으로 분석, 평가되어야 하는 도교 학자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이제 그의 학문세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정북창이 계승하고 있는 선도의 맥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얘기한 바 있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이어지는 내단학(內丹學)을 조선에 들여와 크게 성취시킨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세계는 도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유교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가훈(家訓)?에서 초학자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반드시 학습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가 유교를 생활원리로서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와 더불어 불교도 멀리하지 않았는데, 자주 산사에 가서 수련을 하거나 불승(佛僧)들과 교유한 사실이 그의 시문(詩文)에 나타난다.
    그는 유학자로서 선배인 서화담(徐花潭)을 존경하였고, 도인으로서는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와 친하게 사귀었다. 박지화 역시 당시 도계의 저명한 인물로 후일 수선(水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정북창 사후 정북창의 막내동생 고옥(古玉) 정작(鄭 )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학문내용, 교유관계 등을 종합해볼 때 정북창은 유·불·도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 섰던 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인들의 정북창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 점에 주목하여 그를 삼교에 박통(博通)한 인물로 자주 표현하였다.
    한학(漢學) 사대가(四大家) 중의 일인이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보자. 북창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워 널리 삼교에 통달하였는데, 수련은 도교와 비슷하고, 깨달음은 불교와 흡사하나, 윤리는 우리 유교를 근본으로 하였다 (北窓生而靈異 博通三敎 其修攝似道 解悟類禪 而倫常行誼一本吾儒).
    진인의 경지를 추구한 수련인 그러나 정북창은 삼교에 널리 통달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인의 경지를 추구하였던 수련인이었다. 그의 선도 이론은 그가 남긴 저작 『용호비결(龍虎秘訣)』을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용호비결』은 당시 수련인들이 중국 도서(道書)에만 의존해 어렵게 공부하던 실정에서 탈피하여 한국 선도의 입장에서 새롭고 쉽게 쓰여진 도서로서 정북창의 한국 선도에 대한 자부심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정북창이 소시에 중국에 갔을 때 한 중국 도사를 만났는데 그가 조선의 선도를 깔보자 정북창이 청산유수로 선도 이론을 설파하여 그를 굴복시켰다는 일화 역시 정북창이 평소 한국 선도에 대해 주체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무튼 『용호비결』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도서이자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최초의 도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정북창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우선 단경(丹經)의 왕이라 칭하는 『참동계(參同契)』의 난삽함을 비판하고 초학자를 위하여 쉽게 선도에 입문할 수 있는 수련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폐기(閉氣)·태식(胎息)·주천화후(周天火候) 등 각 수련 법식에 따른 수련의 효과, 즉 신체적 징후 및 정신적 경지에 대해 명쾌히 해설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도서(道書) "용호비결"
    이러한 『용호비결』이 한국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높다. 우선 『용호비결』은 정북창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정북창을 비롯한 조선의 선도 수행자들을 단학파(丹學派)라고 불렀는데 『용호비결』은 바로 이 조선 단학파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 사상, 특히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북창의 막내 아우 정작이 유의(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정북창은 각 방면에 걸친 그의 탁월한 도력으로 인하여 후대에 이르러 점술·풍수학(風水學)의 대가, 의술의 달인(達人) 등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근세에는 신종교 측에 의해 말세를 예언한 도통자로서 추앙되기도 한다. 아울러 온양 정씨 일문에서는 정북창과 그의 종형 정초(鄭礎) 이후에도 정작(鄭 )·정지승(鄭之升)·정회(鄭晦)·정돈시(鄭敦始)·정두경(鄭斗卿) 등 조선도교사상 저명한 선도 인물들이 연속 배출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정북창이 그의 일문에 미친 사상적 영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정북창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부록된 『용호비결』을 비롯, 온양 정씨 문집인 『온성세고(溫城世稿)』에 실린 45수(首)의 시와 가훈이 있다. 그의 묘소는 생시에 그가 집안의 장지로 친히 잡아두었던 경기도 양주군 사정동(砂井洞) 산록에 있는데, 이 산은 온양 정씨의 선영(先塋)으로 현재까지 6백여 년 동안 잘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남양주군에는 그가 은거, 수련했던 장소가 지금도 정씨골이라는 명칭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정현(鄭礥)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라 사섬사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으며 155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대호군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
  • 정창순(鄭昌順) 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을 거쳐 1763년 호서감운어사(湖西監運御史)로 나갔으며 이어 正言(正言),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냈다. 그후 부교이수찬(副校理修撰) 등을 거쳐 정조 때 대사간, 대사헌(大司憲), 함경도(咸鏡道)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等)을 역임(歷任)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밖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유(鄭裕) 등이 있다.
  • 정예남(鄭禮南)
    자(字)는 자화(子和), 호(號)는 서주(西疇). 1596년(선조 29)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어의(御醫)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의학에 밝아 허 준(許 浚). 정 작(鄭 ).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등과 함께 의방신서(醫方新書)]의 편찬에 착수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중단한 바 있으며, [육가잡영]에 그의 시(詩)가 전한다.
  • 충정공 정뇌경 [鄭雷卿] 출생 - 사망 1608년(선조 41) ~ 1639년(인조 17)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정순붕(鄭順朋)의 현손이며, 경기도사 정담(鄭䃫, 十竹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정지겸(鄭之謙)이고, 아버지는 생원 정환(鄭晥)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이 되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대간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스스로 탄핵하기도 하였다. 인조(仁祖)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필선(弼善)이 되어 인조(仁祖)14년(1636)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과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은 인조(仁祖)가 청태종(淸太宗)에게 패망하자, 이듬해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으로 볼모로 끌려가게 됨에, 세자의 배종신(陪從臣)으로 함께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이(金伊) 등이 우리 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주면서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또한 양국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며,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인조(仁祖)15년(1639)에 심양에서 참형(斬刑)을 당해 순국(殉國)하고 말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사후(死後)에 의정부(議政府)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인조(仁祖)가 자기가 봐 두었던 산소자리를 하사(下賜)하여 묘(墓)를 쓰도록 하였는데, 그 곳이 지금의 ‘새능’에 있는 정뇌경의 묘소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했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을 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정유악(鄭維岳)
    1632(인조 10) - ? 자(字)는 길보(吉甫), 호(號)는 구계(구溪). 동촌(東村), 뇌경(雷卿)의 아들. 1652년(효종 3) 잔사(進士)가 되고, 1666년(현종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1675년(숙종 1) 승지(承旨)로서 인사(人事)와 형상(刑賞) 등에 환관(宦官)을 간여케 하는 왕을 간(諫)하다 파직되었으나, 허 적(許 積)의 상소로 다시 기용되어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조(築造) 때 도청(道廳)을 지냈다. 그 후 좌승지(左承旨). 공조 참판(工曹參判).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남인(南人)으로서 극변(極邊)에 안치(安置)되었다. 1685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등용,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1697년 전리에 방귀, 1699년 방송(放送)되었다.
  • 정광한(鄭光漢)
    1720(숙종 46) - 1780(정조 4) 초자(初字)는 수부(秀夫), 자(字)는 양보(良甫), 좌랑(佐郞) 수연(壽淵)의 아들. 1744년(영조 20) 생원(生員)이 되고 175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지평(持平). 교리(校理).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 응교(應敎). 승지(承旨) 등을 역임, 1762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64년 도승지(都承旨).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다시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1768년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이때부터 연달아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반복해 지내고,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전직,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 비변사 제조 (備邊司提調)를 거쳐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효헌공 정기안[鄭基安]
    (1695년, 숙종21 – 1767년, 영조43) 본관은 온양(溫陽). 초명은 사안(思安), 자는 안세(安世), 호는 만모(晩慕). 좌의정을 지낸 정순붕(鄭順朋)의 아들 담(십죽헌)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휘(鄭暉)이고, 할아버지는 정하경(鄭夏卿)이다. 아버지는 정유신(鄭維新), 어머니는 변석징(邊錫徵)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을 지낸 정만석(鄭晩錫)이다. 당대(영조시대)의 활동 정기안(鄭基安)은 1728년(영조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8년(영조 14) 사헌부 지평, 1741년(영조 17) 사간원 정언이 된 뒤 이후 계속 이 두 직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50년(영조 26) 헌납이 되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 1752년(영조 28) 동지사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보덕(補德)을 제수 받았다가 다시 집의가 되었다. 1755년(영조 31) 승정원 승지가 되었으며, 1766년(영조 42) 한성부 우윤·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과 저술 유교와 불교·도교는 물론 천문·의술·음률에까지도 정통하였으며, 문장과 산수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저서로 1834년(순조 34) 아들 정만석이 편집·간행한 6권 3책의 『만모유고(晩慕遺稿)』가 있다. 권두에 남공철(南公轍)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아들 정만석의 발문이 들어 있다.
  • 숙헌공 정만석[鄭晩錫]
    (1758년, 영조34 – 1834년, 순조34) 자 : 성보(成甫) 호 : 과재(過齋) ·죽간(竹磵) 시호 : 숙헌(肅獻) 1780년(정조 4) 사마시에 합격, 83년 문과에 급제하고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거쳐 1785년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대간직(臺諫職)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이 되고 누차 왕명으로 경상우도 ·전라도 ·충청도를 안렴(按廉)하였다. 1805년 동래(東萊)부사로 가서 뇌물을 받고 쓰시마섬[對馬島]과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譯官)을 주살하였다. 이어 도총부부총관 ·형조참판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한 뒤, 1810년 공조참판으로서 앞서 부총관 시절 도총부의 초기(草記)를 변통한 일이 있다 하여 무주(茂朱)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무사 겸 감진사로 파견, 18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1818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공조 ·이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 1827년 중추부사,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1930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시문에도 능한 청백리(淸白吏)로서 편서에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가 있다.
    학문과 저술 평안 감사로 재임할 때인 1811년 12월 18일부터 1812년(순조 12) 4월 19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이를 처리하였는데, 난과 관련해 죄인을 문초하고 기록한 『관서신미록(關西辛未錄)』 2책을 국왕에게 올렸다. 또 『계첩기략(啓牒記略)』도 올렸는데,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홍경래의 난을 정리한 주요 자료이다. 홍경래의 난과 관련한 자료로는 당시 안주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편집한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도 있다 상훈과 추모 정만석이 사망하자 순조가 “나라를 향하여 충근(忠勤)하였고 몸가짐이 청엄(淸嚴)하였는데, 근고(近古)에 찾아볼 때 실로 많이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국사(國事)에 어려움이 많아 바로 노성(老成)에게 힘입어 유지(維持)하였는데, 연일 우려되는 즈음에 마침내 그가 영원히 떠났다는 단자(單子)를 보니, 허전하고 슬퍼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졸한 판부사 정만석 상사(喪事)의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제반 의절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예에 의하여 거행하며, 녹봉은 3년간 실어 보내도록 하고 사손(嗣孫)은 복을 벗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본가(本家)에서 유언이라고 하여 예장(禮葬)을 사양하자, 장례비 500냥과 무영 및 마포(麻布) 각 5동(同)을 수송할 것을 명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선정을 베풀어 고성에 관찰사 정공 청덕 휼민비(觀察使鄭公淸德恤民碑)가 건립되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 정창순(鄭昌順)
    1727(영조 3) - ? 자(字)는 기천(祈天), 호(號)는 사어(四於), 염( )의 후손,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65년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호서 감운어사(湖西監運御史)로 나가 양곡 운반의 실정을 돌아보고, 이어 정언(正言).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냇다. 1766년 부교리(副校理)로 재직중 협잡한 죄로 파직되었으나 협의가 없어 부교리(副校理)에 복직, 1768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1770년 지제교(知製敎)로서 교서(敎書)를 작성하지 않았다가 한때 삭직(削職), 2년후 대사간 (大司諫)에 오르고, 1776년(정조 즉위) 승지로서 고부(告訃) 겸 청시승습부사(請諡承襲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다가 열하(熱河)에서 관향은(管餉銀) 1천냥을 분실한 죄(罪)로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어 함경도(咸鏡道)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1790년(정조 14)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를 지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782년 [송도지(松都誌)]와 [송도잡기(松都雜記)]의 책을 합편(合編). 증보(增補)했고, 1784년 왕명(王命)으로 [동문휘고(同文彙考)]를 편찬했다.
  • 충헌공 정민시(鄭民始) : 시파(時派)의 거두
    1745(영조 21) - 1800(정조 24) 자(字)는 회숙(會叔),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순붕(順朋)의 후손. 창사(昌師)의 아들. 창유(昌兪)에게 입양(入養).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고, 겸필선(兼弼善)으로 세손(世孫 : 정조)을 보도(輔導)했다. 1776년(정조 즉위)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 이어 비변사 부제조(備邊司副提調). 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거쳐 1778년(정조 2) 부총관(副摠管).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을 지냈고, 이듬해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가 되었다. 1780년 대사성(大司成)으로 수어사(守禦使)를 겸직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이듬해 예죠. 호조. 이조의 판서(判書)가 되고 1782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겸직, 이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좌참찬(左參贊), 형조와 공조의 판서(判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1784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 병조 판서(兵曹判書) 가 되었다. 1786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고, 1797년 장용대장(壯勇大將)을 지낸 뒤 1800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오랫동안 선혜청에 있으면서 삼남(三南)에서 진상하는 약재(藥材)를 반감(半減)케 하고 미곡 운반과 조세(租稅)의 수납(收納) 사무를 통일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덜고 특히 왕을 보필하며 당시 문물의 개화를 크게 이바지했다. 1801년(순조 1) 정조(正祖)의 총신이며 시파(時派)의 거두였으므로 벽파(僻派)인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사리사욕을 꾀했다는 죄로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아들 성우(性愚)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 정태호(鄭泰好)
    1837(헌종 3) - ? 자(字)는 대래(大來), 선교(善敎)의 아들. 1858년(철종 9) 생원(生員)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로 급제, 1874년(고종 11)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전임했으나, 1876년 탐학(貪虐)하다는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논척(論斥)으로 제주(濟州)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9년에 풀려나와 1886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등용, 189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 정술교(鄭述敎) 1845년(헌종3) ~ 1915년(을묘. 12. 20.) 파본 : 진사공파(정랑공파) 자 : 학조(學租), 호 : 필명헌(弼明憲) 관직 : 통사랑(通仕郞)이 되고 고종황제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 (참고 :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조선팔도 양반들에게 고종의 밀명을 전달하다가, 일본의 관헌에게 알려져서, 사후에 일제에 밀고한 허씨들이 정씨로 위장하여 선조들의 산소와 재산들이 넘어가고, 아직도 허씨들이 정씨로 위장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됨.)

인구편집

  • 1985년 5,689가구 24,134명
  • 2000년 7,599가구 24,897명
  • 2015년 29,761명

각주편집

((新羅 先祖))

1세 : 시조(始祖) 지백호(智伯虎)감문왕(甘文王)

자(字)는 인세(仁世), 시호(諡號)는 문화(文和),

휘(諱)는 낙랑후(樂浪侯) 지백호(智伯虎), 추봉(追封) 감문왕(甘文王)이시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六村長)의 하나인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하고, 신라(新羅) 건국(建國)에 큰 공(功)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개국(開國)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공(公)의 호양지의(互讓至義)는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가 되었고,

왕도(王道)를 토착(土着)시켰으며, 한 나라의 역사(歷史)를 창조(創造)한 원훈(元勳)으로서 백성을 예(禮)로 가르치고 부족(部族)의 연맹(聯盟)을 이루었으며, 백성(百姓)들이 그 덕화(德化)를 입어 윤리(倫理)가 바로 섰고, 그 넓은 금도(襟度)와 위덕(威德)은 신라(新羅)의 국풍(國風)으로 이어 주었다

서기(西紀) 32년(유리왕 9)에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封)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性)을 하사(下賜) 받았다. 서기(西紀) 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되었고, 서기(西紀) 658년(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음력(陰曆) 10월 10일 후손(後孫)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공(公)은 6촌장(六村長) 가운데 유일(唯一)하게 묘소(墓所)가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내남면(內南面) 노곡리(蘆谷里)의 백운대산록(白雲臺山麓)에 현존(現存)하고 있다.

백운재(白雲齋)는 관향제종(貫鄕諸宗)이 성상즉위(聖上卽位)14년에 건립(建立)하였으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을 거치는 동안 풍우(風雨)로 퇴락(頹落)되어, 서기(西紀) 1984년에 중건(重建)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1971년 입덕묘(立德廟)의 제3위차 육촌장(六村長)에 열향(列享)되었다. 1987년 11월에 시조(始祖) 묘역(墓域) 및 열위조 기적비. 세계비를 세운뒤, 1988년 10월 신호비를 세웠으며, 1990년 11월에 홍살문 안내도 및 문정공(휘진후)의 묘단비를 세워 성역화(聖域化)하였다.

참고문헌(參考文獻)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문헌록(文獻錄) 동경지(東京誌)

2세 : 정 동(井 同) (村長 建國功臣)

공(公)은 지백호(智伯虎) 감문왕(甘文王)의 아들이며, 西紀前 57年 혁거세왕(赫居世王) 원년(元年) 갑자(甲子)에 아버지를 모시고 신라건국에 참여, 건국공신이 되었다. 배위는 실전이다.

3세 : 가 도(可 都) (新羅 大將軍 贊化功臣)

공신(功臣) 정 동(井 同)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37년(신라시조왕 21)에 왕명(王命)으로 금성(金城)을 축성(築城)하였다. 배위(配位)는 최씨(崔氏)로, 부(父)는 최시임(崔始林)이다.

4세 : 빈 (彬) (新羅 大將軍)

가도(可都)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28년(신라시조왕 30)에 낙랑군(樂浪軍)이 신라(新羅)의 변경(邊境)을 침범(侵犯)하니 공(公)은 신라장군(新羅將軍)이 되여 방어(防禦)하였다.

5세(得姓祖) : 정 동충(鄭 東沖) (新羅 本彼部長 答申使 上大等)

대장군(大將軍) 빈 (彬) 선조의 큰아들이며,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4년(신라시조왕54)에 공(公)은 신라 사신(新羅使臣)으로 동옥저(東沃沮)에 들어가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에서 신라(新羅)에 사신(使臣)을 보내여 양마(良馬) 20필(匹)을 바치고 과군(寡君)이 들으니 신라(新羅)에 성인(聖人)이 탄생(誕生)하였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마(良馬)를 바친다 하였다.

(得姓祖) 서기(西紀) 32년(유리왕 9)에 육촌(六村)을 육부(六部)로 개칭(改稱)하고 성(姓)을 정씨(鄭氏)로 하사(下賜)하였다. 배위(配位)는 손씨(孫氏)로 부(父)는 손회춘(孫回春)이다.

6세 : 정남화(鄭南火) (新羅 原大等)

신라사신(新羅使臣) 정동충(鄭東沖)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 28년(유리왕 5)에 공(公)은 왕명(王命)으로 백제(百濟)에 가서 온조왕(溫祚王)의 상(喪)을 조문(吊問)하였다. 배위(配位)는 배씨(裵氏)로 부(父)는 배언(裵彦)이다.

7세 : 정북성(鄭北星) (新羅 兵馬大將軍)

신라사신(新羅使臣) 정남화(鄭南火)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79년(탈해왕 23)에 공(公)은 장군(將軍)이 되어, 시거(尸居)와 칠산(漆山)의 2개국(二個國)을 정벌(征伐)하였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공(公)은 90세(歲)에 생남(生男)하고 168세(歲)까지 장수(長壽)하였다.

8세 : 정개언(鄭盖彦) (新羅 知延日縣事)

장군(將軍) 정북성(鄭北星)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157년(아달왕 23)에 영일현령(迎日縣令)을 역임(歷任)하였으며, 배위(配位)는 설씨(薛氏)로 부(父)는 설효민(薛孝敏)이다.

9세 : 정기완(鄭基完) (新羅 阿湌 門下侍郞)

영일현령(迎日縣令) 정개언(鄭盖彦)선조의 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술(術)이 있어 대부(大夫)들이 외복(畏服)하였다. 배위(配位)는 손씨(孫氏)로 부(父)는 손태구(孫泰龜)이다.

10세 : 정가영(鄭嘉永) (新羅 角干)

사찬(沙飡) 정기완(鄭基完)선조의 아들이며, 각간(角干)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276년(미추왕 37)에 설인형(薛仁亨)과 손임(孫林)등 더불어 주청(奏請)하여, 신라(新羅)의 관실(官室)을 개축(改築)하였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김구빈(金仇彬)이다.

11세 : 정병길(鄭炳吉) (新羅 沙湌)

각간(角干) 정가영(鄭嘉永)선조의 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346년(흘해왕 37)에 이벌찬(伊伐湌) 강세(康世)와 더불어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왜구(倭寇)들이 신라(新羅)의 풍도(風島)를 침범(侵犯)하여, 금성(金城)을 포위(包圍)하므로써 급급한 사태(事態)에 놓여, 왕(王)은 격퇴(擊退)를 명(命) 하였으나, 이벌손(伊伐湌) 강세(康世)는 적(賊)이 먼 길을 걸쳐 왔으니 싸움을 미루고 군졸(軍卒)이 피로(疲勞)할 때를 기다림이 옳다 하였다. 왕(王)은 이 말에 따라 폐문(閉門)하고 불출(不出)하였으니 적(賊)은 군량(軍糧)이 결핍(缺乏)되어 퇴진(退陳)할 때에 공(公)은강세(康世)와 더불어 추격(追擊)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12세 : 정순박(鄭淳朴) (新羅 沙湌)

사찬(沙湌) 정병길(鄭炳吉)선조의 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박씨(朴氏)로 부(父)는 박상림(朴尙林)이다. 묘(墓)는 경주(慶州)의 동사손동(東沙湌洞)에 있으며 금영(金纓)으로 예장(禮葬)하였다.

13세 : 정덕건(鄭德建) (新羅 阿湌)

사찬(沙湌) 정순박(鄭淳朴)선조의 둘째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최씨(崔氏)로 부(父)는 角干 최 홍(崔 仜)이다.

14세 : 정충국(鄭忠國) (新羅 大阿湌 左右衛大將軍)

사찬(沙湌) 정덕건(鄭德建)선조의 큰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475년(자비왕 18)에 장군(將軍)이 되었고, 장군(將軍) 덕지(德智)와 함께 왜구(倭寇)를 격파(擊破)하였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이벌찬(伊伐湌) 김 지(金 智)이다.

15세 : 정호봉(鄭浩峰) (新羅 大將軍)

장군(將軍) 정충국(鄭忠國)선조의 큰아들이며, 서기(西紀) 514년(법흥왕 1)에 장군(將軍)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사신(使臣)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다녀 왔으며, 배위(配位)는 이찬(伊湌) 철부(哲夫)의 여(女)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법흥왕(法興王)18년에 이찬(伊湌) 철부(哲夫)로 하여금 상대등(上大等)을 삼어 국사(國事)를 총관(總管) 하였고 고구려(高句麗)의 안장왕(安藏王)이 훙(薨)함에 인국(隣國)의 상호지도(相好之道)로써,공(公)이 봉명(奉命)하여 조사(吊使)가 되었으니 옹(翁)은 상대등(上大等)이요,서(婿)는 장군(將軍)이었다.

16세 : 정해활(鄭海活) (新羅 阿湌)

장군(將軍) 정호봉(鄭浩峰)선조의 아들이며, 아찬(阿飡)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566년 진흥왕(眞興王) 27년에 신화(神畵)인 솔거(率居)와 같이 월성(月城)의 황룡사(皇龍寺)에 들어갔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서기(西紀) 532년 법흥왕(法興王) 19년에 가락국왕(駕洛國王) 김구형(金仇衡)이 신라(新羅)에 항복(降伏)하니 왕(王)은 상대등(上大等)을 주고 그 나라로 식읍(食邑)을 삼게 하고 이름을 김관군(金官郡)이라 하였으며, 김구형(金仇衡)의 아들 무력(武力)에게 각간(角干)의 벼슬을 주었다.

서기(西紀) 566년 진흥왕(眞興王) 27년에 황룡사(皇龍寺)를 신축(新築)하고 솔거(率居)로 하여금 벽(壁)에 노송(老松)을 그리게 하였다. 그 벽화(壁畵)는 실송(實松)과 다름이없어 조작(鳥雀)이 자주 날아 왔으며 화구색만(畵久色漫)하여 사승(寺僧)이 새로히 단청(丹靑)하였더니 조작(鳥雀)은 다시오지 않았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각간(角干) 김무력(金武力)이다.

17세 : 정완숙(鄭完淑) (新羅 大將軍)

아찬(阿飡) 정해활(鄭海活)선조의 큰아들이다. 공(公)은 서기(西紀) 589년 진평왕((眞平王) 11년에 대홍수(大洪水)가 나서 많은 인가(人家)가 수몰(水沒)하니 왕(王)은 공(公)으로 하여금 장군(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백성(百姓)들을 진휼(賑恤)케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서편(西便)에 대수(大水)로 표몰인호(漂沒人戶)가 30,260여(餘)하고 사자(死者)는 200여인(餘人)으로 왕(王)이 발사(發使)하여 진휼(賑恤)케 하였으니 공(公)이 진휼(賑恤)한것이 명확(明確)하였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김윤중(金允中)이다.

18세 : 정군공(鄭君工) (新羅 左翊衛大將軍)

진휼사(賑恤使) 정완숙(鄭完淑)선조의 아들이며, 장군(將軍)을 역임(歷任)하였다. 배(配)는 양씨(楊氏)로 부(父)는 양임동(楊林同)이다.

19세 : 정급선(鄭汲先) (新羅 角干侍郞) (高句麗 연개소문의 사위)

장군(將軍) 정군공(鄭君工)선조의 아들이며, 각간(角干)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645년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에 사신(使臣)으로 당(唐)나라에 다녀왔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신라(新羅)에서 견사(遣使)하여 조당(朝唐)이라 하였으며, 고구려(高句麗)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王) 건무(建武)를 시해(弑害)하고 왕(王)의 질(姪) 장(藏)을 옹립(擁立)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의 일명(一名)은 개금(蓋金)이요, 성(姓)은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자인 연(淵)을 피하여 천씨(泉氏)라 하였으나, 연씨(淵氏)이다. 배위(配位)는 연씨(淵氏)로, 부(父)는 고구려(高句麗)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20세 : 정지명(鄭枝明) (新羅, 당(唐)나라 文科 吏部侍郞)

각간(角干) 정급선(鄭汲先)선조의 아들이며, 당(唐)나라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이씨(李氏)로 부(父)는 사찬(沙湌) 이팽년(李彭年)이다.

21세 : 정수민(鄭秀敏) (新羅 禮部卿)

시랑(侍郞) 정지명(鄭枝明)선조의 아들이며, 이척찬(伊尺飡)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이씨(李氏)로 부(父)는 이술립(李述立)이다.

22세 : 정동창(鄭東昌) (新羅 工部侍郞)

이척찬(伊尺湌) 정수민(鄭秀敏)선조의 아들이며, 사찬(沙湌)을 역임(歷任)하였다.

23세 : 정문숙(鄭文琡) (新羅 沙湌 侍中)

사찬(沙飡) 정동창(鄭東昌)선조의 둘째아들이며, 사찬(沙飡)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박씨(朴氏)로 부(父)는 박수생(朴修生)이다.

24세 : 정임수(鄭臨水) (新羅 檢校太尉 左部將軍)

사찬(沙飡) 정문숙(鄭文琡)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788년 원성왕(元聖王) 4년에 장군(將軍)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김원전(金元全)이다.

25세 : 정 강(鄭 强) (新羅 紫靑光祿大夫 遼東兵馬元帥)

사찬(沙飡) 정임수(鄭臨水)선조의 큰아들이며, 선덕왕(宣德王)이 될 적에 좌익(左翼)한 공(功)으로 자청광록대부(紫靑光祿大夫)가 되고 요동병마원수(遼東兵馬元帥)에 임명되었다.

배위(配位)는 최씨(崔氏)로 부(父)는 최준생(崔俊生)이다.

26세 : 정파동(鄭坡同) (新羅 門下侍中)

사찬(沙飡) 정 강(鄭 强)선조의 아들이며, 이척찬(伊尺飡),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는 미상(未詳)이고 부(父)는 사찬(沙湌) 간(干)이라 칭(稱)한다.

27세 : 정 유(鄭 裕) (新羅 小阿湌 門下侍中)

사찬(沙飡) 정파동(鄭坡同)선조의 아들이며, 헌덕왕(憲德王) 때(西紀 809~825)에 소아찬(小阿湌)하시다, 효공왕(孝恭王 西紀 897~912)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하셨다. 배위(配位)는 대아찬(大阿湌) 시중(侍中)인 계강(繼康)의 따님이시다. 아들은 2명으로 집(輯)과 년(年)이다.

28세 : 정 집(鄭 輯) (新羅 兵馬元帥 門下侍中)

사찬(沙飡) 정 유(鄭 裕)선조의 아들이며, 서기(西紀) 904年 효공왕(孝恭王) 8年 갑자(甲子)에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반적(叛賊) 인 홍기(弘奇)를 격파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시었다. 배위(配位)는 한씨(韓氏)로 시랑(侍郞)이신 연권(連權)의 따님이시다.

29세 : 정 목(鄭 穆) (新羅 銀靑光祿大夫 太子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 정 집(鄭 輯)선조의 아들이며, 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태자사도(太子司徒) 대도둑(大都督) 좌복야(左僕耶)에 오르시다. 제성보(諸姓譜)에 의하면 검교대장군(檢敎大將軍) 이부시랑(吏部侍郞)이라 하였다.

배위(配位)는 환씨(桓氏)로 부(父)는 장군(將軍)이신 선길(宣吉)의 따님이시다.

30세 : 정풍국(鄭豊國) (新羅, 당(唐)나라 文科 工部侍郞)

태자사도(太子司徒) 정 목(鄭 穆)선조의 아들이며, 공(公)은 서기(西紀) 906년 신라 효공왕(孝恭王) 10년에 당(唐)의 희종(僖宗) 4년 갑진(甲辰)에 당(唐)나라로 가서 문과(文科)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을 하시었다. 당(唐)이 멸망(滅亡)하자, 고국(故國)으로 돌아와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동주사(行東州使)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 부(父)는 대아찬(大阿湌) 덕생(德生)의 따님이시다.

31세 : 정사량(鄭駟良) (新羅 尙書 左僕射) (금강산으로 낙향)

아찬(阿飡) 정손국(鄭遜國)선조의 아들이며, 아찬(阿飡)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역임(歷任)하였다. 서기(西紀) 918년 경명왕(景明王) 2년에 공(公)은 신라(新羅)의 망국(亡國)을 예지(豫知)하고 개골산(皆骨山)에 표입(漂入)하였다. 배위(配位)는 박씨(朴氏)로 부(父)는 박수선(朴修善)이다.

32세 : 정우성(鄭友聖) (新羅 沙湌 侍中) (高麗 귀화)

아찬(阿湌) 정사량(鄭駟良)선조의 큰 아들이며, 사찬(沙湌)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920년 경명왕(景明王) 4년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여,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을 역임(歷任)하였고, 배위(配位)는 손씨(孫氏)로 부(父)는 이척찬(伊尺飡) 손 숙(孫 叔)이다.

******************************************

******************************************

((高麗 先祖, 溫陽 始祖 普天의 父親))

33세 : 정사맹(鄭師孟)(高麗) (高麗 三韓壁上功臣 門下侍中)

사찬(沙飡) 정우성(鄭友聖)선조의 큰아들이며, 태조(太祖)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사도(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복씨(卜氏)로 부(父)는 복지겸(卜智謙)이니,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고려(高麗)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홍 유(洪 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은 일등(一等)에 책훈(策勳)되었고, 그 후(後)에 공신(功臣) 홍 유(洪 儒), 복지겸(卜智謙), 유흑필(庾黔弼)을 태조묘(太祖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아드님 두분 : 遊天, 普天(온양 시조)

((溫陽 始祖))

34세 (溫陽 1세) : 정보천(鄭普天) (高麗 金紫光祿大夫 戶部尙書 門下侍中)

작호(爵號)는 정희공(貞僖公)이시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정사맹(鄭師孟)선조 2째 아들이시며,

공(公)은 서기(西紀) 900年 탄생하시고, 934年 공(公) 35세에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 17年

탕정후(湯井侯)의 후작(侯爵) 즉 공후백자남의 2번째의 책록을 받았다.

또한 고려 호부상서 및 금자광록대부 문화시중(종1품)을 지내고, 후에 정희공(貞僖公)의 공작(公爵)의 작호를 받으셨다.

****************************************

****************************************


((東萊 始祖))

34세 (東萊 시조) : 정회문(鄭繪文)

동래 시조, 안일호장(安逸戶長), 정씨 시조 지백호의 34세손이라고 전해진다.

정회문은 경애왕 말년인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난으로 피신하였다가

931년에 돌아와 동래호장(東萊戶長)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안일호장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정회문 이후 몇 대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1世)로 한다.

고려시대에 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 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은 동지공거(同知貢擧)·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으며,

항의 아들 정서(鄭敍)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東萊 1世祖 : 정지원(鄭之遠)

그 후 100여년이 지난 후 보윤공(甫尹公)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이 東萊 鄭氏의 1세조가 되었다.

東萊 2世祖 : 정문도(鄭文道)

동래호장공(東萊戶長公), 안일호장(安逸戶長)

東萊 3世祖 : 정 목(鄭 穆)

문안공(文安公), 1040년(고려 10대 정종 6년)에 출생하여, 1066년(고려 11대 문종 20년)에 성균시(成均試)에 오르고 6년후 1072년에 병과(丙科)에 발탁되었다.

**** 동래정씨는 상기의 4분의 자손들이다.****

분파는

정지원의 5세손 정보(鄭輔)를 파조(派祖)로 하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는 첨사공파(詹事公派)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였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대호군공파는 조선 중기에 여립(汝立)의 모반사건으로 한때 몰락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직제학공파의 파조 정사(鄭賜)는 조선 세종 때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아들 5명과 손자 10명을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 아들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는데,

세조에서 성종 대에 걸쳐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우참찬을 지냈다.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참고

(온양정씨와 문익공파 정광필과 인연 : 온양정씨는 조선 초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중종의 훈구파 견제 시 정순붕 형제들을 발탁하는 기연을 만나는데,

이때 정광필이 중종의 상신으로 적극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또한 순붕 할아버지께서 조광조일파의 실각 시 같이 초야에 15년을 보내고

다시 중종의 아들 인종, 명종의 교체기에 재 등장을 적극 도움을 준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다.

온양의 후손들은 정광필 대감의 은혜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

*******************************************

((延日 始祖))

연일정씨는 지백호의 31대손인 정종은(鄭宗殷)이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후손으로

지백호의 34대손인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은 연일(延日)의 옛 지명인 영일(迎日)로 쓰기도 하고,

영일(迎日)의 마을인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한다.


연일 정씨는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가 있다.

그의 후손 중 정습명(鄭襲明)을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의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2파(派)가 있다.


((지주사공파))

지주사공파는 지백호 31세 정종은, 34세 정의경의 후손으로

시조(1세조) 정습명( ~ 1151년, 고려 18대 의종5),

고려의 문신, 호는 형양, 지주사공파의 시조

11대손 정몽주는 고려 말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 척살되었다.


((감무공파))

감무공파는 지백호 31세 정종은, 34세 정의경의 후손으로

시조(1세조) 정극유(1200~1250년, 고려 23대 고종37) 감무공파의 시조

12대손 정 철는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송강


참고 :

(소목(昭穆) :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