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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영(鄭宗榮, 1513 ∼ 1589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仁吉(인길), 호는 恒齋(항재)이다. 첨지중추부사 鄭溫(정온)의 증손이며 조부는 정국공신 鄭允謙(정윤겸)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鄭淑(정숙)이며 어머니는 忠義衛(충의위) 金季勳(김계훈)의 딸이다. 金安國(김안국)의 문인으로 淸白吏에 녹선되고 4도의 관찰사와 6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고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로 致仕하였다.

목차

생애편집

靖國功臣 鄭允謙의 장손이요 草溪君 鄭淑의 장자이니 조선 중종조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고 중종 38년(154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헌납, 부수찬, 지평, 교리를 역임하고 명종 7년(1552년) 淸白吏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을 거쳐 강원.경상.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팔계군에 봉군되었다. 명종 18년(1563년) 평안도관찰사로 가서 평양에 서원을 세워 학문의 진흥발전에 힘쓴 결과 서북인의 유학진흥과 문화발전에 큰 공적을 세웠다. 한성판윤을 지내고 명종 22년(1567년)에는 진향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6조의 판서 등 공조, 형조, 병조, 예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1회이상 모두 거치고 우찬성을 지낸 뒤 耆老所(기로소)에 들고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乞退(걸퇴)하니 임금은 중사를 보내 환송하게 하였으며 모든 문무백관이 환송연에 참여하여 전송하는 車馬(거마)가 한강을 메웠다고 한다. 이전에 판서로 재직했던 6조 각부에서는 각각 전별연을 준비하여 별도의 환송연을 치루니 모든 사람들이 恩禮(은례)로서 치사하는 鄭宗榮을 크게 사모하였다. 원주 향리로 내려와 자질들과 후진들을 교도하다가 그해 7월에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부음이 전하니 선조는 輟朝(철조) 2일하고 관비로 예장하였으며 숙종때 靖憲(정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1589년) 2월 1일 "八溪君 鄭宗榮이 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八溪君 鄭宗榮이 致仕하고 고향을 돌아갔다. 종영은 風疾(풍질)이 있어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勳封(훈봉)으로 집에 돌아갔다. 임오년(1582년) 이후부터 여러차례 치사를 청하였는데 이때 집안사람에게 月俸(월봉)을 받지 말도록 하고 간절히 사퇴하여 윤허를 받아 횡성의 향리로 돌아갔다. 상이 驛馬(역마)를 주어 호송하도록 명하고 引見(인견)하고자 하였으나 걸음걸이가 불편하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中使(중사)를 시켜 한강가에서 전송하게 하였는데 백관 이하가 도성을 비우고 나와서 전송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종영은 이때 나이 77세였는데 出身(출신)한지 47년이었다. 본조의 사대부로서 공로가 높고 명망이 중한 사람은 대부분 禍敗(화패)로 일생을 마쳤고 벼슬이 높고 나이 늙은 사람은 시골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宗榮은 홀로 恩禮(은례)로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조야가 처음 보는 일이어서 칭찬하고 사모하여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라고 하였다.
선조 22년(1589, 만력 17,수정실록) 8월 1일(병자) "판중추부사로 치사한 정종영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한 정종영(鄭宗榮)이 졸하였다. 종영의 자는 인길(仁吉)이다. 도량이 넓고 굳세었으며 삼가고 부지런한 자세로 공사(公事)에 힘을 다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명종 초기에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바로 종영의 서고모(庶姑母)였다. 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적에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난정이 참람하게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서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양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난정의 어머니가 난정을 경계하기를 "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하였으므로 화를 면하게 되고 예전처럼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당저(當宁)때에 벼슬하게 되어서도 청망(淸望)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도학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후진을 소외하였으며 또 이발 등에게 미움을 받아 탄핵을 거듭 입었다. 상이 그를 정직하게 여겨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나이가 퇴휴(退休)할 시기에 이르렀으므로 명절(名節)을 잃지 않게 되었다. 자손이 많은데 아들 정혹(鄭㷤)은 명관이 되었다.

신도비문편집

중국 왕조가 명나라일 당시 조선국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의금부 판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팔계군으로 치사한 정공의 신도비의 명과 함께 쓴 서문

가선대부 원임 이조참판 겸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동지성균관사 李端夏(이단하)[1]가 撰(찬) 함 증손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鍮(유)가 篆(전)함 외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정창도가 書(서)함

고 찬성 팔계군 정공은 문학과 덕망으로 중종에서 선조에 이르는 사조의 명신이었다. 단하는 일찍이 집안 사람이나 고향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공에 대해 옛부터 내려오던 이야기와 그에 대해 남아있는 운치를 듣고 나서 염모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몇 배나 되었다. 그러다 지금 공의 증손인 정유(鄭鍮)와 정석윤(鄭錫胤), 외증손인 최문식(崔文湜)등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단하를 찾아와 "조상의 묘비문을 잘 지어 비석에 새기고자 일찍이 돌아가신 대재께 글을 써주기를 부탁하였는데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관사에 엄연해 있으니 이제 선생께서 계속해서 글을 지어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 글을 맡아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단하는 여러분들의 청을 사양하고 글을 짓지 않았다. 사사로운 개인의 의견에 의지하지 않고는 차마 글을 마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청천선생(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이 지은 행장과 가보 사이 사이에 끼어있는 옛 글들을 채록하여 명을 서술하게 되었다.

공의 이름은 종영(宗榮)이고 자는 인길(仁吉)이며 호는 항재(恒齋)로 草溪鄭氏이다. 고려시대 예부상서를 지낸 배걸(倍傑)이 윗대 조상이다. 이분의 소생인 문(文) 역시 예조에서 벼슬하였는데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다. 그 후손인 윤기(允耆)와 선(僐) 모두 진현관 대제학을 지냈다. 편(便)때에 왕조가 조선으로 바뀌었는데 이때부터 원주에 은둔해 살아 자손들 역시 그대로 집안을 이끌었다. 이분의 태생인 흥(興)이 원주에 살면서 남에게 은덕이 될 만한 일들을 많이 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이분이 공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증조할아버지 온(溫)은 무과로 통정에 올랐는데 나중에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청백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특별히 해운판관에 제수되었다. 할아버지 윤겸(允謙) 역시 무과로 등과했고 정국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그 공훈으로 청계군(淸溪君)이라는 봉작을 받았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아버지 숙(淑)은 당진현감이었으며 자식의 공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경주김씨 충의위 계훈(季勳)의 딸인데 계림군 곤의 후예이다. 1513년(계유년,1세) 11월 16일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기질이 있었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슬퍼하고 사모함이 어른과 같았다. 어릴때는 병약하여 혼자서 공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자라면서 모재선생(대제학 金安國)을 스승으로 모셔 공부하게 되었다. 성리학 관련 서적을 받아 깊고 세밀하게 모색하니 선생이 자주 칭찬하였다. 1540년(경자년,28세)에 양사(성균관에 설치된 사서재와 오경재)에 올랐고 1543년(계묘년,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승문원)에 있다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1545년(을사년,33세)에 예문관의 봉교로 자리를 옮겼다. 1546년(병오년,34세)에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호조좌랑을 거쳐 평안도 평사로 나갔다. 당시에 을사사화가 크게 일어났었다. 공은 유관(柳灌)의 조카 사위인데도 삼대신(윤임, 유관, 유인숙)의 죽음에 대하여 사필을 잡고 법대로 쓰는데 숨김이 없었다. 그 결과 동료들 가운데에는 화를 당한 사람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이 평소 몸가짐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했었고 지적 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외직에 나가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1547년(정미년,35세)에 호조정랑에 제수되었다.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부모님이 계시니 빨리 돌아가도록 일찍 전별연을 하고자 한다"고 공에게 이르니 "교대할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국법을 어기겠는가"라고 대답하고 평상시처럼 강변을 순찰하니 절도사가 탄복하였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동고선생(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이 관서지방에서 돌아오면서 공을 힘써 조정에 추천하여 사간원 헌납으로 소환된 후 양서(황해도와 평안도)민들의 어려운 점을 임금께 아뢰었다. 1548년(무신년,36세)부터 1552년(임자년,40세)까지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다가 부응교로 승진했으며 사헌부로 옮겨서는 지평과 장령을 지냈고 그 사이 예조와 공조의 정랑, 사복시의 첨정과 부정을 지냈고 춘추관의 기주관과 선전관을 겸하였다. {(일화1)이 사이에 전랑(銓郞;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을 통칭)에 천거된 적이 있었으나 윤원형(尹元衡)의 반대로 나가지 못하였으며, (일화2)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진복창(陳復昌)이 자신의 상관인 부제학이었는데도 하사주에 취해 진복창을 꾸짖으면서 술잔을 당겨 벌주를 들게 함으로써 곁에서 보는 사람을 떨게 하였고, (일화3)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유신사람 최하손이 권간들이 현에 "중대 사건으로 여러 사람이 잡혔지만 남은 무리가 있다"고 제소하면서 그 화가 사림(士林)에게 미칠 것을 바라고 대사헌으로 있던 진복창도 그 일을 엮어 보려고 노력하자 공은 "이것이 사헌부에서 맡을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이 안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로 진복창이 공을 싫어하였으나 해치지는 못하였다. (일화4)명종께서 조신 가운데 청렴결백한 사람을 뽑으라는 명을 내리자 공도 선발되었다. 이에 대궐 뜰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품 또한 하사하였는데 그 총애함이 남달랐다. 1553년(계축년,41세)에 상을 당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였다. 공은 여묘살이 할 때 예를 다하여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이후 임금께서 교리로 불러들였으며 이후 집의, 의정부의 검상과 사인, 응교, 전한을 역임한 후 직제학에 이르렀다. 삼사에는 전후에 걸쳐 임명되었는데 이렇게 두 번 이상 같은 직임을 맡은 적이 많았다. 1557년(정사년,45세)에 형조참의에 올랐다. 이때 조정에서 임시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책을 참고하여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의 구두를 찍었는데 공이 위원장이 되어 그대로 일을 관할하였다. 일을 마친 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승진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1559년(기미년,47세)에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이조로 옮겼다. 1560년(경신년,48세)에 다시 도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가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임기를 마친 후 봉작을 받았고 한성부 우윤을 맡았다. 당시 이량(李樑)이라는 인물이 멋대로 권세를 부리면서 공을 시기하여 오랫동안 산반(散班)에 두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1562년(임술년,50세)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곳에는 윤원형의 무리들이 군읍의 수령으로 많이 나가 권세를 믿고 탐욕스럽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공은 그들 모두 벼슬을 떼고 내쫓아 윤원형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오망한 승려가 임금의 은밀한 명령이라고 칭하면서 인종의 태를 묻은 산의 나무를 베어버리고자 하니 공이 엄히 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문정왕후가 진노하여 관찰사를 바꾸라고 명을 내렸는데 삼사가 합세하고 성균관의 유생들도 상소를 올려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1563년(계해년,51세)에 한성부 우윤에서 좌윤으로 교체되었고 동지의금부를 겸임하였다가 공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하직하고 떠나는 날 따뜻한 털모자와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탄자를 하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재직시 기왕의 일들을 참고하여 그릇된 정치를 통렬히 개혁하면서 자신에게는 검소하고 백성들을 넉넉케 하니 모든 사람이 잘 따랐다. 당시 평안도 풍속이 활쏘기와 말타기는 숭상하면서 유학에는 어두웠으므로 공이 정성을 다하여 배움으로 이끌고자 평양에 서원을 세우고 또 책 출판국을 세웠다. 이후 평안도 사람으로 등과하여 이름을 올린 자가 계속 이어졌다. 임기를 마친 후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도착하기 전에 이조참판의 일을 맡게 되었다. 공의 서고모는 윤원형의 총첩이었다. 원형이 국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붙어서 아첨했지만 공만이 의연하게 자신을 지켰다. 원형이 첩을 처로 한 후 봉작을 위한 명령서를 받았을 때 친속들이 모두 존중하고 받들었을 때에도 공만이 예를 더하지 않았다. 집안 안팎의 사람들이 감정이 쌓여 여러 차레 중상모략으로 화를 입히려 했지만 첩모(난정의 어머니)의 도움으로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원형이 패함에 이르러 비로서 공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566년(병인년,54세)에 한성부윤과 오위도총관에 발탁되었고 1567년(정묘년,55세)에 진향사로 명나라 서울에 다녀갔다가 돌아왔으며 명나라 조정에서 보고들은 바를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는데 그 말뜻에는 슬며시 돌려 타이르는 말도 있고 권하고 경계하는 바가 간절하여 사람들이 모두 바르게 여겼다. 그해 형조판서 자격으로 빈조사로 나갔다가 중간에 병이 나 지체하였지만 그대로 머물러 전위사가 되었다. 1569년(기사년,57세)에 조정에서 남쪽 우환을 살필 사람들로 대신들이 공을 추천하여 전라도를 순찰하였다. 일을 마친 후 형조로 돌아와 일을 맡았다. 1571년(신미년,59세)부터 1579년(기묘년,67세)까지 호조와 공조의 판서는 한번 하였고 병조와 이조의 판서는 두 번 하였으며 예조와 형조의 판서는 세 번씩 하여 모두 8~9차례의 판서를 하였다. 그 사이 중추부와 돈녕부의 지사와 지경연과 춘추 제조, 비변사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내의 제조로서 약을 써서 병환을 시중할 때의 일이다. 방안에는 화롯불 사방이 한 더위의 열을 불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관대를 벗지 않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있었다. 선비들이 서로 당직을 서면서 때때로 휴게소에 나가 쉬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정공이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인 줄 알겠다"라고 하였다. 이런 공로로 정헌에 올랐다가 다시 참찬이 되었다. 우찬성에 발탁되자 당시 대신(臺臣)들이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바로 잡아달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말하기를 "새로 찬성이 된 사람은 국가의 오랜 재상으로 대신(大臣)들이 천거한 분이다. 일찍이 선대 때에도 힘있는 사람에게 아첨하지도 않았고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몸소 돕고 이로움을 주는 바가 크고 많아 그 재주와 기량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어 세상 사람들이 교만하고 격렬함과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로서 대신들의 논의는 중지되었지만 마침내 사양하고 중추부와 돈령부의 일을 맡았다. 1582년(임오년,70세) 4월에 치사하고자 하는 글을 두번이나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일찍이 시 하나를 지었는데 "두루 육부의 일을 맡아 이제 늙었으니 전원으로 물러나 허물을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공은 매번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충훈부에서 모든 일을 총괄할 다른 재신(宰臣)이 없다는 이유를 대어 몇 차례 지연된 것이 6~7년이나 되었다. 그러다 정곤수가 봉작을 이어 받자 마침내 물러날 뜻을 결행할 수 있게 되어 1589년(기축년,77세) 집안 사람들에게 그해 여름에 나오는 녹봉을 받지 말라고 해 놓은 상태에서 치사하고자 하는 청을 다시 아뢰었다. 임금께서 옛 사례를 찾아 볼 것을 명하자 예조에서 퇴계 선생의 예에 따라 치사 할 수 있도록 계를 올렸다. 이에 임금께서 특별히 공의 청을 윤허하셨으니 실로 세상에서 매우 드문 훌륭한 일이었다. 특별히 말을 주시고 강원도에서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공이 감사의 말씀을 올리자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내가 직접 불러 만나보고자 하였으니 경이 걷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털로 된 요와 약물을 하사하시고 강루에서 술을 내려 주시면서 일행 친속들에게 같이 길을 가라고 명령하시고 높은데서 바라보시며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에 서울 사람들이 모두 전별연에 나왔는데 거마조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원주 옛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고향 친구들과 산수를 찾아 돌아다니며 노래 부르고 술 마시며 한가롭게 소일하였다. 7월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이후 8월 11일에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 77세였다. 임금께서 벼락이 덜어진 듯이 슬퍼하며 며칠 동안 아침 조회도 하지 않았다. 법과 격식에 맞에 제사 지낼 수 있도록 부의하였으며 관에서는 장례식에 쓰이는 도구를 내주었다. 그해 10월 23일 횡성현 북 공근리 북쪽 묏자리에 예를 다해 장사지냈다. 고을 선비들이 공을 추모하여 운곡서원에 배향하고 제사지냈다. 공은 천성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도량은 넓고도 강하였다. 엄중하고 경건함으로 자신을 경계했고 예법으로서 집안을 이끌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바른 자세로 앉아 책을 보셨으며 말할 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고 몸가짐에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진설하는 일은 반드시 손수 하셨고 일가친척을 화목하게 이끌고 은혜를 베풀 때도 두루 하였다. 서모에게서 난 동생과 누이에게 재물을 나누어 줄 때에는 자기 몫을 떼어내 많이 주었다. 스승인 모재선생(金安國)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부인을 어머니처럼 모셨으며 그 후사를 자식처럼 돌보았다. 기일에는 반드시 제사지내는 것을 도우면서 소찬으로 식사하였다. 국상이 나면 졸곡에 이르기까지 소찬으로 식사하셨고 임금과 왕비의 제사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몸은 비록 늙고 쇠하였으나 그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경연에 나갈 때는 반드시 옷을 바꾸어 입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할 때에는 밤 깊을 때까지 원만하게 이끌었다. 편안하고 고요하게 주위를 정리하여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확정된 학문의 힘은 단단하고 확실했으며 위세와 이권으로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과오를 보면 힘써서 그 사람을 덮어 주고자 노력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헐뜯더라도 듣지 못한 척하여 그 사람이 나중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만들었다. 일을 도모함에는 깊고 원대하였으며 주밀하고 조리 있게 일을 대함은 빈틈없이 꼼꼼하였다. 변경을 순회할 때는 험하고 먼곳을 꺼리지 않았으며 국경 방비에 중요한 지점과 병력이 약하고 강한 곳인지를 눈길 한번으로 환하고 똑똑하게 알았다. 일찍이 유장으로 뽑히셨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원(나라를 지키는 장수를 말함)이라고 할 정도로 중대한 명망이 돌아왔다. 사도의 감사와 육부의 판서를 할 때에는 학문을 흥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법을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알았다. 어떤 일을 베푸는데 급급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달마다 이익이 축적됨이 있었다. 형조판서를 오래했는데 송사를 대할 때에는 마을을 곧고 바르게 하면서 늘 원통한 백성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전에 법을 집행 할 때에 형벌을 관대하게 했다고 해서 요로에 있는 사람을 거슬리어서 파면된 일이 있었다. 병조판서를 맡았을 때는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맡겨 사기를 진작시킴으로서 장사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당시 사론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공은 두 논의에 끼어들어서 한쪽에 치우치거나 가로막는 일을 하지 않았고 후배들과 더불어 가까이이 하는 일도 없었다. 처음 이조판서가 되어서 탄핵을 당한일이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복직되었다. 낭관들이 은밀히 찾아와 만나고자 하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논의가 사람들에게 통하는 것을 막았다. 낭관이 자제분을 통해서 인사 규칙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니 공이 웃으며 "공무를 집행하는 자리에서도 가히 헤아려 잘 생각할 수 있는데 어찌 사사로이 논의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장중하고 공정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후배들도 공의 마음을 끝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하는데 혹 자기 이로움만 취하더라도 공 역시 마을 쓰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원주 집에 머무를 때에는 돈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고 재상일 때에도 공복이 아니면 비단을 입지 않았고 지치고 병든 때가 아니면 말과 가마를 타지 않았고 살던 집을 늘리지도 않았다. 혼사는 신중히 하여 당대 벼슬하는 집안은 반드시 피하고자 했고 항상 자제들에게 "나는 내 자신이 편안코자 남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는데 너희들도 이 마음을 본받는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이라고 훈계하였다. 공은 배움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과 내실 있는 것을 찾는데 힘썼고 문장의 수식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간혹 시를 읊조릴 때가 있더라도 성정에서 우러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석사들을 모셔 배우고 연구하는 데에 일생동안 힘을 다하였고 일생동안 경서의 해석에 몰두하느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미암 선생(증 좌찬성 유희준)은 공을 일러 말하기를 "책 읽는데 쏟는 노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현저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미암 선생이 어려서 부터 동문수학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남명선생(조식)도 시를 지어 보냈는데 "붉은 봉황이 높이 날랐으니 바람을 기다릴 것도 없다"는 구절은 권세를 피하고 멀리했던 것을 아름답게 여겨 쓴 것이고, 동고선생은 공을 순금과 아름다운 옥(精金美玉)에 비유하였고 소재선생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은 철석간장(鐵石肝腸;의지가 굳은 사람) 이라고 공을 불렀으니 이 같은 공에 대한 몇 개의 평으로도 충분히 공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공은 첫번째 부인으로 사도시정을 지낸 유엄의 딸인 문화 유씨를 취하셨으나 유씨부인은 자식이 없이 일찍 돌아가셨다. 묘소는 파주에 있다. 두번째 부인은 선공감역을 지낸 엄의 따님이고 성산부원군 稷(직)의 후손인 성주이씨를 취하셨다. 이씨는 여사의 행실이 있어서 제사를 모실 때에는 공경스러움을 다하였고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는 법도에 맞게 하였으며 문중 사람들을 도와 줄 때는 은혜롭게 하였다. 집안일을 할 때에도 검소하고 부지런하여 항상 길쌈하면서 가족들을 입히고 먹이기에 애쓰느라 쉴 틈이 없었다. 공이 받아오는 녹봉은 별도로 보관 하여 공이 불시에 필요한 수요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관직이나 녹봉이라는 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니 날마다 써야 하는 비용을 어찌 이에 의지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공으로 하여금 집안일을 잊게 하고 온 마음을 다해 덕업을 쌓을 수 있게 한 것은 대부분 부인이 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인께서는 1523년 4월 5일 태어나 1599년 9월 29일에 돌아가셨으니 누린 나이 77세였다. 공의 묘지에 합장하였다. 자식은 4남 2녀을 두었는데 네 아들로는 통정대부이며 양주목사를 지낸 약(爚)과 별제를 지낸 후 노직으로 가선에 오른 열(烈), 군수를 지낸 묵(默), 문과에 올라 관찰사를 지낸 혹(豰)이 있었고, (딸 가운데 정실의 첫째)딸은 최경상(崔景祥, 증 대사헌)에게 다음은 조문벽(趙文壁,진사)에게 시집을 보냈고 측실의 네 딸은 각각 박대경(朴大慶) 윤식(尹湜) 김인원(金仁元) 이흥효(李興孝)에게 시집을 보냈다. 첫째 아들 정약은 4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문과에 올라 좌윤을 지낸 후 팔천군에 봉해진 기광(基廣) 부호군을 지낸 기성(基聖) 기평(基平) 부윤을 지낸 기풍(基豊)이 있었고, 다섯 딸은 각각 정호경(丁好敬,진사) 한복윤(韓復胤,부호군) 권종길(權宗吉) 윤의립(尹毅立,판서) 이응기(대사헌)에게 각각 시집보냈다. 둘째아들 정열(鄭烈)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교관을 지낸 기남(基南)과 기달(基達)이 있었고, 네 딸은 각각 이기영(李奇英,판관) 고신오(高愼五) 원경연(元慶寅) 한태일(韓泰一,찰방)에게 시집을 보냈다. 셋째 아들 정묵(鄭默)은 1남 3녀을 두었는데 아들로는 감찰을 지낸 기방(基磅)이 있었고 세 딸은 각각 이분(李昐), 김래(金來,목사), 홍순일(洪順一)에게 시집보냈다. 넷째 아들 정혹(鄭惑)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부사를 지낸 기숭(基崇) 기징(基徵) 현감을 지낸 기강(基岡)이 있었고 두 딸은 각각 박순의(朴純義,목사) 송휘길(宋輝吉)에게 시집보냈다. 첫째 사위 최경상(崔景祥,증 대사헌)은 5남 1녀을 두었는데 아들로는 통정을 지낸 기석(基錫)과 노직으로 가선을 받은 기철(基鐵) 기옥 별제를 지낸 기벽 사예를 지낸 기백이 있고 딸은 정자인 우홍적(禹弘績)에게 시집보냈다. 둘째 사위 조문벽(趙文壁,진사)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첨지인 기번(基蕃)이 있고 세 딸은 남궁행(南宮荇) 이천직(李天直) 김보신(金輔臣)에게 시집보냈다.셋째 사위 박대경은 3남 2녀을 두었는데 이들로는 신명(愼明) 신철(愼哲) 신행(愼行)이 있고 두 딸은 이숙행(李淑行)과 김인충(金仁忠)에게 시집보냈다. 넷째 사위 윤식(尹湜)은 2남 2녀을 두었는데 아들로는 이생(已生)과 임생(壬生)이 있었는데 모두 무과에 합격하였고 두 딸은 유윤(柳潤)과 홍인립(洪仁立)에게 시집보냈다. 다섯째 사위 김인원(金仁元)은 두 딸만 두었는데 큰 딸은 무과에 붙은 정윤영(丁潤英)에게 둘째 딸은 진사 민응열(閔應說)에게 시집보냈다. 외손녀와 내외의 4세손, 5세손의 남녀 후손들이 많아서 모두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손이 많을 경우 공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 가운데 조정에서 더 등용하는 예에 따라 5세손 수명(洙明)이 마침내 현감이 되었다. 광유후 배걸(倍傑)공의 후손들은 문장도 잘하고 배움도 많았고 무(武)에 힘을 쓰는 공들이 그 뒤를 이어 문무 겸비의 단초를 열었다. 청렴하고 결백하고 충성스러움이 모두 나와 복성을 팔방에 비추었고 공경의 달을 가까이 잡았으며 학문의 균형 잡음에 연원이 있었다. 행동에 허물과 하자가 없어 선비들이 완벽한 사람이고 아름다운 징조라 하였으니 고향에 돌아가서는 조정에서의 일을 없었던 일로 여기니 한나라의 이소가 전해진 것이다. 지위는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고 덕을 높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사람의 의당함을 채우지는 못했으나 자손들의 번창함이 불꽃처럼 광대했다. 비단 폭에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으니 이 명(銘)이 그윽한 곳에 감추어 있다가 여러 대에 이르도록 증거 하기를 바란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년)으로 부터 64년 뒤인 정해년(1707년) 횡성 현감인 5대손 우주(宇柱)가 세우다.

일화편집

공은 평소 검소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교군을 타지 않는 등 寒士(한사)와 같이 담담한 평민적 모습으로 지냈으나 일단 국정을 다스리는 경우에는 추상같이 엄정한 처사로 임하였으니, 경상감사때 文定王后(문정왕후;명종의 모후)와 영의정 尹元衡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자행하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단한 사실등은 공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면이라 하겠다. 4도의 감사로서는 교학을 우선 시책으로 문교진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고 6조의 판서때는 成憲(성헌)을 준수하여 嚴正舞私(엄정무사)하였고 밤중까지 勤政(근정)하면서 추호도 태만함이 없었고 엄연한 기상으로 감히 누구도 범하지 못할 위엄을 갖춘 분이기도 하였다. 영의정 李浚慶(이준경)공이 精金美玉(정금미옥)으로 비겨 공을 칭송한 것도 이런 까닭이라 하겠으며 당파싸움이 치열해 가던 때였으나 어느파의 사람에게도 존경을 받는 존재였으니 가히 그 인격을 짐작할 만 하였다. 공의 사적이 왕조실록에 100여회에 걸쳐 이름이 나오고 있고 海東名臣錄(해동명신록), 여지승람, 태백의 인물 등등 여러 문헌에 실렸으나 문집, 서화시집, 기타 문헌이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다.

제향편집

인조 16년(1638년) 七峰書院에 배향하였고 別墓를 세워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墓所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에 있다.

각주편집

  1. 1625(인조 3)∼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자는 계주(季周)이다. 호는 외재(畏齋)·송간(松磵)이다. 섭(涉)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안성(安性)이다. 아버지는 판서 식(植)이며, 어머니는 심엄(沈掩)의 딸이다. 대사성, 홍문관제학, 예조판서, 좌의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