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39회 중의원의원 총선거는 1990년(헤이세이 2년) 2월 18일에 행해진 일본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다.
제39회 일본 중의원의원 총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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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데이터
편집해산일
편집- 1990년(헤이세이 2년) 1월 24일
해산명
편집- 소비세 해산
공시일
편집- 1990년(헤이세이 2년) 2월 3일
투표일
편집- 1990년(헤이세이 2년) 2월 18일
의석 수
편집- 512
선거 제도
편집주된 쟁점
편집정책
편집- 체제 선택(자유 민주주의 정권이나 사회주의 정권인가)
- 소비세의 시비
정국
편집- 정치 부패의 추궁
선거 결과
편집투표율
편집- 73.31%(남자71.93%, 여자74.61%) ※자치부 집계···전회 투표율(71.40%)보다+1.91%증가
- 당일 유권자수:90,322,908명
- 기권·무효표:24,618,604명
- 유효 표수:65,704,304표
의석수
편집정당명 | 의석수 | 득표수[1] | 득표율 | |
---|---|---|---|---|
여당 | 275 |
30,315,417 | 46.11 | |
자유민주당 | 275 |
30,315,417 | 46.11 | |
야당·무소속 | 237 【야당 무소속 】 |
35,330,352 | 53.89 | |
일본 사회당 | 136 |
16,025,472 | 24.39 | |
공명당 | 45 |
5,242,675 | 7.98 | |
일본 공산당 | 16 |
5,226,986 | 7.96 | |
민사당 | 14 |
3,178,949 | 4.84 | |
사회민주연합 | 4 |
566,957 | 0.86 | |
진보당 | 1 |
281,793 | 0.43 | |
무소속 | 21 |
4,807,520 | 7.32 | |
합계 | 512 |
65,645,769 | 100.00 |
정당
편집자유민주당
편집획득 의석:275 의석
- 파벌
일본 사회당
편집획득 의석:136 의석
- 중앙 집행위원장:도이 다카코
- 중앙 집행 부위원장:오카다 토시하루, 오노 아키라, 카네코봐 개, 전변성
- 집행부 서기장:야마구치학남
- 정책 심의회장:이토 시게루
- 국회 대책 위원장:대 출슌
- 참의원의원 회장=츠노다견지로
공명당
편집획득 의석:45 의석
- 중앙 집행위원장:이시다행시로
- 중앙 집행 부위원장:오사다 타케시, 후시키 카즈오, 미키 타다오
- 집행부 서기장:이치카와 유이치
- 정책 심의회장:사카구치 치카라
- 국회 대책 위원장:사카이 코이치
- 참의원의원 단장:쿠로야나기 아키라
- 최고고문:다케이리 요시카쓰, 야노 준야
일본 공산당
편집획득 의석:16 의석
- 중앙위원회 의장:미야모토 겐지
- 중앙위원회 부의장:후와 테츠조
- 간부회 위원장:무라카미 히로시
- 간부회 부위원장:오가사와라 사다코, 에비스다니 하루마츠, 타카하라 신이치
- 서기국장:카네코 미츠루광
- 정책 위원회 책임자:요시오카 요시노리
- 국회 대책 위원장:테라마에 겐
- 참의원의원 단장:하시노토 아츠시
민사당
편집획득 의석:14 의석
- 중앙 집행위원장:영말 에이이치
- 중앙 집행 부위원장:카와무라 마사루, 발산에이코
- 집행부 서기장:요네자와륭
- 정책 심의회장:나카노 칸세이
- 국회 대책 위원장:요시다 유키히사
- 참의원의원 회장:산지 시게노부
- 상임 고문=츠카모토 사부로
사회민주연합
편집획득 의석:4 의석
진보당
편집획득 의석:1 의석
- 대표:타가와 세이치
무소속
편집획득 의석:21 의석
주요 정당 외, 진리당(아사하라쇼오꼬오, 죠우유우사호외 ), 지구 유신당(오오타 류, 토고건외 ), 스포츠 평화당(호소키 히사시경), 녹색당, 일본 노동당, 사회주의 노동자당 등의 군소 정당도 후보자를 공천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의원
편집이 선거로 당선
편집자민당 사회당 진보당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 사민연 무소속
이 선거로 첫 당선
편집※초선 가운데, 참의원의원 경험자에게는 「※」의 표시가 있다.
자유민주당
편집
일본 사회당
편집
공명당
편집
일본 공산당
편집민사당
편집무소속
편집
이 선거로 복귀
편집자유민주당
편집일본 사회당
편집
일본 공산당
편집민사당
편집무소속
편집이 선거로 은퇴
편집자유민주당
편집
일본 사회당
편집
공명당
편집
일본 공산당
편집민사당
편집무소속
편집이 선거로 낙선
편집자유민주당
편집<divstyle="float: left;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nowrap; margin-right: 1em;">
일본 사회당
편집공명당
편집
일본 공산당
편집<divstyle="float: left;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nowrap; margin-right: 1em;">
민사당
편집
무소속
편집선거 관련 특별 프로그램
편집선거 후
편집국회
편집제118 특별 국회
- 중의원의장 선거
- 앵내 요시오(자민당)-507표무효-1표
- 중의원부의장 선거
- 무라야마 키치(사회당)-508표
- 수반 지명 선거(중의원 의결)
- 카이후 토시키(자민당)-286표, 도이 타카코(사회당)-146표, 이시다 행시로(공명당)-46표, 후와 테츠조(공산당)-16표, 영말 에이이치(민사당)-14표
정당
편집1989년 4월의 소비세 도입 후 최초의 총선거이며, 당초 자민당은 이전 회 제38회 총선거에서 거뒀던 300석 압승으로부터의 반동도 겹쳐 험난한 싸움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실제, 1989년 7월의 제15회 참의원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당선자 수로 사회당을 밑돌아, 참의원으로의 과반수를 이어가지 못하고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1989년 가을에 진행된 동유럽 제국의 민주화에 의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동쪽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자민당은 이 선거의 쟁점을 「체제 선택」이라고 설정하는 것에 성공했다. 경제 호조 ( 「버블 경기」)를 향수하는 국민의 반공·보수적 의식에 호소하며 걸쳐 한층 더 참의원의원 선거에서의 참패나 가이후 내각의 인기로부터 유권자에게 「 이제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의석 감소를 소폭으로 줄였고 추가 공천을 포함한 의석수는 286석으로 중의원에서 단독 과반수를 유지했다.
한편, 사회당은 이전 참의원의원 선거로의 압승을 이어받아 중의원으로의 여·야 역전과 정권 획득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하락 추세로 당의 기초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후보자 선정 작업은 난항을 겪어, 특히 중선거구제로의 과반수 의석 획득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복수 후보의 입후보 방침에 대해서는 현직 의원들의 저항이 강했다. 또, 입후보의 권유에서도, 자금난으로 인해 낙선했을 경우에는 생활 보장을 하지 못하고, 거절 당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2].도이는 선거에 협력한 공민·사민 연합에 따라 512개의 의석 수에 대해 사회당 180명, 공민·사민 연합 120명, 3당을 합쳐 300석을 전망하고 있었다.[3]. 그러나, 공민당이 고전을 예상하고 후보자를 줄인 것과 함께, 공천 후보는 사회당 149명, 공민·사민 연합에서 108명, 3당 합계 257명(같은 계열의 무소속은 29명)으로 과반수에 아슬아슬하게 미달했다. 공천만으로 338명(보수 계열의 무소속은 109명)을 후보자로 낸 자민당과의 체력 차이는 확연했다. 야당은 전체적으로 후보를 세우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당의 당선자는 1967년의 제31회 총선거에서 140석을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으나, 그 절반은 공명당·민사당 등 타 야당으로부터 빼앗은 의석이었다.(나머지의 반은, 자민당 독점 지역구로부터의 의석 탈환이 많았다). 특히 민사당은 의석이 거의 반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다. 공명당과 민사당은, 사회당이 사회·공민 노선으로 불리는 야당 연정의 상대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이 선거로 사회당이 단독으로 승리했던 것에 반발해, 사회당과의 연립 정권 협의를 중지했다. 그리고, 자민,공명당민 노선으로 불리는 보수·중도 연계 노선이 정착하며 갔다. 또, 공산당은 소비세에 반대표가 사회당에 집중되고, 자민당에 의한 체제 선택의 쟁점화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의석수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덧붙여 이 선거에서는 종교 단체의 옴 진리교(현:아레후)가 「진리당」를 결성해, 교조의 아사하라쇼오꼬오(본명:마츠모토 치즈오)나 신도 죠우유우사호등 25명을 입후보 시켰지만, 공탁금이 몰수 될 정도의 참패가 되었다. 특히 아사하라가 출마한 도쿄도 제4구에서는, 개표에 부정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신자 3명에게 일부러 본명의 마츠모토 치즈오에 투표하게 한 후, 개표할 때 입회 시에 표를 확인시켰다. 실제로는 발견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사하라는 마츠모토 치즈오의 표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선거 부정」이라고 선전했다. (노다 성인 저 「혁명인가 전쟁인가」). 이것을 기회로 교단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기로 방향을 틀었고, 이것이 이후 마츠모토 살인 사건, 지하철 살인 사건이라고 하는 일련의 오움(진리교) 사건으로 이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