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조병상(曺秉相, 일본식 이름: 가야마 시게루(夏山 茂)[1], 1891년 2월 16일 ~ 1978년 12월 30일)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박두영, 박석윤과 함께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생단을 조직해 민생단 사건을 불러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병상
曺秉相
조선총독부 예하 경성부 행정평의회 협의원
(前 朝鮮總督府 隸下 京城府 行政評議會 協議員)
임기 1918년 5월 20일 ~ 1931년 6월 1일
군주 요시히토 (일본)
히로히토 (일본)
섭정 히로히토 세자(前)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직대)
사이토 마코토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야마나시 한조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 (조선 주재 일본 총독)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 총리)
하라 다카시 (일본 총리)
우치다 고사이 (일본 총리 권한대행)
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 총리)
야마모토 곤노효에 (일본 총리)
가토 도모사부로 (일본 총리)
우치다 고사이 (일본 총리 권한대행)
야마모토 곤노효에 (일본 총리)
기요우라 게이고 (일본 총리)
가토 다카아키 (일본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총리 권한대행)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총리)
다나카 기이치 (일본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 (일본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총리)
신상정보
출생일 1891년 2월 16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978년 12월 30일(1978-12-30) (87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대동
거주지 일제 강점기 경성부
학력 한성 선린고등상업학교
경력 前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한국민주당 최고위원(1945년 12월)
한국민주당 상임고문(1946년 2월)
정당 무소속
자녀 슬하 2남

생애편집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경성부 협의원과 경기도 도의원을 지냈다.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주임참의로 발탁된 뒤 한차례 연임하여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재임했다.

1924년 동민회 이사, 이듬해 갑자구락부 위원이 된 시작으로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36년 조선지원병후원회 이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2년 흥아보국단 발기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3년 조선식량영단 감사, 1945년 대화동맹 이사 등이 주요 이력이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에는 전쟁 지원을 역설하며 기고문 투고와 시국 강연을 위한 지방 순회 연설에 가담했다. 1942년 9월 전시 비상 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종로구 경방단의 단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관변 단체로 이성환이 주도해 설립한 국민동원총진회김동환, 손영목과 함께 이사로 참여한 기록도 있다.[2]

내선일체반공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병상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일본 정부는 쇼와대례기념장 등을 수여했으며, 1940년 2600주년 기원절 행사에 초대한 약 300명의 조선인에 손영목을 포함시켰다.[3]

특히 태평양 전쟁 중 장성한 아들 중 장남을 지원병으로, 차남을 학병으로 참전시킨 뒤,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학도특별지원병 제도 실시가 상류계급의 애국심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며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베이징 등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직접 위문하기도 했다.

광복 후 조병상이 일본행 여행권을 신청한 것이 언론에 보도[4] 될 만큼 '거물 친일파'로 관심을 모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1949년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반민법정에서는 징역 7년형이 구형된 뒤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5]

한국 전쟁 때 실종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6]

사후편집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과 기타 두 분야에 선정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도 중추원과 친일단체의 두 개 분야에 포함되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만주에서 민생단 사건을 직접 겪은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을 통해 조병상을 박석윤, 전성호, 김동한과 함께 "애국애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 혁명가로 자처하였으나 예외없이 일제가 오래전부터 손때를 묻혀 길들여온 반역아"였다고 평가했다.[7]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양회영, 〈소행조서 - 조병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949.2.24)
  2. 전갑생 (2003년 8월 30일). “손영목, '성전(聖戰)완수를 적극 독려한 친일파' - 경남 도서기에서 도지사, 징병후원회 간부까지 오른 친일 공무원”. 오마이뉴스. 2007년 12월 9일에 확인함. 
  3. 정운현 (2002년 3월 8일). “일본판 개천절 '기원절'에 초대받은 '충성스런' 친일 조선인들의 면면들 - [집중기획2] 발굴자료 <광영록>에 실린 친일파들”.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43) (도움말)
  4. “거물 친일파 曺秉相, 외무부에 일본여행권을 신청”. 한성일보. 1948년 9월 17일. 
  5.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曺秉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 경향신문. 1949년 8월 17일. 
  6. “조병상”.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2008년 9월 11일에 확인함. 
  7. 김일성 (1992). 〈제1부 항일혁명편,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 1. 사나운 회오리〉. 《세기와 더불어》.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