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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현(恩津縣)은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일대를 포함한 조선으로, 강경읍논산읍이 속하여 있어서 조선후기에 공주목에서 공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했던 지역이다.[1]

역사편집

1418년 태종때에 덕은현을 지역의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은진이라고 고쳐 불렀다. 세종실록과 여지도에 따르면 15세기 5백 6호에 인구가 1천 717명이었으나, 18세기에는 4천 811호에 1만 7,920명으로 증가하였다. 은진은 공주목 안에서도 공주 다음으로 큰 인구 규모와 경제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은진현 강경은 포구에 가까운 대도회(大都會)로 인식되었으며, 전국 15대 장시로 성장했다. 임원경제지 에 의하면 은진 강경장은 충청도 다른 지역에 비해 쌀, 콩, 어류, 소금을 비롯 면포, 철물, 담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거래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은진현은 세조때 좌의정(左議政) 정창손(鄭昌遜)을 비롯한 권력자의 농장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도 충훈부를 비롯하여 권력아문과 궁방 소유의 토지가 있었다.

경제편집

은진현은 은진과 강경포의 시장세의 일부를 왕족이 떼어 가져간 것이 문제될 만큼 상업이 성행한 지역이었다. 특히 은진 강경포는 19세기 큰 도시로 주목되었고, 강창(江倉)을 거쳐 서울로 운송되는 조세 수송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18세기 은진 강경포를 거쳐 상납되는 충청도 각 읍의 전세곡(田稅穀)을 살피면, 공주 3,599석․정산 579석․석성 524석․연산 1,068석․이산 931석․은진 1,310석으로 도합 8,011석이었다. 이는 충청도 상납 전세곡 전체 28,938석의 27.7%에 달하는 것이었다.

논산은 수로를 이용하여 강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은진현에는 세 군데에 장시가 있었는데, 은진관아(현재 은진초등학교) 앞, 논산포 부근, 김포면 은진세창 옆(강경포)였다. 때로는 강경포와 논산포가 경쟁을 보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1799년 대홍수로 논산항의 수심이 깊어지자 강경까지만 들어오던 상선(商船)들이 논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강경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원래부터 선박에 대해 주인권을 갖고 국가에 일정한 세를 바치고 있었다고 상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논산의 상인은 배란 어느 곳이든지 드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교통편집

은진은 육지 교통상으로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은진현에서 사방으로 난 도로를 통해 공주와 연산, 여산과 전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포천로(布川路)는 삼남을 왕래하는 큰길이었으며, 신교로(新橋路)를 통해 여산 황하정에 이르렀고, 동지원로(東之院路)를 통해 전주 인천장(仁川場)과 연결되었다. 논산로(論山路)를 통해서는 이산과 석성으로 연결되어 공주로 이어졌다. 따라서 전쟁 때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병참상 중요한 지역으로 정유재란(1597년;선조30) 당시 은진지역을 중심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관할지편집

은진 현감은 가야곡을 비롯한 14개면 56개 리를 관할했다.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은진현 관할의 14개 면과 그 인구를 기록하고 있다.

  • 가야곡 1450명
  • 갈마동 991명
  • 두상면 1105명
  • 두하면 820명
  • 대조곡면 1392명
  • 죽본면 991명
  • 구자곡면 1287명
  • 도곡면 1752명
  • 채운면 1056명
  • 김포면 2529명
  • 화산면 1014명
  • 성본면 1334명
  • 화지산면 1851명
  • 송산면 903명

이를 모두 합하면 17920명이다.

인구수로 보면 공주(公州) 세창(稅倉)과 은진 세창(稅倉)이 있고 강경포가 있는 김포면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내동, 관촉리, 취암리, 논산리, 화지리를 포함하고 연산세창이 있었던 화지산면이다.

각주편집

  1. 오갑수, 조선 시대 공주목 관할 지역 지방 관아와 읍세의 분석, 건양대학교 교육학 석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