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각
생애편집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
처음 예문관(藝文館)에 뽑혔다가 얼마 후에는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었다. 이후부터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고 여러번 시강원(侍講院)에 옮겨 임명되었으며, 네 차례나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여섯 차례나 간관(諫官)의 임무를 다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다.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 중에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권신 이기(李芑) 등을 비난하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하고 왕에게 바침으로써 정미사화(丁未士禍)를 일으켰다.[2]
1550년 한성부우윤, 1551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552년 동지중추부사 재임 시절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