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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李在明, 1887년 ~ 1910년 9월 30일)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불과 약관의 나이로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 후 형장에서 순국했다. 아명이수길(李秀吉)이며, 개신교인이다.[1] 본관진안(鎭安)이다.[2][3]

이재명
李在明
1909년 12월 24일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이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피습, 칼로 흉부를 자격하여 이완용이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보도
국적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출생1887년 10월 13일
조선 평안도 선천군
사망1910년 9월 30일(1910-09-30) (22세)
일제 강점기 경성부 경성감옥에서 사형 집행됨.
거주지평안남도 평양
하와이주 호놀룰루
한성부
본관진안
학력평안남도 평양 일신보통학교 졸업
직업항일 독립운동가
종교개신교
정당무소속
상훈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목차

생애편집

1887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아직 어릴때인 1888년 직계 일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대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1890년 직계 일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평양에 본격 이주 후, 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4]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지만 을사늑약한일신협약 체결 뉴스를 듣고 1907년 귀국, 마침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조직되고 있던 암살 조직 중 하나에 가입해,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주요 인사들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매국노들의 처단을 결의했다.[4]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이 있었다. 이완용 참석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는 인력거를 타고오는 이완용을 칼로 수차례 찔렀으나, 인력거꾼에게 가로막혀 미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급하게 인력거 인부를 칼로 찔러 자신에게서 떼어낸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4] 그를 가로막은 인력거 인부의 이름은 박원문으로 곧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대한의원(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5]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으며, 공판에서 일본의 악행을 꾸짖고 이완용을 찌른 것이 의거였다며 스스로 변호했다. 다음은 일본을 꾸짖은 내용이다.[6]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다. 향년 24세

그처럼 송병준, 이용구 등 다른 매국 인사들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이재명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대섭 (2000년 3월 9일). “[진안] 항일구국에 몸바친 이재명의사 추모사업회 결성”. 《전북일보》. 2017년 1월 26일에 확인함. 
  3. (전주)우리 지역 현충 인물 소개- 진안 이재명 동상 -2007년 9월 30일 등록, 2017년 1월 26일 확인
  4.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5. "서울대병원, 매국노 이완용 수술기록 발견" --2008년 12월 18일 조선일보 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6.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 공훈록 이재명 의사 편에서 발췌. 외부 링크 참조
  7. 박상우 (2005년 9월 24일). 《칼》. 서울: 창해. ISBN 978-89-7919-6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