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서

최재서(崔載瑞, 1908년 2월 11일 - 1964년 11월 16일)는 일제령 조선대한민국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이다.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상수시(尙壽施), 석경(石耕), 석경생(石耕生).[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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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崔載瑞
1939년 최재서.jpg
작가 정보
출생 1908년 2월 11일(1908-02-11)
대한제국 황해도 해주
사망 1964년 11월 16일(1964-11-16)(5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 문학평론가·영문학자
학력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필명 石耕牛, 鶴首里, 尙壽施, 石耕, 石耕生, 石田耕造, 石田耕人
활동기간 1930-1964년
장르 문학평론·번역·영어영문학

황해도 해주군 출신. 과수원을 경영하는 부모 아래서 자라났으며 제2고보를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졸업하였으며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사토 기요시 교수의 은덕을 입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강사에 임명되나 타 교수진의 반대로 인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보성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앤드류 브래들리를 소개한 〈미숙한 문학〉으로 평단에 데뷔하였으며, 주지주의 문학론을 본격 도입하였다. 비평활동이 중기에 드는 무렵 지성론을 발표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 김문집과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8년 평론집 《문학과 지성》을 발표. 전시에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다.

광복 이후 평단에서 물러앉아 대학으로 돌아갔으며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사 따위를 강의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 연구에 진력하였다. 1964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1908년 2월 11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북행정 72번지.[2] 옥경, 국경, 재서, 보경, 애경 5남매의 외아들이었다.[3] 최재서 자신의 글에 따르면, 부친 최경태(崔景台)는 해주에서 '과포 집'으로 통하는 과수원을 경영하였다.[4][5] 향리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학업에 뜻을 품고 상경하여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들어갔다.[6] 졸업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하여 1928년 3월 수료하였다.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 후 같은 해 4월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 후 영국 런던대학에 유학하였다.[7] 일본인 교수이자 시인인 사토 기요시 교수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1933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강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선인을 기용했다" 하는 타 교수들의 반대로 1934년 3월 해임되었다.[8][9][10][11] 이후 보성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12]

평단으로편집

첫 논문은 앤드류 브래들리를 소개한 〈미숙한 문학〉(《신흥》 게재). 이후 1933년 4월 〈구미현문단총관〉, 1933년 12월 휴 월폴의 〈영국현대소설의 동향〉, 1934년 2월 밀턴 울드맨의 〈미국현대소설의 동향〉, 제임스 조이스의 《반공일》 등을 번역했고 조선일보 학예면 담당자 이원조의 도움을 입어 하기강좌란에다 〈현대주지주의의 문학이론건설―영국평단의 주류〉, 〈비평과 과학―현대주지주의의 문학론속편〉 등을 발표하여 주지주의 문학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1934년 11월 〈문학발견시대〉에서는 작가와 독자의 중개인 노릇밖에 할 것이 없다는 비평관을 주장, 연후의 〈조선문학과 비평〉에서 거듭 표명하였다.[13] 비평활동이 중기에 드는 무렵 휴머니즘의 연장인 행동주의 문학의 안티테제, 지성론을 1937년 5월 〈현대적 지성에 관하여〉, 1937년 6월 〈고 이상의 예술〉, 1938년 8월 〈문학·작가·지성―지성의 본질과 그 효용성〉 등에 노현하였으며 또한 이 지성론의 변형으로서의 풍자문학론을 1935년 7월 〈풍자문학론〉, 창작방법론을 논한 〈빈곤과 문학〉 등에서 노현하였다.[13] 1930년대 후반 자신과 평단의 쌍벽이었던 김문집과 논전이 시작되었다. 최재서가 찬사를 마지않던 이상의 《날개》에 대하여 김문집은 그러한 신심리주의는 수년 전 도쿄 문단에서 "여름의 맥고모자"같이 흔한 것이라 반론하였다. 1938년 인문사에서 《문학과 지성》을 간행.[13]

그러나 최재서의 비평은 일제군국주의의 강압으로 인문평론 말기에서부터 신체제의 문학으로 전환되었다. 1940년 〈전형기의 언론계〉, 1941년 〈전형기의 평론계〉, 〈전환의 자유성과 자각성〉 등의 평론을 거쳐 결국에는 일문으로 된 〈국민문학의 요건〉, 1942년 〈새로운 비평을 위하여〉, 〈조선문학의 현단계〉 등을 발표하기 이르렀다. 조선문인회, 제2차 대동아문학자대회 등에 참가했으며, 1943년 신체제의 일문평론집 《전환기의 조선문학》을 간행하였다.[13]

해방 이후편집

해방이 되고서 최재서는 과거를 참회하는 뜻으로 평단에서 물러앉아 대학으로 돌아갔다.[14]

1946년 11월 1일 동아대학교에서 교수진을 개편보강하는 차원에서 학생과 직원이 상경하여 당시 연희대 영문학 과장이던 최재서를 초빙하여 1947년 4월 1일에서 1948년 3월 31일까지 재직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재직하기는 자필이력서에서는 1949년 9월 1일에서 1960년 9월 30일까지라 하는데 《연세대학교 백년사》에서는 1947년 9월 1일에서 1961년 3월 19일로 기록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주로 문학개론, 영문학사, 영국문예비평사 등 강의를 담당하였다. 1957년과 1960년에 각각 출판한 《문학원론》과 《영문학사》는 이들 강의의 원고를 토대로 쓴 것.[15]

1948년 12월 27일, 28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16] 1949년 8월 반민당연범의 1인으로서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문초를 당하였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17]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도피생활을 하다 12월 25일 대구로 피난하였다.[17] 책으로 《콘사이스 옥스포드 사전》과 셰익스피어 전집, 아냔의 《글로서리》만을 보따리에 싸서 가져갔다고 한다.[14] 전시 문예지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군사 전문 일간신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에 실린 맥아더 기사를 논평하고 재구성한 《매카―더 선풍》, 맥아더 평전을 번역한 《영웅 매카―더 장군전》을 차례로 발간하였다.[18] 한편 이때부터 셰익스피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단 본격적 셰익스피어 연구는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루어졌다.[14] 1953년 무렵 오랜 침묵을 깨트리고 《사상계》를 중심하여 발표 활동을 시작하였다.[14] 50년대 《사상계》에서 주로 활동하다 60년대 들어 《현대문학》으로 옮겨갔다.[19]

1960년 4.19 혁명이 있고 나서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에 의해 학원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연세대에서는 장경학, 장덕순, 박두진 이렇게 교수 3인에 대한 이사회의 해임처분이 부당하다 항의하여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문과대학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를 위시하여 교수의 농성투쟁도 시작되었다. 요구사항은 교수 3인 해임의 철회, 이사진 개편, 총장인 미국인 언더우드 대신 한국인 총장의 선출이었으니 과격 행동도 벌어졌다. 이에 폭력 앞에 교권이 설 수 없다는 취지의 성명서 아래 최재서 이하 문과대학 교수 7인은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이사회의 권고에 사표를 철회하고 출강하였다.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교수 7인은 학생들의 강의 거부를 당했고 이로 말미암아 최재서는 연세대를 사퇴하였다.[20] 자필이력서에서는 1960년 10월 1일 《동국대학교백년사》에서는 1960년 11월 25일 최재서는 동국대 대학원장에 임용되었고 1년을 지내고 사직하였다.[20] 1961년 동대학에서 한국 최초의 영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셰익스피어 예술론》은 이때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것으로 1963년 여름에 《Shakespeare's Art as Order of Life》로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21] 1962년에는 《현대문학》에 장별로 박사학위 논문을 개재하였으나 어디에 적을 두었는가는 불명. 1963년 4월 한양대 교수로 부임하여 작고할 적까지 재임하였다.[20]

1964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십년래 지병이던 위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고병려의 장례식 약력보고에서는 말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고 적고 있다.[22][23]

가족편집

4남 2녀를 두었으며 큰 아들은 인디애나주립대 교수 최창이고, 막내 아들은 파리7대학의 최승언 교수이다.[24]

사후편집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려고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의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25]

단행본 목록편집

저서
  • 《文學과 知性》(人文社, 1938)[26]
  • 《海外抒情詩集》(편, 인문사, 1938)[26]
  • 《朝鮮文藝年鑑》(공편, 인문사, 1939)[26]
  • 《朝鮮作品年鑑》(공편, 인문사, 1940)[26]
  • 《轉換期の朝鮮文學》(일문, 인문사, 1943)[26]
  • 《신반도문학선집1·2》(편, 일문, 인문사, 1944)[27]
  • 《매카―더 선풍》(향학사, 1951)[27]
  • 《文學原論》(春潮社, 1957)[26]
  • 《現代英美短編小設鑑賞》(공편, 한일문화사, 1959)[26]
  • 《英文學史》(전3권―제1권은 고대·중세, 제2권은 르네쌍스, 제3권은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東亞出版社, 1959-1960)[26]
  • 《標準英文法》(한일문화사, 1960)[26]
  • 《崔載瑞評論集》(靑雲出版社, 1961)[26]
  • 《The Golden Treasury》(주석, 글벗사, 1962)[26]
  • 《교양론》(편, 박영사, 1963)[27]
  • 《셰익스피어 예술론》(乙酉文化社, 1963)[26]
  • 《Shakespeare's Art as Order of Life》(NewYork: Vantage Press, 1965)[26]
  • 《인상과 사색》(연세대학교 출판부, 1977)[27]
역서
  • 《루소와 낭만주의》(I. 배비트, 일문, 上·下, 改造文庫, 1939-1940)[26]
  • 《영웅 매카―더 장군전》(후랑크 캐리·코니리아스 라이안, 일성당서점, 1952)[27]
  • 《주홍글씨》(호돈, 을유문화사, 1953)[27]
  • 《햄릿》(연희춘추사, 1954)[26]
  • 《아메리카의 비극》(박영사, 1959)[26]
  • 《E. A. 포우 단편집》(韓一文化社, 1961)[26]

각주편집

  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1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64쪽. 
  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IV-1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64쪽. 
  3. 최보경 (2011). 〈태일원 과수원〉.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29-30쪽. 
  4. 崔載瑞 (1977년 8월 31일). 〈과수원〉. 《印象과 思索》. 延世大學校 出版部. 52-54쪽. 
  5. 최보경 (2011). 〈아버지의 급서〉.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34-35쪽. 
  6.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관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196쪽. 
  7.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9). 《친일인명사전: ㅇ~ㅎ》. 민족문제연구소. 762쪽. 
  8.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관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195쪽. 
  9.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관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196쪽. 
  10. 김윤식 (1999년 11월 25일). 〈개성과 성격-최재서론〉.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1》. 일지사. 219-220쪽. 
  11. 編著代表 文德守 (1975). 《世界文藝大辭典 下券》. 成文閣. 2005쪽. 
  12.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9). 《친일인명사전: ㅇ~ㅎ》. 민족문제연구소. 763쪽. 
  13. 編著代表 文德守 (1975). 《世界文藝大辭典 下券》. 成文閣. 2006쪽. 
  14. 김활 (1992). “최재서 비평의 인식론적 배경”. 《독서문화 제24집(1992년, 111-131)》: 113. 
  15.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8-9. 
  1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9). 《친일인명사전: ㅇ~ㅎ》. 민족문제연구소. 769쪽. 
  17.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9. 
  18.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9-10. 
  19.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5. 
  20.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0. 
  21. 노민혜 (2016년 2월). “해방 후 최재서 문학비평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4-15. 
  22. 김활 (1992). “최재서 비평의 인식론적 배경”. 《독서문화 제24집(1992년, 111-131)》: 114. 
  23. 최보경 (2011). 〈최재서 오빠에 관한 생각〉. 고순자.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서울: 현대문화출판. 199쪽. 
  24. “재불언어학자 故 최승언 교수 유고집 유럽서 출간”. 
  25.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김남일 기자 (2005년 3월 28일).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한겨레신문. 2007년 11월 7일에 확인함. 
  26. 김윤식 (2009). 〈최재서 저작 목록〉. 《최재서의 국민문학과 사토 기요시 교수》. 301-302쪽. 
  27. 이진영 (2008). “작가연구자료”. 《작가세계》: 9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