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李鎰, 1538년 ~ 1601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용인(龍仁)이며, 자는 중경(重卿),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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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
李鎰
생애 1538년 ~ 1601년 (64세)
출생지 조선 경기도 용인
사망지 조선 함경도 정평
본관 용인(龍仁)
별명 자(字)는 중경(重卿)
시호(諡號)는 장양(壯襄)
종교 유교(성리학)
복무 조선 군사
복무 기간 1558년 ~ 1601년
최종 계급 함경도 병마절도사
지휘 순변사
주요 참전 이탕개의 난
녹둔도 전투
임진왜란
충주 탄금대 전투
임진년 임진강 전투
계사년 평양성 조일 전투
송유진의 난
정유재란

생애편집

1558년 무과 급제 후 경성판관,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하여 1583년 함경도 경원 부사로 이탕개의 난을 진압하였다. 1586년 이탕개가 다시 회령을 재침입하자 이를 다시 물리쳐 1587년 함경북병사가 되었으나, 1588년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 맞서지 않고 부하들과 도망쳤다가 도망치길 거부하고 남은 이순신(李舜臣)과 이경록(李慶祿)이 토벌했다. 그러나 이일은 자신이 도망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했다.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이일을 처벌하지 않고 그 대신 이순신을 처벌했다. 1588년 1월, 북병사 이일은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의 본거지인 추도를 기습 공격하여,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 명을 죽였으며, 말 30필, 소 20두를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순변사 이일은 왜군을 막기 위해 상주로 내려가려 했으나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한 사실 때문에 이일은 군관들로부터 평가가 좋지 못했고 그래서 모두들 이일의 부장이 되려고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이일은 장기군관 50명을 이끌고 병력은 현지에서 징집하기로 해서 상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징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도 이일을 따라 온 장기군관 50명 중 20명 이상이 도주하여 크게 패했다. 원래 5000명 이상 징집해야 왜구를 막을 수 있었으나 이일이 징집한 병력은 고작 800명 수준이였으며 그나마 그 병력도 전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도망쳐 실제로는 훨씬 적은 병력이였다. 이후 이일은 충주에 주둔한 신립(申砬)의 군대로 도망쳤다. 그러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자 황해도평안도로 도망쳤다. 이일은 도망치면서 조선 양민을 죽이고 그 시체를 왜병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시체의 상투를 일본식으로 다시 틀고 목을 베어 소중히 간직했다. 1592년 5월 17일~5월 18일에 일어난 임진강 전투에 참여했으나 또 다시 패배했다. 1593년 1월 6일 평양 전투에 참여해 평양성을 탈환했고 이 과정에서 김응서와 둘이 왜군의 수급을 열심히 주워 모았다. 1594년 송유진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서 이를 진압했다.

이일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함경도에서 벼슬을 받고 활동하다가 1601년 부하를 죽인 혐의를 받고 한성부로 호송되다가 죽었다.

평가편집

잦은 무고와 군무이탈로 평가는 최악 수준이다. 원균이 비교대상일 정도로 이일은 후대의 평가가 매우 나쁘며 그 일은 녹둔도에서 재직중이던 시절 이순신을 모함한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순신은 분명 적과 맞서 싸워서 승리를 달성하고 추가로 납치된 조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한 공로가 있음에도 이일은 이런 이순신에게 죄를 씌웠기 때문에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적어도 신립탄금대 전투에서만큼은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 장렬히 전사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싸우던 이일은 여기서마저 또다시 군무이탈을 했기 때문에 신립보다 평가가 더욱 나쁘다.

적은 신병(神兵)입니다. 무조건 강합니다.
 
— 이일, 신립의 상주에서 만난 왜군의 군세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1]

게다가 신립의 적 상황에 대한 질문에 이런 말을 보고라면서 할 정도로 이일의 자질은 지극히 떨어진다. 구체적인 규모나 전투방식이 아니라 무조건 강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는 보고를 함으로서 아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드려 놓았다.

같이 보기편집

관련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