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면 (정읍시)
입암면(笠岩面)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면이다. 면적은 35.80km2이고, 인구는 2009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3,743명이다.
입암면 笠岩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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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Ibam-myeon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행정 구역 | 38개 리, 78개 반 |
법정리 | 11개 리 |
관청 소재지 | 입암면 정읍남로 489 |
지리 | |
면적 | 35.80km2 |
인문 | |
인구 | 2,773명(2022년 3월) |
세대 | 1,684세대 |
인구 밀도 | 77.46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정읍시 입암면사무소 |
연혁 편집
행정 구역(법정리) 편집
법정리명 | 마을 유래 | 자연마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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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곡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일면(西一面) 단곡리(丹谷里), 내기리(內基里), 단촌리(丹村里), 성신리(誠信信)[2], 양지촌(良之忖), 엄동(俺洞)과 안양동(安良洞), 천원리(川原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으뜸 마을 이름을 따 단곡리라 하여 입암면에 편입하였다. '붉은 고개'란 지명은 황토가 풍부한 언덕이 많아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왕심(旺尋)마을, 월천(月川)마을, 양지(良芝)마을 엄동(俺洞)마을, 차단(次丹)마을 |
애국열사 남사(南史) 유병우(柳秉禹)는 차단(次湍)마을 출신이다. 왕심마을은 순흥안씨 도정공파 현록손이 인천에서 이주해와 200년 이상 세거하는 집성촌으로도 유명하다. 공군참모총장과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두선과 그의 형 한국전쟁당시 빨치산 왜가리부대장 박춘성이 양지마을 출신이다. |
등천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이면(南二面) 등천리(登川里), 장재동(長在洞), 신령리(新令里), 군령리(軍令里), 백연리(白蓮里)와 서일면(西一面), 수얼리(水越里), 연동리(蓮洞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으뜸 마을 이름을 따 등천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되었다. 등천리는「갈재」에서 시작되는「등내」(登內)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입암산(笠巖山) 서쪽에 있다. 과거 장성으로 통하는 이곳 갈재 아래에 소규모 병영이 있어 검문검색과 요소 방어를 담당하던 '군령'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
신등(新登)마을, 원등(元登)마을, 군령(軍令)마을 | |
마석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일면(西一面) 마석리(摩石里), 신기리(新基里), 양동리(良洞里),비용촌(飛龍忖)과 서일면(西一面) 서암리(西巖里)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 으뜸 마을 이름을 따 마석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하였다. 구마석은 의령남씨 집성촌이다. |
신마석(新磨石)마을, 구마석(舊磨石)마을, 노송(老松)마을 | |
봉양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고부군(古阜郡) 성포면(聲浦面) 봉양리(鳳陽里), 필동(筆洞), 정동(鼎洞), 율치리(栗峙里), 문동(文洞), 안양리(安陽里)와 정읍군 서일면(西一面) 안양리(安陽里), 엄동리(淹洞里) 및 흥덕군(興德郡) 이동면(二東面) 용전리(龍田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양리라 하고 소성면(所聲面)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입암면으로 편입되었다. | 봉양(鳳陽)마을, 안당(安堂)마을 | |
신면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南二面) 구면리(舊綿里), 신면리(新綿里), 봉암리(鳳岩里), 신기촌(新基村), 선암리(仙岩里)와 송정리(松亭里) 및 만화리(萬花里), 성신리(誠信)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이름을 따 신면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하였다. | 신면(新綿)마을, 구면(舊綿)마을, 진등(辰登)마을 신기(新基)마을, 선암(仙岩)마을 |
고조선대 역사소설 '대동이'를 쓴 작가 박문기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손화중의 활동영역이기도 했다. |
연월리 | 본래 고부 두승산과 부안 변산과 함께 호남의 3신산이라 불리는 방장산(方丈山) 소갈재 밑에 위치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일면(西一面) 월산리(月山里), 월곡리(月谷里), 운월리(雲月里), 수월리(水越里), 연동리(蓮洞里)를 병합하여, 연동 운월에서 다서 연월리(蓮月里)라 이름하고 입암면에 편입시켰다. |
신월(新月)마을, 반월(半月)마을 | |
접지리 | 1914년 개편 때 남이면(南二面) 접지리(接芝里), 석계리(石溪里), 제내리(堤內里), 송정리(松亭里), 구면리(舊綿里) 및 서일면(西一面) 신평리(新坪里), 진목리(眞木里), 중흥리(中興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그 때 중심 마을의 이름을 따서 접지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하였다. | 원접지(元接芝)마을, 제내(堤內)마을 송정(松亭)마을 |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직조공장이 50여개나 될 정도로 직물직조산업이 크게 번성하기도 했다. 제내마을은 탐진안씨 집성촌이다 |
대흥리 | 접지동부(接芝東部)마을, 접지서부(接芝西部)마을, 접지남부(接芝南部)마을, 접지중부(接芝中部)마을, 문화(文化)마을(최근에 조성) |
동학 접주였던 차경석이 일으킨 민족종교인 보천교가 일제시대 크게 번성하여 '대흥리'라고도 불리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 |
지선리 | 1914년 흥덕군(興德郡) 이동면(二東面) 장산리(長山里). 태동(台洞), 태산리(台山里), 어룡포(漁龍浦)[3], 은행리(銀杏里), 지선리(芝仙里)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이름을 따 지선리라 하고, 정읍군 입암면에 편입시켰다. | 지선(芝仙)마을, 원천(源泉)마을 | |
천원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일면(西一面) 천원리(川原里), 영안리(永安里), 사점리(沙店里), 옹암리(甕岩里)와 양지촌(良之村) 일부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이름을 딴 천원리(川元里)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되었다. 천원은 과거 말을 갈아타는 역과 숙소가 있던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
천원동부(川元東部)마을, 천원서부(川原西部)마을, 영안(永安)마을 옹암(甕岩)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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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리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南二面) 상부리(上富里), 하부리(下富里), 만화리(萬化里), 평암리(平岩里)와 신면리(新綿里), 신등리(新登里) 및 서일면(西一面) 천원리(川原里) 일부를 병합하여 중심마을의 이름을 따 하부리라 하고 입암면에 편입하였다. | 원하부(元下富)마을, 상부(上富)마을, 만화(萬化)마을 평암(平岩)마을, 가리대(자라등)마을 |
복조리마을로도 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