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영어: William Ewart Gladstone, 영국식 영어 발음: /ˈjuːət ˈɡlædˌstən/, 1809년 12월 29일 ~ 1898년 5월 19일)은 영국의 전 총리이다.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선을 내세운 19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영국 총리 중 한명이었다.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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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왕국의 총리 | |
제4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92년 8월 15일-1894년 3월 2일 |
전임 | 솔즈베리 후작 |
후임 | 로즈베리 백작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제3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86년 2월 1일-1886년 7월 20일 |
전임 | 솔즈베리 후작 |
후임 | 솔즈베리 후작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80년 4월 23일-1885년 6월 9일 |
전임 | 비컨스필드 백작 |
후임 | 솔즈베리 후작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68년 12월 3일-1874년 2월 17일 |
전임 | 벤저민 디즈레일리 |
후임 | 벤저민 디즈레일리 |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연합왕국의 대장상 | |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80년 4월 28일-1882년 12월 16일 |
전임 | 스태퍼드 노스코트 |
후임 | 휴 칠더스 |
총리 |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 | |
임기 | 1873년 8월 11일-1874년 2월 17일 |
전임 | 로버트 로위 |
후임 | 스태퍼드 노스코트 |
총리 |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
제2차 파머스턴·제2차 러셀 내각 | |
임기 | 1859년 6월 18일-1866년 6월 26일 |
전임 | 벤저민 디즈레일리 |
후임 | 벤저민 디즈레일리 |
총리 | 파머스턴 자작, 러셀 백작 |
애버딘 내각 | |
임기 | 1852년 12월 28일-1855년 2월 28일 |
전임 | 벤저민 디즈레일리 |
후임 | 조지 콘월 루이스 |
총리 | 애버딘 백작 |
연합왕국의 하원의원 | |
임기 | 1880년 4월 27일-1895년 8월 7일 |
전임 | 윌리엄 스콧 |
후임 | 토머스 깁슨카마이클 |
지역구 | 미들로디언 |
임기 | 1868년 12월 7일-1880년 4월 27일 |
전임 | 찰스 틸스턴 브라이트 |
후임 | 헨리 드 웜스 |
지역구 | 그리니치 |
임기 | 1865년 7월 24일-1868년 12월 7일 |
전임 | 윌리엄 레그 |
후임 | (선거구 폐지) |
지역구 | 랭커셔 남부 |
임기 | 1847년 8월 26일-1865년 7월 24일 |
전임 | 토머스 그림스턴 에스트코트 |
후임 | 개손 하디 |
지역구 | 옥스퍼드 대학 |
임기 | 1833년 1월 8일-1846년 1월 30일 |
전임 | 토머스 와일드 |
후임 | 존 스튜어트 |
지역구 | 뉴어크 |
이름 | |
별명 | 위대한 노인 (Grand Old Man)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09년 12월 29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리버풀 로드니가 62번지 |
사망일 | 1898년 5월 19일 | (88세)
사망지 | 웨일스 해워든성 |
학력 |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
정당 | 토리당 (1828년-1834년) 보수당 (1834년-1846년) 필파 (1846년-1859년) 자유당 (1859년-1898년) |
부모 | 존 글래드스턴 준남작 앤 맥켄지 로버트슨 |
배우자 | 캐서린 글린 (m. 1839년) |
자녀 | 윌리엄 헨리 글래드스턴 헬렌 글래드스턴 헨리 글래드스턴 남작 허버트 글래드스턴 자작 등 8명 |
종교 | 고교회파 성공회 |
서명 |
경력
편집보수당 경력
편집그는 리버풀에서 출생하여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를 졸업하였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833년 보수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필 내각 때에 관세 개혁을 하여 자유무역의 길을 열었다. 또한 1852년 애버딘 연립 내각의 재무상이 된 후, 1853년에 획기적인 예산안을 성립하여 재정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아편전쟁 반대
편집1840년 아편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하원에서 논의할 때에 전쟁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청나라 관리였던 임칙서가 영국상인들로부터 마약인 아편을 압수하여 소각하는 상식적인 행정명령을 시행하였음에도, 당시 영국인의 치외법권 문제나 아편무역으로써 무역적자를 풀려고 한 영국의 배금주의 등이 겹쳐 영국 정부는 청과 명분이 부족한 전쟁을 하려고 했다. 이에 하원 회의장에서 글래드스턴 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저는 아편도 경제도 잘 모릅니다. 그 나라 법을 따르지 않는 외국인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린 전쟁은 없었다고 기록할 것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1]
글래드스턴 의원의 연설은 전쟁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용기를 내도록 하여, 당초 파병이 우세해보이던 초기 상황과 달리 1840년 4월 파병안 최종 투표 결과는 전쟁 찬성의견과 반대의견이 찬성 271:반대 262로 매우 팽팽하게 나왔다.[2] 허나 결과적으로 찬성이 약간 더 우세하여 전쟁은 벌어지고 글래드스턴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다만 이때의 일로 그는 많은 지지층을 얻게 된다.
자유당 경력
편집1867년 자유당의 당수가 되고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여러 번 재무장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영국 총리 시절이던 1870년 12월 1일에서 1871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한 그는 1868년~1894년까지 4번이나 자유당 내각을 만들었다.
자유당 내각에서는 그는 교육 제도를 고쳐 영국사람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의무교육) 또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등 많은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참고로 디즈레일리가 이끌던 당대 보수당도 친노동 스탠스의 온건적 보수주의를 내세웠는데,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예기치 못하는 혁명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글래드스턴은 1894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하워든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 (The Great commoner) 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역대 선거 결과
편집참고 자료
편집각주
편집- ↑ “[유레카] 아편전쟁 / 함석진”. 2009년 11월 22일. 2018년 8월 7일에 확인함.
- ↑ “[유레카] 아편전쟁 / 함석진”. 2009년 11월 22일. 2018년 8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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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벤저민 디즈레일리 |
제18대 영국 야당 당수 1866년 6월 28일 ~ 1868년 12월 1일 |
후임 벤저민 디즈레일리 |
전임 벤저민 디즈레일리 |
제20대 영국 야당 당수 1874년 2월 20일 ~ 1875년 2월 |
후임 하팅턴 후작 |
전임 스태포드 노스코트 |
제23대 영국 야당 당수 1885년 6월 23일 ~ 1886년 2월 1일 |
후임 마이클 힉스 비치 |
전임 마이클 힉스 비치 |
제25대 영국 야당 당수 1886년 7월 25일 ~ 1892년 8월 11일 |
후임 아서 밸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