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장효조(張孝祚, 1956년 7월 6일 ~ 2011년 9월 7일)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외야수이자 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었다. 2011년 9월 7일, 부산 동아대학교병원에서 위암 투병 끝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1] 그는 초년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말년에는 아들이 목사가 되며 개신교를 믿었다.[2] 한편, 백대삼 전 KBO 심판의 처남이며[3] 삼촌이 작곡가 故 길옥윤의 유일한 남동생인 최치갑 부산 조은치과 원장의 손위동서이기도[4] 하다.

장효조
Jang Hyo-Jo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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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arlemse honkbalweek Korea tegen Japan Bon Yen Kim (Korea) wordt uitgetikt, Bestanddeelnr 929-8612.jpg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56년 7월 6일(1956-07-06)
출신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망일 2011년 9월 7일(2011-09-07) (55세)
신장 175 cm
체중 74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외야수, 지명타자
프로 입단 연도 1983년
드래프트 순위 1983년 1차 3순위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KBO / 1983년
마지막 경기 KBO / 1992년
획득 타이틀
  • 1983,1985~1987년 수위 타자
  • 1983년 최다 안타, 최고 장타율
  • 1983~1987,1991년 최고 출루율
  • 1987년 최우수 선수
  • 1983~1987년 골든 글러브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프런트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월드컵 1982년 서울

야구 입문편집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부산영선초등학교[5] 3학년 때였던 10세 때 대구로 이주했다.[6] 야구를 시작한 때는 대구삼덕초등학교 4학년으로, 키는 작았지만 이 빠르고 기민해 야구부 감독의 총애를 받았다. 어렸을 적부터 고된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한 장효조는 대구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7]

키 174 cm, 체중 70kg에 지나지 않았던 장효조는 1972년 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학년이었던 1973년에 각종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대구상고를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는 14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우수선수, 타격 1위(0.428), 최다 안타상을 받았고[8] 봉황대기에서도 타격왕을 수상했다.[7] 그 해 일본과의 고교야구 친선경기를 위해 대한민국 국가대표에 선발된 장효조는 다시 맹활약하여 한국이 2승 1무로 일본을 누르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74년에도 대구상고를 봉황기를 우승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타격왕과 최다안타 상을 수상했고[9],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을 기록하며 다시 타격상을 수상했다. 장효조는 그 해 출전한 네 개 고교야구대회에서 0.383라는 타율을 기록했다.[10]

1975년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장효조는 1학년 때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0.714(14타수 10안타)라는 경이로운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을 달성하고 4연타석 2루타를 쳐 내는 등 크게 성장할 선수로 큰 기대를 모았다.[7]

프로 야구 경력편집

실업 팀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가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첫 해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프로 적응기가 필요하다는 전망을 비웃듯 1군 92경기에서 타율 3할 6푼 9리(1위), 18홈런(공위), 22도루(4위), 장타율 6할 1푼 8리(1위), 출루율 4할 7푼 5리(1위)로 천재성을 입증했다.[11] 1983년 5월에 8연타석 안타에 3연타석 홈런을 때려 내며 타율이 0.414까지 치솟았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이며, 1983년 시즌 내내 0.380 이상의 고타율을 기록하였으나, 막판에 약간 부진하여 0.369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며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등의 명성을 얻었다. 1985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12]

그는 기자들 가운데서 '장효조가 치지 않는 볼은 볼이다','장효조는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났으며, 그의 컨택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는 타격실력에 비하여 형편없는 수비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이 졌던 여러 원인 중에 장효조의 캐치 미스가 있었다. 물론 그렇지만 해설자들이 평가하기로 그는 약한 어깨이긴 하지만 유격수나 2루수가 커트 안하고 홈까지 직선으로 갈 만큼 놀라운 송구 정확도를 보였다. 타격 면에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4할 타자 백인천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일한 선수이다.

이후, 1988년에는 트레이드설에 휩싸인 데다[13]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자주 이견을 보인 것 탓인지[14] 선수협 파동 직후 같은 해 12월 21일 좌완 투수 장태수와 함께 외야수 김용철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는데 이적 후에는 지명타자로 뛰었으며 홀수 해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격년제 징크스'를 겪었다. 이는 최동원김시진 등이 트레이드된 후 한 달 후의 일이었다. 1989년 1월 삼성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될 때 연봉 5,600만 원에 계약한 바 있다.

대구상고 후배였던 이정훈1991년의 그를 평가하기를 '장효조 선배는 늘 경기 후 밤에 맥주를 2캔 마시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 타격왕 경쟁을 하면서 그 맥주를 끊고 밤새 연습을 하더라'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해에 0.347의 타율을 기록하며 2년만에 타율 3할대를 달성했고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프로 데뷔 9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본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지녔던 등번호 10번은 그가 팀을 떠난 뒤 1993년에 입단한 양준혁이 달기도 했는데, 양준혁은 그와 동일하게 좌타자이면서 타격왕을 네 차례나 수상하였다. 네 차례의 타격왕 수상은 역대 타격왕 최다 수상 횟수이다. 두 선수의 통산 타율은 각각 장효조 0.331와 양준혁 0.316로서 한국 프로 야구 통산 타율 1위와 2위의 성적이다. 이에 따라 삼성 구단과 팬들은 등번호 10번이야말로 삼성 팀 내에서 가장 타율이 높은 타자가 물려받는 등번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15][16][17]

2011년 KBO 리그 30년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사망편집

레전드 올스타 행사가 있기 며칠 전에 몸에 이상을 느낀 그는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간암과 위암이 동시에 발견되어 2군 투수코치 양일환에게 2군 감독직을 넘겼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동아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 30분 55세의 나이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영락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주일 후인 9월 14일에는 국내 최고의 선발 투수로 꼽혔던 전 롯데 자이언츠 투수 최동원도 대장암 투병 끝에 53세로 별세해 2011년 9월에만 한국프로야구계에서 2개의 큰 별이 떨어지고 말았다. 2011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했다.

출신 학교편집

주요 기록편집

기록 날짜 소속 구장 상대팀 상대 투수 경기수 타석수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최소 타석 1000안타 92.8.13 롯데 사직 쌍방울 951 3606 36세 1개월 7일 역대 4번째

통산 기록편집

















2

3



















O
P
S












4
1983 삼성 28 92 386 317 61 117 19 3 18 62 22 2 58 39 .369 .475 .618 1.093 196 1 6 0 5 6
1984 29 89 365 309 56 100 19 7 7 44 8 8 49 25 .324 .424 .498 .923 154 2 5 0 2 8
1985 30 107 422 346 66 129 24 1 11 65 17 8 57 23 .373 .467 .543 1.010 188 6 4 8 6 6
1986 31 95 367 304 55 100 20 2 6 41 16 7 59 30 .329 .436 .467 .903 142 6 1 0 3 7
1987 32 88 335 284 51 110 16 4 2 58 7 4 41 26 .387 .461 .493 .954 140 1 3 1 6 3
1988 33 96 334 283 41 89 12 2 4 35 5 5 49 27 .314 .419 .413 .833 117 2 2 0 0 0
1989 롯데 34 94 393 333 40 101 8 3 1 31 12 15 56 30 .303 .407 .354 .762 118 2 3 0 1 0
1990 35 96 364 324 36 89 13 4 1 22 8 4 34 33 .275 .347 .349 .696 113 5 2 4 0 0
1991 36 122 424 346 56 120 17 10 4 54 11 7 70 31 .347 .452 .488 .941 169 4 0 2 4 6
1992 37 82 242 204 23 54 9 0 0 25 3 1 33 25 .265 .365 .309 .674 63 2 1 1 3 1
KBO 통산 : 10년 961 3632 3050 485 1009 157 36 54 437 109 61 506 289 .331 .427 .459 .886 1400 31 27 16 30 37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빨간 글씨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 82년 ~ 85년까지 한국 프로야구 출루율 계산법에서 희생 플라이는 제외하였다. 현재의 출루율 계산법으로 83년 ~ 85년까지 장효조의 시즌 출루율은 각각 .469 .422 .460 이 되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표기함

각주편집

  1. 스포츠 조선 -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별세"
  2. "하나님의 구장에서 장외홈런 날려야죠". 기독공보. 2016년 2월 2일. 
  3. 송채수 (1996년 5월 15일). “백대삼심판 1,500경기 출장”. 경향신문. 2020년 4월 27일에 확인함. 
  4. 변영상 (1996년 1월 13일). “롯데선수에 파워가드(치아턱보호대) 보급...최치갑 치과원장”. 국제신문. 2020년 4월 27일에 확인함. 
  5. 현재의 부산남항초등학교. 2002년 부산영선초등학교와 합병했다.
  6.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어제 별세 - 한국 야구계 큰 별이 지다
  7. 화려했으나 외로웠던 사내, 장효조, 《박동희 칼럼》, 2011년 9월 7일
  8. ‘타격 달인’ 장효조“요즘 고교야구 투지 실종…잔꾀만 늘어”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동아일보》, 2007년 7월 5일
  9. ‘전설’ 장효조의 발자취, 《스포츠경향》, 2011년 9월 7일
  10. 노재현 (2011년 9월 9일). “[노재현의 시시각각] 장효조에게 명예의 전당을”. 중앙일보. 2020년 8월 30일에 확인함. 
  11. 김은진, '장효조, 최동원 불멸의 야구 천재' <<주간경향>>, 2011, 9, 27
  12. 일간 스포츠 - 2010년 4월 기사 "OB의 재구성 - 삼성 역대 최고 타선"
  13. "장(張)효조 데려가겠다". 조선일보. 1988년 1월 28일. 2020년 9월 9일에 확인함. 
  14. 김원익 (2016년 9월 9일). “[김원익의 휴먼볼] 우리는 ‘타격천재’ 장효조를 잊지 않았다”. 엠스플뉴스. 2020년 9월 9일에 확인함. 
  15. 스포츠 서울 - 2007년 9월 기사 "이래서 내가 타격왕 해야 한다, 사연 있는 타격왕 전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6. 한국일보 - 2009년 9월 기사 "등번호엔 가치관 · 꿈 · 사연이…" Archived 2011년 11월 19일 - 웨이백 머신
  17. 일간 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숫자로 본 양준혁 데뷔 이후 줄곧 썼던 등번호는?"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