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영국의 정치인 (1874–1965)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경(영어: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a]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0년부터 1945년과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영국의 정치인, 군인, 작가이다. 처칠은 1900년부터 1964년 사이 62년 동안 하원의원(MP)이었으며 이 동안 총 5개의 선거구를 대표했다. 이념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제국주의를 고수한 처칠은 정치 경력 대부분을 자신이 1940년부터 1955년까지 이끌었던 보수당 소속으로 지냈으며, 1904년부터 1924년까지는 자유당 소속이었다.

The Right Honourable
윈스턴 처칠 경

Sir Winston Churchill
KG OM CH TD DL FRS RA
1941년 처칠.
1941년 처칠.
영국의 총리
임기 1951년 10월 26일 ~ 1955년 4월 5일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후임 앤서니 이든
군주
부총리 앤서니 이든

임기 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전임 네빌 체임벌린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고위 정치직 경력

하원의 원로 의원
임기 1959년 10월 8일 ~ 1964년 9월 25일
전임 데이비드 그렌펠
후임 랍 버틀러

영국의 제1야당 대표
임기 1945년 7월 26일 ~ 1951년 10월 26일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보수당의 당대표
임기 1940년 10월 9일 ~ 1955년 4월 6일
후임 앤서니 이든
행정 직책 경력 (1939~1952)

영국의 국방부 장관
임기 1951년 10월 28일 ~ 1952년 3월 1일
전임 매니 신웰
후임 해럴드 알렉산더
총리 본인

임기 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전임 에른리 채트필드
국방부 조정자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본인

영국의 해군장관
임기 1939년 9월 3일 ~ 1940년 5월 11일
전임 제임스 스탠호프
후임 A. V. 알렉산더
행정 직책 경력 (1908~1929)

영국의 재무재상
임기 1924년 11월 6일 ~ 1929년 6월 4일
전임 필립 스노든
후임 필립 스노든
총리 스탠리 볼드윈

영국의 식민지 국무장관
임기 1921년 2월 13일 ~ 1922년 10월 19일
전임 알프레드 밀너
후임 빅터 캐번디시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의 공군부 장관
임기 1919년 1월 10일 ~ 1921년 2월 13일
전임 윌리엄 위어
후임 프레디 게스트

영국의 전쟁성 장관
임기 1919년 1월 10일 ~ 1921년 2월 13일
전임 밀너 자작
후임 라밍 워싱턴-에반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의 전쟁장관
임기 1917년 7월 17일 ~ 1919년 1월 10일
전임 크리스토퍼 애디슨
후임 앤드류 웨어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의 랭커스터 공국상
임기 1915년 5월 25일 ~ 1915년 11월 25일
전임 에드윈 몬타구
후임 허버트 새뮤얼
총리 H. H. 애스퀴스

영국의 해군성 장관
임기 1911년 10월 24일 ~ 1915년 5월 25일
전임 레지널드 맥케나
후임 아서 밸푸어
총리 H. H. 애스퀴스

영국의 내무장관
임기 1910년 2월 19일 ~ 1911년 10월 24일
전임 허버트 글래드스톤
후임 레지널드 맥케나
총리 H. H. 애스퀴스

영국의 상무원 장관
임기 1908년 4월 12일 ~ 1910년 2월 14일
전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후임 시드니 벅스턴
의회 직책 경력

우드포드하원의원
임기 1945년 7월 5일 ~ 1964년 9월 25일
전임 신설
후임 폐지

에핑의 하원의원
임기 1924년 10월 29일 ~ 1945년 6월 15일
전임 레너드 라일
후임 리아 매닝

던디의 하원의원
임기 1908년 5월 9일 ~ 1922년 10월 26일
전임
공동재임자 알렉산더 윌키
후임

멘체스터 북서부의 하원의원
임기 1906년 2월 8일 ~ 1908년 4월 12일
전임 윌리엄 홀즈워스
후임 윌리엄 조인슨힉스

올덤의 하원의원
임기 1900년 10월 24일 ~ 1906년 2월 8일
전임 월터 런시먼
후임 존 앨버트 브라이트

이름
본명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신상정보
출생일 1874년 11월 30일(1874-11-30)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주, 블레넘
사망일 1965년 1월 24일(1965-01-24)(90세)
사망지 영국, 잉글랜드, 런던, 하이드파크게이트
학력
정당
부모
배우자 클레멘타인 호지엔 (1908년 결혼)
자녀 5(다이애나, 랜돌프, 세라, 메리 포함)
직업
묘소 옥스퍼드셔주 세인트 마틴 교회
서명 파일:Winston Churchill signature.svg
군사 경력
복무
복무기간 1893~1924
소속군
최종계급 목록
지휘 왕립 스코틀랜드 보병 연대, 6대대
주요 참전
상훈 훈장

처칠은 영국과 미국의 혼혈인 옥스퍼드셔주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인 스펜서가에서 태어났다. 1895년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영국령 인도, 마흐디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등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며, 이후 전쟁 특파원으로 명성을 얻고 자신의 작전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1900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처칠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을 옮겼고, H. H. 애스퀴스의 자유정부에서 상무원 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내며 교도소 개혁과 노동자 사회 보장을 옹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해군성 장관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감독했지만 매우 크게 실패한 뒤 해임되어 랭커스터 공국상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11월 처칠은 공국상에서 사임하여 서부 전선에서 6개월 동안 왕립 스코틀랜드 보병 연대에서 대대를 지휘했다. 1917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정부에서 내각에 복귀하여 군수장관, 전쟁장관, 항공장관, 식민지 국무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영국-아일랜드 조약중동에서의 외교 정책을 감독했다. 2년 동안 잠시 의회를 떠난 이후 스탠리 볼드윈의 보수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지만, 1925년 처칠은 파운드제를 금본위제로 되돌려 경제를 침체시켰다.

1930년대 "황야 시기"라고 불렸던 기간 동안 처칠은 정부에서 물러나 나치 독일군국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재무장을 요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성 장관으로 재임명되었다. 1940년 5월 처칠은 네빌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영국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국민정부를 구성하여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전쟁을 주도하여 최종적으로 1945년 승리를 얻어냈다. 194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며 처칠은 제1야당 대표가 되었다. 처칠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를 경고하는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유럽의 통합을 촉구했다. 처칠은 두 임기 사이에 여러 권의 책을 썼고,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1951년에 재집권했다. 처칠의 두 번째 임기는 외교, 특히 영국-미국 관계와 인도가 이탈한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국내적으로 정부의 우선순위는 광범위한 주택 건설 프로그램이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건강이 악화되자 처칠은 1955년 총리에서 사임했고, 하원의원직은 1964년까지 유지했다. 1965년 사망하자 국장을 치루었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처칠은 영국과 영미권 지역에서 여전히 인기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파시즘의 확산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 전시 지도자로 여겨진다. 처칠은 종종 제국주의와 인종에 대한 특정 발언, 지역 폭격과 같은 일부 전시 결정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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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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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자넷과 동생 존과 함께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다. 그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를 배출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였다. 처칠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의 8대 선조이기도 하다. 즉,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와 처칠은 같은 뿌리의 친척이다.[1]

윈스턴 처칠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 여사는 미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적과 권력투쟁에 밀리고서 회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사망한다. 당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사관학교 시절과 보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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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학교 시절의 처칠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로우 학교 입학시험 때에 주어진 시간인 2시간 동안 라틴어 작문을 전혀 하지 못했고[2] 해로우 스쿨에서의 학과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다행히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역사에 소질이 있어 영문학역사 성적이 좋아서 입학을 허락받았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부친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에 있을 땐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히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으며,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십과 공동체의 규칙 존중을 배웠다.[2]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병과가 기병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장교로서 군복무를 할 때, 배에서 내리다가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어깨를 다치는 산업재해를 당해 어깨가 좋지 않아서[2] 기병용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지 못했고 그래서 사비로 마우저 C96 권총을 구입해다가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수단인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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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막역지우였던 알렉산더 플레밍을 도왔다. [3]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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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에 임명된 후 "V" 사인을 보이는 처칠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공군비행사의 실수로 떨어뜨린 폭탄이 진짜 영국을 공격한 것처럼 되었지만, 사람들은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1940년 5월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4]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있다.

종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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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와 함께 대서양 헌장에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처칠

1945년 1월 1일에서 1945년 7월 26일까지 강인한 리더십으로 6개월 동안 영국 군주 조지 6세대리청정을 전담 수행하기도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처칠 총리는 1943년 11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카이로 선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이것은 2차 대전을 일으켰던 나치스의 장본인 아돌프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5]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6]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6]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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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무덤

1945년 7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며 총리에서 물러났다.[7] 노동당이 393개의 의석과 총유효투표의 48%를 획득하며 승리하였고 처칠이 이끈 보수당은 213석으로 줄어들었다.[8] 이는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크게 패배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남부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영어 사용 국민들 간의 형제애적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53년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9] 1955년에 앤서니 이든에게 물려주고, 하원 평의원으로 머무르다가 1964년에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10]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미국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

1965년 1월 24일, 향년 91세로 고인이 되었으며, 영국의 모든 관공서 뿐만 아니라 학교, 해외주재 대사관, 영사관들도 모두 조기를 게양하였다. 영국 국민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나라 사람들이 그에 대한 애도를 표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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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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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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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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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ee: Charles SPENCER,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2. 신상웅 글; 김희준 그림.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처칠》. 계몽사. 
  3. “계몽사 어린이그림위인전기《처칠》/신상웅 씀,김희준 그림/계몽사”. 2018년 8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8월 2일에 확인함. 
  4. 박지향 <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까치글방 2000.7.5, p470
  5. Miscamble, Wilson D. (2007). 《From Roosevelt to Truman: Potsdam, Hiroshima, and the Co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86244-2. 
  6. Wettig, Gerhard (2008). 《Stalin and the Cold War in Europe》. Rowman & Littlefield. ISBN 0-7425-5542-9. ,
  7. 기무라 <전후세계사> 역사교양사 1999년 p74
  8. 이주영 外 3명 <서양현대사> 삼지원 1995년 p74
  9. [네이버 지식백과] 윈스턴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인물세계사, 표정훈)......처칠은 신문에 기고한 많은 에세이와 시사평론은 물론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 등을 집필한 정력적인 작가, 저술가였다. 대표작은 6권 분량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과 카이사르의 영국 침공 시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는 <영어 사용민의 역사>다. 그는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 준 탁월함과, 고양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훌륭한 연설’을 이유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0. [네이버 지식백과] 윈스턴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인물세계사, 표정훈)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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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네빌 체임벌린
영국의 총리
1940년~1945년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제48대 영국의 야당 당수
1945년 7월 26일~1951년 10월 26일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의 총리
1951년~1955년
후임
앤서니 이든
전임
이오시프 스탈린
제14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40년
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임
해리 S. 트루먼
제23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49년
후임
미국의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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