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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변씨(原州 邉氏)는 강원도 원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원주 변씨 (原州 邉氏)
관향강원도 원주시
시조변안렬 (邉安烈)
집성촌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황해도 연백군 온정면 모계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주요 인물변현, 변이, 변상회, 변상복, 변수, 변영청, 변협, 변양걸, 변응정, 변흡, 변중일, 변급, 변수, 변학기, 변광호, 변시지, 변형윤, 변우량, 변웅전, 변정일, 변재승, 변소정, 변백현
인구(2015년)47,804명

시조 변안렬(邉安烈)은 중국 심양(瀋陽) 사람으로, 원나라 말기에 병란(兵亂)을 피해 공민왕을 따라서 고려에 들어왔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고,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되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으며, 1376년(우왕 2)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다.[1]

역사편집

변순(邉順)이 고려 원종 9년(1268년)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元)에 가서 심양(瀋陽)의 장수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다.

변순의 손자 변안렬(邉安烈)은 공민왕(恭愍王)과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왔다. 1351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공민왕 10년(1361년)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켜, 2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는 개성(開城)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우왕 2년(1376년)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녕(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우왕 14년(1388년)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으나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 시키려다가 김저(金佇)와 함께 죽었다. 그는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原州)에 정착하였다.

변안렬의 첫째 아들 변현(邉顯,1356년생)은 1382년(우왕(禑王) 8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통훈대부 관봉상시사에 이르렀다. 아들은 극충(克忠)과 극민(克愍)이다.

변안렬의 둘째 아들 변이(邉頤,1360년 ~ 1439년)는 젊어서부터 풍채가 우뚝하고 기절이 높아 경제(經濟)의 뜻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세상을 진취 할 뜻을 없었다. 태조(太祖)가 등극하여 여러 번 벼슬을 내렸는데 변이는 한사코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해 주지 않았다. 1411년(태종 11)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고 원종공신(元從功臣)에 1등으로 책록되어 전지(田地) 30결과 노비 30구를 하사 받는 등의 총애를 받았다. 남원부사(南原府使), 원주목사(原州牧使), 강계부윤(江界府尹)을 역임하였는데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자신을 규율하였으므로 다스린 곳마다 구비(口碑)가 전해졌다. 1420년(세종 2)에 전라도병마수군도절제사(兵馬水軍都節制使)로 임명되었고, 1422년에 충청도수군도안무처치사(忠淸道水軍都安撫處置使)로 전보되었다. 내직으로 들어가 중군총제(中軍摠制)가 되었으며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진하사(進賀使)인 권희달(權希達)의 죄상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첩을 회수 당했으며 부처하기를 자원하였다. 이듬해에 직첩을 되돌려 받아 좌군총제(左軍摠制)로 전보되었다. 1439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고,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다. 자식은 7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변차희(邉次熹)는 첨지중추(僉知中樞), 변상조(邉尙朝)는 남부령(南部令), 변상근(邉尙覲)은 영중추호군, 변상회(邉尙會)는 예조참판(禮曹參判), 변상동(邉尙同)은 감찰(監察), 변상빙(邉尙聘)은 간성군수(杆城郡守), 변상복(邉尙服)은 덕천군주(德川郡主)에게 장가들어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딸은 공신 정유길, 개성유수 이점, 좌찬성 이승손에게 출가하였다.[2]

변안렬의 셋째 아들 변예(邉預,1363년 ~ 1417년) 통훈대부 고려 우왕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 절도사 상호군 판훈련원사를 지냈다. 아들은 영청(永淸)과 세청(世淸)이다.

분파편집

『원주변씨족보(原州邉氏族譜)』에 의하면 중국 송(宋)나라 말에 고려 황주(黃州)에 귀화한 변요(邉)의 아들 변려(邉呂)가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졌다. 변려(邉呂)는 황주 변씨의 시조이기 때문에 원주 변씨는 황주 변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별좌공파(別坐公派)편집

극충(克忠)은 별좌공파祖이다.

참의공파(參議公派)편집

극민(克愍)은 참의공파祖이다.

첨추공파(僉樞公派)편집

차희(次熹,1392~1462)는 첨추공파祖이다. 子 회문, 조선조 세종때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남부령공파(南部令公派)편집

상조(尙朝)는 남부령공파祖이다. 조선조 세조때 남부령을 지냈다.

호군공파(護軍公派)편집

상근(尙覲)은 호군공파祖이다. 조선조 세종때 선절장군 군기판관을 지냈다.

참판공파(參判公派)편집

상회(尙會,1399~1485)는 참판공파祖이다. 호 무송, 호조․예조참판 증예조판서 겸 예무관제학 지 경연춘추관사 원평군에 봉했다. 1399년(정종 1)∼1485년(성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무송당(撫松堂). 외조부는 남좌시(南佐時)이고, 처부는 유이생(柳易生)과 김관(金灌)이다. 1417년(태종 17)에 정유식년사마시(丁酉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에 갑인알성문과(甲寅謁聖文科)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예조‧병조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令), 승문원사(承文院事), 군자(軍資) 선공판사(繕工判事) 등을 역임했다. 외직으로 함주‧양주‧원주의 수령을 지내면서 공적을 인정받아 내직으로 돌아와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재직 중에 참소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문신임에도 무술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활쏘기의 달인으로 유명했고, 또 풍류를 즐기며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삼가면서 명리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가(特加)하면서 호조참판(戶曹參判)과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을 행했을 때, 왕이 친히 여러 원로대신에게 술잔을 돌렸는데 변상회도 검참판(檢參判)의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예문관제학지경연춘추관사(藝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事) 원평군(平原君)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별내면(別內面) 광전리에 있다.[3]

감찰공파(監察公派)편집

상동(尙同,1400생)은 감찰공파祖이다. 조선조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군수공파(郡守公派)편집

상빙(尙聘)은 군수공파祖이다. 세종조에 행대감찰로서 홍원숙과 같이 옭고 그른일을 살피는 일로 경기 좌우도보사직이 되고 원종공신삼등에 녹훈 통정대부 간성군수를 역임하였다.

부마공파(駙馬公派)편집

상복(尙服)은 부마공파祖이다. 호는 송헌(松軒), 조선조 통정대부 강릉대도호부사, 원천위의 부마, 조선 전기의 문신, 부인은 정종의 딸 덕천옹주이며 덕천군주(德川郡主)로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책록되었다. 1455년(세조 1)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재임 중에 사망했다. 이에 세조는 호조(戶曹)에 전지를 내려 관직에 있으면서 사망하였으니, 미두(米豆) 각 10석과 종이 60권을 부의(賻儀)하였고 아울러 관곽(棺槨)도 내렸다. 묘는 남양주(南陽州) 진건면(眞乾面) 용정리에 있다.

사용공파(司勇公派)편집

영청(永淸)은 사용공파祖이다.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편집

세청(世淸)은 중랑장공파祖이다.

인물편집

  • 변상복(邊尙服, ∼ 1455년) : 조선 정종의 부마. 호는 송헌(松軒). 조부는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렬(邊安烈)이며, 부친은 원종공신(元從功臣) 좌군총제(左軍摠制) 변이(邊㶊)이다. 부인이 덕천옹주(德川郡主)로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책록되었다. 1455년(세조 1)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재임 중에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 진건면 용정리에 있다.
  • 변수(邉修, 1447년 ∼ 1524년) : 무과에 급제하여 1479년(성종 10) 병조참지에 올랐다. 이어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곧이어 좌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경상우도수군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로 나갔다가 1489년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시킨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천군(原川君)에 봉해졌다. 1511년(중종 6)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뒤 충청도와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 변영청(邉永淸, 1516년 ∼ 1580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는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변광(廣)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6(명종 1)에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남원부사·대구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집인 『동호집(東湖集)』이 있다.
  • 변협(邉協, 1528년 ∼ 1590년) :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장흥부사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만포첨사(滿浦僉使)를 지낸 뒤, 이듬해 제주목사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방어사(全羅右防禦使)가 되어 녹도(鹿島)·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공조판서 겸 도총관과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 변양걸(邉良傑, 1546년 ∼ 1610년) : 충좌위사직(忠佐衛司直) 확(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토산현감(兎山縣監) 변자정(自靖)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변위(偉)이다. 어머니는 부장(部將) 민희현(閔希賢)의 딸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뒤, 용양위부장(龍驤衛部將)·벽동군수·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강계부사 등을 지냈다. 1583년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경원부(慶源府)에 침입하자 길주목사 겸 조방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시기한 주장(主將)의 무고로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북변(北邊)의 여진족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순천부사가 되었다. 1591년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뱃길로 행재소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협력해 강화도를 방어하고, 조정의 명령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어 충청도병마절도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7년 경기우도방어사(京畿右道防禦使)가 되었으며, 1599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으나 문신·언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에 복직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지훈련원사가 되어 비변사의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1604년 포도대장으로서 임진왜란 후 혼란한 장안의 치안을 바로잡았고, 도총관·수원부사 겸 방어사를 거쳐 제주목사가 되었다. 시호는 정의(貞毅).
  • 변응정(邉應井, 1557년 ∼ 1592년) : 원양군(原陽君) 변사겸(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經歷) 변윤계(胤季)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변열(悅)이며, 어머니는 병사 이흔(李昕)의 딸이다. 1585년 무과에 급제하여 월송만호(越松萬戶)·선전관 등을 거쳐 해남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또 대군으로 침입한 적의 본토가 비어 있을 것을 들어 이를 공략하면 왜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 일본 정벌을 상소하였다. 전라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왜적의 야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
  • 변흡(邉潝, 1568년 ∼ 1644년) :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7년(광해군 9)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1622년에는 등극부사(登極副使)로 상사(上使) 오충겸(吳充謙)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황해도병마절도사로서 양서순변사(兩西巡邊使)를 겸하여 난의 평정에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으로 책록(冊錄)되어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1629년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교동현(喬桐縣)을 교동부(喬桐府)로 승격시키고 경기도 수영(水營)을 교동부로 옮기게 할 때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교동부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하였다.
  • 변중일(邉中一, 1575년 ∼ 1660년) : 조선 중기의 학자.
  • 변급(邉岌) : 1654년(효종 5) 함경도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候)로 있다가 나선정벌에 출전하여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656년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충홍도수군절도사(忠洪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 변수(邉燧) : 1861년 ~ 1891년 10월 22일)는 조선 말의 개화파 관료, 정치가, 개화운동가이자 외교관이자 미국의 공무원이다.
  • 변학기(邉鶴基) : 구한말의 항일 의병장
  • 변봉덕(邊鳳德, 1939년 ~ ) : 코맥스 대표이사 회장. 경기도 성남상공회의소 회장.
  • 변웅전(邊雄田, 1940년 ~ ) : 제15·18대 국회의원
  • 변근주(邊根周, 1942년 ~ ) : 연세대학교 토목환경공학과 교수. 제37대 대한토목학회 회장.
  • 변재승(邊在承, 1943년 ~ ) : 대법관
  • 변소정(邊昭井, 1970년 ~ ) : 배우
  • 변백현 : 가수 EXO 멤버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편집

과거 급제자편집

원주 변씨(原州邉氏)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2명, 무과 급제자 79명을 배출하였다.[4]

고려 문과

변현(邉顯)

문과

변경붕(邉景鵬) 변경우(邉景祐) 변경준(邉景俊) 변경진(邉景鎭) 변광대(邉光大) 변규창(邉奎昌) 변기종(邉起宗) 변득룡(邉得龍) 변득한(邉得翰) 변복일(邉復一) 변복일(邉復一) 변상(邉祥) 변상회(邉尙會) 변상훈(邉相勳) 변성(邉成) 변성우(邉聖遇) 변성운(邉聖運) 변시섬(邉始暹) 변시중(邉是重) 변영청(邉永淸) 변옥명(邉玉明) 변욱(邉旭) 변위(邉偉) 변응벽(邉應璧) 변익로(邉翼老) 변인길(邉麟吉) 변종신(邉宗信) 변진국(邉鎭國) 변형순(邉亨淳) 변호길(邉虎吉) 변효성(邉孝誠) 변희리(邉希李)

무과

변경인(邉擎仁) 변계온(邉繼溫) 변광일(邉光一) 변국량(邉國良) 변국성(邉國城) 변극남(邉克男) 변근(邉瑾) 변기한(邉起漢) 변끝손(邉唜孫) 변대유(邉大有) 변득생(邉得生) 변몽린(邉夢麟) 변박(邉璞) 변상겸(邉相謙) 변상현(邉尙賢) 변상훈(邉尙勳) 변석룡(邉錫龍) 변선(邉選) 변성대(邉成大) 변성린(邉聖鄰) 변성보(邉聖輔) 변성일(邉成一) 변성화(邉聖和) 변속(邉涑) 변어내(邉於乃) 변언림(邉彦霖) 변언수(邉彦琇) 변염(邉濂) 변영(邉泳) 변옥(邉沃) 변우(邉寓) 변위(邉煒) 변유(邉宥) 변유정(邉有定) 변윤광(邉潤光) 변윤종(邊胤宗) 변윤지(邊允祉) 변응규(邊應奎) 변응복(邊應福) 변응정(邊應井) 변응진(邉應軫) 변응해(邉應海) 변의(邉儀) 변의(邉儀) 변의길(邉義吉) 변이범(邉以範) 변이충(邉以忠) 변이택(邉以澤) 변이필(邉以弼) 변익중(邉翊中) 변익헌(邉翼獻) 변익흥(邉翼興) 변일주(邉一柱) 변절(邉嶻) 변종득(邉宗得) 변주국(邉柱國) 변준(邉俊) 변준(邉寯) 변중겸(邉重謙) 변진국(邉鎭國) 변진명(邉振溟) 변진억(邉鎭億) 변진해(邉振海) 변찬(邉粲) 변창려(邉昌麗) 변창열(邉昌悅) 변창일(邉昌一) 변취성(邉就晟) 변치인(邉致寅) 변태홍(邉泰弘) 변태희(邉泰熙) 변필(邉佖) 변한규(邉漢圭) 변한진(邉漢鎭) 변해진(邉海鎭) 변협(邉恊) 변혼(邉混) 변홍대(邉弘大) 변홍점(邉鴻漸)

생원시

변경장(邉慶長) 변광(邉廣) 변광대(邉光大) 변기종(邉起宗) 변기탁(邉基卓) 변대즙(邉大楫) 변덕연(邉德淵) 변몽윤(邉夢胤) 변보(邉保) 변상수(邉尙綏) 변석(邉錫) 변석룡(邉錫龍) 변석연(邉錫淵) 변석윤(邉錫胤) 변성(邉成) 변세영(邉世英) 변세혁(邉世爀) 변세화(邉世華) 변시발(邉始發) 변여호(邉汝虎) 변영청(邉永淸) 변용연(邉龍淵) 변용원(邉用瑗) 변우(邉寓) 변윤중(邉允中) 변응삼(邉應參) 변익춘(邉益春) 변익희(邉益熙) 변인길(邉麟吉) 변일휴(邉日休) 변종신(邉宗信) 변지두(邉之斗) 변진규(邉鎭奎) 변포(邉褒) 변호길(邉虎吉) 변홍구(邉鴻九) 변후(邉厚)

진사시

변광대(邉光大) 변기풍(邉基豊) 변기홍(邉基弘) 변동식(邉東植) 변동환(邉東煥) 변득일(邉得一) 변몽정(邉夢程) 변사검(邉士儉) 변사청(邉四淸) 변석홍(邉錫洪) 변섭(邉㒤) 변수양(邉壽楊) 변숙(邉橚) 변순(邉栒) 변신(邉愼) 변안(邉晏) 변역(邉㴒) 변용각(邉龍珏) 변욱(邉頊) 변위(邉偉) 변위호(邉威虎) 변응보(邉應輔) 변익로(邉翼老) 변적(邉迪) 변정원(邉挺原) 변제(邉悌) 변졸(邉) 변주헌(邉周憲) 변진유(邉震維) 변창(邉昌) 변충익(邉忠翊) 변택용(邉宅鏞) 변학명(邉鶴鳴) 변효성(邉孝誠)

역과

변겸환(邉謙桓) 변경구(邉憬求) 변계(邉棨) 변기(邉墍) 변백윤(邉伯胤) 변상집(邉相諿) 변섬(邉暹) 변성구(邉性求) 변수(邉穟) 변숙(邉淑) 변시한(邉是翰) 변영정(邉永靖) 변영화(邉永和) 변욱(邉煜) 변위(邉煒) 변응두(邉應斗) 변준(邉埈) 변준(邉準) 변직(邉稙) 변직(邉稷) 변진환(邉晉桓) 변치관(邉治寬) 변치중(邉治重) 변치후(邉治厚) 변탁(邉倬) 변탕(邉逿) 변택중(邉擇中) 변합(邉合) 변혁(邉爀) 변호(邉鎬) 변훤(邉烜) 변흠(邉欽) 변희(邉)

율과

변경(邉炅) 변계중(邉啓中) 변창휴(邉昌休)

음양과

변순(邉恂) 변제환(邉濟桓) 변종규(邉宗圭) 변찬(邉燦) 변홍(邉烘)

의과

변급(邉伋) 변두경(邉斗卿) 변석구(邉錫龜) 변선(邉墡) 변시태(邉始泰) 변여망(邉汝望) 변여목(邉汝牧) 변여적(邉汝勣) 변여정(邉汝靖) 변영강(邉永康) 변영석(邉永錫) 변영수(邉永綏) 변영청(邉永淸) 변영태(邉永泰) 변영휘(邉永徽) 변영희(邉永熙) 변옥(邉沃) 변완(邉垸) 변응익(邉應翼) 변창윤(邉昌潤) 변창흡(邉昌洽) 변치수(邉致綏) 변치정(邉致定) 변치한(邉致翰) 변치헌(邉致憲) 변태환(邉泰桓) 변한수(邉漢壽) 변혁(邉爀) 변훈(邉壎)

음관

변경인(邉擎仁) 변계환(邉啓煥) 변규창(邉奎昌) 변득규(邉得圭) 변득규(邉得圭) 변상훈(邉相勳) 변석린(邉錫麟) 변승규(邉昇圭) 변시섬(邉始暹) 변영호(邉永浩) 변익환(邉益煥) 변익환(邉益煥) 변재문(邉載文) 변진규(邉晉圭) 변진규(邉晉圭) 변철규(邉徹圭) 변철규(邉徹圭) 변한규(邉漢圭) 변한규(邉漢圭) 변형규(邉衡圭) 변형순(邉亨淳)

취재

변계환(邉繼煥) 변준(邉埈) 변희(邉)

인구편집

  • 1985년 9,698가구 39,605명
  • 2000년 11,503가구 37,505명
  • 2015년 47,804명

성(姓)의 한자표기편집

원주 변(邉)씨 문중은 한문 성자(姓字) 표기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사용되어온 원주 변(邊)씨의 '邊'자의 한문 표기는 '邉'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체자 '邉변'은 필기체를 근간으로 하는 비문, 교지, 필사 한적(목판본, 활자본), 주민등록 원부, 호적 원부 등에 널리 사용됨으로써 마치 邉변자만 선조들이 써오던 글자체인 것으로 착각하는 혼선이 온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발급된 모든 서적(문무과방목,사마방목, 공신녹권 등, 위 과거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모든 원본에서는 邉변자를 사용하지 않고 邊변자를 사용하고 있다.)에서는 대부분 원주 변씨 선조들의 姓을 정자체 邊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원주변씨 종원들이 접할수 있는 모든 문서는 筆寫필사에 기초한 자료들이고, 왕실에서 발행된 모든 문서는 금속활자라는 차이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私家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금속활자로 문집이나 서적을 발간할수 없었다. 邊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자체에는 이체자가 있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邊변자를 邉변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다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지금 정자체인 邊변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찾아보기 힘들 뿐이다. 姓성의 한자표기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는 1950년 이후에 태어나거나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은 이체자 邉변을 사용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1950년 이전에 태어난 원래의 일본인만 邉변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두었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적 성씨(인구순위 5위)인 渡邊씨의 경우 씨를 渡邉이라 표기한 사람은 1950년전에 태어난 사람임을 알수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한자교육을 받지않은 세대들이 주류를 이룸으로서 원주변씨 일부에서는 한자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마치 성씨 邊변자 표기는 정자체임에도 불구하고는 잘못된 것이고 이체자 邉변자가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한자체이기 때문에 邊변자로 쓰는 것이 틀렸다고 오해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주변씨 선조들이 관습적으로 많이 사용하던 이체자 邉변자를 인쇄체로 표기할 방법이 없으므로 일부 젊은 원주변씨 종원들이 이체자 邉변자를 링크된 이미지 파일 문서를 보급하고 있고, 한글과 컴퓨터(주)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이체자를 꾸준히 추가하고 있으므로 조만간 원주 변씨 일부 종원들이 즐겨쓰고자 하는 邉변자도 추가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邊자를 邉으로 쓰지 않으면 틀렸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 지금이라도 종씨 변의 한자를 처음에 썼던 걸로 쓰는 게 맞다.

각주편집

  1. 『고려사』 권126, 열전39
  2. 世宗實錄 南陽州市誌 原州邉氏參判公派譜 1991
  3. [참고문헌:世祖實錄, 成宗實錄, 南楊州市誌, 韓國人名大辭典 신구문화사 1976]
  4. 원주 변씨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