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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성(鄭海成, 1958년 3월 4일 ~ )는 전 대한민국축구 선수 및 현 지도자이며 현재 베트남 V리그 호찌민 시티의 감독이다.

정해성 Football pictogram.svg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Chung Hae-soung
출생일 1958년 3월 4일(1958-03-04) (61세)
출생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포지션 감독 (선수시절 수비수)
클럽 정보
현 소속팀 호찌민 시티 (감독)
청소년 클럽 기록
1975-1977
1978-1981
서울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클럽 기록*
연도 클럽 출전 ()
1982-1983
1984-1989
제일은행 축구단
FC 서울

106 0(2)
지도자 기록
1990
1991-1993
1994
1995
1996
1996-1998
1998-2000
2000-2002
2003
2004-2007
2007-2010
2010-2012
2017
2017
2017-2018
2019-
FC 서울 (트레이너)
FC 서울 (코치)
FC 서울 (스카우트)
포항 스틸러스 (코치)
대한민국 (코치)
전남 드래곤즈 (코치)
대한민국 U-23 (코치)
대한민국 (코치)
전남 드래곤즈 (코치)
제주 유나이티드
대한민국 (수석코치)
전남 드래곤즈
서울중앙고등학교 (총 감독 겸 기술 고문)
대한민국 (수석코치)
호앙아인 잘라이 (총 감독 겸 기술 고문)
호찌민 시티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유소년 경력편집

원래 핸드볼 선수였던 정해성은 초등학교 시절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로 전학을 오면서부터 핸드볼 선수로 지냈었다. 서울시 대회에서 MVP를 받았을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으나 핸드볼부가 없는 한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축구를 새롭게 접하면서 축구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지만, 당시 그가 키도 작고 몸이 약했던 탓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여 몰래 축구를 해야만 했다. 대신 정해성의 아버지는 야구를 권유하여 야구부에 가입해 1년 정도 했으나 야구에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아 결국 중학교 2학년 말에 아버지 몰래 축구부에 가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말 경에 수학여행 경비로 축구화를 산 것이 덜미가 잡혔지만 결국 어렵게 허락을 받아 축구를 하게 됐으나 키도 작았고 축구를 시작한 것 자체도 늦었던 탓에 중학교를 1년 더 다니게 되었다. 한영중학교 시절 정해성은 한영고등학교 감독의 권유로 충북 옥천의 죽향초등학교로 내려가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선수가 부족했던 죽향초의 감독이 선배였던 한영고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는 나이를 속인 부정 선수들이 득실거리던 시절이었고 당시 체구가 작았던 정해성은 영문도 모른 채 죽향초에서 축구를 해야만 했다. 결국 정해성은 9개월여 기간동안 그 곳에서 보내야 했고 소년체전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 후 대구에 있는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계성고 축구부에서 구타가 만연했던 탓에 서울중앙고등학교로 도망치듯 전학을 가게 되었다. 중앙고에 입학하면서부터 축구에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해성은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하여 3학년 때는 모교의 주장을 맡아 맹활약하여 1977년 고교선수권에서는 중앙고 유일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어느덧 그는 고교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받았고 대학 팀들의 치열한 스카우트 공세에 시달릴 정도가 됐다.

중앙고의 고교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던 정해성은 ‘제 2의 차범근'이라 불렸던 남강고등학교의 이형노에 이어 고교랭킹 2위로 평가받았고 고려대학교공군사관학교간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에 휘말렸다. 아버지는 “군인이면 먹고 산다”며 공군사관학교를, 어머니는 고려대를 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정해성은 고려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려대 진학이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얼마 후 3사의 스카우트 경쟁이 과열됐다는 판단에 사관학교의 스카우트 금지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만약에 정해성이 공군사관학교로 갔다면 입학이 취소되어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뻔 했던 것이다. 힘든 과정 속에 1978년 고려대에 입학한 정해성은 김정남 감독이 부임한 2학년 시절부터 풀백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대표팀 합류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맹활약하였으나 동료들과 창경궁으로 벚꽃놀이를 하러 가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던 과정에서 옆구리를 찔리는 중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정해성은 축구부에서 제명되었고 재활을 거치고 나서 축구부 복귀를 희망했지만 학교 측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축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체육위원회 사무실에서 허락을 거듭 요청한 끝에 다시 축구를 하게 된 정해성은 이후 다시 주전으로 활약하며 고려대를 무사히 졸업하였다.

클럽 경력편집

1982년 실업팀이던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여 2년여를 보내고 1984년 FC 서울의 창단 멤버로서 프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FC 서울에서의 출발은 좋지 못했는데 당시에는 한 시즌이 끝나면 8~10명 정도가 방출되는 시절이었다.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정해성의 수비 쪽에서 수비가 뚫리면서 결국 수적 우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2-3 역전패를 당하면서 주전으로 나서지 못하게 된 것. 그래서 진주에서의 여름합숙훈련 때 당시 박세학 감독에게 어필하기 위해 삭발을 하면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해성은 울산전에서 다시 기회를 잡았으며 그의 역할은 울산의 키 플레이어 허정무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비록 경기는 패했지만 그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으면서 이후부터 서울의 듬직한 주전 선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1985년에 서울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정해성은 1986년 후반기부터는 주장을 맡아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팀의 살림꾼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리더십까지 갖춘 정해성에 대한 평가는 높았고 K리그에서는 이미 톱 클래스의 선수로 인정받기도 하였지만 대표팀으로서의 인연은 없었다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대목이 되고 있다. 줄곧 서울에서 팀을 위해 헌신한 정해성은 1989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89 시즌에도 28경기나 뛰면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갑작스런 은퇴라 할 수 있었다. 프로에서 6년을 뛰면 재계약금을 줘야하는 제도가 오히려 그의 선수생활 연장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지도자 경력편집

그렇게 1989 시즌 후 FC 서울에서 은퇴한 직후부터 1994년까지 FC 서울에서 코치와 스카우트를 지낸 후 1995년 포항 스틸러스를 거쳐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전남 드래곤즈,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AFC 아시안컵을 함께 했다. 이어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여 2002년 FIFA 월드컵에 나가 4강 신화에 일조했다. 코치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2003년부터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허정무 감독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춰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일궈냈고 곧바로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2012년 성적 부진으로 그 해 8월 자진 사퇴하였다. 전남 감독 사임 후 수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7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계약 기간은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였으나 슈틸리케 감독 경질 후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자 결국 분위기 쇄신을 위해 자진 사임을 택했다. 이후 모교인 중앙고등학교의 기술고문으로 잠시 지내다가 베트남 V리그의 명문 클럽 호앙아인 잘라이 FC의 총감독 겸 기술위원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2018년 12월 28일 베트남의 또 다른 명문 클럽 호찌민 시티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부임하자마자 2017년 V리그1 승격 이후 하위권을 맴돌던 호찌민의 대반전을 이끌면서 2019년 3월에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결국은 팀의 사상 첫 1부 리그 준우승을 안겼다.

수상 내역편집

선수편집

  FC 서울

우승 (1): 1985
준우승 (2): 1986, 1989
4위 (1): 1988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