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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신흥고등학교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중화산동1가에 있는 고등학교

좌표: 북위 35° 49′ 00″ 동경 127° 08′ 13″ / 북위 35.8167880° 동경 127.1368706°  / 35.8167880; 127.1368706

전주신흥고등학교
全州新興高等學校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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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지(智), 인(仁), 용(勇)
개교 1900년
설립형태 사립
교장 조재승
교감 임희종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위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중화산동1가)
학생 수 967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88 명 (2018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은행나무, 교화: 무궁화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관할관청 전라북도교육청
웹사이트 http://www.jsh.hs.kr

전주신흥고등학교(全州新興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1가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편집

학교 동문편집

전주신흥고등학교 관련 유적편집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편집

전주신흥고등학교 교내(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에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172호[10] 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일정 수준의 교사 확보와 시설 및 교육과정이 갖추어진 사립학교에게 고등보통학교와 같은 자격을 인정하는 소위 지정학교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신흥학교는 지정학교 승격을 위하여 교사 신축을 추진하였고, 선교사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마침내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리차드슨 여사(Mary Lynn Smith Richardson, 1857-1940)[11]가 9,000달러의 건축비를 지원하면서 1927년 10월 신흥학교 본관을 신축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명칭을 리차드슨 홀(Richardson Hall)로 정하였다.

본관 건물의 설계는 건축을 전공한 서로득 선교사가 담당하였으며,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윈스브로우 홀(Winsborough Hall)과 구조가 같은 쌍둥이 건물로 건축되었다.[12]

신흥학교의 강당은 1935년 당시 금액으로 33,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강당 겸 체육관 공사를 시작하였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조 건물로 1936년 3월에 완공되었다. 강당의 명칭은 리차드슨 여사의 남동생인 에그버트 스미스 목사(Rev. Egbert Watson Smith)[13]의 이름을 기념하여 "EGBERT W. SMITH AUDITORIUM"으로 정하였다.[14]

  • 1927년 10월 11일: 신흥학교 본관(리차드슨 홀) 착공
  • 1928년 6월 20일: 신흥학교 본관 준공 낙성식
  • 1935년: 강당(에그버트 스미스 오디토리움) 신축공사 시작
  • 1936년: 강당 준공
  • 1974년: 강당 증축(슬레이트 마름모꼴 잇기에서 골슬레이트로 개조)
  • 1982년: 본관 화재로 소실
  • 1994년: 강당 지붕 보수(굴뚝 철거, 창호 교체, 지붕 개조)

희현당편집

신흥학교는 조선시대의 학당이었던 희현당(希顯堂) 위에 세워졌다. 교가에도 희현당이 등장하며, 건물 중에도 희현당의 이름을 가진 신흥 건물이 있다.[15] 희현당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金時難)이 지방 유지인 오명기(吳命模)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司馬齋)터에 학당을 창건했다. 김시걸은 희현당을 지어 놓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창설당시의 규모를 보면 강당과 주방을 마련했고, 전답을 사들여 그 수입으로 경비를 쓰도록 했다. 책을 비치하여 학업을 돕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규율을 세웠다. 임원을 두어 사무를 처리했고, 식모를 채용하여 숙식을 관리하였다. 봄·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의 학생을 뽑아 수강하도록 하였다. 그 후 관찰사 이집(李集)이 중수(重修)하려고 하였으나 임기가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鑛)이 영조 14년(1738)에 부임하여 먼저 규모보다 더 넓게 중수했으며, 새로 당규 40종목을 제정하고 당기(堂記)를 써서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당쟁으로 선비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경영이 충실하지 못하여 퇴락한 상태에 있다가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신흥학교에 남아 있는 희현당 사적비와 희현당 중수사적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서 세운 것으로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과 이를 중수한 이주진의 곡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신흥고등학교와 신흥중학교는 사생회, 백일장, 학교축제 등을 희현당의 이름을 따서 희현제로 명명하고 있다.

18세기 말 희현당에서는 '희현당장판'(希顯堂藏板)이라고 하여 많은 책을 출판하였으며, 무쇠를 녹여 만든 '희현당철활자'(希顯堂鐵活字)를 이용하였다.[16] 활계선생유고(活溪先生遺稿), 한훤차록(寒暄箚錄), 난곡선생연보(蘭谷先生年譜) 등 다수의 인쇄물이 희현당에서 활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흥학교 교가편집

교가의 유래편집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신흥중학교)의 교가는 1910년대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이부르던 대표적 군가의 하나인 '용진가'와 동일하고 후렴부 가사가 비슷하다. 1910년대 전주의 신흥학교에서도 동일한 교가가 불렸다는 당시 재학생의 증언이 있으며, 1910년대 전주 신흥학교에 재직했던 교사들 중 민족의식이 강했던 오산학교와 숭실학교 출신이 많았으므로 만주지역 독립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독립군의 군가였던 용진가는 1911년 만주 서간도에서 개교한 신흥무관학교(경희대학교의 전신)의 교가로도 변형되어 사용되었으며,[17] 가사가 변형되어 북한에서 군가로도 사용되고 있다. 2000년 6월 13일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북한 군악대가 순안공항에서 연주한 곡이 전주신흥고등학교 교가와 유사하다는 것이 화제[18][19][20] 가 되었다. 이 곡들의 원곡은 미국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인 1865년 헨리 클레이 워크가 지은 조지아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으로 알려져 있다.[21]

가사편집

완산 정기 모아드는 수려한 곳은
옛부터 문명한 희현당 정기로다.
백운간에 솟아있는 층층한 집은
지인용을 배양하는 신흥학교다

만세 만세 만만세 신흥학교 만만세
지인용을 삼덕으로 신흥할지니
학도들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
한 목소리 한 발자국 나아갑시다

각주편집

  1.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전주신흥학교총동문회. 김창국은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 중 1인이며, '가을의 기도'라는 시를 만든 김현승(金顯承) 시인은 김창국의 차남
  2. 독립에대한염원…누구도막을수없어 [커뮤니티] 3·13만세운동 재현행사,[새전북신문].
  3.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 지도자들은 군산에서 4일과 5일 독립만세 시위가 감행됐다는 소식에 듣고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와 박태련 신간회 총무집에서 필요한 태극기를 인쇄하기로 했었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일본경찰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전주시내 학교에 강제 방학조치를 취했다. 이에 최종삼 등 신흥학교 학생 5명은 밤을 이용해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 인쇄물을 만들었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13일 장터로 모이기 시작했고, 채소가마니로 위장한 태극기를 장터로 실어 나르고 거사 직전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했다. 낮 12시20분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및 천도교도 등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남문 밖 시장,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에서 모여 인쇄물을 뿌리며 시가지로 구보로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서너차례 계속됐다. 또 다음날 오후 3시에도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후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 신흥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모두 실형 1년을 언도 받았다. 이외 신흥학교 학생 3명은 일제의 고문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시위를 지도한 전주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는 이후 중국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현재 신흥학교 교문 옆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4. “구체화되어가는 야구심판협회”. 동아일보. 1923년 6월 18일. 
  5. 하태홍이 투수, 안용남이 유격수로 출전하였고 6:4로 패배하였다.
  6.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지 3달 후인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12월 2일 개교 기념 행사 후 거사할 예정이었으나 연기되었다. 이 후 12월 12일에 다시 거사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이 사태를 눈치 채고 조기 방학에 들어감으로 무산되었다. 개학(1월 25일) 이 후 재차 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간부들은 기숙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규합하여 1월 25일 거사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와 전단을 붓으로 그려가며, 거사를 준비했다.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다가교 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80여명을 모았다. 9시 30분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同感만세!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同感한다는 뜻)"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고, 출동한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검거된 학생에게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 형무소로 넘겨졌다. 주동자의 한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해방 후 함수만에게는 공적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7. 1930년대 들어 일본 고유 신앙 신도의 행사인 신사참배는 일본이 군국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강요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신흥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를 수용 할 수 없었고, 신흥학교의 설립 주체인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C. Darby Fulton) 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일본 태생의 풀톤 목사는 일제의 신도가 단순한 정치적 의식이 아닌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한 달여의 조사 끝에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 미국 남장로교의 풀톤 선언(Fulton Declaration)이 발표되었다. 이는 학교를 폐쇄할지언정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강경한 신사참배 반대 성명이었다. 풀톤 선언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 발발 후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9월 4일 전라도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사전협의회가 열렸다. 9월 6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로 인솔되었다. 참배 구호 후 일본 순사와 관리만 참배를 하였고, 학생들은 참배를 거부했다. 재차 참배 구호가 내려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신사참배는 무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9월 22일 문을 닫았다. 폐교 후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전학을 위한 학비 150원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다. 학생들 외에도 고창고보로 5명의 교사가 전근되었는데 김태훈, 김교문, 박준영, 최주남, 김병수 교사였다.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도 고창고보로 옮겨졌으며, 모든 서류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의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되었다.
  8. 지역 학교 중심으로 확산된 '복음의 물결', 전남도민일보, 2015년 05월 11일, "신사참배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와 관계가 됩니다. 즉 유일신론이냐 다신론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반 기독교 신자이거나 교파의 지도적인 인물을 막론하고 정부가 신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의식이 기도라든지 신령을 부르는 것 등의 종교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누가 보더라도 종교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9. 한국 장로교 전통 단절 정체성 상실의 시대, 문화와신학, 2012년 8월호,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우리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근의 사태 발전을 고려하여,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한국 선교부에 적절한 절차로 우리 학교를 폐쇄할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 ('풀턴 선언', 제4항)
  10.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79,01720000,35
  11. (영어) Mary Lynn Smith Richardson(1857-1940) - 파인드 어 그레이브 리차드슨 여사는 미국의 의약품 도매회사 '빅스 베이포럽(Vicks VapoRub)'을 운영하던 런스포드 리차드슨(Lunsford Richardson, 1854-1919)의 부인이다. 런스포드 리차드슨은 대학 친구인 헨리 스미스의 누이와 결혼하였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약사이자 의약품 도매회사를 운영하였으며, 교회 장로로서 흑인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등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12. 서로득 선교사(Martin Luther Swinehart, 1874-1957, 徐路得)는 서울 이화여대 중강당 건축을 감독하였고, 광주 오웬 기념관도 건축하였다.
  13. (영어) Rev. Egbert Watson Smith(1862-1944) - 파인드 어 그레이브
  14. 에그버트 스미스 목사(Rev. Egbert Watson Smith) 는 리차드슨 여사의 남동생으로 당시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Executive Secretary of Foreign Missions for the PCUS)로 시무하고 있었다.
  15. 100년 전 전주 시가지는 어땠을까?, [국정브리핑].
  16. 전주의 문화유산, 전주역사박물관. 희현당 철활자는 '정리자체 철활자'라고도 불린다.
  17. 신흥무관 100주년 통신(43)- '신흥무관학교 교가(校歌)'와 '용진가(勇進歌)', 경희대학교 총민주동문회
  18. <화제> "북한 군악대 연주곡은 우리학교 교가", [연합뉴스], 2000년 6월 15일
  19. 북군악대 연주 '용진가' 전주신흥고 교가와 같아, 조선일보, 2000년 6월 16일
  20. 北, 전주 신흥고 교가 소개, 조선일보, 2001년 6월 18일
  21. 이 곡은 전주신흥학교 뿐 아니라 1910년대에 만주지역 독립군 군가로 널리 불리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서로 다른 가사를 가지고 당시 항일 단체나 개신교회에서 널리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항일가는 직접 작곡한 곡들도 있었으나, 그 밖에 세계적인 명곡이나 다른 나라의 유행가를 차용하여 부르는 것도 일반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일본 가요를 개사한 항일가도 다수 존재했다. 항일가로서의 용진가와 신흥학교 교가의 멜로디는 '조지아 행진곡'을 직접 차용한 곡이라기 보다, 오히려 1909년 일본에서 카미나가 료오게쯔(神長瞭月)가 '조지아 행진곡'을 바탕으로 편곡한 일본 유행가 「하이카라 부시」(ハイカラ節)의 멜로디를 차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민족문화연구소의 '항일음악 330곡집' 참고. 한편, 원곡인 '조지아 행진곡'은 '우리들이 싸울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신교의 찬송가로 불리고 있으며 이 찬송가의 가사는 일본의 찬송가 작가인 미다니 다네끼지(三谷種吉, 1868-1945) 목사가 작사한 것으로 국내 성결교단의 1919년 <신증 복음가>에 처음으로 수록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