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와씨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일본의 부케(武家)이자 사족(士族)으로써 존재했던 씨족이다. 일본어로는 이마가와우지(いまがわうじ) 또는 이마가와시(いまがわし)라고 읽는다.
![]() 이마가와 아카토리(今川赤鳥) | |
본성(本姓)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요시우지류(義氏流) 기라 씨(吉良氏)계 이마가와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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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 이마가와 구니우지(今川国氏) |
종별(種別) | 부케(武家) 사족(士族, 1887년 집안이 단절) |
출신지 | 미카와 국(三河国) 하즈 군(幡豆郡) 이마가와 장(今川荘) |
근거지 | 스루가 국(駿河国) 도토미 국(遠江国) |
출신 저명인물 |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範忠)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 이마가와 우지테루(今川氏輝)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 |
지류·분가 | 시나가와 씨(品川氏) 호리코시 씨(堀越氏) ・ 세나 씨(瀬名氏) 간바라 씨(蒲原氏) |
범례 - 분류:일본의 씨족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지류 가문으로, 그 적류(嫡流)인 스루가 이마가와 씨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스루가 국(駿河国) ・ 도토미 국(遠江国)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되어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는 이들 구니(国)를 지배하는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전화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대에는 미카와 국(三河国)까지 지배하게 되어 일본 도카이 지방(東海地方)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3년(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요시모토가 전사하고, 이후 미카와의 도쿠가와 씨(徳川氏) ・ 가이의 다케다 씨(武田氏) ・ 사가미의 고호조 씨(後北条氏) 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였다.[1]
이후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자손이 고게(高家)로써 겨우 집안의 이름을 유지하였으나[1]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화족(華族)이 아닌 사족(士族)에 편입되었고, 그나마도 1887년에 적류 집안이 단절되었다.[2]
개요
편집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의 손자인 기라 나가우지(吉良長氏)의 둘째 아들 구니우지(国氏)가, 미카와 국(三河国) 하즈 군(幡豆郡)의 이마가와 장(今川庄)을 영유하고 이마가와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3] 이마가와 집안은 아시카가 일문에 속하는 명문가였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쇼군케(足利将軍家)의 친족으로써의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었고, 아시카가 쇼군케의 고이치케(御一家)로써 우대받았던 기라 씨(吉良氏) 집안의 분가에 해당하였다. 「고쇼(御所, 아시카가 쇼군케)가 단절되면 기라가 잇고, 기라가 단절되면 이마가와가 잇는다」(御所が絶えなば吉良が継ぎ、吉良が絶えなば今川が継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시카가 종가(즉 무로마치 바쿠후의 쇼군 가문 계통)의 혈맥이 단절되었을 경우에는 기라 집안은 아시카가 종가 그리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의 직책을 계승할 권리가 발생하는 특별한 집안이었다고도 전한다. [a]
기라 집안의 분가인 이마가와 집안은 슈고나 사무라이도코로쇼시에 임명되는 경우가 으레 있었다. 군공을 세워서 부쇼군(副将軍)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이마가와 노리마사(今川範政)의 아들 노리타다(範忠)는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에서 세운 전공으로 쇼군으로부터 노리타다 본인과 그 직계 자손 이외에는 이마가와 성 사용을 금지한다는 「덴카이치묘지」(天下一苗字)라는 대우를 받았으므로, 일본 각지에서 번영한 이마가와 성을 쓰는 집안도 스루가 슈고 집안밖에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노리타다 사후에 잠시 종가의 지위를 다투는 입장이었던 오가 씨(小鹿氏)에는 그 뒤로도 만일의 경우 가독(家督) 계승 자격자로써 이마가와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는 경우도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4]
집안의 역사
편집가마쿠라 시대
편집아시카가 3대 당주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義氏)의 서장자(庶長子)로써 기라 집안을 일으킨 기라 나가우지(吉良長氏)의 차남 구니우지(国氏)가 기라 씨의 영지 가운데 미카와 국(三河国)의 幡豆郡에 있던 이마가와 장원(
기라 씨와 이마가와 씨의 조상인 나가우지는 훗날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우게 되는 아시카가 집안의 소료(惣領)를 이은 야스우지(泰氏)에게는 항렬상 형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에(비록 서자이기는 했지만), 기라 씨 다음으로 아시카가 일문에서 중하게 대우되었고, 시부카와 씨(渋川氏) ・ 이시바시 씨(石橋氏)와 함께 「고잇케」(御一家)라 불리며 아시카가 일문의 여느 분가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로 대우받았던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시카가가 단절되면 기라가 잇고, 기라가 단절되면 이마가와가 잇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시카가 쇼군케의 근친자였다 한들 현실에서는 아시카가 쇼군케(足利将軍家)의 다른 숱한 분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기라 씨가 버티고 있는 이상 이마가와가 아시카가 본가를 잇고 쇼군 자리에 다가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난보쿠초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로
편집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멸망과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을 거치면서, 구니우지의 손자(모토우지의 장남)인 이마가와 요리쿠니(今川頼国)가 네 명의 동생[d]나 그 자식들을 거느리고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의 북조(北朝)편에 속하여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요리쿠니는 호조 잔당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에서의 小夜中山合戦에서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측의 나고시 다카쿠니(名越高邦)를 잡는 공적을 세웠지만, 사가미 강 전투(相模川の合戦)에서 셋째 동생 요리치카(頼周)와 함께 전사했다. 둘째 동생인 노리미쓰(範満)도 고테사시가하라 전투(小手指原の戦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 공적으로 요리쿠니의 아들인 요리사다(頼貞)는 단고(丹後) ・ 다지마(但馬) ・ 이나바(因幡)의 슈고(守護)로 임명되었다. 또한 요리쿠니의 막내동생으로 쇼군 타카우지를 가까이서 섬겼던 노리쿠니(範国)도 스루가(駿河) ・ 도토미(遠江)의 슈고로 임명되었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에서는 노리쿠니의 적남인 노리우지(範氏)가 타카우지편에 속하여 공을 세웠고 스루가 슈고직을 이었다. 이 노리우지의 계통이 이마가와의 적류(嫡流)로써 스루가 슈고를 세습하게 된다. 스루가 슈고 이마가와 씨는 간토 구보(関東公方) 영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아시카가 쇼군케로부터 부여받았다고도 한다.
이마가와 씨 가운데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이 임명되기도 하는 등 시바 씨(斯波氏)・하타케야마 씨(畠山氏)・호소카와 씨(細川氏)・잇시키 씨(一色氏)・야마나 씨(山名氏)・아카마쓰 씨(赤松氏)・교고쿠 씨(京極氏)・도키 씨(土岐氏) 등과 함께 바쿠후의 숙로(宿老)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또한 노리우지의 동생으로 히젠 슈고(肥前守護)였던 사다요(貞世, 이마가와 료슌)는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로부터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어 남조(南朝) 세력이 강하던 규슈(九州)를 평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로부터는 료슌의 세력이나 명망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매우 견제당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가 쇼군 요시미쓰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오에이의 난(応永の乱)이 발발하자 일시 이에 가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아시카가 우지미쓰(足利氏満)를 뒤에서 부추긴 것이 이마가와 료슌이었다는 의심까지 사고 있었다. 료슌이 바쿠후의 토벌 대상에 오르게 되자 우에스기 노리사다(上杉憲定) 등이 나서서 료슌을 구명하였고, 료슌 자신이 상경하여 쇼군 요시미쓰를 뵙고 사죄의 뜻을 밝히면서 사면되었지만, 중앙정계로부터 내쳐지게 된 데다 도토미의 절반에 대한 슈고 권한을 잃었다(나머지 절반은 료슌의 동생 나카아키가 슈고를 맡았다). 그 자손은 슈고직을 시바 씨에게 넘긴 뒤 스루가에 토착했고, 스루가 이마가와 집안(駿河今川家)으로 출사하였다.
센고쿠 시대
편집센고쿠 시대(戦国時代) 15세기 말에 이르러 큰외삼촌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의 도움으로 가독 다툼에서 승리한 우지치카(氏親)는 아버지 요시타다(義忠)의 대에 좌절되었던 도토미로의 재침공을 시도했다. 그 결과 기존에 적대하고 있던 시바 씨를 배제하는데 성공하고 도토미 슈고직을 얻었다. 또한 미카와에서 도토미로 진출해 있던 기라 씨가 일련의 전투로 시바 씨에 가담하여 그 아군이 되자 도토미 영지를 빼앗아 차지하고 이를 굴복시켰다. 다만 아무리 하극상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던 센고쿠 시대라 한들 분가인 이마가와가 본가인 기라를 굴복시킨다는 것은 이마가와의 권위를 뒤에서 받치고 있는 아시카가 일문의 내부질서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최종적으로는 우지치카의 딸을 기라 요시타카(吉良義堯)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기라 씨의 체면을 어느 정도 보전해 주는 형태를 취했다.
그뒤 우지치카는 가이 국(甲斐国)의 난리 상태에 개입해 가이 서부의 고쿠슈(国衆) 오오이 씨(大井氏)를 종속시켰다. 령국 통치에 있어서는 분국법(分国法)인 「이마가와 가나 목록」(今川仮名目録)을 정하여 이마가와 씨를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발전시켰다. 슨푸(駿府)에서는 레이제이 다메카즈(冷泉為和) 등 전란을 피해 내려온 구게(公家)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문화적으로도 원숙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우지치카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정실(正室)인 주케이니(寿桂尼)가 적남(嫡男) ・ 우지테루(氏輝)를 후견하였다. 덴분(天文) 5년(1536년) 3월 17일에 우지테루 ・ 히코고로(彦五郎)가 죽자 우지테루의 동생으로 승려로 출가해 있던 겐코 에탄(玄広恵探)과 바이카쿠 쇼호(栴岳承芳), 두 형제 사이에 가독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고 한다. 하나구라의 난을 제압한 것은 바이카쿠 쇼호였고, 그는 환속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라 개명하고 이마가와 집안의 당주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이마가와 역대 당주들의 돌림자인 우지(氏)를 쓰지 않은 대신 쇼군케로부터 받은 요시(義)를 사용하였다.
요시모토가 당주로 있던 시기에는 그때까지 적대하고 있던 가이의 다케다 씨(武田氏)와의 화목으로 고슨 동맹(甲駿同盟)이 맺어졌고, 이로 해서 이마가와 씨와 사가미의 고호조 씨(後北条氏)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토의 난」(河東の乱)을 야기하게 되었다. 가토의 난은 다케다 집안의 당주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의 중개로 이마가와 ・ 고호조 사이에 동맹이 맺어졌으며, 나아가 다케다 씨와 고호조 씨 사이에도 고소 동맹(甲相同盟)이 맺어지면서 삼자관계는 고소슨 삼국동맹(甲相駿三国同盟)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요시모토는 이 삼국동맹을 배경으로 미카와로의 진출에 힘썼고, 약체화된 마쓰다이라 씨(松平氏)를 종속시켰으며, 오와리(尾張)의 오다 씨(織田氏)와는 「안죠 합전」(安城合戦), 「아즈키자카 전투」(小豆坂の戦い) 등의 전투를 벌이며 미카와에서 오다 씨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인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존 바쿠후의 호코슈(奉公衆)로 스루가 이마가와 씨의 중신이기도 했던 이마가와 세키구치 가(今川関口家)에서 정실을 맞이했다. 이렇게 스루가 ・ 도토미 ・ 미카와 3개 구니에 더해 오와리 일부까지 영유하게 되었으나, 에이로쿠(永禄) 3년(1560년) 5월 19일에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본진을 기습당해 당주 요시모토가 전사해 버렸다.
요시모토의 뒤를 이은 것은 우지자네(氏真)로, 그의 대에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에서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자립하는 등 지배 령국의 동요를 초래했고, 이마가와에 신하로 따르던 고쿠진(国人)들의 이반을 유발하였다. 우지자네는 몸소 이들에 대한 정벌전에 나섰지만 미카와 호이군(宝飯郡)에서 마쓰다이라군에 대패했다. 나아가 깃타 성(吉田城)을 잃고 미카와의 지배권을 잃었다.
가이 다케다 씨는 삼국동맹을 배경으로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와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라 불리는 전투를 벌였지만, 이 전투는 에이로쿠 4년(1561년)을 계기로 피차간에 어떤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종식되었다. 우지자네의 여동생인 레이쇼인(嶺松院)은 신겐의 적남(嫡男) ・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에게 시집가서 그 혼맥으로 고슨 동맹이 성립되어 있었는데, 다케다 집안에서 에이로쿠 8년(1565년) 요시노부의 모반이 발각되어 유폐당하고, 2년 뒤에는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다케다 영내로의 소금 판매를 금지해 버렸다. 그 해 10월 19일 요시노부가 병사했다.[5][6][7][8] 오빠인 우지자네가 호조 씨를 통해 레이쇼인의 귀국을 요청하자[9] 신겐은 이에 난색을 표하였다고 한다.[10] 훗날 레이쇼인은 스루가로 귀국했고[9] 이마가와로 돌아간 레이쇼인은 출가하여 데이슌니(貞春尼)라 칭하였다.[11] 그뒤 데이슌니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御介錯上臈(무가의 적남에 대한 교육을 맡은 여성 가로)로 도쿠가와에 출사하였다.[12][13][14]
에이로쿠 10년 12월, 우지자네와 겐신은 비밀리에 동맹 교섭을 시작했다고 한다.[10] 에이로쿠 11년(1568년) 겐신에 대해 몇 번이나 교섭 과정에서 우지자네가 호조나 다케다와의 협의 사항이나 기밀사항을 우에스기측에 누설시켰고, 이는 중대한 동맹 위반이었다.[10] 그 해에 신겐은 이마가와와 우에스기의 교섭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10] 고슨 관계는 긴장 관계가 되어갔고, 다케다 집안에서는 넷째 아들 스와 가쓰요리(諏訪勝頼)가 세자가 되고, 가쓰요리의 부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양녀를 맞이하여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등 서서히 이마가와와의 적대적 자세를 보이게 된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말에 신겐은 도쿠가와 씨(徳川氏, 마쓰다이라 씨에서 고침)와 동맹을 맺고 이마가와 령국으로의 침공을 개시했다(스루가 침공). 다케다 씨의 스루가 침공에 대해 고호조 씨는 이마가와에 가세했고, 이로 해서 고소 동맹도 파열되었다. 이마가와는 몇 년간에 령국 스루가와 미카와를 다케다와 도쿠가와에 의해 동서로 순식간에 빼앗겼다.[e] 에이로쿠 11년(1568년) 도토미로 쫓겨난 우지자네는 마지막 거점 가케가와 성(掛川城)을 도쿠가와군의 이시카와 이에나리(石川家成)에게 넘기고 가케가와 성주 아사히나 야스토모(朝比奈泰朝) 등과 함께 고호조 씨를 의지해 오다와라(小田原)로 물러났다. 센고쿠 다이묘로써의 이마가와 씨는 오케하자마 전투 8년만에 멸망했고, 스루가는 다케다의 령국이 되었다. 이때 다케다 씨와 교전중이던 고호조 씨와 도쿠가와 씨는 우지자네가 스루가 국주로 복귀하게 할 것을 보증했지만, 훗날 고호조 씨가 다케다 씨와 화목하고 우지자네는 다케다 씨를 의지해 그 객장(客将) 같은 입장이 되었다. 도쿠가와 씨도 다케다 집안 멸망 후에 스루가를 자신의 영지로 삼으면서, 우지자네를 스루가 국주로 복귀시킨다는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에도 시대
편집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우여곡절 끝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오미 국(近江国)의 노슈 군(野洲郡, 사가 현 노슈 시)에 500석의 지행지(知行地)를 안도받았다.
우지자네의 적손인 나오카타(直房)는 바쿠후에 출사하여 고게(高家)직(오쿠고게)로 취임했고, 히데타다(秀忠) ・ 이에미쓰(家光) ・ 이에쓰나(家綱) 3대 쇼군에 걸쳐 교토 조정과의 교섭 등에 힘썼다. 쇼호(正保) 2년(1645년) 교토에 파견되는 사자를 맡아서 조정으로부터 쇼군 이에야스에 대한 「도쇼구」(東照宮) 궁호 선하를 받아 낸 공으로 이에미쓰로부터 무사시 국(武蔵国) 다마 군(多摩郡) 이쿠사 촌(井草村, 도쿄 도 스기나미 구) 등 5백 석의 지행이 가증되어, 가록(家禄)은 도합 1천 석이 되었다. 나오카타 자신의 관위는 이마가와 역대 당주 가운데 가장 높은 사콘노에노쇼조(左近衛少将)까지 올랐고, 이마가와의 자손들은 그를 집안의 중흥조(中興祖)로 받들었다.
에도 시대 이마가와 집안의 보다이지였던 호슈 산(宝珠山) 간센지(観泉寺)에는 이마가와 역대 당주들의 묘가 모셔져 있고, 일본 도쿄 도의 지정사적지(指定旧跡)로 지정되어 있다. 간센지의 주소인 '이마가와'는 이 땅이 옛날 이마가와 집안의 지행지였던 데에서 유래한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바쿠후의 고게 하타모토(旗本)로써 존속했던 이마가와 집안에서는 에도 시대 한 시대 동안 11명의 당주가 거쳐갔으며, 우지미치(氏睦)・요시야스(義泰) ・ 요시아키(義彰) ・ 요시모치(義用) ・ 노리노부(範叙) 여섯 명이 고게직에 취임하였다. 당주 노리노부의 대에 일본은 바쿠마쓰라 불리는 에도 바쿠후 말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고게 출신으로써 유일하게 와카도시요리(若年寄)에 취임했던 노리노부는 관군(官軍)과의 강화나 에도 성(江戸城)의 무혈개성에 즈음하여 힘을 보탰다. 그 뒤에는 조정에 귀순하여 영지를 안도받았고, 바쿠후의 신하에서 조정의 신하로 전환하여 중대부(中大夫)의 자리를 받았다.[2]
한편 우지자네의 차남인 다카히사(高久)도 쇼군 히데타다에게 출사하여 시나가와 집안(品川家)을 칭하고 [f] 이마가와 본가와 함께 고게의 반열에 들었다.
메이지 이후
편집에도 바쿠후가 사라지고, 1869년(메이지 2년) 12월에 이마가와 집안은 사족(士族)으로 편입되었다.[2]
1884년(메이지 17년) 시행된 화족령(華族令)으로 화족(華族)이 오등작(五爵制)이 되었을 때에 정해진 『서작내규』(叙爵内規)의 전 단계안이었던 『화족령』안이나 『서작규칙叙爵規則』(叙爵規則)안에서는 옛 바쿠후의 고게들을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와 함께 남작(男爵) 작위를 주는 것으로 포함시켰고, 이마가와 집안도 남작가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정해진 『서작내규』에서는 고게도 고타이요리아이도 모두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이마가와 집안은 사족으로 머무르게 되었다.[15]
1887년(메이지 20년) 당주 이마가와 노리노부(今川範叙)의 사망으로 이마가와 집안의 적류는 단절되었다. 옛 가메야마 번(亀山藩) 번사로 교토 부(京都府)의 사족이던 세키구치 나오타로(関口直太郎)가 스스로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먼 후손이라 자처하며 서작 운동을 벌였는데, 세키구치는 1908년(메이지 41년) 궁내대신(宮内大臣)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顕), 1913년(다이쇼 2년)에는 궁내대신 와타나베 치아키(渡辺千秋)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을 화족으로써 대우하여 작위를 수여해 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했지만 그 어느 것도 허가되지 못한 채 끝났다.[16]
에도 시대에 고게 이마가와 집안의 보다이지로 간센지 외에도 와다(和田) 반쇼 산(萬昌山)의 초엔지(長延寺)도 있는데, 와다도 간센지가 소재한 이마가와와 마찬가지로 스기나미 구에 속해 있다. 초엔지는 간분(寛文) 원년(1661년) 당주 나오카타의 묘를 쓴 것을 계기로 이마가와 집안의 보다이지가 되었고, 역대 당주들의 묘가 모셔졌으나, 1909년(메이지 42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고[17] 그 과정에서 절에 모셔져 있던 이마가와 집안 역대 당주들의 묘석도 행방불명되어 현재는 2기만이 확인되고 있다.
계보
편집- 범례
- 실선은 친아들, 점선은 양아들 또는 혼인이다. 혼인관계의 경우 정실만 기재하였다.
- 1 = 종가 역대(동그라미 안의 숫자는 스루가 슈고를 역임한 대수이고, 13부터 23은 에도 막부의 고게이다).
- ⅰ= 도토미 이마가와 집안 역대
요시이에 이전은 가와치 겐지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源義家) | |||||||||||||||||||||||||||||||||||||||||||||||||||||||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源義国) | |||||||||||||||||||||||||||||||||||||||||||||||||||||||
아시카가 요시야스 (足利義康) | |||||||||||||||||||||||||||||||||||||||||||||||||||||||
요시카네(義兼) | |||||||||||||||||||||||||||||||||||||||||||||||||||||||
요시우지 (義氏) |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의 딸 | ||||||||||||||||||||||||||||||||||||||||||||||||||||||
기라 나가우지 (吉良長氏) | 아시카가 야스우지 (足利泰氏) | 기라 요시쓰구 (吉良義継) | |||||||||||||||||||||||||||||||||||||||||||||||||||||
기라 미쓰우지 (吉良満氏) | 이마가와 구니우지 (今川国氏)1 | ||||||||||||||||||||||||||||||||||||||||||||||||||||||
모토우지 (基氏)2 | 쓰네쿠니 (経国) (이마가와 세키구치 집안의 시조) | ||||||||||||||||||||||||||||||||||||||||||||||||||||||
요리쿠니 (頼国) | 노리쿠니 (範国)③ | ||||||||||||||||||||||||||||||||||||||||||||||||||||||
요리사다 (頼貞) | 노리우지(範氏)④ (스루가 집안) | 사다요(貞世)ⅰ (도토우미 집안) | 우지카네 (氏兼) (간바라 집안의 시조) | 나카아키 (仲秋)ⅱ | |||||||||||||||||||||||||||||||||||||||||||||||||||
우지이에 (氏家)[g] | 야스노리(泰範)⑤ | 사다오미 (貞臣)ⅲ | (간바라?)요리하루 (頼春) | ||||||||||||||||||||||||||||||||||||||||||||||||||||
우에스기 도모아키 (上杉朝顕)의 딸 | 노리마사 (範政)⑥ | 사다스케 (貞相)ⅳ | 간바라 우지요리 (蒲原氏頼) | ||||||||||||||||||||||||||||||||||||||||||||||||||||
우에스기 우지사다 (上杉氏定)의 딸 | 노리타다 (範忠)⑦[h] | 오가 노리요리 (小鹿範瀬) | 노리마사(範将)ⅴ | ||||||||||||||||||||||||||||||||||||||||||||||||||||
이세 모리사다의 딸 | 요시타다 (義忠)⑧ | 오가 노리미쓰 (小鹿範満) | 사다노부 (貞延)ⅵ[i] | ||||||||||||||||||||||||||||||||||||||||||||||||||||
나카미카도 노부카네의 딸 | 우지치카 (氏親)⑨ | 세나 가즈히데 (瀬名一秀) | 호리코시 사다모토 (堀越貞基) | ||||||||||||||||||||||||||||||||||||||||||||||||||||
우지테루 (氏輝)⑩ | 히코고로 (彦五郎) | 겐코 에탄 (玄広恵探) | 조케이인 (定恵院) (다케다 노부토라의 딸) | 요시모토 (義元)⑪ | 우지토요(氏豊)[j] | 즈이케이인 (瑞渓院) (호조 우지야스의 아내) | |||||||||||||||||||||||||||||||||||||||||||||||||
호조 우지야스의 딸 | 우지자네 (氏真)⑫[k] | 레이쇼인 (嶺松院) (다케다 요시노부의 딸) | |||||||||||||||||||||||||||||||||||||||||||||||||||||
구니오마루 (国王丸)[k] | 기라 요시야스 (吉良義安)의 딸 | 우지모치 (範以) | 시나가와 다카히사 (品川高久) (시나가와 집안의 시조) | 기라 요시사다 (吉良義定)의 아내 | |||||||||||||||||||||||||||||||||||||||||||||||||||
나오후사 (直房)13 | 기라 요시미쓰 (吉良義弥)의 아내 | ||||||||||||||||||||||||||||||||||||||||||||||||||||||
우지나리 (氏堯)14[l] | |||||||||||||||||||||||||||||||||||||||||||||||||||||||
호조 우지히라 (北条氏平)의 딸 | 우지미치 (氏睦)15[m] | ||||||||||||||||||||||||||||||||||||||||||||||||||||||
노리타카(範高)16[n] | |||||||||||||||||||||||||||||||||||||||||||||||||||||||
노리누시 (範主)17[o] | |||||||||||||||||||||||||||||||||||||||||||||||||||||||
노리히코 (範彦)18 | 마쓰다이라 가쓰부미 (松平勝文) | 요시야스 (義泰)19 | |||||||||||||||||||||||||||||||||||||||||||||||||||||
우지아키 (義彰)20 | |||||||||||||||||||||||||||||||||||||||||||||||||||||||
요시모치 (義用)21 | |||||||||||||||||||||||||||||||||||||||||||||||||||||||
요시요리 (義順)22 | |||||||||||||||||||||||||||||||||||||||||||||||||||||||
요시노부(範叙)23 | |||||||||||||||||||||||||||||||||||||||||||||||||||||||
요시토(淑人) | |||||||||||||||||||||||||||||||||||||||||||||||||||||||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기라 집안에서 슈고(守護)나 간레이(管領), 사무라이도코로쇼시(侍所所司) 같은 바쿠후 요직에 임명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들 관직은 「가신의 일」이었고, 아시카가 종가의 계승권을 지닌 사람은 가신들이나 맡아 볼 간레이 '따위'에 임명될 신분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 ↑ 2021년 시점에서 일본 아이치 현(愛知県) 니시오 시(西尾市) 이마가와 정(今川町) 주변 지역이다.
- ↑ 또는 구니우지는 나가우지의 조카인데 그의 양자가 되었다고도 한다
- ↑ 원래는 5형제였는데 넷째 동생은 승려로 출가했다.
- ↑ 다케다 씨의 이마가와 령국으로의 침공에 대해서 고호조 씨는 우에스기와의 엣소 동맹(越相同盟)을 맺어 대항하였고, 사태는 우에스기 씨나 오다 씨 등의 동향과도 관계되어 복잡하게 흘러갔다.
- ↑ 에도 바쿠후가 적가(嫡家) 이외에는 이마가와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류(庶流)는 시나가와 성을 칭하게 된 것이다.
- ↑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로부터 정식으로 스루가 슈고로 임명되고 난 뒤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루가 이마가와 씨 역대 당주로 세기는 어렵다는 오이시 야스시(大石泰史)의 설도 있다.[18]
- ↑ 노리마사의 조카라는 설도 있다.
- ↑ 사다스케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 ↑ 우지치카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 ↑ 가 나 고호조 씨의 비호 아래에 들어간 우지자네는 정실의 조카로 이마가와 집안의 피를 이은 종조카(큰어머니 즈이케이인의 손자)이기도 한 호조 구니오마루(北条国王丸, 훗날의 호조 우지나오)를 유자(猶子)로 스루가 이마가와 씨의 당주를 양도하였으나, 훗날 연조를 해소하고 우지자네가 당주로 복귀하였다.
- ↑ 시나가와 다카히사(品川高久)의 외손자이다.
- ↑ 우지나리의 종형제로 시나가와 다카히사의 손자이다.
- ↑ 시나가와 고레우지(品川伊氏)의 장남으로 다카히사의 직계 현손(玄孫)이다.
- ↑ 노리타다의 친동생이다.
출처주
편집- ↑ 가 나 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일본어) 『今川氏』 - 고트뱅크
- ↑ 가 나 다 松田敬之 2015, 127쪽.
- ↑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일본어) 『今川氏』 - 고트뱅크
- ↑ “今川氏親家督相続前後の小鹿氏”. 《戦国遺文今川氏編 月報》 (東京堂出版) (5号). 2015. 다음 글자 무시됨: ‘遠藤英弥’ (도움말)/所収:黒田基樹, 편집. (2019년 4월), 《今川氏親》, 中世関東武士の研究 第二六巻, 戎光祥出版, 338–341쪽, ISBN 978-4-86403-318-3
- ↑ 黒田基樹『武田信玄の妻、三条殿』東京堂出版、2022年 ISBN 978-4-490-21069-9 P50-51.
- ↑ 다만 平山優의 「大河ドラマ『真田丸』에서도 시대고증을 담당했던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씨에 의해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어 병사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NHK대하드라마 「어떡할래 이에야스」(どうする家康) コラム 大河と歴史の裏話『文化人としての 武田信玄・今川義元を描く』2023年6月25日『「時代を駆け抜けた戦国武将たち~武田信玄の新研究・義信事件を考える」강사는、2016년 NHK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의 시대고증을 담당했던 스루가다이 대학(駿河台大学) 교수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이다. 중요 사료에 따르면 요시노부는 병사한 것이다. 이로 해서 사건의 배경이나 사건에의 신겐의 처치에 대한 이해는 크게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진실을 추구하였다.』武田信玄の新研究【NHKカルチャーオンデマンド講座】2022年4月22日
- ↑ 「永禄10年というと、甲斐国の武田信玄の嫡男・義信が病死した年でもありました。」【豊臣秀頼が出馬していれば家康を打ち取れたかもしれない家康に切腹を覚悟させた真田信繁のツワモノぶり…大坂夏の陣で家康本陣を切り崩したラストサムライの最期】2023.12.04 濱田浩一郎
- ↑ 「永禄10年(1567年)に病死。」【徳川家康が「武田信玄」に心開かなかった複雑事情】2023/02/26 濱田浩一郎
- ↑ 가 나 大石泰史『今川氏滅亡』KADOKAWA〈角川選書604〉、2018年5月18日、271–272頁。ISBN 978-4-04-703633-8。
- ↑ 가 나 다 라 平山優 (2024), 〈武田信玄・勝頼の対北条氏外交と戦略〉, 小田原市観光協会, 《戦国北条フェスオフィシャルブック vol.1》, 戎光祥出版, 27쪽
- ↑ 『甲斐国志』
- ↑ “かつての抗争相手の妹を徳川秀忠の「育ての親」に 家康は今川家を頼りにしていたのか”. 《AERA dot.》. 2023년 8월 27일. 2023년 9월 5일에 확인함.
- ↑ “信長でも秀吉でも信玄でもない…「徳川家康にもっとも影響を与えた戦国大名」の数奇な生涯”. 《PRESIDENT Online》. 2023년 5월 4일. 2023년 12월 14일에 확인함.
- ↑ 『今川家瀬名家記』
- ↑ 松田敬之 2015, 128쪽.
- ↑ 松田敬之 2015, 128/392쪽.
- ↑ 大谷光男、嗣永芳照 著『杉並区史跡散歩 (東京史跡ガイド15)』学生社、1992年、131-133p
- ↑ 大石泰史『城の政治戦略』角川選書、2020年、34-35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