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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작전(독일어: Fall Blau) 또는 블라우 작전은 1942년 여름에 히틀러가 코카서스 지역의 유전을 손에 넣는 것을 목표로 한 작전이다.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함으로써 사실상 실패로 끝나자, 히틀러는 1942년 코카서스 지역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바쿠(로스토프 남동쪽 1,112km), 마이코프(로스토프 남쪽 약 300km), 그로즈니(로스토프 남동쪽 약 640km) 등의 유전이 있는 코카서스 지방은 소련의 생명줄과도 다름없었다. 특히 소련 국내와 연결된 철도가 로스토프스탈린그라드 방면 두 곳뿐이라는 것을 알아챈 독일군은 이곳의 철도를 끊어 소련으로 가는 석유 수송을 완전 차단할 속셈이었다. 한편 독일군의 전력이 증강되고 있음을 간파한 소련은 여름에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재개될 것을 확신했다.

크렘린 작전의 개시편집

히틀러는 블라우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크렘린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모스크바에 몰려 있는 소련군 대부대가 블라우 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격을 재개하라 같은 가짜 지령을 내리거나 모스크바 지구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는 등 소련군이 이 위장 모스크바 공격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확신하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위장전술을 꾸몄다. 소련군은 그 가짜 정보를 믿고 모스크바 방어선을 강화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42년 6월 19일에 군사기밀이 누설되어 블라우 작전이 위기에 직면했다.

라이헬 소령의 비행기 사고편집

독일 제6군 제40 장갑군단의 사령관 게오르크 시투메 중장은 6월 17일 휘하 3개 사단의 사단장들을 소집하여 처음으로 블라우 작전 제1단계에서 군단이 맡은 역할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당연히 시투메는 히틀러 엄명대로 구두에 의한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단장 한 사람이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약간의 메모를 요청했고 시투메도 이것을 허락했다. 그는 반 페이지 정도의 개요를 구술하고 각 사단장에게 보내는 복사본을 만들게 하여 믿을 만한 전령에게 주어서 그것을 하르코프 북방의 3개 사단 사령부에 전하도록 했다. 6월 19일, 슈투메의 이 규칙 위반 메모를 받은 제23기갑사단의 작전주임참모 요하임 라이헬 소령이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그는 비행기로 제17군단 사령부로 가서 자기 사단 배치를 확인하기 위해 문제의 메모와 제40기갑군단 소속 각 사단의 배치도와 제1단계의 군사 목표를 적은 전용지도를 가지고 갔다. 라이헬은 오후 2시에 피젤러 시토르히 관측기를 탑승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말았다. 관측기가 행로를 잘못 벗어나면서 소련군 고사포의 공격을 받아 연료 탱크에 구멍이 뜷려 적 전선 근처에 불시착했다. 그날 밤, 시투메 중장은 하르코프의 사령부에서 부하 사단장과 5명의 고위 장교를 불러 호화 파티를 열었다. 시투메는 미식가로서 유명했고 그 자신도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쟁은 분명히 나쁘다. 그렇다고 똑같이 나쁜 것을 먹으란 법이 있는가? 그렇지 않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는 손님들에게 캐비어, 사슴고기 구이, 그리고 크리미아산 샴페인을 대접하면서 농담으로 그 만찬을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마지막 만찬"이라 불렀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시투메와 장교들은 기분이 좋았고, 블라우 작전의 개시를 대망하고 있었다.

오후 10시께 대화를 가로막으려는 듯 시투메의 작전주임참모인 헤세 중령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헤세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본 시투메는 "나쁜 소식을 가지고 오지 말게"라고 여전히 기분 좋게 말했다. 헤세 중령은 흉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라이헬 소령 탑승기가 예정 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이헬이 블라우 작전 계획서를 가지고 갔다는 헤세의 설명을 듣자 시투메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부관에게 명해서 모든 사단, 모든 연대, 모든 중대에 연락을 취해 라이헬 탑승기의 행방을 찾게 했다. 그후 1시간 내내 시투메와 초청객들은 초조감을 견디지 못한 채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고 있었다. 라이헬 탑승기가 소련군 전선에서 격추되어 작전계획서가 소련군 수중에 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마침내 제336사단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그 사단의 전선 관측병 한 사람이 오후 늦은 시각에 관측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관측기는 소련군 전선 바로 뒤 아니면 바로 앞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시투메는 당장 수색대를 보내 전선을 수색하게 했다. 수색대는 그 관측기를 무인지대의 한 골짜기에서 발견했다. 기체는 무사했으나 기내에는 서류가 없었다. 수색대는 2개의 새 무덤을 발견하고 소련병이 라이헬과 조종사를 사살하여 매장한 것으로 추측했다. 수색대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일단 돌아와 그대로 보고했다. 시투메는 노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소련군이 우리 장병 시체에 경의를 표해 매장을 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는 소리질렀다. 시투메는 소련군이 계획서를 입수했을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소련군이 독일군 수색대를 속이기 위해 다른 시체 2구를 매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투메는 확인을 하도록 또 한번 수색대를 내보냈다. 라이헬의 당번병이 함께 갔다. 실제로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면 소령의 시체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무덤을 파냈다. 시체는 알몸이었는데 손상이 심해 당번병도 단정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 시투메가 염려한 최악의 상황과 한치의 차이도 없었다. 라이헬은 지금쯤 소련 비밀경찰의 고문을 받아 손톱이 뽑히고, 블라우 작전에 관해 소상한 내용을 불고 있으리라. 이윽고 크렘린 작전 때문에 모스크바 방면에 있던 소련군 대부대가 블라우 작전을 분쇄하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남하해 오리라. 시투메는 적어도 이렇게 상상했다.

라이헬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수수께끼에 싸였다. 독일군은 그것을 해명할 수 없었고 또 소련도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투메와 그 부하 장교들은 당장 독일군부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제23 기갑사단장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시투메와 그 막료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각기 5년 및 2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군법회의 의장인 헤르만 괴링 원수는 훌륭한 군인인 시투메를 동정하여 히틀러에게 관대한 처분을 진정했다. 히틀러는 시투메의 형을 감하고 그를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시투메는 1942년 10월 여기서 벌어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블라우 작전 개시일이 다가옴에 따라 히틀러는 잠깐이기는 하나 딜레마에 빠졌다. 소련군이 이 작전 계획의 전모를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여 블라우 작전을 중지할 것인가, 아니면 공격을 감행할 것인가. 히틀러는 냉정하게 블라우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라이헬 탑승기가 추락한 이후 소련군 부대는 라이헬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손에 넣었고, 이 서류는 세묜 티모셴코 원수를 통해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스탈린은 이 서류를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했다. 즉 독일군의 의도는 모스크바 남방으로부터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데 있으며, 그들은 엉터리 작전계획서를 탄로나게 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공격이라는 있지도 않은 공격에 대항하게 하기 위해 모스크바 방어군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공중 정찰에 의해 독일군 부대 배치가 계획서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문제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블라우 작전'의 제1탄편집

이후 블라우 작전은 예정대로 개시되었다. 1942년 6월 28일, 페도르 폰 보크 원수 휘하의 3개군 가운데 2개 군이 하르코프 북방 약 150km의 쿠르스크 지구로부터 진격을 개시했다. 주공격을 맡은 독일 남부집단군은 병력이 130만명에 달했고, 전차 2천대와 1,600여기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먼저 제4장갑군, 제2군이 동쪽으로 약 160km지점에 있는 보로네시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보로네시돈 강보로네시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도시로서 모스크바, 흑해, 카스피해를 잇는 러시아의 남북에 걸친 모든 철도와 도로 그리고 하천 교통의 요충지였다. 2일 후, 보크 장군 휘하의 제3타격군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6군이 북동쪽의 보로네시를 향해 하르코프를 출발했다. 제6군은 정예군으로서 11개 사단과 시투메 중장이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제40장갑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장갑군단이 선봉에서 길을 내고 제6군은 북쪽 병력과 연계해서 오스콜강과 돈 강 사이에서 소련군을 포위할 예정이었다. 이 작전이 끝나면 독일군은 돈 강을 남하하고 다시 한번 협공작전을 펴서 스탈린그라드를 봉쇄한 다음 코카서스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 작전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그리고 처음 수일간은 전장에서도 빈틈 없이 훌륭하게 수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6월 30일, 북쪽의 장갑부대는 보로네시까지 가는 도로의 반을 주파했다. 제6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각 부대들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파울루스 휘하의 장갑군단의 한 사단은 파리에서 막 이곳으로 온 부대로서 아직도 에펠탑 기장을 달고 있었는데, 그들을 맞이한 환영 인사는 그런 불안을 더 증대시켜 주었다. 공중에서 투하된 소련군 전단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제23 장갑사단 여러분, 소련에 어서 오십시오. 화려한 파리 생활도 이제 끝이 났습니다. 이 땅이 어떤 곳인지는 전우들로부터 들었겠지만 얼마 후면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소련군이 이상하게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전진부대에 종군한 한 독일 특파원을 괴롭혔다. "여지껏 1km마다 완강한 저항을 보여온 소련군이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퇴각했다. 적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이 광대한 대지로 진입한다는 것은 몹시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독일군을 이처럼 불안하게 만든 소련군의 기묘한 후퇴는 결코 무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 전선 사령관 티모센코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멈추고 만사가 잘 된다면 독일군은 이 볼가강변의 요새에 부딪쳐 소진될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소련군이 노리던 바였다.

티모센코군의 황급한 철수는 블라우 작전의 제1단계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소련군의 철수를 깨달은 레오 가이르 폰 슈베펜부르크 중장(줄여서 가이르 장군)은 당시 시투메 중장의 후임으로 제40장갑군단장이 되어 있었다. 이 장군은 즉각 제 40장갑군단을 동쪽의 돈 강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허가를 요청했다. 그는 여기서 퇴각하는 소련군 퇴로를 끊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울루스 장군은 전장에서 즉흥적으로 작전을 변경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했다. 가이르 장군이 제6군 사령부로부터 받은 회답은 그에게 주어진 당초 임무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즉, "제40장갑군단은 제4장갑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으로 진격하라"는 것이였다. 7월 3일경에는 히틀러도 파울루스가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군을 공략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히틀러는 폰 보크 원수의 전투사령부로 날아와 보로네시에 관한 새 계획을 명령했다. "보크, 나는 보로네시 점령을 이제는 고집하지 않소. 또 실제로도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소. 만약 당신이 하고 싶다면 즉각 남하해도 좋소." 이 변심으로 일련의 어지러운 명령이 잇달아 하달되었고, 그것이 일단락되었을 때는 블라우 작전은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 상태로 빠졌다. 먼저 7월 3일 오후 늦게 제40장갑군단장 가이르 장군은 제6군으로부터 초기의 지령을 뒤엎고 돈강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얼마 전에 그가 요청했다가 허락되지 않은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정오 그가 진격을 개시하자마자 그 명령은 또다시 취소되었고, 그 대신 보로네시로 진출해 제4장갑군이 이 도시를 공격하는 동안 그 측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랫동안 히틀러로부터 자유 지휘권을 얻지 못했던 보크 장군이 비로소 그것을 얻게 되자, 그는 우선 보로네시를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지휘하는 북쪽 부대의 일부가 보로네시로 수km지점까지 육박했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을 고쳐서 가는 김에 보로네시를 점령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보로네시 점령과 히틀러의 계획 변경편집

그러나 일은 그렇게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 보크는 보로네시에 소련군 부대가 충만해 있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이 소련군 방어군은 9개 보병사단과 4개 보병여단, 7개 전차 여단 그리고 2개 대전차포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들은 선전분투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까지 시간을 벌어주었다. 보크는 7월 13일이 되어서야 겨우 보로네시를 점령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그가 얻은 포로의 수는 적었으며, 소련군은 돈 강 동쪽 기슭의 중요한 보급로와 철도를 사수하고 있었다. 당시 블라우 작전의 시간표는 전혀 맞지 않게 되고 있었다. 히틀러는 시간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원래의 작전을 포기하고 한쪽 손(B집단군)으로는 스탈린그라드를, 다른 한쪽 손(A집단군)으로는 로스토프를 점령함으로써 코카서스로의 문을 열기로 결정했다. 처음 계획에 의하면, 스탈린그라드 지구 협공작전에서 남으로부터의 공격을 맡게 되어 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장군 휘하의 제1장갑군은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새 명령을 받아 스탈린그라드 대신 로스토프로 남하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당초 헤르만 호트 장군의 제4장갑군은 제6군의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지금부터는 남하해서 클라이스트를 돕게 되었다. 한편 남부집단군 사령관 보크 장군은 자기 병력의 분할에 항의하다 해임되고 말았다. 그 후임으로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 장군이 임명되었다. 여기서 로스토프를 공격하고 코카서스 지방까지 가야 할 A집단군에게는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포탄과 연료가 더 많이 할당되었다. 클라이스트는 스탈린그라드를 "7월 말에 한번도 싸우지 않고도" 점령할 수 있었다고 후에 회고했다. 그러나 B집단군 소속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결정에 따라 연료를 빼앗김으로서 예정 기간 안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격이 늦어진 만큼 소련군 방어선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와 똑같이 코카서스 지방 깊숙한 곳의 소련군 방어 태세도 로스토프에서의 전투 동안 강화되었다.

로스토프 쟁탈전편집

7월 22일 시작된 로스토프 공방전은 치열한 싸움이었다. 로스토프를 공격한 독일군은 처음에는 쾌조를 보였다. 그러나 로스토프 시가에 돌입하자 독일군 부대는 소련 공병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소련병은 발코니나 지붕 위에서 독일병을 저격하고 화염병을 투척하기도 했다. 도로에는 바리케이트를 쌓고 대전차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 "로스토프 공방전은 처절한 전투였다."라고 독일군의 알프레트 라인하르트 대령은 회상했다. "소련군 방어부대는 산 채로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싸웠다. 아군 부상병은 병력수송용 장갑차에 실어서 보호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사살되었다." 독일 제125사단 소속 라인하르트 연대는 소련군을 냉정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처치했다. 독일군 포병대의 맹포격으로 로스토프를 완전히 파괴해버린 다음 시내를 A,B,C,D 4개의 전투구역으로 나누었다. 6개 공격중대가 각각 중기관총 1문, 대전차포 1문, 경야전유탄포 1문을 가지고 세로로 한 줄로 늘어서서 북으로부터 남으로 공격하여, 각 전투구역의 경계에서 전진을 정지하고 태세를 정비했다. 그 뒤로는 6개 소탕중대가 따라와 건물을 샅샅이 수색해 공격부대가 놓친 소련병이나 시민, 나아가서는 부녀자까지도 몰아냈다. 그리하여 차례차례 A,B,C,D 전투구역 방어부대는 일소되었다. 7월 24일까지 그 소탕작전이 완료되었다. 이날 독일군 선두부대가 로스토프에서 돈 강을 도하했다. 그들 앞에는 약 500km에 걸쳐 광대한 초원이 이어져 있었으며 그 끝에 바쿠 유전이 있었다.

독일 제6군의 진격편집

한편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제6군은 진격을 계속했지만 대항하는 적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독일 육군 총사령부의 할더 참모총장은 돈강을 남하해서 칼라치로 향하는 제6군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진격을 계속하는 것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총통 각하, 소련군은 아군과의 접촉을 조직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라고 할더는 히틀러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히틀러는 쏘아붙였다. "소련군은 패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 수개월 동안 입은 타격으로부터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군측 상황에 관해 히틀러는 어느 정도까지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라 할지라도 질서정연한 후퇴는 모든 군사 행동 중에서도 아마 가장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소련병의 훈련도는 낮았다. 티모센코의 철수 명령의 글이 서툴게 쓰여졌기 때문에 그 명령을 쏜살같이 퇴각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소련병이 수만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는 사단이 있는가 하면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게 퇴각하는 사단도 있었다. 소련 제62군 사령관 V Ya. 콜파크치 소장은 공황상태에 빠진 부대의 분류(奔流)를 붙들어 세우기 위해 막료들을 자동소총으로 무장시켜 칼라치(보로네시 남동쪽 약 180km,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약 320km) 교량 근처에 배치했다. 이 장교들은 도망치는 소련군을 불러세우는 한편으로, 지평선쪽으로부터 파울루스 휘하의 독일 제6군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제6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콜파크치는 얼마 후 티모센코에게 "독일군의 추격 없음"이라고 전보를 쳤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라고 티모센코는 참모장에게 물었다. "독일군이 계획을 바꾸었는가?"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은 파울루스 장갑군단의 연료가 바닥난 것이였다. 제6군은 칼라치 전방 약250km 지점에서 정지하여 거기에 그후 18일간이나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티모센코는 이 기회를 당장 이용했다. "독일군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돈 강 서안에 방어선을 구축할 여유가 생겼다."하고 그는 막료들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칼라치 주변의 4개군으로부터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과 아직 편성중에 있던 2개 전차군을 투입했다. 이처럼 휘하의 대병력을 좁은 전선에 꽉 몰아넣었다는 것은 티모센코가 남긴 최악의 실수였다. 마침내 연료보급을 받은 독일 제6군의 파울루스는 이중포위작전을 취해서 진격해 갔다. 그의 제14장갑군단은 좌익으로부터 진출하고, 호트의 제4장갑군으로부터 제24장갑군단이 우익으로부터 진출했다. 8월 8일 포위망이 완성되었을 때, 7만의 소련병과 약 1천 대의 전차 및 장갑차 그리고 750문의 대포가 포위망 속에 갇히고 말았다. 사실상 이제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데 이 공격이 끝나자 파울루스는 칼라치 주변을 소탕하고 남쪽으로부터 지원받기로 되어 있던 호트군을 기다리느라 2주일을 낭비했다. 그것이 문제가 되자 호트는 끝내 히틀러에게 소환된다. 드디어 8월 21일 제6군은 돈 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이 사이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사를 건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얻었던 것이다.

독일 A집단군의 후퇴편집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반격을 받은 독일 B집단군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소련군은 '토성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 작전의 목적은 로스토프를 점령하여 코카서스 지방에 들어가 있는 독일 A집단군을 가둬버리는 것이었다. 1942년 8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독일 A집단군은 테레크강 부근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여기서 코카서스 산맥에 가로막히고, 또 테레크강 도하를 앞두고 뜻밖에도 연료 부족 때문에 멈추어서고 말았다. 또한 그곳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구축한 방어 시설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소련군 코카서스 집단군 사령관 I. V. 튜레네프 장군은 이렇게 쓰고 있다. "주민들은 피묻은 헝겊을 물집이 생긴 손에 감고 쓰러질 때까지 굳세게 일해주었다. 초가을 무렵에는 7만 개의 토치카와 기타 총포좌를 포함한 약 10만을 헤아리는 방어시설이 구축되었다. 800km를 넘는 대전차 구덩이를 파고 320km에 걸친 장벽을 구축했다. 또 1,600km나 되는 참호도 팠다. 줄잡아 동원 인력이 연 900만일분의 노동 시간을 이 작업에 바쳤다."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1월경, 소련군은 '토성 작전'을 개시했다. 클라이스트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소련군은 로스토프 전방 불과 6.4km되는 지점까지 오고, 아군은 로스토프 동쪽 630km지점에 있을 때, 히틀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철수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나에게 보내왔다. 이것은 그야말로 죽음의 선고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에 나는 새 명령을 받았다. 퇴각하라, 모든 장비를 다 가지고 철수하라." 클라이스트는 지체하지 않고 준비를 하고 당장 출발했다. 그리하여 클라이스트는 간발의 차이로 로스토프를 지나 탈출에 성공한다. 1943년 2월 14일, 소련군은 로스토프를 점령했다. 그러나 벌써 독일 A집단군의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뒤였다. 클라이스트는 이 공적에 의해 원수로 승진했다. 히틀러가 퇴각을 지휘한 전공에 대해 장성을 승진시킨 일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렇게 해서 코카서스 지역의 유전을 목표로 한 '블라우 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참고 서적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