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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대전 대략도

유성현(儒城縣)은 신라시대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던 지역이다.

목차

유래편집

원래 이름은 노사지(奴斯只)또는 노질지(奴叱只縣)이다. 유성은 이를 한자화 한 것으로 결국 표기법만 달리한 같은 이름이다. "유성"이라 쓰고 "노사지"라 읽었던 것이다.

노사(奴斯) - 노(奴)의 음(音)은 "노", 사(斯)와 질(叱)의 음(音)은 "ㅅ"로 받침자이다.[1] 즉「노사(奴斯)」는 늦의 음차(音借)이다. 유성(儒城)의 유(儒)는 고대에 노(奴)자와 같이 노, 누, 늦등으로 같이 읽혔다. 지(只) - 지(只)의 음(音)은 "지"로 「재」(현:峴·성:城)의 음차(音借)이다. 따라서 노사지(奴斯只)를 풀이하면 늦(儒) 재(城) 즉, 유성(儒城)으로 개명(改名)된 것이다. 유성(儒城)이라는 이름의 의미에서 선비 · 학자의 고장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어 주민들의 인식이 이제는 거의가 그렇게 굳어졌다. 실제로 대학교와 연구기관이 밀집된 연구단지가 자리잡고 있어 많은 학자가 여기에 상주하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유성(儒城)이라 할 수 있겠다.

옛 유성과 유성구편집

같은 이름이긴 해도 현재의 유성구와 역사상의 유성은 영역상에서 차이가 난다. 옛 유성은 지금의 유성구에서는 온천1.2동과 노은 1동이 옛 노사지현에 속해 유성구의 가운데의 3분의 1도 안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고 동쪽으로 서구의 반을 차지해 동서로 긴 모양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현대의 유성구는 옛 유성에서 동쪽의 반 이상을 서구에 내주는 대신에 옛 진잠군의 반 남짓과 덕진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남북으로 긴 모양이다. 이를 겹치면 대략 "ㅏ" 모양이 되는 것이다.

역사편집

  • 구즉동에서 구석기 유적. 구성동과 갑천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 서기 9년에 마한의 영역 대부분이 백제에 합병되면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계승하여 백제의 지배하에서 소국체제가 계속되었다.

  • 백제의 행정체제가 정비되면서 노사지현(奴斯只縣) 또는 노질지현(奴叱只縣)이 되었다.
  • 660년 백제가 패망하자 웅진도독부는 노사지에 동명주 노신현(鹵辛縣)을 설치했다. 하지만 나당 전쟁등으로 이름뿐인 행정관청이었다.
  • 757년 경덕왕 16년 행정체제 개편으로 유성현으로 개명하고 비풍군(比豊郡)의 영현이 되었다.
  •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공주군 천내면 서측과 현내면은 대전군 유성면, 천내면 동측과 유등천면은

유천면이 되었다. 정림동 일대는 기성면에 속했다.

  • 1973년 대통령령 제6543호로 유성면을 유성읍으로 승격했다.
  •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로 유성읍 일원이 대전시 중구 관할로 신설된 유성출장소에 편입되었다.
  • 1984년 9월 1일 시 조례 제1404호(1984. 9. 1 공포)로 중구 유성출장소를 시 직할 유성출장소로 승격시켰다.
  •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367호(1987. 12. 31 공포)로 서구가 신설됨에 따라 유성출장소의 행정구역 구 명칭이 중구에서 서구로 변경되었다.
  • 1989년 1월 1일 법률 제 4049호(1988. 12. 31 공포)로 대전이 직할시로 되면서 유성구가 신설되었다.

각주편집

  1. 叱자가 대개 향찰,도는 이두에서 ㅅ,ㅈ의 받침자로 자주 사용되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