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의 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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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교회 슬라브어: Ольга, 고대 노르드어: Helga 헬가, 890년경 ~ 969년 7월 11일)는 키예프 루스의 공비이자 여공작(945년 ~ 963년경)이다. 류리크 왕조 출신이며 동방 정교회(러시아 정교회, 우크라이나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가톨릭교회(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올가
Ольга
미하일 네스테로프의 작품 《성녀 올가》
미하일 네스테로프의 작품 《성녀 올가》
키예프 여공작
재위 945년 ~ 963년
전임 이고리 류리코비치
후임 스뱌토슬라프 1세
신상정보
출생일 890년
출생지 프스코프
사망일 969년 7월 11일
사망지 키예프
국적 키예프 루스
왕조 류리크 왕조
배우자 이고리 류리코비치
자녀 스뱌토슬라프 1세
종교 슬라브 이교정교회
성녀 올가
세르게이 키릴로프의 작품 《올가 대공비의 세례》
출생890년경
프스코프
선종969년 7월 11일
키예프
교파동방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우크라이나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가톨릭교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축일7월 11일 (율리우스력)
7월 24일 (그레고리력)

생애 편집

오늘날 러시아프스코프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903년경에 프스코프에서 키예프 루스의 2대 대공인 이고르 류리코비치와 결혼했다. 942년에는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1세를 낳았다. 945년에 남편인 이고리 류리코비치동슬라브족 계열 부족인 드레블랴네인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당시 아직 너무 어렸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1세를 대신하여 키예프 대공을 섭정 통치하였다.

올가는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살해한 드레블랴네인들에게 4차례에 걸쳐서 복수하였다. 제1차 복수에서는 드레블랴네인 사신들을 태운 선박을 큰 구멍 속에 집어넣어서 생매장시켰고, 제2차 복수에서는 목욕을 권유한 드레블랴네인 귀족들을 욕실에 가둔 다음에 욕실 채로 불에 태워 죽였으며, 제3차 복수에서는 올가의 남편인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추모하는 행사에 드레블랴네인들을 초대한 다음 술에 취한 드레블랴네인을 생매장시켰고, 마지막으로 제4차 복수에서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코로스텐 지역이자 드레블랴네인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인 이스코로스텐을 불로 태워 소각하였다. 이후 드레블랴네인들은 키예프 루스에 투항하게 된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성장한 이후에는 올가의 섭정이 끝나고 스뱌토슬라프 1세키예프 루스를 통치하였지만, 스뱌토슬라프 1세가 군사 원정에 나설 동안에는 손자들과 함께 군사 원정에 나간 스뱌토슬라프 1세 대신 키예프를 비롯한 본토를 통치했다. 969년 페체네그인키예프를 포위하던 와중에 키예프에서 병사했다.

루스인들의 정교회 개종 시도 편집

올가 대공비는 957년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정교회 세례를 받았는데,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가 쓴 《의식의 서》(De Ceremoniis)에서는 올가가 정교회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있었던 행적이 묘사되어 있다. 올가의 정교회 세례는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통해 높은 수준의 문화와 인재를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에서 성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959년에는 올가가 파견한 사절단이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황제를 만났다는 라틴어 문서 기록이 존재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올가는 오토 1세에게 키예프주교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초대 마그데부르크 주교를 역임한 티트마르 폰 메르제부르크(Thietmar von Merseburg)는 아달베르트 폰 프라크(Adalbert von Prag)를 키예프주교로 임명했지만 스뱌토슬라프 1세를 중심으로 슬라브 이교를 숭앙하던 세력들의 반발로 추방당하고 만다.

올가는 다른 루스인들에게도 정교회를 전파하려고 했는데,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도 정교회 세례를 권했지만 슬라브 이교를 숭앙하던 스뱌토슬라프 1세는 이를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올가 시대에 루스인들의 정교회 개종은 개인적, 산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루스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정교회 개종은 989년블라디미르 1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진 편집

전임
이고리 류리코비치
키예프 대공 (섭정)
945년 ~ 963년
후임
스뱌토슬라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