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2세 (잉글랜드)
제임스 2세(James Ⅱ, 1633년 10월 14일 ~ 1701년 9월 16일)는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1685년 2월 6일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 스코트인의 왕 및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하였고 1660년 12월 31일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와 아일랜드 왕국을 군림하는 데 마지막 로마 가톨릭 군주였다. 그의 많은 주제들은 그의 종교 정책들과 소문이 난 전제를 분배하여 명예혁명에서 그들의 단체가 자신을 폐하는 데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가톨릭 교도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아닌 1689년 공동 통치자가 된 자신의 개신교 딸과 처자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제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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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 |
재위 | 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
전임 | 찰스 2세 |
후임 | 윌리엄 3세 메리 2세 |
신상정보 | |
가문 | 스튜어트 |
부친 | 찰스 1세 |
모친 |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 |
배우자 | 클래런던 백작 영애 앤 하이드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디 모데나 공녀 |
자녀 | 메리 2세 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제임스 피츠제임스 |
종교 | 잉글랜드 성공회 → 로마 가톨릭 |
윌리엄 3세 혹은 메리 2세가 아닌 제임스가 합법적인 통치자였다는 믿음은 "자코바이트" (제임스의 라틴어 이름 야코부스를 땄음)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임스는 1689년 아일랜드에 상륙했을 때 자신의 왕좌를 되찾는 하나의 심각한 시도를 만들었다. 1690년의 여름 보인 전투에서 자신의 패배 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보호 아래 자신의 일생의 나머지를 살았다. 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늙은 척 한 사람)과 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젊은 척 한 사람과 사랑스러운 찰리 왕자)는 제임스의 사후 자코바이트의 가계도를 복원하는 데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임스의 개인적 표어는 "A deo rex, a rege lex" (라틴어로 하느님으로부터 왕이 오고, 왕으로부터 법이 온다)였다. 제임스의 퇴위법은 공식 국교로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의 종말과 "개신교 헌법"으로 불린 것의 설립을 보았다. 1684년 제임스 2세의 신교 자유령은 윌리엄과 메리의 이후의 관용령 (1689년)보다 더욱 거대한 종교적 자유를 부여했다. 정치적 신중함이 제임스를 동기 부여했을 것이었어도 그의 선언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서 종교적 자유의 현대적 이해의 개발에 중요한 개발을 나타낸다.
초기 생애편집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의 생존한 둘째 아들인 제임스는 런던의 세인트제임스궁에서 태어나 1644년 요크 공작으로 창조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난 동안 그는 왕당파의 근거지 옥스퍼드에서 머물렀다. 도시가 1646년 포위되었던 동안 항복했을 때 요크 공작은 의회 명령에 의하여 세인트제임스궁에서 갇혀있었다. 1648년 그는 궁전을 탈출하여 거기에서 변장하여 헤이그로 갔다. 1649년 찰스 1세가 반란자들에 의항 처형되었을 때 군주주의자들은 요크 공작의 형 찰스를 국왕 찰스 2세로서 선포하였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의회에 의하여 인정을 받고 1651년 스코틀랜드 스쿤에서 스코트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는 잉글랜드 국왕 자리를 확보할 수 없어 따라서 프랑스로 달아났다.
자신의 형 같이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피난처를 찾아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아래 프랑스 군대에 복무하였다. 1656년 그의 형 찰스가 프랑스의 적국 스페인과 동맹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아래 스페인 군대에 입대하였다.
1660년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찰스 2세는 잉글랜드 왕정으로 복원되었다. 제임스가 추정상속인이었어도 그가 왕좌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여 찰스에게는 아직도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젊은 남성이었다. 그해 9월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올버니 공작으로 창조되었던 제임스는 찰스의 수석 장관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 앤 하이드에게 결혼하였다.
제임스는 제2차 (1665년 ~ 1667년)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72년 ~ 1674년)이 일어난 동안 해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왕립해군을 명령하였다. 1664년 잉글랜드에 의하여 그 포획 후에 뉴네덜란드의 네덜란드 영토는 그의 영예에 뉴욕으로 이름이 붙었다. 허드슨 강의 240km (150 마일) 위에 있는 포트 오린지도 또한 제임스의 영예에 올버니로 다시 이름이 지어졌다. 제임스는 또한 노예 무역에 참가한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이끌었다.
종교편집
제임스는 어쩌다 비밀로 지켜졌어도 1668년 혹은 1669년 경에 로마 가톨릭교회로 들어갔다. 하지만 궁정에서 가톨릭 영향력의 자라나는 공포들은 1673년 의회에 의하여 새로운 심사율의 소개로 이끌었다. 이 법령 아래 민간과 군사 공무원들은 성변화의 독트린을 부인하는 뿐만 아니라 "미신적이고 우상 숭배적"으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특정 관행을 비난하고 잉글랜드 성공회의 후원 아래 성찬을 받는 데 자신들이 요구된 것에 선서를 하는 데 요구되었다. 제임스는 양쪽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 거부하였고 대신 해군최고사령관의 직위를 포기하기로 선택하였다. 그의 가톨릭으로 개종은 이제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찰스 2세는 개종을 반대하여 제임스의 자녀들이 개신교도들로서 키워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럼에 불구하고, 1673년 그는 1671년 첫 부인이 사망했던 제임스를 가톨릭교도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디 모데나 공녀에게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가톨릭에 대한 불신이었던 많은 잉글랜드 국민들은 새로운 백작 영애를 교황의 앞잡이로 여겼다.
1677년 제임스는 자신의 딸 메리를 또한 자신의 조카이기도 했던 개신교도 오라녜 공 윌리엄 3세에게 결혼하는 데 허용하면서 개신교도들을 진정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양보에 불구하고 지속되는 가톨릭 군주의 두려움은 찰스 2세의 부인 브라간사의 캐서린의 실패한 임신들에 의하여 강하게 되었다. 성직을 빼앗긴 성공회의 성직자 타이터스 오츠는 찰스를 죽이고 요크 공작을 왕좌에 놓는 데 "교황의 음모"에 대하여 거짓으로 말했다. 꾸며낸 음모는 전국을 휩쓰는 데 반가톨릭 광란의 경향을 일으켰다. 국왕의 명령에 요크 공작은 브뤼셀을 위하여 잉글랜드를 떠났다. 1680년 그는 스코틀랜드의 주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에든버러에 있는 홀리루드하우스궁에서 자신의 거주지를 택하였다.
잉글랜드에서 그를 승계선으로부터 제외시키는 데 전 정부의 장관이자 이제 제임스와 가톨릭 승계의 지도적인 적인 제1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에 의하여 시도들이 만들어졌다. 어떤이들은 왕좌가 찰스 2세의 사생아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이 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1679년 제외 법안이 통과의 위험에 있었을 때 찰스 2세는 잉글랜드 의회를 해산하였다 (제외 법안 위기는 잉글랜드의 2당 제도의 개발로 공헌하였으며, 토리당원들이 법안을 반대했던 자들이었던 동안 휘그당원들은 그것을 지지한 자들이었다). 2개의 더욱 나가서의 의회들은 1680년과 이듬해 선출되었으나 같은 이유로 해산되었다.
찰스와 요크 공작 둘다를 암살하는 데 개신교의 불법 공모인 1683년의 라이 하우스 음모는 완전히 실패하였고, 국왕과 그의 동생을 위하여 대중적 동정심을 증가시켰다. 제임스는 다시 한번 정부에서 자신을 영향적으로 찾고, 그의 형은 1684년 해군최고사령관으로 그를 복원시켰다.
군림편집
1685년 찰스는 적법한 자손 없이 사망하여 자신의 임종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제임스 2세"로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7세"로 군림한 자신의 동생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해 4월 23일 제임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좌에 올랐다. 처음에 거기에 새로운 주권자에게 약간의 노골적인 반대가 있었다. 5월에 모여진 새로운 의회는 제임스에게 호의적으로 보여 그에게 큰 수입을 주는 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찰스 2세의 사생아 몬머스 공작에 의하여 이끌어진 몬머스의 난을 향하였다.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6월 20일 자신을 국왕으로 선언하였으나 이후에 세지무어 전투에서 패하였다. 곧 후에 몬머스는 런던탑에서 사형을 당했다. 국왕의 판사들 - 가장 두드러지게 조지 제프리스 - 제1대 남작 제프리스 (교수형 판사)는 잔인하게 반란군들을 처벌하였다. 제프리스 판사의 피흘리는 순회 재판은 당시 약간의 논평을 일으켰고 많은이들에 의하여 무장 반란으로 적절한 대응으로 보였다.
더욱 나가서의 반란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제임스는 대규모 상비군을 설립하는 데 추구하였다. 가톨릭 교도들에게 몇몇의 연대들의 책임들을 맡기면서 국왕은 의회와 갈등에 휘말렸다. 의회는 11월 정회되어 제임스의 잠시 군림 동안 다시는 모이지 않았다.
종교적 긴장은 1686년부터 고조되었다. 제임스는 논쟁적으로 가톨릭 교도들을 왕국의 가장 높은 직위들을 차지하는 데 허용하였고, 자신의 궁정에서 메리 1세의 군림 이래 로마에서 런던으로 첫 대표자인 교황 대사를 받았다. 제임스의 예수회 증거자 에드워드 페트르는 의회 분노의 특정 대상이었고 제임스가 정무로부터 몇몇의 성공회 교도들의 정지를 명령했을 때 그는 제임스의 이전 성원들을 거의 잃었다.
신교 자유령편집
1687년 신교 자유령에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국교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을 정지하였다. 그것은 제임스가 국교 반대자들의 정치적 지원을 얻는 데 선언을 발급하던지 혹은 만약 그가 진실적으로 신앙의 자유의 원칙들로 충실했다면에 관하여 토론되어 왔다. 국왕은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로 관련된 자신의 정책들에 의한 반대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의 가장 큰 2개의 대학들 크라이스트 처치와 대학 학원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중요한 직위들을 보유하는 데 허용하면서 성공회교도들을 성나게 했다. 더욱 인기 없던 그는 모들린 칼리지의 개신교 동료들을 해고하여 그들의 자리에 파커 주교를 포함한 가톨릭 교도들을 임명하였다. 그의 선언은 기독교도들은 물론 유대교와 무슬림 같이 아무 신앙의 국민들에게 적용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왕의 의지와 즐거움인 것이자 그 이후로 교회 문제에 전체의 처형과 온갖 형법인 것이며 교회에 오지 않거나 성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혹은 설립된 종교로 기타 부적합 사항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종교의 행사의 이유에 대해 혹은 의하여 즉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며 더욱 나가서 상기 형법 중에 처형과 그 모든 것들은 이로써 정지될 것입니다.
국왕은 "우리는 개인 저택이든 혹은 그 이용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고용되거나 건설된 장소에서 있을지라도 그들의 각자의 방향과 의식대로 그들에게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도록 내버려 둡니다."라고 지속하였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영토들의 전 국민들이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이었다는 것"다는 것보다 "단순한 종교 문제에서 제약을 받지도 않고 사람을 강요하지도 않도록 양심은 해서는 안 되는 오랫동안 우리의 끊임없는 감각과 의견이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명예혁명편집
1688년 4월 제임스는 신교 자유령을 다시 발급하여 즉시 성공회 성직자들에게 그것을 그들의 교회들에서 읽도록 명령을 내렸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6명의 다른 주교들은 국왕의 종교 정책들의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을 때 그들은 체포되어 선동적인 명예훼손 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해 6월 공공 경보가 메리 여왕에게 가톨릭 아들과 상속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의 출생과 함께 증가하였다. (어떤이들은 아들이 가정적이었이며 사산아를 대체한 것이란 거짓 주장을 하였다) 가톨릭 왕조에 의하여 위협을 받은 몇몇의 영향력 있는 개신교도들은 제임스의 조카이자 사위 오라녜 공 윌리엄과 협상들로 들어갔다.
6월 30일 "불멸의 7인"으로 알려진 개신교 귀족들의 단체가 오라녜 공에게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오도록 요청하였다. 9월까지 그것은 윌리엄이 침략을 시도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제임스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원조를 거부하여 잉글랜드인들이 프랑스의 중재를 반대할 것에 두려워했다. 더욱 나가서 그는 자신의 군대가 적당할 것을 믿었다. 그러나 국왕은 너무 자기만족하였으며 윌리엄이 11월 5일에 도착했을 때 많은 개신교 장교들이 도망가 윌리엄에게 가입하였다. 그의 딸 앤이 궁정을 떠나 국왕의 일부에 숙고적인 격통으로 이끌었다. 12월 11일 제임스는 프랑스로 달아나려고 시도하여 처음에 왕국의 위대한 인장을 탬즈 강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는 켄트주에서 잡혔다. 제임스를 순교자로 만드는 데 욕망을 가지지 않은 오라녜 공은 12월 23일 그가 탈출하도록 했다. 제임스는 자신에게 궁전과 넉넉한 연금을 제공한 루이 14세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윌리엄은 불규칙한 대회 의회를 소집하였다. (대회 의회를 소집하는 절차는 왕좌에 계승이 명백하지 않았을 때 이전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과 공화정의 연방에 이어 찰스 2세를 왕좌로 복원시켰던 대회 의회였다) 1689년 2월 12일 대회는 지난해 12월 11일 제임스의 달아나려는 시도가 정부의 퇴위를 구성했고, 그러고나서 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에게 넘기는 대신 왕좌가 비어있었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기탁 의회였다. 제임스의 딸 메리가 여왕으로 선언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 윌리엄 3세와 공동으로 다스렸다. 4월 11일 스코틀랜드 영지가 따랐다.
윌리엄과 메리는 나중에 권리장전으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법령으로 자신들의 동의를 얻었다. 법령은 대회 의회가 제임스의 도주가 퇴위를 구성하였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국왕과 여왕이 될 것을 선언한 것에 초기의 권리선언을 확인하였다. 권리장전은 또한 제임스 2세를 권력 남용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다른 것들 중에 그것은 심사율의 정지, 왕좌를 단순히 청원한 것에 7명 주교들의 검찰, 상비군의 설립과 잔인한 처벌의 부과를 비판하였다. 권리장전은 또한 이후에 아무 가톨릭 교도도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는 데 허용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잉글랜드의 군주가 가톨릭 교도에게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규정하였다. 더욱나가서 법안은 왕좌로 계승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였다. 처음에 계승의 선에서 있던 것들은 이후의 결혼에 의하여 앤 공주과 그녀의 자녀에 의하여, 그리고 결국 윌리엄의 자녀들에 의하여 따라지는 데 윌리엄과 메리의 자녀들이었다.
관용령편집
윌리엄과 메리는 1689년 관용령을 법률로 서명하였다.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가톨릭 교도들이 아닌 잉글랜드 성공회로부터 반대자들에 대한 믿음을 주어 가톨릭 교도들이 제임스가 보증한 권리들을 잃었던 동안 제임스의 반대자들에게 양보가 남아있었다.
이후의 세월편집
자신의 편에 프랑스 군대와 함께 제임스는 1689년 3월 아일랜드에 상륙하였다. 아일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의 예를 따르지 않았으며 제임스가 국왕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제임스의 촉구에 아일랜드 의회는 아일랜드에서 전체의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양심의 자유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왕은 1690년 7월 1일 윌리엄 3세에 의하여 보인 전투에서 패하였다. 그는 패전 후 킨세일로부터 출발하여 프랑스로 달아났으며 그의 비겁함은 아일랜드에서 그의 지지의 거의 해산으로 이끌었다.
프랑스에서 제임스는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사는 데 허용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가톨릭 교도들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엘핀의 성공회 주교가 그를 방문했을 때 제임스 2세는 "만약 내가 신임한 대로 내가 겪은 일은 내 영혼에 유익을 주었고, 그러고나서 오라녜 공 윌리엄 마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임을 증명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시도는 1689년 윌리엄 3세를 암살하면서 그를 왕위에 복원시키는 데 만들어졌으나 음모는 실패하였다. 동년에 제임스를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할 루이 14세의 제공은 제임스가 잉글랜드 국민들의 마음 속에 폴란드의 왕관의 받아들임이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지내온 것게 관하여 자신을 무능하게 만들 것에 두려움을 느껴 거절되었다. 그후에 루이는 제임스에게 지원을 중단하였다.
자신의 마지막 세월 동안 제임스는 엄격한 참회자로 살았다. 1701년 9월 16일 그는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파리 뤼에 생자크에 있는 잉글랜드 베네딕도회 교회에 성에드먼드 예배당에서 관에 놓여졌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동안 그의 시신은 더럽혀지고 시체가 잃어졌으며 하지만 그의 뇌는 파리 스코츠 칼리지에 있는 예배당에 있는 청동 항아리에 생존하였다. 제임스 2세의 공식적 스타일은 "제임스 2세,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국왕이자 신앙의 수호자"였다. (프랑스에 주장은 명목상일 뿐이었고 실제로 통치된 프랑스 영토의 양에 관계없이 에드워드 3세로부터 조지 3세까지 모든 잉글랜드 국왕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1660년 12월 31일 제임스는 루이 14세에 의하여 "노르망디 공작"으로 창조되었다. 이 일은 그의 형 찰스 2세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좌로 (찰스 2세는 1651년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로 복권이 있던 몇달 후였고, 아마 그의 형도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타이틀로 주장되었을 이래 제임스를 위한 지지의 정치적 동작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유산편집
제임스의 어린 딸 앤은 1702년 윌리엄 3세가 사망했을 때 왕좌로 계승하였다. (메리 2세는 1694년에 사망하였다) 1701년 왕위계승법은 만약 권리장전에서 설립된 계승의 선이 소멸될 것이면 그러고나서 왕관은 독일인 사촌 하노버의 소피아에게 갈 것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소피아의 사망 2달 적게 후에 1714년 앤이 사망했을 때 왕좌는 소피아의 아들이며 하노버의 선제후이자 앤의 재종 형제 조지 1세에 의하여 물려받아졌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제임스 3세와 8세", 그리고 반대자들에게 "늙은 척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자코바이트의 원인을 들었다. 그는 조지 1세의 즉위 직후 1715년 스코틀랜드에서 봉기를 지도하였으나 패하였다. 더욱 나가서의 봉기들도 또한 패하였으며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에 의하여 이끌어진 1745년 봉기 이래 어떤 개인들이 자코바이트의 철학으로 여전히 고수했어도 스튜어트가의 상속인을 회복하는 데 진지한 시도들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1766년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는 자신의 맏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는 "찰스 3세", 반대자들에게는 "젊은 척 한 사람"으로 알려짐)에 의하여 계승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찰스는 차례로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 대학 학장인 자신의 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헨리는 제임스 2세의 마지막 적법한 후손이었다. 1807년 그의 사망에 야코바이트의 주장은 찰스 1세의 선배 후손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 개발하였다. 현재 제임스 2세의 상속인은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이다. 바이에른 공작이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어도 그는 야코바이트들에 의하여 "프랜시스 2세"로 인정되었다.
가족관계편집
- 첫 번째 왕비 : 클래런던 백작 영애 앤 하이드 -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
- 두 번째 왕비 :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디 모데나 공녀 - 알폰소 4세 데스테 디 모데나 공작의 딸
- 캐서린 로라(1675~1676)
- 이사벨(1676~1681)
- 찰스(1677) 케임브리지 공작
- 엘리자베스(1678)
- 샬럿 마리아(1682)
-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1688~1766)
-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1692~1712)
- 애첩 : 애러벨라 처칠(Arabella Churchill)
- 헨리에타 피츠제임스(1667~1730)
- 제임스 피츠제임스(1670~1734) 베릭 공작
- 헨리 피츠제임스(1673~1702)
- 애러벨라 피츠제임스(1674~1704)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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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685년 ~ 1688년 |
후임 명예혁명으로 인한 폐위 메리 2세 윌리엄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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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왕 1685년 ~ 16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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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왕 1688년 ~ 17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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