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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과 독일 사이의 협력을 보여주는 프로파간다

중독합작은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중화민국과 독일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중화민국의 산업과 중화민국 국군의 현대화에 있어서 중국과 독일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1926년 당시 중화민국은 군벌 시대에 들어섰다. 1928년 북벌이 시작되어 중국 국민당은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중국은 잠재적인 적으로 일본 제국을 꼽았다. 중화민국 정부의 국방과 산업에 대한 현대화 요구와 독일 정부의 안정적인 원자재 공급처에 대한 욕구가 중화민국과 독일이 1920년대 말부터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내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때에도 두 국가의 협력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약화되었고, 1941년 독일과 일본이 동맹을 맺으면서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협력은 중국의 현대화와 중국의 항일 능력 증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편집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로 인해, 독일의 산업 확장은 크게 제한되었다. 독일 육군은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고, 독일 군수품은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군을 혁신하는 것 자체를 제한하지 않았고, 많은 군수 기업들은 기술과 기계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기에 무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군수 기업들은 소련, 아르헨티나와 같은 제3국과 관계를 형성했고, 합법적으로 무기를 생산해 제3국에 판매했다. 중화민국 정부 역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1년 중국-독일 협약을 별도로 체결했다. 한편, 중국은 위안스카이의 사망 이후 북양정부가 붕괴되었고, 군벌 시대가 도래했다. 독일 무기상들은 군사적 원조와 거대한 무기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중국과 다시 연결되기를 희망했다.[1]

중국 국민당 정부 역시 독일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고, 독일 유학파인 주지아화는 1926년부터 1944년까지 중국과 독일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1953년 발간된 "쑨원"에서 중국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독일이 최상위권에 오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제국주의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조직을 돕고 공산주의자들의 정부 참여를 권했던 소련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중국에 정치적 이익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장제스독일의 통일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 독일은 주요 요소로 간주되었다. [2]

1926년 주지아화는 막스 바우어를 초청해 중화민국에 대한 투자 가능성을 조사하게 했고, 1927년 바우어는 광저우에 도착해 장제스의 고문관이 되었다. 이후 46명의 다른 독일 군관들이 국민혁명군의 고문과 훈련을 맡았고, 바우어 자신은 1929년 군벌들과의 전쟁에서 국민당이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고안했다.[3] 1928년 바우어는 중국의 산업화 노력을 위해 영구적인 고문 임무를 맡고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우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회사들은 중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1920년 카프 폭동에 바우어가 참여한 것으로 인해 중국에 투자하기를 주저했다. 더욱이 독일은 여전히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직접적인 군사 투자가 불가능했다. 중국으로 돌아오던 중 막스 바우어는 천연두에 걸렸고, 상하이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안장되었다.[4]

각주편집

  1. China Year Book, 1929–1930 pp. 751–753.
  2. Sun Yat-sen 1953, p. 298.
  3. China's nation building effort, AN Young
  4. Kirby 1984, p.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