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융청

총융청(摠戎廳)은 1624년(인조 2년)에 만들어진 조선5군영 중 하나이다. 이 군사 부대의 군량미 창고로는 남창(南倉)이 있었다. 지금의 수도군단에 해당하며, 제3야전군사령부의 역할도 겸했다.

역사편집

도성 외곽의 방비를 위해 설치되었으나 수어청이 설치되면서 도성 북부의 방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여러 번 인원의 감축과 통폐합을 겪었다. 1846년(헌종 12년) 총위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49년 다시 총융청으로 되돌려지고, 1884년(고종 21년)에 결국 폐지되었다.

청사편집

  • 본영(本營) : 한양 도성 서북쪽에 있던 창의문 밖 연융대(鍊戎臺)에 있었으며, 신영(新營)이라 하였다. 300여 칸[間] 규모.
  • 동영(東營) : 창경궁 선인문 밖에 있었다.[1]
  • 경리청(經理廳) : 한성부 중부 항교동에 있었다.
  • 평창(平倉) : 창의문 밖에 있었다. 상창(上倉), 하창(下倉)으로 구분되었다.
  • 북한청(北漢廳) : 북한산성 내에 있었다.

편성편집

도성을 방어하는 총융청 내영(內營) 2부(部)의 편성은 아래와 같다. 이 내영 편성은 숙종 즉위년인 1674년부터 1704년(숙종 40년)까지 유지되었다.

  • 좌부(左部) : 천총
    • 좌사(左司) : 5초(哨)[2]
    • 중사(中司) : 3초
    • 우사(右司) : 5초
  • 우부(右部) : 천총
    • 좌사(左司) : 5초(哨)
    • 중사(中司) : 3초
    • 우사(右司) : 5초

관제편집

  • 종2품 총융사(摠戎使) 1명
  • 종2품 중군(中軍) 1명
  • 정3품 천총(千摠) 2명
  • 정3품 진영장(鎭營將) 3명 : 전영장은 남양부사, 중영장은 파주목사, 후영장은 장단부사 겸직
  • 종4품 파총(把摠) 2명
  • 종9품 초관(哨官) 10명
  • 기타 교련관(敎鍊官) 15명, 기패관(旗牌官), 군관(軍官) 10명 2명 등

북한산성 주둔 부대편집

  • 정3품 관성장(管城將) 1명
  • 종4품 파총(把摠) 1명
  • 종9품 초관(哨官) 6명
  • 기타 교련관, 기패관, 성문부장(城門部將) 등[3]

각주편집

  1. 책응소(策應所)라고 하며, 장용영(壯勇營) 직방(直房)으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2. 오늘날의 중대급 부대이다. 약 100명에서 125명 사이로 편성된다.
  3. 북한산성 수비를 전담했던 군영인 경리청(經理廳)을 1747년(영조 23년)에 총융청으로 편입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