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崔炯, 1814년 ~ 1866년 3월 9일)는 조선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국 천주교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베드로(Petrus)이다.

최형 베드로
순교자
출생1814년
충청도 공주[1]
선종1866년 3월 9일
서울 서소문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시복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
시성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절두산 순교성지[2]
축일9월 20일

생애 편집

최형은 1814년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서 한양남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최형은 14 때에 부모의 권유로 형제들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최형은 소년기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농사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여야 했다. 그의 동생 최방제김대건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던 도중 1836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1836년모방 신부조선에 입국한 뒤, 최형은 그의 복사가 되었다. 최형은 1839년기해박해모방 신부순교할 때까지 그를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840년에 최형과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어 석방되었다.

최형은 김대건 부제와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김 신부서품식에 참석한 천주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김 신부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같은 목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조선에 입국한 후,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였다. 최형은 36세에 결혼하였고 한양의 남쪽 근교에서 살면서 종교 서적을 번역하며 묵주를 만들었다. 그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곤 했다. 최형은 교리 교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세례자의 권한을 주었다. 주교는 또한 그를 인쇄소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최형은 4년 동안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천주교 서적출판하였다.

베르뇌 주교체포될 때, 포졸들은 최형도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형은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피신하였다. 그는 나중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용감히 그의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극심한 매질로 인해 다리가 부러졌다. 베르뇌 주교순교하고 며칠 뒤인 1866년 3월 9일에, 최형은 서소문 바깥의 사형장에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참수되었다. 최형은 다른 순교자들 보다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최형이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3세였다.

그의 형 최수1866년절두산에서 참수되었으며, 큰 누나는 평생을 처녀로 살았다.

시복 · 시성 편집

최형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3]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4] 1984년 5월 6일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고 문헌 편집

각주 편집

  1. 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
  2.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유해실”. 2014년 10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2월 15일에 확인함. 
  3.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2014년 10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월 25일에 확인함. 
  4. 서화동/박상익, 공동취재단 (2014년 8월 17일). “교황 "순교자 유산, 세계 평화·인간가치 수호에 이바지할 것". 한국경제 디지털 신문. 2015년 1월 2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