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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한 국가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가 없는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고있는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단교한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12월 기준으로 161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었으나, 2001년 138개국에서 23개국이 늘었다.

아시아에서 25개국과, 미주에서는 24개국과, 유럽에서는 49개국과, 중동은 17개국과, 아프리카는 46개국과 맺었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은 158개국으로, 미주에서는 미국, 볼리비아, 아이티,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파나마, 파라과이 11개국은 북조선과 수교를 맺지 않고 북조선과 단독수교를 맺은 국가는 쿠바가 유일하다. 아프리카 46개국은 모두 남한·북조선 동시 수교국이다.

유럽에서는 마케도니아는 북조선과만 수교 관계이며, 교황청, 에스토니아, 프랑스, 안도라, 모나코등과는 국교가 없다.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스라엘이 미수교국이고, 시리아는 수교를 맺고 있다.

북조선의 재외공관은 49개이고, 북조선에는 15개국의 외교공관이 있다.

북조선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국가는 아주지역에서 베트남, 인도, 몽골, 인도네시아, 중화인민공화국, 캄보디아, 파키스탄, 라오스, 말레이시아이다.

미주에서는 쿠바와 브라질, 유럽에서는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스웨덴, 독일, 영국, 체코가 대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시리아, 이란, 이집트, 나이지리아이다. 리비아는 북조선에 모두 경제협력 대표부를 두고 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도 북조선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북조선은 재외에 대사관을 42개, 영사관은 3개, 대표부는 4개를 두고 있다.

자국민 보호 업무를 하는 영사관보다 국가의 경제외교 등의 연락 업무를 하는 대표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대표부는 과거 11개였지만 현재는 4개로 축소되어 있다. 유럽에 국제기구가 많아 2001년 7개였던 것이 2010년말 현재 3개로 줄었다. 이는 북조선의 어려운 경제현실도 일부 반영한다.[1]

남북 관계편집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고 있었으나,.[2] 197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발표한 '조국통일 5대강령'에 따라, 오늘날에는 양국 간의 체제를 인정하는 고려연방제 방안을 통일 정책의 중심에 두고 있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은 베트남 전쟁 지원, "남조선 혁명"을 통한 조속한 통일을 강조하며, 대한민국과 미국에 대한 적대적 무력공세를 강화하였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적으로는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금강산 관광, 개성공업지구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006년 10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여러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하여 남북 관계는 소원(疎遠)해졌으며, 각종 남북 협력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2007년 6자 회담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의 타결로 활발히 재개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관광 중단, 개성공단 축소 등을 통보했다.[3][4]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선 희박하지만 배제 못한다고 발표했다.[5]

2009년 11월 10일 인천 대청도 인근 해상 북방 한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에서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정이 반파되었다. 그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하며 가혹한 군사적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하였다. 2010년 3월 26일에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277 천안을 어뢰로 침몰시켰다. 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였고, 이 포격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 내륙으로 피난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박은 대한민국의 영해를 통과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항공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공을 통과하지 못한다.

일본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치되었던 일본인들(사진 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은 북일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문제와 일제 강점기 과거사 사과여부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북조선은 한일합병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한국'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도 "한국의 주권은 한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해 왔다. 따라서 일본측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북조선을 실질적 존재로 취급하여 왔다.[6] 한편, 배상 문제도 남한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조선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북조선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됐었으나, 이후, 국교정상화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북조선의 국가 범죄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는 북조선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일본은 현재 경제제재를 북조선에 가하고 있다. 북조선은 핵 카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테러국가 지정해제를 받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오히려 엄격한 제재조치로 전환하였다.

미국편집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은 아직까지도 적대 관계에 있어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행 안내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미국 대사관이 없습니다. 의료적·영사적 응급 상황이 발생한 미국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찾으세요."라고 기술하고 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도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이용한다.[7] 2005년 북조선 정부는 미국과의 조속한 수교를 바라지만 전면 수교에 앞서 초보 단계로 이익대표부를 상대국 수도에 개설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8] 미국 이익대표부(Interest Section)의 책임자는 정무공사(Charge d’affaire)다.[9] 2007년 3월 5일 북조선은 미국측에 조기에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 사무소를 개설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연락 사무소 설치의 전 단계로 평양의 외국 공관 가운데 한 곳을 이익대표부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10] 오바마 정부는 출범후 이른 시일 내에 평양 주재 영국 대사관이나 스웨덴 대사관 안에 이익대표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미국은 외교관계가 없는 쿠바의 아바나에 스위스 정부의 법적 보호 아래 6명이 상주하는 이익대표부를 두고 있다.[11] 북조선의 초청으로 동료의원 3명과 함께 사흘간 방북했던 데이비드 앨튼 영국 상원이 2009년 2월 11일 "평양에 미국 대사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12] 미국의 스파이가 북조선 외교관의 유전자를 채취, FBI가 보관하고 있다.[13] 미국 대학생 2명이 평양프로젝트라는 계획으로 북조선을 방문하였다.[14] 존 에버라드 전 주평양 영국대사는 "북조선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혐오증은 예상보다 훨씬 큽니다. 미국보다 중국을 더 싫어합니다. 평양 시민은 의외로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크지 않아요"라고 강조하였다.[15]

1969년 말부터 미국과의 대외관계에서 보다 유화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조선은 일본과 유럽 국가 등 대서방진영 외교를 한층 강화하였고, 미국과의 접촉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북조선은 1969년 10월 29일 미국의 저명 일간지 뉴욕 타임즈에 김일성의 업적을 칭송하는 광고를 내고, 미국인들을 평양에 연달아 초청하였다.[16]

2018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대한민국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미국 대통령인 도날드 트럼드에게 전달한 양국간 정상회담 제의를 트럼프 대통령이 수락하면서 양국간의 첫 북미정상회담(北美頂上會談)이 이뤄졌다. 하지만 회담 얼마 전인 5월 24일, 트럼프가 북한의 미국에 대한 극도의 분도와 적대심,경계로 인하여 회담을 취소하려 한다고 의사를 밝혔다가 이틀 뒤인 5월 26일에 갑자기 다시 회담수락을 하여 2018년 6월 12일, 역사상 최초로 정상회담이 현지 시각 9시에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이뤄졌다. 북한측 명칭은 조미수뇌상봉(朝米首腦相逢)이다.

중화인민공화국편집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17]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북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한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18] 북조선은 중국에 위화도와 황금평을 100년간 임대하였다.[19]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간 동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20] 베이징에 북조선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다.[21]

러시아편집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이리하여 스탈린은 북조선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무기들을 대량으로 북조선으로 제공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이란편집

인도네시아편집

기타 국가편집

2009년 5월, 싱가포르 기업과 합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햄버거 가게가 평양 중심가 금성네거리에서 "삼태성 청량음료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17] 2009년 초반에 북조선 대표단이 싱가포르를 방문, 싱가포르 사업가 패트릭 소가 운영하는 체인점 "와플타운"의 음식들을 시식하며 개점 허가 여부를 저울질했고, 5월에 평양에 개점하게 했다고 한다.[18]

1990년 5월 이래로 필리핀의 상원, 하원 의원들이 북조선을 방문하여 북조선-필리핀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을 비공식적으로 추진한 바 있다. 북조선 정무원 부총리 김달현을 단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이 1991년 6월 필리핀을 방문하여 1991년 내에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원칙적인 합의를 하였다. 태국 주재 이도섭 북조선 대사도 1995년 1월 필리핀을 방문하여 기존의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양국 간의 공식적인 수교는 상주공관을 개설하지 않은 채 2000년 7월에 성사되었다.[22]

몽골과는 1948년 수교하여 이전까지는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북조선과 깊은 관계에 있던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몽골과 남한이 수교한 후에는 정치성향이 바뀌어 몽골은 남한과도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 있다.

1974년 6월 2일, 네팔과 북조선은 외교관계를 대사급으로 승격하였다고 발표하였다.[23]

1970년 스리랑카는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수상 집권에 따라 양국은 수교했으나 1971년 북조선 대사관이 반(反)정부 반란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대사관이 폐쇄되고 공관원 전원이 추방당한 바 있다. 그러나 형식상의 외교관계는 지속되었으며 스리랑카는 유엔문제에서 불개입정책을 고수해 왔다.[24]

1973년 12월 28일, 아프가니스탄과 북조선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25]

2000년 12월 15일 스페인 정부는 성명을 통해 "북조선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한반도 화해와 정상화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북조선과의 공식 외교관계 수립을 밝혔다.[26] 그러나 대사관 설립여부는 밝히지 않았다.[27] 한편 북조선과 수교한 국가들의 북조선 업무를 담당하는 상주공관은 평양보다 베이징에 훨씬 더 많이 있다.[28]

1974년 2월 27일, 북조선은 스위스 취리히에 통상대표부를 개설하는 등 대 스위스 경제교류 촉진책을 써왔고, 1974년 12월 19일, 스위스는 북조선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였다.[29] 스위스의 인도적 대북 지원량이 1997년 들어 급증하자, 1997년 8월 5일 부터 9일까지 발터 푸스트 스위스 외무성 인도주의협조총국장을 수석대표로 한 외무성대표단이 방북해 평양에 스위스 외무성 직원 1∼2명이 상주하는 사무소를 개설키로 북조선과 비공개 합의했다. 1998년 평양주재 스위스 외무성 사무소가 설치되었다.[30]

이탈리아는 2000년 1월 서방선진7개국(G7) 중에서 처음으로 북조선과 수교했다. 2001년 6월 20일 마테오 피카리엘로 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 서울 사무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경제 사절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최초의 이탈리아 경제사절단의 평양 방문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은행 중 하나인 뱅카 나치오날레 델 라보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C.S.I 테오레마, 의류업체 오벰 등이 포함되었다.[31] 2001년부터 이탈리아 정부는 북조선의 유학생과 의사, 연구원들을 이탈리아에 초청해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연간 20명 정도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32] 평양에는 이탈리아 외교부 산하 개발협력처 평양 사무소가 있다.[33] 평양의 광복거리에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방장이 피자 재료까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원래의 맛을 추구하는 평양 최초의 이탈리아 피자가게가 2008년 12월 문을 열었다.[34] 2009년 평양에 이탈리아 요리 전문식당이 하나 더 생겨 모두 3곳으로 늘면서, 피자와 스파게티가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35]

쇼팽 탄생 200돌을 맞아 북조선은 폴란드와 공동음악회를 열었다.[36]

1972년 6월 북조선은 프랑스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이어서 1984년 12월 그것을 일반 상주 대표부로 승격시킨 바 있는 이 때, 남한 정부는 윤석헌 주프랑스 대사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항의의 뜻을 표했었다. 또한 평양에 프랑스와의 합작투자 호텔을 건립하는 등 북조선으로서는 드문 선물을 주면서 서방국가에 외교적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37]

1988년 북조선이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헝가리 대사로 임명한 것을 두고 권력계승을 둘러싼 갈등문제와 관련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북조선이 그만큼 헝가리와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37]

2001년 7월 28일 북조선 주재 영국 대사관이 임시 개설되었다.[38] 2003년 4월 30일 최수헌 북조선 외무성 부상이 영국 주재 북조선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런던 서부 주택가 일링의 거너스버리에 위치한 130만 파운드 짜리 저택을 매입해 대사관으로 개조했다.[39] 서유럽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에 이어 6번째 북조선의 공식 외교공관이며, 개관식에는 최수헌 외무성 부상, 리시홍 대리대사, 주 영국 중국 대사, 영국 외무부 관계자, 하원의원 등 수십명이 참석했다. 개관식이 열리는 동안 대사관 앞에서 영국 인권단체인 세계기독연대(CSW·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와 ‘릴리즈 인터내셔널(Release International)’이 공동으로 북조선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39]

스웨덴은 반제국주의 노선을 걸으며 1974년 북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1975년 3월 서방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대사관을 열었다. 북조선과 수교하지 않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 출신의 외국인(남한, 일본 제외)은 스웨덴 대사관이 보호한다.

각주편집

  1. “[통계로 보는 남북한①] 수교국 및 국제기구 가입”. 데일리엔케이. 2011년 1월 3일. 
  2. 《력사사전》 '남조선괴뢰정부' 항목
  3. <종합>北, "개성공단 축소·개성관광 중단·남북 철도 중단"
  4. 北개성안내원 "이제 닫히면 언제 열릴지..."
  5. 金통일 "개성공단폐쇄, 희박하나 배제 못해"(종합)
  6.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일 양국간의 문제점
  7. “미국 여기자·로버트 박 송환 ‘해결사’ 역할… 평양은 스웨덴 대사관으로 통한다”. 국민일보. 2010년 5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0월 15일에 확인함. 
  8. [1]
  9. [2]
  10. [3]
  11. [4]
  12. [5]
  13. "비밀리에 북 외교관 DNA 관리" 미국 스파이 폭로 2010-11-13 SBS뉴스
  14. 미국 대학생 둘, 평양에 뛰어들다 2011-01-07 미디어오늘
  15. "북한 주민, 美보다 中 싫어해" 2012-06-26 매일경제
  16. 하영선,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322쪽
  17.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6쪽. ISBN 978-89-91965-12-6. ...1949년... 중국은 이보다 닷새 뒤인 10월6일 북조선과 수교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간주하는 듯 했으나,... 
  18. “북-중,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한겨레21》 (한겨레신문사). 2011년 6월 6일. 
  19. "北, 中에 황금평·위화도 100년간 임대". 한국일보사. 2010년 10월 28일. 
  20.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72554 2010-12-27 노컷뉴스
  21. "北 무역상 베이징서만 1천명 외화벌이" 2011-02-09 연합뉴스
  22. 양승윤, 《필리핀》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2003), 366~7쪽
  23. “北傀네팔 大使級修交”. 동아일보. 1974년 6월 3일. 1면. 
  24. “스리랑카 · 가나와 大使級修交 의미”. 경향신문. 1977년 11월 14일. 스리랑카는 지난 70년 반다라나이케수상 집권에 따라 북괴와 수교했으나 71년 북괴대사관이 反정부반란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대사관이 폐쇄되고 공관원전원이 추방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형식상의 외교관계는 지속되었으며 스리랑카는 유엔문제에서 불개입정책을 고수해 왔다. 
  25. “北韓∙아프가니스탄 大使級外交수립”. 동아일보. 1973년 12월 29일. 北韓과 「아프가니스탄」은 大使級外交關係를 樹立했다고 北韓의 中央通信이 二十八일 보도했다. 
  26. [6]
  27. [7]
  28. [8]
  29. “스위스北傀 修交합의”. 동아일보. 1974년 12월 20일. 1면. 
  3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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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11]
  33. [12]
  34. [13]
  35. [14]
  36. 안윤석 대기자 (2010년 11월 12일). “北, 쇼팽 탄생 200돌 기념 폴란드와 공동음악회”. 노컷뉴스. 2010년 11월 17일에 확인함. 
  37. “韓-헝가리 代表部설치 의미와 波長”. 동아일보. 1988년 9월 13일. 3면. 
  38. [15]
  39. [16]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