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흠 (1876년)

유승흠(柳承欽, 1876년 11월 21일 ~ ?)은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인물이다. 호는 인고생(麟皐生)이며, 본적은 경기도 인천부이다.

생애 편집

조선 중기의 무신인 유응수의 12대 손이다. 형인 유승해와 함께 함경남도 지역에서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1]

대한제국 말기인 1904년학부에서 선발하는 일본 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했다. 도쿄의 부립제일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유학생들은 이에 동요하다가 교장의 조선인 학생 비하 발언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 유학생 가운데 유승흠과 최린, 한상우 등 10명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으나, 대한제국 고종의 배려로 황실 장학생으로서 공부를 계속했다.[2]

일본 유학 중인 1906년에 《태극학보》에 글을 기고하여 자강과 개화를 강조하는 등 애국계몽 운동 계열에서 활동했다.[3] 1909년에 법률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성부에서 교육인으로 일했다.[4]

1921년에 함경남도 참여관에 발탁되었으며, 곧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이던 1933년을 기준으로 종5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과 도 참여관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형 유승해도 들어 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유승해(柳承海) - 국사편찬위원회
  2. 이승원 (2005년 4월 18일). 〈8. 유학생 -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가다〉. 《학교의 탄생》. 서울: 휴머니스트. ISBN 8958620404. 
  3. 김복순 (2006년 7월 29일). 《1910년대 한국문학과 근대성》. 서울: 소명(박성모). 394쪽쪽. ISBN 898837505X. 
  4. “咸南列邑大觀, 日新日興의 新興郡”. 《개벽》 (제54호). 192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