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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李漢應, 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은 본관은 전의예안 이씨(全義)후손 이며 대한제국관료, 외교관이며 순국 열사(殉國 烈士)로 자는 경천(敬天)이며 호는 국은(菊隱)이고 李漢膺(이한응)이라는 일명으로도 불리었다.

비한 군수였던 이경호의 아들로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아버지 이경호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던 도중 황토현 전투에서 전사한 뒤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駐箚)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공사 민영돈과 함께 부임하였고[1] 1903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었다. 이한응은 1904년 1월 13일 영국 대외사무소(Foreign Office)를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쪽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극동정세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영국 정부가 극동,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망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예상대로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2]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5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음독 자살로 순국하였다. 사후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고 장충단 배향 및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목차

유서편집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 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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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한응
  2. 김정형, 《역사속의 오늘 1》, 생각의 나무(2005) 140쪽
  3. 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 309쪽에서 전문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