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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趙寅永, 1782년 ~ 185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조선에 고구마를 도입했던 조엄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장인 조만영의 동생이다. 풍양 조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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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
趙寅永
이한철 필 조인영 초상.jpg
작가 생애
출생 1782년
조선 경기도 양주
사망 1850년 (향년 69세)
조선 한성부
직업 문관, 문장가, 시인
국적 조선
학력 1819년 식년문과 장원 급제
종교 유교(성리학)
작가 정보
필명 자 희경(羲卿)
호 운석(雲石)
시호 문충(文忠)
활동기간 1819년 ~ 1850년
장르 시조, 한시, 시문학
가족 관계
부모 조진관(부)
자녀 슬하 3녀
양자 조병기(趙秉夔)
친지 조영하(양손자)
이정숙(양손부)
주요 작품
영향
기타 정보

목차

생애편집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이 있어 1817년(순조 17)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1]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대사성,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이조참의, 직제학을 역임하고 이조참판, 예조참판, 동지돈녕부사, 홍문관제학을 한 뒤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 우참찬, 예문관제학을 차례차례 하며 수원유수, 예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당시 나이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순원 왕후가 정사를 맡아보게 되자, 안동 김씨가 세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에 맞서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이 되어 외종손 헌종을 보필하였다. 호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841년(헌종 7) 의정부 우의정을 거쳐 의정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며, 1847년 《국조보감》을 지을 때 공이 컸다.

저서로 《운석유고》가 있다.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조엄(趙曮)
    • 아버지 : 조진관(趙鎭寬)
      • 형님 : 조만영(趙萬永)
      • 형님 : 조원영(趙原永) - 숙부 조진의(趙鎭宜)의 양자가 됨
  • 양자 : 조병기(趙秉夔) - 조만영(趙萬永)의 차자
    • 양손자 : 조영하(趙寧夏) - 조병석(趙秉錫)의 차자, 조부는 조상경의 맏증손 조장영(趙章永)
  • 장녀 : 청풍 김씨 김학성(金學性)의 처
  • 차녀 : 전주 이씨 이인우(李寅禹)의 처
  • 삼녀 : 대구 서씨 서익보(徐翼輔)의 처

저서편집

  • 《운석유고》

관련 항목편집

참고 문헌편집

  1. “조인영(야후 백과사전)”. 한국 야후. 2009년 4월 17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전임
심상규
조선섭정
1841년 11월 29일 ~ 1841년 12월 11일
후임
흥선대원군
전임
조만영
조선의 상급 국상
1838년 3월 19일 ~ 1849년 7월 25일(음력 6월 6일)
후임
김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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