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정기룡(鄭起龍, 1562년 음력4월24일~ 1622년음력2월28일)은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아명은 무수(茂壽)이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기룡 | |
별명 |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 충의(忠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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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562년 |
출생지 | 경상도 곤양현 금양면 중평리(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
사망일 | 1622년 |
사망지 | 통영 진중 |
국적 | 조선 |
본관 | 진양(晋陽) |
부모 | 정호(鄭浩) |
종교 | 유교 |
생애
편집1562년 명종 17년 4월24일 곤양군 태촌(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3남으로 태어났다.[1] 첨정공(僉正公) 정중공(鄭仲恭)의 15세손이다.
태어날 때 모친께서 천연두에 걸려서 산달이 지나서 어렵게 낳았기 때문에 부친께서 무병으로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면서 초명을 무수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19세때인 1580년 8월 곤양 인근인 고성현에서 향시에 가서 초장에 합격하였다.
- 당시 태촌에서 고성까지는 육로가 아닌 뱃길로 남해 창선도를 거쳐 고성으로 이동했다.
1585년 24세때 진주의 향리 강세정의 딸과 결혼하였다.
- 부인 강씨는 1563년 명종 계해년생으로 정기룡보다 한살 어리다. 두 분다 당시 결혼적령기에 비하면 늦게 결혼을 하였다.
25세때인 1586년 10월26일 무과별시 병과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선조의 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실제는 집안 항렬인 "룡"자 돌림에 따라 18세인 1579년 관례를 치루고 관명에 따라 '기룡'으로 지었으며, 자를 '경운'으로 하였다. 족보에 형제 이름이 몽룡, 인룡이며, 사촌은 견룡,룡, 응룡으로 기록되고 있다.
- 교지보인정기룡무과병과제4인급제출신자 만력14년10월26일
1587년 봄부터 1589년까지 북쪽 변방 국경에서 3년간 근무하였다.
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할(1548~1592)의 휘하에서 창원도호부에서 복무하였다.
- 신할은 신립 장군의 동생이다. 1589년 경상도 좌병사에서 1590년 경상도 우병사로 재임하다가 전쟁이 나자 조대곤(생몰년미상)과 교체되어 경기수어사 겸 남병사로 임명되어 1592년 6월27일 임진강 전투에서 44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 경상우병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은 <촉영도선생안>에 나오며, <선조실록>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매헌실기>에도 분명 신할로 표기되고 있으며, 신립(1546~1592)으로 소개 및 표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
- 1408년 태종8년 창원부로 승격이 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었다가, 1603년 진주로 옮겨가게 된다.
1591년 30세에 전력부위(종9품)직에 나아가고, 한양에서 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훈련원의 종8품 봉사직으로 복무하였다.
1592년 4월13일 오후 늦게 7백여 척의 왜적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1592년 4월17일 경상좌수사 박홍의 급보가 조정에 도착하자 정기룡도 왜적의 침공사실울 접하게 되었다.
정기룡은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1541~1609)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한양에서 곧장 경상도로 출발하였다.
-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서 출발하는 조경의 군대는 불과 20여 명이었다. 종사관 이수광, 군관 정기룡, 종사관 정눌, 군관 김태허, 조막 송건, 군관 배설 등이 있었다.
1592년 4월24일경 거창 신창지역에서 선봉별장으로 수십 명의 기병으로 일본군 구로다 나가사마의 좌종대의 선견대 500여명을 만나 분전하고는 김산을 거쳐 어모현에 위치한 추풍역 방면으로 후퇴했다.
1592년 4월28일부터 29일 경상우방어사 조경과 조방장 양사준, 비장 장지현 등 관군과 함께 추풍역(현재 김천시 어모면에 있던 역참)을 지키고 있었으나,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왜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어 대패하고, 황간 등으로 후퇴하였다.
- <난중잡록>에 의 하면, 성주의 왜적이 개령과 김산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과 그의 종사관 이수광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라고 적고 있다.
1592년 4월29일 새벽 선조가 평양으로 몽진을 출발하였다.
1592년 5월2일 한양이 함락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1일 만이다.
- 조선의 반민(叛民)들이 성문을 열어 왜군을 맞이 하였으며, 왜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손짓으로 뭔가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 보는 사람도 있어 왜인들이 당황해 하였다.(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참조)
1592년 5월3일 김산(현재 김천)전투에서 한 왜병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하자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자 이를 발견하고 즉시 말을 달려 왜병을 단 칼에 베고 위험에 처한 직속상관인 조경을 구출하였다.[2]
- 조경 장군 신도비문에 의하면, <공이 기병으로 왜적을 뒤쫓게 하고는 몇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뒤에 있었는데 왜적 3명이 풀숲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공이 직접 2명을 활로 쏘았는데, 나머지 1명의 왜적이 뒤에서 튀어나와 칼로 치자 공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었다>고 한다. 그후 조경은 칼로 인한 상처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다.
- <선조실록>에 관련 기사가 나온다. 1년 후인 선조26년(1593) 11월5일 기사에,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이 적에게 살해될 뻔 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1592년 5월14일 3도근왕군 경상도 소속으로 경상감사 김수(1547~1615) 휘하에서 참여하여 한양으로 북상하다가 6월4일 왜군 1명의 머리를 베는 공을 세웠으나 5일 와카자키 야스하루의 가신 휘하의 수비대 600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용인 부근인 수원 광교산에서 패배하여 간신히 후퇴하였다.
- 6월4일 전공에 대해 경상감영 아전 이탁영(1541~1610)이 김수를 수행하면서 쓴 종군일기인 [정만록]에는, <정기룡은 김산 접전에서 2개의 머리를 베었고, 지금 또 1개를 베어 이미 3개가 되었으니 당상관이 될 만하여 축하할 일이다.> 라고 정기룡을 칭찬하고 있다. 경상감사 김수도 이 기록으로 장계를 올린다.
- 당시 승전내(승전관청)에서 왜적 머리 1개을 베면 공사천에 논의되어 등과가 허락되며, 2개를 베면 6품에 서용되고, 3개를 베면 당상에 오르고 왜놈을 잡은 장수로써 가선대부에 훈봉된다고 하였다.
1592년 6월15일 명나가 군대가 최초로 압록강을 건넜다.
1592년 6월 하순 경상도 함양에서 김수의 명령으로 학봉 김성일의 명으로 진주성 수비를 위해 떠나는 제52대 곤양군수 이광악(1557~1608)을 대신하여 임시로 고향인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일조했다.
- 곤양수성장으로 오기 전 7월초 구례에서 치료중인 상관인 조경을 만나 그간 전투상황을 보고한뒤 하동 지리산 모처에 피난중인 어머니와 부인강씨, 조카 상린과 친족들을 만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조카 수린을 시켜 어머니를 간호하게 하였다.
- 그 무렵 7월23일 경 왜군 2번대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회령부로 쳐들어가, 조선을 배반하고 왜군 측에 붙어버린 국경인과 지역 주민들에 의해 이미 사로잡혀 있던 2명의 왕자(임해군과 순화군), 신하인 김귀영, 황정욱, 황혁(황정욱의 아들), 이영, 은성부사 이수, 경성판관 이홍업, 회령부사 문몽헌,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 등 20여 명을 포로로 잡는다.
1592년 9월 초유사 김성일을 진주에서 찾아뵈었으며, 유병별장으로 임명되었다.
1592년 9월6일~25일경(어떤 기록은 8월로 적고 있음) 김산 부상고개 전투에 참여하여 영동 의병대장 한명윤, 상주목사 김해, 의병장 박이룡, 김산군수 이우빈, 진주목사 김시민 등과 연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1592년 10월5일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며, 호남 의병장인 전 부사 최경회가 진주의 살천창(현 산청군 시천면)에 주둔하자 정기룡은 살천창 외원에서 왜군 방어와 군량 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592년 10월 6일부터 진주성 제1차 전투가 승리한 9일까지 유병별장과 한후장으로 진주성의 서쪽 방면인 산청 살천장 주변(현재 덕산면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워 진주성 전투가 승리로 끝난 10월10일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 의해 품계를 뛰어넘어 상주 가판관으로 파격 승진한다.
- <학봉속집, 10월10일> 기록에, 진주에 사는 훈련원 봉사 정기룡은 날래고 용맹함이 아주 뛰어나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습니다. 비록 직무상 맡은 임무에 걸맞지 않으나, 왜적들을 토벌하는 것이 급하므로 정기룡을 상주판관에 임시로 임명하였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김성일은 상주에 도착하면 상주 목사 김해를 만나 격문을 돌려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상주성을 탈환하라는 작전을 하달한다.
1592년 10월18일 상주 갑장산 영수암에 도임 후 상주의 여러 의병들(충의군, 상의군 등)과 연합하여 피난 중인 상주목사 김해를 만나 상주성 수복 등을 논의를 하였다.
1592년 10월20일 상주 모처로 향하던 중 용화동에서 왜적 300여명의 목을 베는 성과를 올렸다.
- 권용중의 <용사일록>에 적기를, 10월20일 용화사에서 돌아가는 길에 노략질하는 왜적을 함께 공격했는데 붙잡거나 참수한 왜적이 300여 급이었다. 라고 한다.
또 상주 중모현과 화령현 등에서 긴요한 골목에 석차를 설치하여 돌을 발사하여 왜적을 많이 죽였다.
- 이무렵 상주 상의군 대장 김각은 경상우감사 김수에게 보고하길, 험난한 곳에 왜적을 몰아쳐 부수는 데는 정기룡만 힌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3일 밤에 화공법으로 상주성을 기습공격하여 400여 왜적의 목을 베고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였다.
- 이날 상주를 포함한 안동지역 날씨는 23일 맑음, 24일은 흐렸다.(출처 : 향병일기)
1592년 12월 고향에서 어머니와 조카 상린 등 가족들을 상주로 이거시켰다.
- 강씨 부인은 진주 친정에 머물다 1593년 6월 진주성 함락시 순절한다. 20세에 어머니와 둘이서 상주로 이거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 이 무렵인 12월6일 검간 조정의 동생 조익은, 정기룡이 가판관으로 임명된 뒤 왜적의 진을 출입하면서 많이 베어 죽였고, 경상하도에 있을 때도 군공으로 행오간에 이름을 얻었다고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가휴선생문집 중 진사일기)
- 검간 조정도 12월10일, 상주 가 판관은 싸움터에 나간 후에 자신이 사졸에 앞장서서 진심으로 왜적을 공격하여 한 주의 사람들이 감동하고 흥분해 일어나서 싸움터에 나가기를 즐겨하는데 병황이 극에 달하고 기근이 너무 심해서 초목의 열매를 먹으며 조석을 이어가는 터에, 모였다가 헤어지곤 하여 군대를 이루어 왜적을 토벌할 수 없으며 용장으로 하여금 그 뜻을 펼 수 없게 하니 매우 한탄스럽다고 적고 있다.(검간선생문집)
1592년 12월12일 창의군과 더불어 합세하여 함창과 문경의 경계에 있는 당교에서 12월8일부터 진을 치고있던 왜군과 전투를 벌여 패퇴시켰다. 창의군은 수급 50여개, 정기룡 군대는 수급 수백 개를 베었다.
- 당시 창의군의 조사갑 등이 정병 수십 명을 이끌고 당교를 야습하여 무수한 왜적을 사살하고, 곽응화는 1급을 베었다.(임진왜란과 상주지역 의병활동 참조)
그리고 상주 북쪽 대승산 아래까지 뒤쫓아 가서 공격하여 왜군을 많이 살상하였다.
1592년 12월19일 충청좌도와 경상우도 16진 총책 중 9진의 좌위장을 맡아 25일 경상도 의병장 김면과 합세하여 감문.선산 두 고을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로 도모하였지만, 24일 선산부의 성을 공격하여 할때 적과 내통한 중이 있어서 실패하였다.
- 좌위장수 : 상주 가판관 정기룡, 조전장 선의문, 보은현감 구유근, 상주목사 김해, 충보장 김홍민, 대리소모관 조익, 선산부사 정경달, 상주의병장 김각, 창의장 이봉, 충의장 이명백, 숭의장 노경임, 대리좌막 조정
- 이날 상주를 비롯한 경북 대부분 지역에 눈이 내렸으며, 20일에는 눈이 밤까지 이어져 들판이 모두 새하얗다. 이는 납일(연말 무렵) 전에 보는 상서로운 일이었다.(호재진사일록 12월20일 참조)
1593년 1월7일, 상주 가판관 정기룡은 상주 및 함창, 문경의 관군을 좌우위로 나누고 지휘를 맡았다.
- 함경도에서 지난 7월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왕자를 구하는 작전의 일환이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실패에 돌아간다.
- 검간 조정은 1월7일 <임란일기>에서, 정기룡은 비단 용감하고 강건하기 짝할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위해 죽고자 몸을 잊은 까닭으로 본진 및 함창.문경의 관군을 합세하여 좌우위로 나누고 모두 정기룡의 절제를 받도록 했다라고 적고 있다.
1593년 1월9일 정기룡의 판관군 500명, 상주 의병 1,000여 명, 선산군 1,200명과 함께 죽현의 적을 습격한 계획을 세우고 우구동으로 물러나 묵었다.(검간조정임란일기, 반곡난중일기)
1593년 1월13일 정기룡은 상의진과 합진하여 상주성 텅빈 성을 분탕질하고 청리를 지나는 왜적 200여 명을 공격하여 많이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593년 1월15일 선산부를 공략하는 작전이 개시되어 상주 의병 천여 명과 관군 5백여 명, 선산군 1천2백여 명의 대장으로 선산부사 정경달이 임명되고 정기룡은 부장으로 임명되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1593년 1월17일 정기룡의 상주 관군을 비롯한 충청도와 전라도 군사와 의병들이 우구동에 진을 쳤다.
1593년 1월30일 명나라 군사들이 왜적을 압박하자 무수히 많은 왜적들이 남하하여 당교에 진을 쳤다.
1593년 2월4일부터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왜적의 수가 60여 리에 뻗쳤는데 밤이면 더 많았다.
1593년 2월12일 경 상주목사 김해와 아들이 왜적에게 죽임을 당했다.(정경달의 <반곡난중일기>)
1593년 2월16일 정기룡 관군을 비롯한 영호남의 군사가 어울려서 선산의 왜적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1593년 2월21일부터 27일까지 순변사 한효순의 지휘아래 상주 가판관 정기룡과 영천 출신 의병장 권응수 등이 당교에 주둔하고 있는 4,000여 명의 왜적을 의병들과 연합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왜적을 문경 대승산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593년 3월20일 전후 율원전투에서 많은 왜군을 살상하였다.
- 가휴 조익은 3월26일 <가휴진사일기>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보은현감(구유근)과 상주판관(정기룡)과 함께 율원의 험한 벼랑길에 요새를 구축해 매복을 설치하고 왜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활을 셀 수 없이 마구 쏘아서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조방과 조전 두 진영이 뒤따라 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낭패를 겪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근래의 전투 가운데서 오직 이 전투가 통쾌하다라고 적고 있다.
이 해 봄 지난해 난리 통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먹을 것이 부족해 소나무 껍질을 다 벗겨내 여러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상주 가판관 정기룡은 굶주린 백성들 중 어려운 사람을 먹여 살리고 사대부의 자제들을 거두어 구휼하였다. 또한 둔전을 개설하고 파괴된 제방을 수축하였으며 영천고을 관가의 곡식을 운반해 와서 농민들에게 종자를 보급하였다.
그들 중에 병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원을 들어주니 감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힘을 다했기 때문에 모두가 한 사람이 적병 백 사람을 당해 낼 수가 있었기에 정기룡의 군대를 <감사군>이라 일컬었다.
- 감사군에 대한 내용은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 중 통제사 정공(정기룡장군) 신도비명에 잘 나와 있다.
1593년 4월18일 지난 4월8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이 강화회담을 타결하자 철수를 시작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정기룡은 상의군 대장과 광주목사, 영동현감, 상주목사, 선산부사 등이 6개 진을 죽현에 매복시킬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적군이 용궁현의 하풍진을 거쳐 비안현으로 갔는데 정기룡은 사전에 정보을 듣지 못해 추격을 하였지만 실패하고 애석해하며 철수하였다.
1593년 4월말 명나라 장수 유정, 사대수 조승훈 등을 상주의 경계에서 맞아 응접하였다.
1593년 4월29일 함창에 당도한 명나라 군이 당교에서 철수하여 상주성 안팎에 진을 치고 노략질하는 왜군들에게 철수할 것을 재촉하였다.
- 29일 경상우도 감사 학봉 김성일이 진주에서 별세하였다. 정기룡은 5월초에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명나라 장수 심유경이 명나라 사람 20명을 통솔하면서 두 왕자를 거느려 왔으며, 왜군은 5월10일부터 15일까지 철수를 시작해 밀양부 이남으로 이동했다.
1593년 5월 초 한명윤(1542~1593)이 상주목사로 도임했다.
- 선조실록 4월9일 기사에, 한명윤을 상주목사에 제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593년 5월14일 명나라 군의 선봉대가 상주에 도착을 하였다. 부총병 오유충군이 상주와 선산지역에 주둔하였다.
1593년 5월 28일 크고 작은 전투 전공으로 실제 상주판관으로 승진되었다.
- 중훈대부 군자감 부정으로 관등을 뛰어 임명되고 실제 판관(종5품) 겸 진관(상주鎭) 병마절제도위(종6품)로 승진되었다.<매헌실기>
1593년 6월14일 상주 목사 한명윤(1542~1593)이 관아에서 죽었다.<고대일록>
- 대부분 기록에는 10월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6월이 정확하다.
- 선조실록에, 투항한 왜인에게 살해되었다고 우복 정경세가 선조에게 아뢴다.
1593년 6월19일 상주 목사직을 대행하여 명나라 장수 왕필적과 진주성 2차전투 발발 이틀전 진주성을 방문하였다.
- 이 기록은 의병장 김천일의 <건재선생문집>과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나온다. 선조실록 6월26일에 첫 등장하는 회령부사 정기룡이 동일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확실한 기록이다.
- 당시 명나라 유격장 왕필적은 상주 함창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주성 발발 무렵엔 함양군 인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 상주가목사인 오운을 대신하여 상주목사직을 임시로 수행하였다.
이날 진주성에 입성 후 성지를 돌아보고는 유격장 왕필적은 "남쪽에는 큰 남강이 있고 북쪽에는 큰 못(대사지)이 있어 하늘이 만든 험한 곳이다. 유총병(유정)이 외부에서 지원하는데 선봉이 이미 함양에 이르러 나를 보낸것은 먼저 깨닫게 한 것"이라며 진주성 방어의 견고함을 칭찬하였다.
1593년 6월20일 왕필적이 진주성에서 "왜군이 침범시 내가 마땅히 위급함을 알려서 달려가 구원토록 하겠다"라 하고 정기룡과 함께 함양군 본진으로 돌아갔다.
- 정기룡과 부인 강씨의 마지막 작별도 이날이었다. 그리고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부인 강씨 비롯하여 7만 관민이 전몰한다.
1593년 6월27일 진주성 함락 2일 전 진주목사 서예원이 보낸 원병 요청의 통첩을 받았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의 적극적인 공세지원을 받지 못하고 산청 인근에서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1593년 7월21일 진주성 함락 후 급히 진주목사로 임명된 박종남(1549~1601)이 제때 부임하지 못하고 함양군과 산청경계에서 진을 꾸리고 있는 상주판관 정기룡에게 찾아가 급한 사정을 알리자 콩과 밀을 각각 조금씩 나누어 주었고, 가목사 오운 또한 콩과 밀을 조금씩 나누어 주도록 공문서를 발급해 주었다.(가휴진사일기)
1593년 8월5일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오유충을 맞이해 응접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겹쳐서 도착하여 접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 정기룡 판관은 검호의 둑을 터서 물고기를 잡아 풍성한 음식으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접대하고 친히 스스로 꼴을 베어서 군마에 공급하니 명나라 장수는 정기룡이 성심으로 접대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다른 점에 감동하여 혹시 모자란 일이 있더라도 싫은 말을 가하지 않았다.
- 당시 명나라 군사 때문에 백성들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다. <고대일록>엔, 가는 곳 마다 명나라 군사들이 닭, 술, 채소, 과일과 짐 싣는 말 등을 요구했는데 성화같이 재촉하니 사람들이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같은 기록에, 우리나라 모든 백성에게 명나라 통제에 복종하라는 명이 내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1593년 8월 가목사 오운(1540~1617)이 상주목사로 승진하나 얼마 후 병을 얻어 사임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자 민심을 얻은 정기룡이 가목사로 승진하였다.
- 도승지 윤승훈(1549~1611)이 명나라 유총병을 문안하는 문안사로 상주에 와서 정기룡이 마음을 다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보고서 임금에게 아뢰어 상주 가목사로 승진시켰다.(매헌실기)
1593년 10월 전국적으로 토적들이 일어났다. 충청도에서는 역적의 난이 계속 일어났다.
1593년 11월 30일 상주목사로 승진하고 감사군 대장을 겸임하였다.
- <선조실록> 1593년11월5일 기사에,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행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에도 능합니다. 접대할 적에 성의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을 목사로 올리면 다시 판관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1594년 3월24일 상주판관 장홍한(1570~1594)이 군중에서 순사(殉死)하자 상주목사 정기룡이 직접 염습 반장하였으며 괴걸인이라 칭찬하였다.
- 장홍한은 왜란초기 김산, 개령, 선산, 지례의 4고을의 소모장으로 황간 의병장 박이룡과 함께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참판 정광적의 장계로 상주판관이 되어 정기룡 휘하에서 왜적 토벌에 앞장섰다.
1594년 3월27일 조정에서 내암 정인홍을 상주목사로 제수하였으나, 4월27일 임명장을 받은 정인홍은 5월3일 <사상주목사소>를 올리고 도임을 하지 않는다.
1594년 6월10일 예천권씨에게 장가를 갔다.
- 현재 경북 영주시(당시 영천군)에 살던 선전관 권홍계의 따님이시다. 혼인 후 슬하에 딸 1명을 두었으며, 학봉 김성일의 손자 김시절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하여 1594년 7월 3일 독포대장으로 임명되어 토적들을 토벌하던 정기룡이 다시 중훈대부(종3품 하계)로 가자되고 상주목사로 임명되고, 독포대장과 토포사를 겸임하였다.
각 도 곳곳에서 토적이 일어나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어 다녔는데 남원의 토적 김희와 영남의 도적 임걸년이 가장 횡포하였다.(부여의 홍산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독포대장 정기룡이 난을 평정했다 전해진다.) 서애 유성룡 먼저 전라 병사 김응서로 하여금 잡도록 하였으나 군사가 무너져 물러나자, 다시 정기룡을 독포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독포대장 정기룡이 도적 이복, 김희 등을 토벌하였다.
<선조실록, 8월21일자 기록에, 성룡이 아뢰기를, "상주목사 정기룡은 인심을 얻었고 또 싸움도 잘하니 이제 당상에 올리어 토포사로 삼아 적이 만약 다시 움직이면 상주 낙동강을 막아 지키거나 혹은 물러나 토기(兎機)를 지키게 해야 할 것이며, 왜적이 움직이기 전에 도내에 있는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하자 임금이 매우 온당하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1594년 8월 도적 이복의 목을 베었다. 그 무리들이 정기룡을 피해 김희와 합하였다.
1594년 10월16일 정기룡이 토포대장으로 함양군에 도착하여 밤에 백전에 있던 토적 여럿을 잡았다.(고대일록,10월16일)
1594년 10월19일 정기룡이 북면(현 거창군 웅양면 일대)의 도둑을 잡았다.(고대일록, 10월19일)
1594년 12월11일 토적을 잡기위해 함양군에 도착을 하였다. 20일 토적 김희 무리를 남원 땅 도점에서 습격하여 8명을 죽였다. 22일엔 안음땅에서 토적을 습격하였다.
1594년 12월24일 함양에서 족친 정경운의 외가 7촌서숙 유계선의 딸을 복첩으로 들였다.(고대일록)
- 유계선은 조선초기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뇌계 유호인(1445~1494)의 후손이다.
- 이현일(1627~1704)이 쓴 정기룡의 <시장>에 측실 기록이 처음 나온다.
1594년 12월29일 안음 수령 곽양정이 함양군에 도착하자 정경운과 하동에 사는 친척 정사연 등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눈이 내렸다.(고대일록)
1595년 1월12일 토적 괴수 김희를 산청 단성에서 붙잡았다.
1595년 1월22일 함양에서 정경운과 작별하고 상산(상주)으로 돌아갔다.
1595년 2월28일 함양군에 들렀다.
1595년 3월2일 함양군에 들렀다. 영천 사는 유옥경을 정경운과 만났다. 지난 4월14일 동래성 함락과 부사 송상현의 죽음애 대해 유옥경에게서 자세히 들었다.(고대일록)
1595년 4월 백암 김선계(1563~?)가 상주목사로 제수되나 부임여부는 불투명하고 정기룡과 교체되었다.
- 의성김씨 목사공파 후손들이 교지를 보관하고 있는데 제수된 날짜는 적혀있지 않다.
1595년 4월 상주목사로 재임명되어 명나라 사신 도로 도차사원 임무를 맡았다.
- 상주목선생안에 기록되어 있으나, 교지는 전하지 않는다.
또한 경내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농사를 권장하고 곡식을 쌓아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공급하였으며, 또 상시 병졸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하여 닥쳐올 사변에 대비를 하였다.
1595년 6월19일 명나라 사신 도로도차사원으로 함양군에 도착하여 정경운을 만났다.(고대일록)
- 이 무렵 명나라 장수들이 접대 소홀로 고을 수령과 백성들을 구타하는 일이 허다했다.
1595년 6월24일 함양군에 있었다.
1595년 7월6일 함양군에 있었다.
1595년 8월19일 거창에서 진주로 향하는 체찰사 이원익과 접반사 이항복, 순찰사 서성 등을 만나 시국을 논했다.(백암집)
- 체찰사 이원익은 8월23일 이순신과 김응서를 진주에서 만나 시국을 논했다.(난중일기)
1595년 9월18일과 20일 함양에서 <고대일록>을 쓴 먼 집안인 정경운을 만났다. 정기룡은 상주지역에는 생존한 선비가 500여명, 청장년 백성이 3000명, 적에게 항복한 자가 3000명 있다고 정경운에게 이야기 하였다.
1596년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관사 수리, 촌락 정비, 죽은 시체 매장, 서당 운영 등 목민에 힘썼다.
1596년 윤달7월 일본 교토에 큰 지진이 발생해 수만명이 죽었다. 민심이 동요되자 풍신수길은 자구책으로 조선재침공을 준비하였다.
1596년 8월 장남 익린(1596.8.~1649.4)이 출생하였다.
1596년 10월21일, 영의정 겸 도체찰사 이원익이 선조에게, "기룡의 식견은 기용할 만한 듯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때 조정에서 험한 곳을 점거하고 성을 지키는 것을 상책으로 여겨서 각 도로 하여금 크게 산성을 쌓도록 하며, 경상도는 하삼도 체찰사 이원익이 주관토록 했다. 선산의 금오산은 당초 선산부사 배설이 주관하였으나 배설이 경상우수사로 교체되어 간 후 상주목사 정기룡과 성주목사 이수일이 주관하였다.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이 부산 다대포에 상륙했다.
1597년 3월 경상도 방어군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경상좌도방어사 곽재우가 상의하여 왜군의 재침을 막아낼 장수로 정기룡이 적임이라 정하고, 이원익은 정기룡에게 방문을 보내어 방어군 선봉장으로 기용할 뜻을 말하고, 경상도 28개군의 군사 전부를 지휘하여 적을 격멸토록 했다.
1597년 6월 경상도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가족을 이끌고 구미에 있는 금오산성으로 가서 지켰다.
- 금오산성은 영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도체찰사 이원익은 임금의 명을 받아 금오산성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1597년 7월8일 왜군 14만여 명이 600여 척의 배로 8개 군으로 나누어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1597년 8월7일 나게시마 나오시게 12,000명의 왜군이 의령현을 점령하고, 삼가현을 거쳐 북상하여 고령에 도달하였다.
1597년 8월15일 정기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에 들어가 진을 쳤다.
- 이날 밤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이 병력 400명을 이끌고 적진을 정찰하고, 관죽전에서 왜군 복병을 만나 격전끝에 100여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1597년 8월16일 새벽 정기룡 군사 전 병력과 왜군이 용담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진하였다. 이후 이동현 쪽에 복병울 배치하고 거짓 퇴각을 하다 일제히 공격하여 포위망에 빠졌던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
- 고령전투는 정유재란 시기 육지전투에서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 정기룡 부대에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은 북진 계획을 중단하고, 가토기요마사를 선두로 전주에 들어가 일단 왜군의 좌군과 합류하였다.
- 고령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정기룡은 고령현에 들어가 궁사대회를 베풀어 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 고령전투의 승리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보고되고, 며칠 뒤 적의 수급이 말에 실려 오자 이원익 이하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탄하였다.
한편, 초계에서는 장군 휘하에서 아장으로 활약하던 이경령(1541~1597)이 장군의 명령으로 감물창진(현 합천군 청덕면 대부리 부곡)과 통하는 '가매실나루'에서 왜선 1척을 수장시키고 육지에서 왜적을 추격하다 유탄에 맞고 향년 57세로 숨지자 장군께서 손수 시신을 염습하고 군례에 따라 장사하였다. 장군은 지체없이 그 전공을 조정에 상주하여 수문장겸사복시정으로 증직하였다.)
1597년 9월20일 정기룡은 충청도 직산 소사평전투, 화덕전투, 형강전투에서 패하고 크게 밀리던 왜군부대 중 가등청정 부대를 만나 왜적을 많이 살상하였다.
- 정기룡은 유격병 4백여 명을 거느리고 보은방면에서 왜군을 공격하려다가, 적암에서 가등청정 군사와 짙은 안개속에서 충돌하여 왜적을 많이 죽이고, 기마연락을 보냐어 백성들로 하여금 빨리 피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령전투 전공으로 9월22일 절충장군으로 승진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10월 말 경 명나라 군대의 출병이 결정되었다. 명군 36,000명, 조선군 11,500여 명 등 총 46,500여 명으로 조.명연합군이 구성되어 울산 도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 정기룡 휘하 1,000명은 좌.우협군 중 우협부대에 편성되었다.
- 좌.우 양협군은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총지휘하고, 조선에서는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였다.
1597년 12월7일 김산 아천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남은 왜적들이 상주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였다.(고상증의 <용사실기>에 나온다.)
1597년 12월20일 명나라 군대와 함께 경주에 주둔한 왜적을 격파하고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왜적들은 울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1597년 12월22일 울산 도산성을 새벽에 공격하여 수급 400여 개를 베었다.왜적들은 도산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1597년 12월23일 명나라 경리 양호와 합동으로 함께 도산성을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명나라 유격장 모국기와 함께 선봉장이 되어 적병의 수급 660여 개를 베었다.도산성 안에 불이나서 왜군이 많이 타 죽었다.
1597년 12월24일 부터 1598년 1월3일까지 도산성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성안의 왜적들이 추위, 배고픔, 갈증으로 많이 죽어나갔다. 서생포로 부터 왜군 지원병이 속속 도산성으로 진군하였다.
1597년 12월27일 왜군이 휴전을 요청하였으나, 항복을 원하는 명나라와 강화 후 안전한 철수를 원하는 왜군의 입장이 맞지않아 협상이 결렬되었다.
1598년 1월2일부터 3일까지 왜적의 배 수백척이 서생포와 염포로 부터 도산성에 포위된 가등청정을 구원하기 위해 대거 내습해 왔다.
- 비가 온뒤 강추위 때문에 조.명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력이 약해졌다.
도산성을 함락하기 직전 명나라군이 크게 패전하자 일방적 철수로, 정기룡을 비롯한 경상우도 절도사 소속 병력도 경주로 후퇴를 하였다.
- 조선군 사망자 1천여 명, 부상자 3천여 명, 명군 사망자 4천800명, 부상자 6천명 그리고 왜군 사망자 추산 6천명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전투가 끝났다.
- 울산성 제2차전투(9월11일부터 시작)엔 정기룡은 참여하지 않았다.
1598년 1월10일 전후 경상좌도 경주를 지키고 있다가 경상우도가 비워있으므로 유성룡과 도원수 권율이 의논하여 경상우도 본진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으로 본진이 있는 성주로 돌아왔다.
1598년 1월11일 신녕현감 오한 손기양이 전날 전 병사 김응서를 만나고 이날 성주에 와서 우병사 정기룡과 만나 시국을 논했다.(오한집)
1598년 1월 김산군 아산촌과 상주 목통현에서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 또 거창군 연송촌, 거창군 가조현에서도 많은 왜적을 살상했다.
- 거창군 모곡에서 항복한 왜적 사지지를 시켜 많은 왜적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항왜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의심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이 일로 인해 한 평생 한(恨)이 되는 일로 여겼다.
- 적병의 수급을 명나라 장수 조승훈에게 주어서 도산성1차 전투 패배의 책임을 속죄하도록 하였으나 조승훈은 사양하고 적병의 수급을 받지 아니하였다.
1598년 1월23일 충청병사 이시언이 도원수 권율의 명령으로 정병 5~6백 명을 뽑아서 정기룡 부대와 합세하였다.
1598년 1월26일 적군을 제압하는 일체의 일은 스스로 결단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리는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 유서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에게 선조가 유시하는 글로 내용은 이렇다.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에게 유시한다. 경은 한 방면의 위임을 받았으니 체찰하는 직임이 가볍지 않다. 무릇 병졸을 동원하여 기회에 대응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군을 제어하는 모든 일상의 일은 스스로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장(典章)이 있지만, 혹시 내가 경과 함께 독단하여 처치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밀부(密符)가 아니면 일을 시행할 수가 없다. 또 뜻밖에 일어나는 간사한 계획도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특별한 명령이 있게 된다면 병부(兵符)를 합쳐 보아도 의심이 없는 연후에 마땅히 명령한 일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압(御押)을 찍은 제18부를 내리니, 경은 이를 받아 두어라. 이른 까닭에 유서를 내린다. 때는 만력26년 정월26일이다.
1598년 2월7일 군대를 주둔하는 곳에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하면서 수비하는 계책을 시기에 맞추어 조치하라는 선조의 전지를 받았다.
1598년 2월8일 도원수 권율이 보고한, 정기룡과 한명련(?~1624)이 합세하여 우도의 왜적을 나포해서 벤 19급을 전부올려 보낸다는 장계가 비변사에 도착하였다.(선조실록)
1598년 2월16일 백홍제(1572~1646)와 훈련원부정 박천기 등을 삼가현에 보내 밤을 이용하여 사방에 땔나무를 쌓아 한꺼번에 불을 질러 많은 왜적을 죽였다. 전공으로 백홍제를 포상하도록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1598년 2월20일 경 고령현에 우병영 진을 쳤다. 급한 기별이 들리면 즉시 적병을 토벌하여 잡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1598년 2월24일 가선대부(종2품 문무관)으로 가자되었다.
- 특별히 허리에 금대(金帶)를 띠도록 하였으니 지위와 명망이 더욱 무거워졌기 때문에 정기룡은 한편으로 감격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 서애 유성룡이, 경상도의 내부가 텅 비어있는 것이 다른 도 보다 더욱 심하고 좌도와 우도가 수백 리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중간에 다만 정기룡이 아주 작은 군졸로서 좌도와 우도의 적군이 침입하는 길을 끊고 있으니 표창하는 유지를 가하기 바란다고 선조에게 아뢰자 윤허한 것이다. 선전관 성확이 왕명을 가지고 왔다.
1598년 2월28일 왜적이 거창군으로부터 지례현을 침범하려고 하기 때문에 즉시 별장 한명련과 군관 정구룡(1563~1598.9)을 보내어 왜적을 공격하도록 하고 김산군수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지례현감과 함께 합세하여 우지현을 방비하여 왜적이 침범해 오는 길을 끊도록 했다.
1598년 3월2일 직접 권빈역(합천에 위치한 역)에 있는 왜적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삼가현으로 도망해 버렸다. 삼가현에 진군하니 왜적은 합천군과 초계현에 있는 왜적과 함께 모두 도망해 버렸다.
1598년 3월6일 선종에게 소장을 올려 작산(作散)한 관원의 도망한 죄를 중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고 또정인홍을 다시 향병대장으로 임명하기를 청하였다. 또 허리에 나무패를 차게 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 선조실록 3월19일 기사에, 경상병사 정기룡과 전라감사 황신이 호패법 시행을 요청하였으니 우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우선 시행하도록 명령한다고 적고 있다.
1598년 3월24일에서 25일 합천군 삼가현 율원 전투에서 명나라 총병 해생과 연합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하였다.
- 선조실록 4월3일 기사에, 마 제독과 선조와의 대화에서 마 제독은 지난 3월24일 정기룡이 적 24명의 목을 베었다 하고, 명나라 장수들도 적의 수급 23개를 베었다고 적고 있다.
- 매헌실기에는, 3월24일 명나라 부총관 해생과 연합으로 왜적 목 73개를 베었는데 이를 모두 명나라 군대에 주었으며, 왜적에게 잡힌 포로 100여 명을 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 정경운의 고대일록에는, 우병사 정기룡과 별장 김응서가 적의 목 80여 급을 얻었다고 적고 있다.
4월15일 산음현감 최발이 왜적이 산음현 생림리를 침범한다고 보고를 하자 16일 한명련과 함께 해가 질 때에 빨리 달려서 적 진지 좌.우에서 공격하여 많이 살상을 하였다. 남은 적병이 진주로 돌아갔는데 밤이 깊어 뒤쫓지 못하였다.
4월20일 함양 사근역 전투에서 명나라 부총병 이령이 적병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명나라 군인 700여 명을 임시 지휘하였으며, 명나라 도독부에서 신패(보물 669-2호/도독 마귀가 전달), 명나라 도찰원에서 표패(4월1일 전달), 명나라 감군 사세용은 증정시 1수(대도독 경운 정장군 존장에게 무원전수자 사세용이 지어보낸 시)를 내렸다.
- 부총병 이름은 분명 '이령'이다. 매헌실기에 적힌 '이절'이 아니다. '이절'이란 이름은 명나라 부총병에 없다.
- 선조실록 4월20일 기사에도, 부총병 이영이 군대 1백30명을 거느리고 안동을 출발하여 거창으로 가다가 사근역에서 적과 마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헌실기와 군인 수가 차이가 난다.
1598년 4월22일 전 사량만호 송발의 무죄를 해명하여 구원해 주었다. 송발(생몰년미상)이 부임하고자 한 곳은 통제사 원균의 막하인데 1597년 7월15일 칠천량해전 패배로 갈곳이 없게되자 도원수의 절제를 받으며 정기룡 막하로 와서 공을 세우자 정기룡이 선조께 장계를 올려 구원하여 주었다.
또한, 임금에게 군량을 공급해 주기를 건의하였으며, 여러 별장들을 나누어 보내어 진주, 사천, 단성, 창원, 진해, 고성, 곤양 등 여러 곳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1598년 6월15일 창녕 영산현에 있는 왜적을 공격하여 적군을 패퇴시켰다. 해가 저물어 끝까지 뒤쫓지 못하여 다만 적병의 머리 50여 개만 베고 포로로 간 33명을 구출했다.
1598년 6월29일 합천 야로현 동쪽 숭산에서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도망가는 바람에 포로가 된 백성 9명과 소.말 10여 마리를 구출했다.
1598년 7월8일 고령현 북쪽 둔덕산 인근에서 왜적 1천여 명의 선봉대와 접전을 벌여 베어 죽인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1598년 7월20일 초계현과 고령현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1598년 7월27일 여러 별장들을 나누어 정하여 여러 고을의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하였다.
또한 1598년 8월12일 적군의 괴수에게 항부하여 거짓으로 단성현감이라 부르던 안득을 잡아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실을 선조께 계문하였다.
- 8월23일 계문이 선조에게 보고되었다. 선조실록8월23일 기사에 나온다
1598년 8월29일 시마즈 군의 장수 이로사모가 6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1598년 9월18일부터 20일 새벽까지 남강과 진주의 망진산왜성, 24일 영성왜성과 곤양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동양창(선진리 왜성)으로 육박해 나아갔다.
1598년 9월28일 사천현의 옛 성을 공격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격하여 성을 되찾고 왜적 장수 이선도를 목 베었다. 이 전투에서 장군이 아끼던 군관 정구룡도 장군의 애마를 타고 공을 세우고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러나 10월1일 사로병진작전으로 동양창(사천왜성)전투에서 명나라 동일원의 군사와 함께 공격하다가 명나라 군사가 패전하자 많은 전사자를 내고 진주를 거쳐 삼가현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정기룡은 맨 먼저 성에 올라갔고 맨 뒤에 나왔는데 먼저 달아났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다. 선조실록 10월23일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1598년 11월16일 사천현 동양창(사천 선진리왜성)에서 철수하여 순천성에 명나라 수군과 조선수군에게 포위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한 시마즈 요시히로군의 배를 타지 못한 병든 군사 등 50여명의 목을 베었다.
- 이후 시마즈군은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불멸의 노량해전에서 싸워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철수한다.
1598년 12월1일경 창원부의 옛 병영으로 돌아왔으며, 전쟁이 종료되었다.
1598년 12월18일 오위도총부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고, 상주로 돌아와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고 분황제를 지냈다.
1599년 1월24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차 임명되어 임금의 명령을 받았다. 창원도호부로 와서 옛 군영을 다시 회복하였다.
1599년 3월22일 임금의 전지를 받들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 구제하였다.
1599년 9월20일 임금의 전지를 받들어 왜놈들이 재차 침범할 것을 대비하여 다시 군대 무기를 수선하고 힘을 다하여 군대를 정비하였다.
1599년 10월2일 명나라 유격 모국기가 관소에 찾아온 선조 임금께, "귀국의 수로 총병 이운룡(1562~1610)과 육로 총병 정기룡은 두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것은 이 두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분부하여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하외다."하였다.(선조실록)
1599년 10월10일 선전관 이사성이 임금이 내린 표신(문표)을 가지고 왔기에 절하고 받았다.
- 내용을 왜적이 재침하려는 변란을 대비해 선척 및 격군 등의 일을 미리 조치하라는 것으로, 우병사.순찰사.통제사 등에게 전지를 받들게 하였다.
1599년 11월3일 소속된 군병의 수효를 임금에게 계문하였다.
- 경상우병영 소속 군병은 속오군 415명, 출신 93명, 군공 249명 총 748명임을 계문하였다.
- 출신은 과거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뱌슬에 나서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1599년 12월3일 정유재란 초기부터 왜적의 괴수에게 항부한 고성.남해.진주 지방 출신 박사빈 등 10명을 효수하여 세상 사람들의 심정을 통쾌해 주기를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1599년 12월10일 무기를 만들어 준비하여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으로 삼기를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 활과 화살을 만드는 도구가 부족하니 소의 뿔.힘줄과 자작나무 껍질, 활줄 등의 물건과 수량을 넉넉하게 내려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1599년 12월13일 변방의 시급한 일은 봉화를 연달아 잘 피워 드는 일인데, 충청도 연풍현(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관원이 봉화를 조심스럽게 들지 않는 형상을 임금에게 계문 진달하였다.
또한, 올해 둔전에서 추수한 원수 5백73섬에 대해 임금에게 계문하였다.
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전공이 있는 사람에게 호역을 면제해 주라는 명령을 거행하지 않는 사실을 임금에게 보도하였다.
또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처자를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구휼하여 앞으로 닥쳐오는 사람들을 권장하기를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 거창군의 훈련원정 조개와 주부 김응, 함안군의 첨정 정구룡, 성주의 부정 도흥종과 주부 이중명 등은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여, 남은 식구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서 구휼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1599년 12월30일 도망한 장수 유대립은 벼슬아치의 명단인 사판에서 이름을 깎아버리고, 한각 등은 형률에 따라 죄를 논정할 것을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1600년 1월1일 우후(종3품 무관직) 송후송이 지난 해 12월30일 죽었는데 변방의 중요성으로 인해 관직을 비울 수 없으므로 젊고 용력있는 사람을 각별히 가려서 임명해 줄 것을 계청하였다.
1600년 1월10일 경상우병영에 군관이 30여 명 뿐이라 변고가 생기면 국가의 계획에 큰 근심이 되니 참작하여 처치해 달라고 계문 진달하였다.
1600년 1월24일 왜적의 머리를 벤 사람이 명나라 장수 모국기의 군문에 소속된 편장 첨자명에게 왜적의 머리를 빼앗긴 일과 또 왜적의 머리를 벤 사람도 마땅히 다른 예에 따라서 논공해야 한다는 일을 임금에게 회계하였다.
1600년 2월2일 활을 잘 쏘는 보인을 시험해 뽑아서 변경의 방어을 충실할 것을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1600년 4월4일 의령과 함안 경계 정암진에서 배가 뒤집어져 군인 수 명이 빠져 죽었으니, 책임을 다하지 않은 함안군수 소응종을 추고할 것을 순찰사 김신원(1553~1614)에게 매우 급히 통첩을 보내 징계할 것을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1600년 4월14일 경상우병영의 원방군에 결원이 많아 충청도에 있는 6백 명을 이속시켜 달라고 지난 3월16일 임금의 재가를 받았는데 첨방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매우 근심이라고 임금에게 회계하였다.
1600년 4월24일 전라도 광양현에 사는 정주복 등 남녀 18명이 일본에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고국으로 왔으니 상을 내려 주기를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1600년 6월1일 임금의 교서를 받들어 재차 박사빈이 왜적에게 항부한 죄상을 계문하고 효시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기를 요청하였다. 또 도망한 장수 유대립의 직명과 한각 등의 범한 죄상을 임금에게 회계하였다.
1600년 8월 영남과 호남지방에서 무관에 새로 급제한 사람은 북방의 변방을 지카는 데에 보내지 말고, 수군에 보내어 남방을 지키는 것에 충실할 것을 임금에게 계청하였다. 또 군사임무에 관한 설계와 준비를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임금에게 계문 진달하였다.
1600년 10월30일 함양군에 사는 족친 정경운이 우병사 정기룡이 편지와 함께 부쳐 온 소금 몇 말을 받고는 보물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고대일록)
1601년 1월22일 가선대부(종2품)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었다
1601년 2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서 체임되었다.
1601년 3월18일 도체찰사 이덕형이 체임된 정기룡과 김응서를 우도방어사와 좌도방어사로 삼는다고 비변사에 치계하였다.(선조실록)
1601년 3월21일 경상우도 방어사(종2품)로 임명되었다.
- 임금의 유지와 병부를 받고 숙배사은 하는 날에 임금께서 정기룡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ㅈ극함을 칭찬하면서 손수 소학 1부를 내려 주셨다.
- 1601년 이후 임금에게 계문한 초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이 매헌실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1602년 1월12일 경상도체찰사 이덕형이 방어사 정기룡이 왜란때 왜적에게 부역했던 남해현 사람들을 잡아 가두자 불만이 많다고 아뢰자, 임금이 비변사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고 전교를 하였다.(선조실록)
- 우병사 시절 정기룡은 적에게 부역했던 남해 고을 사람들을 주륙하기를 청하자, 해사가 회계하여 차등 있게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정기룡이 방어사로 와서 그때의 사람들을 다시 가두게 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벌여진 것이다.
윤달2월16일 남해 사건으로 김해 도호부사(종3품)로 좌천 임명되었다.
1602년 3월14일 함양에 사는 족친 정경운이 정기룡이 김해 부사로 임용됐다는 소문을 들었다.(고대일록)
1603년 김해 도호부사로 재임하였다.
1603년 2월6일 정경운이 김해부사 정기룡의 답서를 받아 보았다.(고대일록)
1603년 3월4일 공신도감에서, 정기룡도 왜란때 힘써 싸운 공이 있다고 아뢰자, 육군의 장수는 별달리 적의 예봉을 꺾은 일이 없으므로 훈공이 있다고 하는 일은 모를 일이다라고 선조가 전교하였다.(선조실록)
1603년 4월28일 공신도감에서, 정기룡 등 26인을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 공로가 있다고 취품하자, 선조가,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전교하였다.(선조실록)
1603년 7월3일~4일 폭풍우로 김해를 포함한 경상도 전역이 피해가 매우 심했다.
1603년 9월9일 능묘 중 경상도 김해에 있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능을 수리하라는 전교에 의해 수로왕릉을 정비하였다.(선조실록)
1603년 9월20일 남해사는 친족 정수명이 김해에서 함양으로 와서 족친 정경운에게 김해부사 정기룡이 평안하다는 소식을 전했다.(고대일록)
1604년 1월23일 밀양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1604년 2월10일 중도방어사의 직책을 겸무하였다. 치안유지와 변란대비 직책이다.
1604년 2월22일 공신도감에서 공신의 등제를 규정하고 4월에 회맹제를 개최키로 임금께 아뢰면서, 남쪽 변방 밀양부사 정기룡 등은 조석으로 사변에 대비해야 하기에 불러오기 어렵다고 하였다.(선조실록)
1604년 3월29일 경상도 순검어사 유간이, 김해부사 정기룡은 무비를 정비하고 잔약한 백성을 무휼하였으며 청빈하게 살아가면서도 신산한 고통을 달게 여겼으니 특별히 논상하도록 장계를 올렸다.(선조실록)
1604년 5월19일 청도군수(종4품)로 좌천되었다.
- 이때 정기룡을 거짓으로 만든 공신으로 시기하고 음해하면서 참소한 사람이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1604년 7월27일 밀양부사로 재 임명되었다.
- 밀양부의 모든 백성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정기룡을 모함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다시 부사로 임명한다는 임금의 명령을 받았다.
1604년 8월5일 가의대부(종2품)로 특별 승진하였다.
- 김해부사로 재임시 백성들을 구휼하고 병졸을 훈련하며, 청렴하고 결백하여 착하고 어진 정치를 한 것이 온 나라에 으뜸이 되었기 때문이다.
1604년 11월8일 자헌대부(정2품)으로 특별승진 되었다.
1605년 4월16일 선무원종공신 1등 5위에 녹훈되었다.
1605년 7월1일 영남과 관동지방에 유래에 없는 큰 홍수가 발생하였으며, 밀양도 큰 피해를 입었다.
1605년 7월 밀양부사에서 체직되었다
1605년 9월14일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었다.
- 밀양부의 백성들이 청정비를 세워 정기룡을 기렸다.
1605년 9월30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무하였다.
1605년 12월22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겸 울사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1606년 1월19일 임금의 유지와 35번의 병부를 받고 임소인 울산에 부임하였다.
1606년 11월7일 경상좌수사 최강과 함께 해변에 나아가 수군과 육군의 군용을 점검했다.(선조실록, 11월12일)
1607년 2월5일 쇄환사 경섬(1562~1620) 일행이 울산군에 도착하자 밤이 깊도록 술자리를 베풀었다.(해사록)
- 쇄환사 일행 중 하동사람 하종남에게 포로로 간 조카 상린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데려올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1607년 2월15일 체직되어 상주로 돌아왔다. 늙은 어머니의 병이 위중한 이유로 조정에 사직원서를 제출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기 때문이다.
1607년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임명되었다.
- 임명장은 7월 초 상주에 도착한다
1607년 7월3일 조카 상린을 비롯한 포로 1200여 명이 회답겸쇄환사가 부산에 도착할때 함께 돌아왔다.
1607년 7월11일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이 저녁 상주에 도착하였다. 전라병사 정기룡, 대구판관 조정과 모여 얘기하다가 밤이 되어 파하였다.(해사록)
- 전라병사로 임명장을 받고 아직 강진으로 출발전이다.
1607년 8월1일 도총부 부총관(종2품)을 겸무하였다.
1607년 8월26일 평안도 구성도호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연세가 70세인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1607년 8월28일 의흥위 상호군으로 임명되고 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1607년 9월7일 상주로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 안부를 살피라는 임금의 명령을 회수하였다.
1607년 9월22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차 임명되어 진주로 부임하였다.
1608년 선조 임금이 승하하였다.
1608년 3월29일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제수되었다.
1608년 9월4일 전라병사 정기룡이 사적인 일로 상소하였으니 파직시키라고 장령 박건이 아뢰자, 광해군이 정기룡의 상소는 자식으로서 애틋한 정에서 나온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광해군일기)
1608년 9월5일 장령 박건과 6일 지평 이민성(1570~1629)이 재차 전라병사 정기룡를 파직시키라고 아뢰자, 광해군이 이미 유시하였기에 윤허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608년 11월25일 함양의 족친 정경운이 병사 정기룡의 편지를 받고 평안함을 알게 돼 기뻤다고 하였다.(고대일록)
1609년 7월18일 비변사에서, 전라병사 정기룡에 대한 상소와 전쟁에 익숙한 무신으로 오랫동안 병사로 있어 전임시켜야 한다고 아뢰자, 광해군이 합당한 사람으로 천거하라고 전교하였다.(광해군일기)
1609년 7월21일 용양위부호군(종4품)으로 강등되었다.
1609년 9월5일 정기룡이 함양군에 도착하여 정경운과 조카를 만나 얘기하였다. 그후 상주로 향했다.
1610년 2월4일 용양위부호군으로 임명되었다.
1610년 2월14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을 겸무하였다.
1610년 윤달3월28일 상호군(정3품)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으로 임무을 맡았다.
1610년 7월5일 정부인 분성김씨 상을 당하였다. 향년 73세였다.
1611년과 1612년은 정부인 분성 김씨 상중으로 상주에서 3년상을 치렀다.
- 1611년 우복 정경세가 당쟁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 상주로 낙향한다.
1612년 3월 김직재(?~1612) 역옥사건에 연루된 우복 정경세를 체포하러 간 금부도사 조척이 정기룡을 잘못 체포한 사건이 있었다. 4월12일 사간원이 이를 임금께 아뢰었다.(광해군일기)
1612년 9월 정부인 김씨의 3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었다.
1613년 3월7일 경상 좌수사로 임명되어 3월18일 임명장을 받고서 4월2일 울산에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 계축옥사 사건이 일어났다.
1614년 3월18일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경상 좌수사 재임중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체직되어 3월23일 감옥에 투옥되어 4월13일 광해군의 공초를 받았으나 5월20일 무혐의로 보석되었다.(응천일록,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 5월20일 한양의 날씨는 종일 비가 내렸다.(계암일록)
1615년 관직이 없었다.
- 공빈추숭사건과 능창군추대사건이 일어났다.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했다. 허준이 별세하였다. 일본에서는 오사카 전투 패배로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였다.
1616년 1월경 나라를 근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2월24일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비변사에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1616년 3월9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세 번째 임명되어 진주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고향 곤양에서 증조.조부.부 3대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분황제를 거행하였다.
-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했다.
1617년 2월17일 조정에서 통제사 천망단자 15인 중 장군의 이름이 올려져 2월25일 제15대 삼수수군통제사로 임명이 되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겸무하였다.
- 정기룡을 추천한 사람은 문창부원군 류희분(1564~1623)이다. 류희분은 정기룡, 한희길, 유승서를 추천하였다.
- 정기룡위자헌대부행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삼토통제사교지 만력45년 2월25일
1617년 3월7일 임금이 교서를 내려 칭찬 장려하고 상을 내렸다.
1617년 3월10일 임금의 유지와 제2번의 병부를 받았다.
- 교삼도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정기룡 만력45년 3월10일 / 보물669호
1617년 6월2일 전 상주목사 오운이 별세하자 상여수레를 만들어 아들 오여은에게 보냈다.(계암일록)
1617년 6월21일 대마도로 출발할 회답사의 행차가 지연되자 대마도주와 조흥 등이 회답사의 행지를 탐문한다는 사실을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그해 7월27일 삼도수군통제사 관할 충청수영인 공흥도에서 지난 12일 표류된 명나라 어민 41명을 통제영으로 데리고 와서 9월까지 편히 쉴 수 있게 하였다.
- 명나라의 표류 어민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 자세히 나온다.
1617년 12월17일 통제사 정기룡이 활과 화살을 각각 1부씩 올려 보내자, 광해군이 국사에 성의를 다한 것이 매우 아름다운 일이므로 품계를 올리라고 전교를 하였다.(광해군일기)
1618년 1월11일 정헌대부(정2품)로 승진되었다.
1618년 4월26일 광해군이 통제사에게 여러 도감에서 쓸 곳이 많으므로 부채(유선, 칠선)을 2백파를 속히 만들어 5월 안에 속히 올려 보내라 하유하였다.(광해군일기)
1618년 7월5일 숭정대부(종1품 하계)로 승진되었다.
- 교지 정기룡위숭정대부행겸삼도수군통제사경상우도수군절도사자 만력46년 7월초5일
1618년 11월9일 숭록대부(종1품 상계)로 승진되었다.
이달에 장남 익린이 무과별시에 급제하였다.
1619년 5월15일 임금이 통제사에게 내사복시에서 기르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1619년 7월16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체직되었다.
1619년 9월8일 후금 침입 문제 논의 등으로 정기룡을 속히 서울로 불러다가 형편을 보아 차임하여 쓰라고 전교하였다.(광해군일기)
이후 서울에 있었다.
1620년 10월17일 행 지중추부사(정2품)로서 존호를 올리는 문제로 다른 백관들과 함께 임금께 나아가 아뢰었다.
- 존호는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올리던 칭호
1621년 윤달2월13일 보국숭록대부(정1품)로 승진하고 제17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맡아 남해안 방비에 힘썼다.
- 교 삼도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정기룡 천계원년 윤2월13일
1621년 4월3일 지난 1617년 명나라의 표류한 상선을 구제한 사실을 기록하여 임금께 보고한 결과 동지사 임석령.최정운 등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황제의 칙서에 의해 백금과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 당시 표류한 상선 4척을 발견하여 정진명 등 14명을 구출하고 의복 등을 나눠주고 조정에 중국 상선 표류사건을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으며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 사건를 보고하자 중국에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백금 등을 하사하였다.
1621년 3월초 상주에 거주하는 전식(1563~1642)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 전식은 1619년 모친상, 1620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시묘하며 슬픔에 겨워 몸에 병이 생기자 위로차 방문를 하였다. 정기룡이 별세하자 제문를 적었다.
1622년 2월28일 통제영 진중에서 순직하였으며, 4월3일 무진일에 상주 사벌동에 영면하셨다
1773년(영조 49) 1월20일 사후 151년 만에 충의(忠毅) 시호를 받으셨다. 교지 내용은 이렇다. <보국숭록대부행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정기룡증시충의공자 임란불망국왈충 치과살적왈의> 忠은 '전란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며, 毅는 '과감함을 다하여 왜적을 죽였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
2004년 대한민국 전쟁기념관의 '1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으셨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이다. 또한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장군 사후 124년인 1746년 상주목사 이석표는 <매헌실기 서문>에 적기를, 정기룡이 없었다면 영남 지방이 없어진 것이고, 영남지방이 없어진다면 우리 국가가 없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선조 임금이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이 기록이 최초이다.)
1960년대 후반들어 월남전 파병과 더불어 육군 장성들을 주축으로 국군의 정훈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바다엔 이순신 육지엔 정기룡>으로 평해지고 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4년 나림 이병주도, 해상에서 연전연승한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며, 육상에서 연전연승한 장군은 정기룡 장군 하나뿐이다. 라고 하였다.
일화
편집- 할아버지가 명당을 획득, 발복하여 장군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
- 이미 죽은 어머니에게서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
- 친구들과 산에 갔다 호랑이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살려 두라는 산신령의 명령으로 살아났다.
- 공부할 때도 하늘이 장군을 알아보고 용마와 신검을 주었다.
- 19세 무렵에 진주에서 소금장수를 하였다.
- 19세 무렵 진주에서 관노비 생활을 하였다.
- 19세 무렵 진주 남강에서 전쟁놀이를 하다가 불어난 홍수로 인해 전쟁 놀이 하던 친구 한 명이 빠져 죽자 죄책감으로 20세에 홀어머니와 몰래 상주로 이사를 갔다.
-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게 되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그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정기룡이라고 한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 정기룡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하였으며, 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서 강씨 부인을 잃는 슬픔에도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강씨 부인을 잃은 후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권씨)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나이가 들수록 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씨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어느새 노처녀가 되고 정기룡 장군을 만나고 나서야 정기룡 장군과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정기룡 장군은 전란 중의 상황과 그의 옛 부인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의 부인(권씨)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어 정기룡 장군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 말이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정무수로 정기룡이 된 사연은 이렇다. 정무수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그 당시 임금인 선조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무수였다고 한다. 그가 무과 시험에서 무용이 출중하여 선조가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결혼에서도 든든한 처가를 얻게 되며, 정절을 지키며 죽은 첫재 부인 강씨 다음으로 들어온 둘째 부인 권씨는 정기룡이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무기와 의병을 준비해 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였다.
- 20세 무렵에 상주 경천대에서 용마를 얻었다.
- 권씨 부인이 결혼선물로 가져온 준마를 타고 전쟁을 치렀다.
- 추풍령 고개에서 줄공개와 화공전략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 관노에서 속량되어 임진란에 공을 세웠다.
- 모든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뒤 상주성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가족 관계
편집- 아버지: 정호(鄭浩)
- 어머니: 분성김씨(족보에는 경주김씨로 되어 있음 / 부친 김의손) * 큰어머니 : 남양홍씨
- 형: 정몽룡(鄭夢龍) / 모친 남양홍씨 /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벼슬이 참봉에 이르렀으며, 아들은 정수린으로 후에 훈련원정 벼슬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시 삼촌인 정기룡의 참모로서 끝까지 활약하였다.
- 형: 정인룡(鄭仁龍) / 모친 분성김씨
- 본처: 진주강씨(晉州姜氏), 강세정(姜世鼎)의 딸
- 후처: 예천권씨(醴泉權氏), 권홍계(權弘啓)의 딸 / 1594년 6월10일 혼인 / 자녀 딸 1명(학봉 김성일의 손자며느리)
- 측실: 함양유씨 / 뇌계 유호인(1445~1494) 후손으로 <고대일록>을 지은 정기룡의 먼 집안인 함양의 명문가인 정경운(1556~1610)의 외가 7촌 서숙 유계선의 딸 / 1594년 12월24일 혼인
- 측실 : 달성서씨 / 기록 없음
- * 아들: 익린(翼麟), 득린(得麟), 덕린(德麟), 시린(時麟) / 딸 1명
관련 문화재
편집드라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외부 링크
편집- 한국종합인물정보 시스템-정기룡
- 충의사 여행기 Archived 2016년 3월 11일 - 웨이백 머신
- 2004년 12월 이달의 호국인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육지의 '이순신 장군' 하동의 정기룡 장군
전임 류지신 |
제15대 삼도수군통제사 1617년 4월 - 1619년 9월 |
후임 김예직 |
전임 김예직 |
제17대 삼도수군통제사 1621년 4월 - 1622년 2월 |
후임 원수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