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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김씨

한국의 성씨 중 하나

울산 김씨(蔚山 金氏)는 울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울산 김씨(蔚山 金氏)
관향울산광역시
시조김덕지(金德摯)
중시조김환(金環)
집성촌전라남도 장성군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함경남도 문천군
주요 인물김계흥, 김황, 김온, 김인후, 김경수, 김남중, 김기하, 김시서, 김희서, 김녹휴, 김익중, 김경중, 김성수, 김병로, 김연수, 김상협, 김녹영, 김종인
인구(2000년)36,225명 (163위)
비고신라의 왕족 성씨

시조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왕자(王子)로 망국의 한을 품고 은둔한 이후 13세까지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역사편집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房夫人)사이의 제2 왕자(王子)로, 학성(鶴城)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고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작(封爵) 되었다. 학성(鶴城)은 울산의 별호라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敬順王)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太子)를 따라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1]

일설에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덕지(金德摯)의 이름은 사기(史記)에 전하지 않으나 후손 《하서 김인후 가장》 · 《김씨 분관록》 · 《증보문헌비고》등에 언급되어 있다.[2][3]

별자(別子) 왜곡편집

작금에 들어 시조 김덕지(金德摯) 왕자에 대해 모모씨 족보에는 있지도 않았던 별빈 안씨(別嬪 安氏)를 내세워 그 소생의 제9자라 하며, 세계표(世系表)까지 만들어 붙여 놓은 실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바, 이는 제동야인(齊東野人)의 망설(妄說)이라 할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라면 제9자 덕지(德摯)는 첫째 아들인 마의 태자보다 최소한 20여년 늦게 태어났다는 것인데, 어떻게 같은 시기인 935년 10월에 부왕 경순왕(敬順王)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고 문헌은 전하는 것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561년 문인 석성현감(石城縣監)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이 찬(撰)한 하서 김인후 『가장(家狀)』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 왕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1682년 우암 송시열이 찬(撰)한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별호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별자(別子)’를 왜곡하여 ‘서자(庶子)’라 하며, 별빈 안씨(別嬪 安氏) 소생이라 한다. 『예기(禮記)』의 『별자(別子) 종법(宗法)』을 살펴보면, 「별자(別子)」’란 제후(諸侯)의 적장자(嫡長子)의 아우(弟)로 분가하여 그 자손의 조상이 된 사람을 말한다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경순왕죽방부인과 사이에 두 명의 왕자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바, 장자(長子)는 세칭 마의태자이고, 둘째는 별자(別子)가 되어 분가하여 일가(一家)를 세워 그 씨족의 시조(始祖)가 된 김덕지 왕자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가문의 유래편집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되고 그의 14세 김환(金環)이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때 삼중대광(三重大匡) 광록대부(光祿大夫)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에 이르고 문숙(文肅)의 시호를 하사 받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울산 김씨 ‘기사보(己巳譜)’ 범례에 의하면, 고려 삼중대광 광록대부 김환의 증손인 조선 개국원종공신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까지의 분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김온(金穩)의 후손들만 합보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후손들이 김온(金穩)을 중조(中祖)로 삼고 학성(鶴城)의 개칭인 울산(蔚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7세 조선 개국공신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이 양주 목사 재임 중 태종의 왕권강화 정쟁에 휘말려 1413년(태종 13) 피화를 입자, 배위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驪興 閔氏)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솔가하여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면서부터 장성을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가문의 대세는 산림에서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과 존심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어려운 고비마다 분기(奮起)하여 의를 지키며 충절을 다하였으니, 단종 참변의 계유정난 · 임진왜란 · 병자호란 · 한말 국난에 의인 열사가 무리지어 나왔다. 그러는 중에도 경세에 뜻하여 문·무과 급제자 및 음사 · 은일로 출사한 인사도 다수 나왔다.

특이할 일은 장성(長城)에 터를 잡은 지 5대에 문묘(文廟) 종사(從祀) 대현(大賢)이 나왔으니, 바로 그가 바로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호남 지방에서는 하서 김인후의 울산 김씨(蔚山 金氏) 집안을 명족(名族)인 국반(國班)으로 꼽으며, 「울김」(蔚金)이라 부른다.

근·현대의 주요 인물로는 고려대학교경성방직, 동아일보 창설자이자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삼양사 그룹 창설자 수당 김연수 · 김상홍 家, 동아일보 회장 일민 김상만 · 화정 김병관, 전 고려대 총장, 국무총리 남재 김상협,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종인 등이 있는데 하서 김인후의 직계 후손들이다.

본관편집

울산(蔚山)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신라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다. 파사왕(婆娑王)때 처음으로 이 지역에 계변성(戒邊城)·신학성(神鶴城)·화성군(火城郡)이 속한 지변현(知邊縣)을 설치하고, 757년 경덕왕때 하곡현(河曲縣) 일명 하서현(河西縣)이라 고치고 임관군(臨關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4]

901년 효공왕때 한 쌍의 학(鶴)이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戒邊城) 신두산(神頭山)에서 울어 고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신학성(神鶴城)’이라 불렀다.[5]

고려 태조때 고을 사람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공을 세워 동진(東津)과 우풍(虞風)의 두 고을을 합쳐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다가,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고 별호로 ‘학성(鶴城)’이라 하였다. 1018년(현종 9)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을 합쳐 울주(蔚州)로 개칭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진(鎭)을 폐지하고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하고, 1598년(선조 31)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 울산군으로 개편되고, 1962년 울산시로 통합되고, 1997년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 부(府)의 동쪽 2㎞지점에 신학산성(神鶴山城) 옛터가 남아있고, 동쪽 4㎞지점에 굴화역(掘火驛)이 있다.

인물편집

고려편집

  • 김환(金環) : 고려조에 출사, 삼중대광(三重大匡) 광록대부(光祿大夫) 학성군(鶴城君)에 봉군되고,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에 오르고 문숙(文肅)의 시호를 하사 받음, 충숙왕 때 전택(田宅)을 특사 받고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남양 홍씨 족보에 배위(配位) 남양 홍씨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홍승찬(洪承贊)의 딸이라 함
  • 김계흥(金季興) :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냄. 다른 기록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군되었다함
  • 김황(金貺) : 봉상대부(奉常大夫) 전공총랑(典工摠郞)을 지냄. 배위(配位) 경주 김씨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강의공(康懿公) 김득겸(金得謙)의 딸

조선편집

  • 김온(金穩) : 자(字) 이정(而正), 호(號) 학천(鶴川), 흥려군(興麗君), 회군공신(回軍功臣)·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380년(우왕 6) 생원시 합격, 1387년(고려 우왕 13) 문과 급제, 종부시 주부(主簿)로 출사, 그 해 여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급료관을 맡음, 이조좌랑, 단양군사, 1392년(태조 1) 함안군사, 1395년(태조 4) 회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되고, 1398년(태조 7) 밀양부사를 지냄,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진압 후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여산군(麗山君)에 봉군됨[6] 국조방목에는 흥려군(興麗君)으로 기록되어 있음. 1413년(태종 13) 양주목사(楊州牧使)때 태종이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하는 정치 파동을 일으킬 때 처가인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니 66세이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인정돼 불천위(不遷位)가 내려졌으며, 부조묘(不祧廟)는 장성군 북하면 중평리에 세워졌다가 1961년 장성군 북이면 신평리로 이건 되었다.[7] 전남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鶴林祠)에 배향 되었다. 묘는 실전되어 배위 여흥 민씨 묘 옆에 신위단비(神位壇碑)를 세웠다.
  • 정부인(貞夫人) 민씨(閔氏) : 아호(雅號) 하소부인(荷沼夫人). 아버지는 여흥 민씨 한성판윤 민량(閔亮)이며, 조선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사촌언니이다. 무학대사로부터 전수받은 풍수이론을 정립하여 '하소결(荷沼訣)'을 저술하였으며, 우리나라 여류 3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하는 정치파동을 일으킬 때 부군(夫君)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이 친정 여흥 민씨 집안 민무구(閔無咎)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1413년 화를 당하자, 이듬해 세 아들을 비롯한 전 가족을 데리고 호남 땅 장성(長城) 대맥동(大大麥)으로 남하하여 자리를 잡아 살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8] 전남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산37번지 복부혈(覆釜穴)에 유적지와 '명정재'(鳴鼎齋) 재실이 있다.

분파편집

장파(長派)편집

  • 파조 김달근(金達根) : 흥려군 김온의 장자, 수의부위(修義副尉)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신덕(金愼德. 1400-1458?) : 호 손암(遜庵), 장파조 김달근(金達根)의 중자(仲子), 장악원 주부, 송화현감, 노모 봉양 외직 청암찰방, 단종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돌아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킴, 저서 손암유고(遜菴遺稿), 장릉지(裝陵誌) 행적 올라 있음, 단종 절신, 영호남 사림들이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수노(金粹老. 1401-1458) : 호 복양재(復陽齋), 장파조 김달근의 손자, 의정부 녹사, 중부령을 거쳐 1457년(세조 3) 단종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단종 승하에 투신 자결. 단종 절신,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대명(金大鳴. 1536-1603) : 자는 성원(聲遠). 호 백암(白巖). 문정랑(文正郞), 1558년(명종 13) 생원 의금부 도사, 1570년(선조 3) 문과 장원 급제, 성균관 전적,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칭송 받음, 늙은 모친 봉양 위해 사천 현감, 1577년(선조 10) 예조정랑 서장관으로 명(明)에 가서 황제로부터 옥용연(玉龍硯:옥 벼루)과 묵화 병풍 하사 받음. 당쟁 심화로 외직 괴산·풍기·봉산 군수를 역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자제들과 후진 양성, 경남 하동군 두류산 묵계동에서 병든 몸을 수양하던 중 임진왜란 발발하자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그를 도소모장으로 삼으니, 고성(固城) 에서 의병들과 함께 왜적 토벌 공을 세움, 전란 후 소실되었던 향약을 복원, 마을 미풍 양속을 후세에 전하고자 강응태(姜應台), 정밀(鄭密), 정안(鄭安) 등이 정한 백야동안(白也洞案) 보수하고 직접 발문을 지음. 진주 대각서원(大覺書院) 배향되었다.
  • 김천록(金天祿. 0000?-1593) : 자(字) 성경(聖卿). 여주 판관 재직 때 임진왜란 발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최경희(崔慶會) 장군등과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 선무원종공신에 녹권, 사적이 호남창의록에 기록. 충신 정려가 내려짐.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에 정려비를 세움, 충절의 고장 광양의 표상이 됨, 1982년 국도 확장공사로 정려비는 출생지 광양시 황금동 금곡마을 입구로 이전하고,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 유당공원에 ‘정려이건사적비(旌閭移建事蹟碑)’를 세움.
  • 김광련(金光鍊. 1727-1809) : 자(字) 자정(子精), 호 입암(立巖),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 후손으로 경남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 출생함.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전(經典)을 배우고 지신(持身)의 자세를 익힘, 동문(同門) 사우(士友)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함. 만년에 경남 거제군(巨濟郡) 국사봉(國士峰) 아래에 정자를 짓고 독서와 심신수양에 매진함, 유고『입암유집(立巖遺集)』.

중파(仲派)편집

  • 파조 김달원(金達源) : 흥려군 김온의 중자(仲子), 충좌위(忠佐衛) 중령사정(中領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중파조 김달원의 현손(玄孫),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음.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출사,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 등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스승이었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의 원한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여 그 본분을 다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1545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한양에 올라왔으나, 곧이어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벼슬길을 버렸다. 이후 몸을 추스린 그는 성리학 연구에 종신할 것을 마음에 두고 몰두하였는바,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잡아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이와 기는 혼합된 것이라 주장하며 이황의 이기일물설에 반대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 두루 정통했고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과 1,600여수의 시(詩)를 남겼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과 옥과 영귀서원 등에 주향 되고,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 김남중(金南重. 1570-1636) : 호(號) 취옹(醉翁). 하서 김인후(金麟厚) 손자, 관품이 선교랑(宣敎郞),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宗系辨誣) 공이 인정되어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추록(追錄)되고, 임진왜란 때 종군하였다.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의인(宜人) 행주 기씨(幸州 奇氏. 1569-1597) : 취옹((醉翁) 김남중(金南重) 부인, 고봉 기대승(奇大升)의 딸, 정유재란 때 왜놈들에게 잡히자 절개를 지키고자 잡힌 팔을 잘라 버리고 강물에 투수 입절, 전쟁 후 남편 김남중(金南重)이 잘린 팔 하나를 거둬 정성들여 맥동 원당 선산에 장사지냈는데 이를 일비장(一臂葬)이라 한다. 이후 조정에서 부인의 뜻을 기리고 귀감 되는 정려(旌閭)가 내려져다.
  • 김형지(金亨祉, 1621-1675) : 호(號) 맥촌(麥村).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현석 박세채・문곡 김수항등 여러 선비들과 교유. 선조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천양사업(闡揚事業)에 매진, 효행천거(孝行薦擧), 추은(推恩)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 김기하(金器夏, 1649-1701) : 호(號) 각재(覺齋). 우암 송시열과 문곡 김수항의 문인, 역사・의학・지리・천문 등에도 두루 능통함. 선조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학문 연구와 업적을 정리하는데 매진함, 율곡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 등의 거유(巨儒)·석학(碩學)들과 깊이 사귀었으며 그들의 칭송을 받음. 스승 송시열제주도 귀양 중 한양으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자 인근 선비들을 모아 장례를 주관하고 스승을 기리는 서원을 정읍 모천(茅川)에 세움. 벼슬길에는 뜻이 없어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학행으로 이조판서 이세백의 천거를 받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각재유고(覺齋遺稿)가 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고, 장성군 서삼면 연호사(硯湖祠)에 배향되었다.
  • 김시서(金時瑞, 1652-1707) : 호(號) 자연당(自然堂). 조선 중기의 시인, 송시열의 문인, 학행으로 경양 찰방에 제수, 《강도(江都)》라 제(題)한 시는 숙종의 상찬을 받음, 순창 쌍치면에서 글을 읽으며 선조 하서 김인후가 3여 년 동안 강학했던 훈몽재(訓蒙齋)를 수리해 짓는 한 편, 그 옆에 초당(草堂) 자연당(自然堂)을 짓고 선조의 유업을 계승했다. 전북 순창 화산사(花山祠) · 어암서원(魚岩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희서(金羲瑞, 1675-1742) : 호(號) 환암(喚菴). 효종ㆍ영조때의 학자, 삼연 김창흡(金昌翕) 문하에서 수학, 학문이 독실하고 효도가 후순지행(厚純至行)하며 향리의 화목을 도모하여 그 명성이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일찍이 《격물치지설》과 《향약》에 관한 글을 저술하여 후학을 장진함으로써 풍속을 돈독히 하였으며, 문집으로 《환암유고(喚菴遺稿)》가 있다.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鶴林祠)에 배향되었다.
  • 김녹휴(金祿休, 1827-1899) : 자(字) 치경(穉敬). 호(號) 신호(莘湖). 1835년(헌종 1) 생원시에 합격, 조선 후기 호남 유학 거장 노사 기정진의 문하생, 1877년(고종 14) 학행으로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씀, 『심성이기(心性理氣)』에 대한 연구에 몰두함, 조성가・이응진・조의곤・김평묵 등과 교유, 문집으로 《신호집(莘湖集)》이 전하며, 장성군 진원면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익중(金翼中, 1851-1907) : 호는 녹동(鹿洞). 조선말 의병장. 하서 김인후 후손으로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에 격분 1907년 9월 장성 수록산(隨綠山. 일명 수련산)에서 성재 기삼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종사가 됨. 이후 장성·영광 등지에서 순사주재소, 일본인 상점, 일진회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고, 그해 9월 23일 전북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야습해온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북문루에서 전사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 전북 진안군 이산묘(駬山廟)에 배향되었다.
  • 김기중(金祺中. 1859-1933) : 구한말 문신, 교육자, 인촌 김성수의 양아버지로 용담・평택・동복 군수를 역임하고, 국권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사직하고 동생 경중(暻中)과 함께 일제하 육영사업을 위해 막대한 재산 투자하여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인계하였다. 또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종로구 계동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계파(季派)편집

  • 파조 김달지(金達枝) : 흥려군 김온의 계자(季子). 호분위(虎賁衛) 부사정(副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처리(金處离. 1403-1456) : 호 도암(鞱菴) 또는 남강(南岡). 계파조 김달지의 장자, 형제 생원 합격, 장례원 사평, 단종 퇴위에 사임하고 귀향, 세조가 사헌부 지평平 등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음, 관작을 쓰지 말라하고 유명(遺命)함, 단종 절신,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응두(金應斗. 1492-1552) : 자(字) 자추(子樞). 호 서수헌(逝水軒). 계파조 김달지의 증손, 1522년(중종 17) 문과 급제, 승문원 정자, 문학이 뛰어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다녀와 복명 중종이 화상(畵像)을 특사, 이조정랑, 홍문관 교리, 부응교, 고부군수, 밀양․순천부사, 광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1550년(명종 5) 부모 봉양을 위해 귀향.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鶴林祠)에 배향되었다.
  • 김경수(金景壽. 1543-1621) : 자(字) 백형(伯亨). 호(號) 오천(鰲川). 백부(伯父) 김응두(金應斗)와 삼종형(三從兄) 하서 김인후(金麟厚) 문하에서 수학, 기효간·정운용·변이중 등과 학문 강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신남(信男) 및 두 아들 극후(克厚)·극순(克純), 기효간·윤진 등과 장성 남문(南門)에서 창의 맹주 추대. 도내 격문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여 승리. 1593년(선조 26) 두 아들 극후(克厚), 극순(克純)이 의병과 군량을 가지고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순절함.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병 모집 크게 활약. 이듬 해 그 공로로 군자감정에 승진. 1601(선조 34)년 영의정 윤승훈이 그의 충의를 조정에 천명하여 공조참판·의금부동지사·동지중추부사등에 제수되나 모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여생을 마침. 오천집(鰲川集) 2권,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와 오산사(鰲山祠) 배향되었다.
  • 김신남(金信男. 1552-1598) : 자(字) 신재(信宰). 호(號) 오암(鰲巖).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운봉(雲峰)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참판에 추증됨. 장성군 모현리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 김진호(金鎭祜. 1847-1924) : 자(字) 사형(士衡). 호(號) 금초(金樵).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의정(義楨). 1876년(고종 13)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으로 대사간 윤구영․집의 윤상익 등과 복제변경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함. 이듬해 사간원 정언으로 다시 서용, 1886년(고종 23) 부수찬으로 승진, 교리·사복시정·사간을 역임함. 저서 《금초집(金樵集)》

근·현대편집

  • 김성수(金性洙. 1891-1955) : 근대사의 거목, 고려대학교 설립자, 동아일보 창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한국 민주당·민주국민당 총재
  • 김병로(金炳魯. 1886-1964) :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 대한민국 건국 직후 초대 대법원장
  • 김연수(金秊洙. 1896-1979): 김성수의 친동생, 형이 창업한 경성방직을 물려받아 삼양사 그룹 창업, 장학재단 양영회(養英會)와 수당장학회(秀堂獎學會)를 설립하여 장학에 힘씀
  • 김상만(金相万. 1910-1994) :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金性洙)의 장남.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졸업. 동아일보사 대표이사 회장 역임,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1975년도 ‘자유의 금펜상’을 수상.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며, 국제적으로 한국 언론 발전의 위상을 높임.
  • 김상협(金相浹. 1920-1995) : 한국 지성의 거목, 정치학자, 문교부 장관, 제8대 고려대학교 총장, 제16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김상홍(金相鴻. 1923-2010) : 보성전문학교 상과 졸업,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수료. 실업가, 전 삼양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주)경방 이사, 철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 한국의 최고경영자상 등 수상.
  • 김태규(金兌奎, 1923-2017) : 대한민국의 법학자, 전남대 법대 교수, 제9대 국회의원
  • 김녹영(金祿永. 1924-1985) : 제8・9・10・12회 국회의원, 제12대 국회부의장. 야당인 신민당 의원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힘씀, 80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투옥되는 고초를 겪음, 김상현 전 의원과 민추협을 꾸려 대항, 1985년 지병으로 타계한 후 건국훈장 추서[9]
  • 김병관(金炳琯, 1934-2008) :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인.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언론인 김성수(金性洙)의 장손, 동아일보사의 대표이사 회장, 사회분야 발전에 진력하고 민족 전통문화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 김종인(金鍾仁. 1940- ) :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경제민주화 제창자,[10][11] 11·12·14·17·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5선).
  • 김병철(金炳哲. 1949- ) : 서울대학교 축산학과 졸업, 괴팅겐대학교 대학원 식육가공학 박사, 전 고려대학교 총장
  • 김재진(金載軫. 1961- )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교수(2008년-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2016년-현재)
  • 김재호(金載昊. 1964- ) : 동아일보채널 A 대표이사
  • 김재열(金載烈. 1968- ) :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이건희 회장의 둘째사위

과거 급제자편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2명, 무과 급제자 4명, 음관 13명, 사마시 급제자 45명을 배출했다.[12][13]

문과

김응두(金應斗), 김인후(金麟厚), 김백균(金百鈞), 김대명(金大鳴), 김종진(金宗振), 김우휴(金羽休), 김진호(金鎭祜), 김동주(金東柱), 김흥수(金興洙), 김상호(金相昊), 김헌수(金憲洙), 김상희(金相熙)

무과

김해룡(金海龍), 김흥국(金興國), 김경택(金敬澤), 김형택(金馨澤)

음관

김기하(金器夏), 김시서(金時瑞), 김장환(金章煥), 김경휴(金景休), 김도환(金道煥), 김우휴(金羽休), 김영수(金榮秀), 김경휴(金景休), 김칠환(金七煥), 김도환(金道煥), 김봉휴(金鳳休), 김종휴(金鍾休), 김정환(金貞煥)

생원시

김준(金俊), 김응두(金應斗), 김규(金奎), 김대명(金大鳴), 김진추(金震秋), 김극진(金克晉), 김의휴(金宜休), 김시화(金始華), 김기휴(金休), 김방유(金邦儒), 김응휴(金膺休), 김경휴(金景休), 김기환(金箕煥), 김요언(金堯彦), 김연환(金溎煥), 김요익(金堯翊), 김흥환(金興煥), 김봉수(金鳳洙), 김영환(金永煥)

진사시

김국노(金國老), 김인후(金麟厚), 김백균(金百鈞), 김홍균(金弘鈞), 김석형(金碩亨), 김진휘(金振輝), 김시서(金時瑞), 김곡(金鵠), 김경집(金敬緝), 김익휴(金益休), 김문재(金文在), 김이조(金履祖), 김방묵(金邦默), 김방규(金邦奎), 김도환(金道煥), 김종휴(金鍾休), 김만현(金萬鉉), 김봉휴(金鳳休), 김상환(金商煥), 김학수(金鶴洙), 김기중(金祺中), 김용중(金容中), 김헌수(金憲洙), 김학규(金學奎), 김건중(金建中), 김용기(金容琪)

항렬자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