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이씨(原州 李氏)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로 이춘계(李椿桂)를 모시는 (구)원주이씨와 시조로 이신우(李申佑)를 모시는 (신)원주이씨 2개의 성씨가 있으므로

(구)원주이씨(李椿桂)와 (신)원주이씨(李申佑)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원주이씨 (이춘계) 편집

원주 이씨 (이춘계)
관향원주
시조이춘계(李椿桂)
중시조이희백(李希伯)

원주이씨(李椿桂)의 선조는 중국 고대 한고조 서기전 200년경 진란(秦亂)을 피해 절서지역에서 고조선으로 정착하여 씨족 사회를 이루었다.

신라 16대 흘해왕조에 득사위한 진민(眞民)이 원시조(元始祖)이고, 공의 27세손인 도균(道均)의 차남인 이춘계(椿桂)가 시조이다. 고려 17대 인종과 18대 의종(1122~1170)에 병부상서 평장사 안일호장을 지냈다. 시조 이하 7대까지 실묘한 곳이 대부분 광주 온정동이다.

중시조인 8세 이희백(希伯)은 남부 부령을 지냈고, 9세 녹규(祿圭)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로 원주를 중심으로 중흥 번영하였다. 녹규는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임(琳)이 봉어동정으로 동정공파시조, 삼남 침(琛)이 병사공파시조, 차남 인(璘)이 중정대부종부시령을, 인의 자(子)가 재령현령 십일세 방진(邦珍)이고, 공은 형제를 두어 장남 완(玩)이 주부공파시조 차남 거(봉례랑공)가 육형제에 장남 기(起)가 은사공, 차남 추(趨)가 교도공, 삼남 월(越)이 사용공, 사남 부(赴)가 사직공, 오남 필(䟆)이 갈촌공, 육남 진(趂)이 평천공, 육파의 파시조이며 총 일원(一源) 구파(九派)를 이룬다.

분파 편집

  • 동정공파 (同正公派)
  • 병사공파 (主簿公派)
  • 주부공파 (主簿公派)
  • 은사공파 (隱士公派)
  • 교도공파 (敎導公派)
  • 사용공파 (司勇公派)
  • 사직공파 (司直公派)
  • 갈촌공파 (葛村公派)
  • 평천공파 (平川公派)

인물 편집

  • 이정식(李挺植) - 조선조 수군,병조판서, 동지의금부사
  • 이극신(李克新) - 조선조 원종1등공신
  • 이응순(李應順) - 조선조 正一品 좌의정 (익흥부원군), 임란공신
  • 이응인(李應인) - 조선조 正二品 병조판서 (원흥부원군), 임란공신
  • 이인민(李仁敏) - 조선조 임란공신
  • 이선민(李善敏) - 조선조 임란공신
  • 이강중(李剛中) - 조선조 병조판서, 동지의금부사
  • 이분(李芬) - 조선조 안주목사, 좌승지
  • 이윤남(李胤男) - 조선조 청난소무공신 (원성군)
  • 이광정(李光庭) - 조선조 영남의 대학자
  • 영남(嶺南)사림(士林)의 종장(宗匠) 눌은 이광정 1674(현종15)-1756(영조32)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은 1674년 6월 24일(현종년)경상북도 봉화(奉化)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이택(李澤1586-1625) 묘소가 원주시 흥업면 서곡리에 있다. 눌은(訥隱)의 관향(貫鄕)은 原州로 고려 안일호장(安逸戶長)이춘계(李椿桂)를 시조(始祖)로 하고 21세손이 된다. 원주에 세거(世居)해 오면서 유업(遺業)의 문벌을 존속해 왔다. 그러나 시조로부터 18세손인 증조부 이택(李澤)에 이르러 광해군의 어지러운 세상과 함께 성균관 유생 폐출사건이 발발하자, 원주(原州)를 떠나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있던 장인(丈人) 금윤선의 안내로 안동군 내성현(現 봉화)으로 이거하게 된후 원주를 往來하였지만 안동지방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증조부 이택은 당시 성균과 유생으로서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이 월등하여 주위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하며 훗날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추증되었다. 조부 이시암(李時庵 1607-1644), 자는 문약(聞若) 호는 만문(晩聞)으로 26세때 진사 (進士), 27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제자였고 34세 때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 (都事)를 역임했고 훗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생시에는 선조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 영의정 삼촌 신흠의 아들) 및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과 깊은 교분을, 인근 유곡(酉谷-안동권씨) 해저(海底. 의성김씨) 등의 문중과 친분관계를 유지했으나, 38세의 젊은 나이에 신병(身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문집(文集) 4권이 전한다. 눌은(訥隱)의 生父는 이후룡(李後龍)이며, 생모는 통덕랑 이유형(李惟馨 )의 딸인 공주 李씨이다. 눌은은 대를 잇기 위하여 생부 이후룡의 쌍둥이 형제인, 백부(伯父) 이선룡(李先龍)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백부는 통덕랑을 지내고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이었고, 백모(伯母)는 사인 이시철의 딸이자 퇴계 이황선생 兄의 손녀인 증정부인(贈貞夫人) 眞城 이씨이다 이광정(李光庭)의 자(字)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또는 녹문산인(鹿門山人)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부모의 시중을 들며 공손하여 후일에 성덕군자(成德君子)가 될 것이라는 양아버지의 칭송을 들었으며, 생부 이후룡(李後龍)은 어린 시절 눌은에게 자애로 글을 가르치다 학문을 게을리하면 매로 다스렸고, 그의 뜻을 받들어 종일 책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눌은은 재능이 뛰어나 7살에 증사(曾史)를 읽고 9살에 논어를 모두 외웠고 10살부터는 좌씨춘추(左氏春秋), 장자(莊子), 초사(楚辭), 사기(史記) 등과 굴원,송옥의 문장을 즐겨 읽고 15살에 육경을 통달한 천재였으나 세속문자(世俗文子)는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26세(숙종25년. 1699년)가 되던 해에 눌은은 진사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9세 되던 해 친어머니가 별세하고, 32세에 양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으며, 얼마후 전 부인 안동 金씨[스승 이화(而和) 김중청(金中淸)의 손녀] 마저 세상을 하직하자 상심하였다. 그는 세상 명리에 뜻이 없어 진사시에 올라 사마방목에 올랐을 뿐 대과는 외면했다 재신(宰臣)들의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등으로 등용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는데 문하생이 오백 명을 넘었다. 이광정은 효도와 우애가 남다르고 덕행과 절개와 지조가 맑고 깨끗해서 영남 일대에서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다. 영남 사대부 가문에서는 눌은 이광정의 문장이나 시 한편이라도 서재에 비치해야 선비로서의 자긍심이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61세 되던 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임금 앞에 나가 눌은은 효도와 청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에 있어 영남 제1인자라고 천거하니 영조는 남녘 영남지방의 예절과 학문이 왕성한 그곳에서 제 일인자면 당대(當代)에 제 일인자라 하여 눌은의 인물됨을 인정하였다. 그 후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재로(金在魯)가 조정의 조회에서 영조에게 영남에서 문장으로 출중한 넷 가운데 눌은이 으뜸이라 고하고 문학에 능하나 과거를 보지 않으며 청렴하여 향리에서 제자를 교육하여 신망이 두텁다고 아뢰니 영조가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여, 부임한 후 역대 임명지를 열람하다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과 청송(聽訟) 성수침(成守琛)이 제수되었으나 공직(公職)의 사양사실을 알고, 눌은 역시 한편의 시를 읊고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후일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말하기를 [이광정의 문장(文章)은 영남일대에서 백년 이래 이런 글이 없었고 그 빛이 창연하여 뒤에 드리움이 분명할 것이다] 라고 극찬했다. 그 후 81세 되던 해 봄에는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를 제수하였고 여름에는 영조가 사전(四殿) 존호(尊號)를 내릴 때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를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는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었다. 82세 가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며 이때 公이 말하기를 개방청형은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더니 이제 노직을 받으매 내가 내 직책을 얻었다고 하였다. 83세 되던 봄에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제수된 여러 벼슬 중 장능참봉 이외의 직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노환으로 세상을 뜨기 전 한달 여 동안 여러 노인들과 태백산(강원도 삼척 황지.태백)에 들어갔다가 귀향해서 1756년(영조32년) 4월1일 어은계사(漁隱溪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3세였다. 1756년 4월 이광정(八十三세) 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증직을 내렸다. 종二품으로서 대학자에 대한 예우였다고 할 수 있다. 번암(樊巖) 채제공 선생이 묘갈명(墓碣銘. 비문), 간옹(艮翁) 이현경 선생이 묘지명(墓誌銘)을, 문인대산 (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행장(行狀)을, 발문은 전라감사 와은(臥隱) 김한동(金翰東) 선생이 유권(遺券)에 대한 뒷글을 찬(撰) 했다. 묘소는 봉화현 대조산(大鳥山)에 있다. 내성현(奈城縣, 봉화군 봉화읍 일대에 있던 옛 고을)에 있는 백록리사(栢鹿里社)에 배향되었다.

이광정은 숱한 유문집(遺文集)을 남겼다 손자 이종훈(李宗勛)과 문인(門人)들이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두고 자금사정이 어려워 출판하지 못했다, 그가 떠난지 52년 뒤인 1808년 22권 11책 861판(板) 의 목판 초간본(初刊本)이 세상에 나왔다. 화재로 소실된 글도 많다고 하니 아쉽다. 지금 목판원본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돼 있다.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강원대학교 등에서 이를 교재로 활용하며 [눌은연구]로 배출된 석사 박사도 많다. 눌은 문집을 살펴보면 사(辞) 부(賦) 시(時) 서(序) 소(疏) 기(記)발(跋) 식(識) 명(銘) 찬(贊) 행장(行狀) 전(傳) 유사(遺事) 등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 눌은 문집중 [노파의 다섯가지 즐거움]을 비롯한 21편의 우언(寓言)이 담긴 [망양록(亡羊錄)] 과 [강상여지가]. [향랑요] 등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의 연구 논문을 쓰신 학자(무순)  - 눌은 이광정의 망양록 연구: ◾동방한문학회 신태관  - 한시를 통해본 이조여성의 형상- 눌은 이광정의 서사적 한시를 통하여:  ◾영남 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김혈조  - 눌은 문학의 세계관적 기반  - 눌은 이광정의 [노파지오락(老婆지五樂)] 분석  - 18세기 영남지문학 사상논쟁 연구- 강좌(江左) 대 대산(大山) 논쟁의 성격과 눌은 제산(霽山)의 중재논리:  ◾한국한문학회 회장 /인한대학교 교수협의회 의장 김영  -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작품에 나타난 여성 형상화의 양상과 의미:  ◾한국고전연구학회 하국고전 연구 강석숙  - 20세기 전반 지역사회의 재편과 지역민의 대응; 눌은 이광정의 우언 창작 방식  [망양록(亡羊錄)] 소재 창작우언을 중심으로  ◾성균관 대학교 대동문화 연구원 윤승준  - 눌은선생문집(訥隱先生文集)  ◾안동 대학교 퇴계학부 교수 황만기 (황교수외연구원은 2018.5월부터 향후 3여년 간에 걸쳐 눌은집 전권(全卷)을 번역 중임)  [참고 문헌]  『눌은집(訥隱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원주이씨 이신우(李申佑) 편집

원주이씨(原州 李氏) - 이신우(李申佑)
관향강원도 원주시
시조이신우(李申佑)
집성촌강원도 원주시

전라도 담양군
전라도 해남군
전라도 강진군
전라도 진도군
경상도 청송군
경기도 파주시

충청도 단양군

원주이씨(原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이신우(李申佑)이다.

진한(辰韓) 양산촌장(楊山村長)이며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인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원대손(遠代孫)이다.

이신우(李申佑)는 1004년(고려 목종 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문종조(文宗朝)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원주백(原州伯), 경흥군(慶興君)에 봉작되어 호장(戶長)으로 원주(原州)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경주(慶州)에서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분관(分貫)하였고, 경원군파(慶原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公派), 강릉공파(江陵公派) 3파(三派)후손을 두었다.

경원군파(慶原君派)의 파조(派祖)는 파조(派祖)는 이반계(李攀桂, ? - 1392)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작위(爵位)는 경원군(慶原君)이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켰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상서(조선시대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조선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을 추증(사후 작위나 벼슬을 내리는 일)하였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문인이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는 친구사이이며, 예부상서 시절에는 이방원을 제자로 가르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虎衛嶺中郞將)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양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 함께 강원도 원주 사전리 치악산에 은거하며 고려의 운이 다하고 이씨의 세상이 됨에 차라리 굶어죽을지라도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후 단식 7일 만에 죽으니 후에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추봉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강릉공파(江陵公派)의 파조(派祖)는 이영화(李英華)[1430~1517]이다. 이영화(李英華)는 과거에 급제한 뒤 투필첩호방(投筆捷虎榜)으로 무과에도 뽑혀 감역(監役)을 역임하였다. 이후 직산현감과 홍산현감을 거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역임하던 중 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반대파를 살해하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염려하여 지금의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로 피신해 정착하였다. 이영화(李英華)는 맹건(孟健). 충건(忠健). 인건(仁健). 의건(李義健). 예건(禮健). 지건(智健)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해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충건을 제외한 다섯 아들이 해남 근교에 흩어져 세거하면서 해남 지역 원주이씨의 기틀을 다졌다. 강릉공파(江陵公派) 후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9명의 충신과 3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장(李樟), 이남(李楠), 이원해(李元海), 이홍신(李弘信), 이지훈(李之訓), 이계정(李繼鄭) 등을 들 수 있다. 1991년 원주이씨대동보 발간 때 영화(英華)의 조부이신 을계(乙桂)로 상계하여 파조(派祖)로 삼았다.

판도공파(版圖公派)의 파조(派祖)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천명(李天明)이다.

분파 편집

경원군파(慶原君派) 편집

경원군파(慶原君派)의 파조(派祖)는 이반계(李攀桂, ? - 1392)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작위(爵位)는 경원군(慶原君)이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켰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상서(조선시대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조선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을 추증(사후 작위나 벼슬을 내리는 일)하였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문인이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는 친구사이이며, 예부상서 시절에는 이방원을 제자로 가르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虎衛嶺中郞將)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양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 함께 강원도 원주 사전리 치악산에 은거하며 고려의 운이 다하고 이씨의 세상이 됨에 차라리 굶어죽을지라도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후 단식 7일 만에 죽으니 후에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추봉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강릉공파(江陵公派) 편집

강릉공파(江陵公派)의 파조(派祖)는 이영화(李英華)[1430~1517]는 과거에 급제한 뒤 투필첩호방(投筆捷虎榜)으로 무과에도 뽑혀 감역(監役)을 역임하였다. 이후 직산현감과 홍산현감을 거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역임하던 중 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반대파를 살해하자 멸문지화를 염려하여 지금의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로 피신해 정착하였다.

해남의 원주이씨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9명의 충신과 3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장(李樟), 이남(李楠), 이원해(李元海), 이홍신(李弘信), 이지훈(李之訓), 이계정(李繼鄭) 등을 들 수 있다.

이영화는 맹건(孟健). 충건(忠健). 인건(仁健). 의건(李義健). 예건(禮健). 지건(智健)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해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충건을 제외한 다섯 아들이 해남 근교에 흩어져 세거하면서 해남 지역 원주이씨의 기틀을 다졌다.

1991년 원주이씨대동보 발간 때 영화(英華)의 조부(祖父)이신 을계(乙桂)로 상계하여 파조(派祖)로 삼았다.

판도공파(版圖公派) 편집

판도공파(版圖公派)의 파조(派祖)는 이천명(李天明)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셨다.

항렬제차 편집

原州李氏 行列第次
세(世) 경원군파/판도공파 강릉공파 세(世) 전족공통
28세 台 ◎ ◎ 欽 / ◎ 鉉 38세 思 ◎ / 重 ◎ / 愚 ◎
29세 ◎ 基 / ◎ 培 泳 ◎ / 浩 ◎ 39세 ◎ 元 / ◎ 胤 / ◎ 旭
30세 鍾 ◎ / 錫 ◎ ◎ 根 / ◎ 煥 40세 夏 ◎ / 命 ◎ / 昺 ◎
31세 ◎ 澤 / ◎ 潤 炯 ◎ / 炳 ◎ 41세 ◎ 宗 / ◎ 宇 / ◎ 寧
32세 東 ◎ / 相 ◎ ◎ 培 / ◎ 均 42세 哉 ◎ / 茂 ◎ / 成 ◎
33세 ◎ 煥 / ◎ 然 錬 ◎ / 鎭 ◎ 43세 ◎ 起 / ◎ 熙 / ◎ 範
34세 圭 ◎ / 在 ◎ ◎ 淑 / ◎ 求 44세 肅 ◎ / 康 ◎ / 庚 ◎
35세 ◎ 鎔 / ◎ 鎭 和 ◎ / 植 ◎ 45세 ◎ 章 / ◎ 常 / ◎ 宰
36세 洙 ◎ / 濟 ◎ ◎ 容 / ◎ 燮 46세 珪 ◎ / 升 ◎ / 揆 ◎
37세 ◎ 來 / ◎ 榮 吉 ◎ / 圭 ◎ 47세 ◎ 肇 / ◎ 奉 / ◎ 揆

※ 共用行列字는 家諱에 禁한 四十三字를 除外하였고 大法院에서 選定한 人名用 二千七百三十一字中에서 作名數運靈動에 맞추어 制定하였음.

인물 편집

과거 편집

이신우(李申佑) 신원주이씨 시조, 고려조 병부상서
이반계(李攀桂) 고려조 예부상서
이천명(李天明) 고려조 판도판서
이을계(李乙桂) 고려조 통례원 봉례
이영화(李英華) 조선조 강릉대도호부사
이계정(李繼鄭) 조선조 충청수군절도사
이억복(李億福) 조선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숙형(李淑亨) 조선조 회령부사
이황(李璜) 조선조 병절교위
이유(李瀏) 조선조 예조좌랑(禮曹佐郞)추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조봉대부행무장현감(朝奉大夫行茂長縣監)
이대행(李大行) 조선조 훈련원 판관
이원해(李元海) 조선조 훈련원 부정
이준(李浚) 조선조 의주부윤
이순(李珣) 조선조 직장
이호(李琥) 조선조 선무원종2등공신
이성춘(李成春) 조선조 훈련원 봉사
이의경(李毅敬) 조선후기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남(李楠) 조선조 무장현감,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연근(李淵根) 항일의사

현재 편집

이훈동(李勳東) 1917년 10월11일 ~ 2010년 10월30일. 전 조선내화 창업주.
이성일(李成一) 1928년 4월20일 ~ 1989년 11월12일. 제11대 국회의원(한국국민당(1981년)
이정일(李正一) 1947년 11월7일 ~ 2009년 3월 4일. 제16대 국회의원(무소속(2000년), 제17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2004년)역임.
이기진(李誕熙) 1960년생. 서강대 교수
이준호(李俊澔) 1974년생. 전남대 교수
이탄희(李誕熙) 1978년생. 제21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2020년)

같이 보기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