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냐크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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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냑 동맹 전쟁(이탈리아어: Guerra della Lega di Cognac, 1526년 ~ 1530년)은 카를 5세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제국합스부르크 스페인)과 프랑스, 교황령,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등이 결성한 동맹인 코냑동맹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494년에서 1559년까지 65년간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벌였던 일련의 이탈리아 대전쟁중에 제 5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4년간 진행된 전쟁의 결과는 코냑 동맹국들이 대패하며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코냐크 동맹 전쟁
이탈리아 전쟁의 일부
Siege of Florence.JPG
코냐크 동맹 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피렌체 공성전
날짜1526년~1530년
장소
결과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연합 승리
교전국

1526-1528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스페인 제국

페라라 공국의 기 페라라 공국

1526-1528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잉글랜드 잉글랜드 왕국
밀라노 공국의 기 밀라노 공국
나바라 왕국의 기 나바라 왕국

제노바 공화국의 기 제노바 공화국

1528-1530
신성 로마 제국의 기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스페인 제국
제노바 공화국의 기 제노바 공화국
페라라 공국의 기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의 기 만토바 공국

1528-1530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의 기 밀라노 공국

나바라 왕국의 기 나바라 왕국
지휘관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카를 5세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샤를 드 부르봉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안토니오 데 레이바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필리베르 드 샬롱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5세

신성 로마 제국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

프랑수아 1세
생폴 백작
로트레크 자작   ·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프란체스코 페루치   ·
조반니 데 메디치   ·

말라테스타 발리오니

서막편집

파비아 전투편집

파비아 전투 (1525/2/24)에서 대패하며 생포된후 스페인 마드리드에 감금되었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1월 14일에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한후 2월 9일 석방되었다.[1] 프랑스에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3월에 의회를 통해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하며 조약을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1534) 역시 프랑수아 1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황제 카를 5세는 분노했지만 같은해 4월에 오스만 군대가 유럽침공을 위해 이스탄불을 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응징은 뒤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의 1차목표는 헝가리 정벌이였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본가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가 함락된다면 오스트리아가 바로 침공당할수 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출신인 카를 5세로서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오락가락 하는 교황의 정책편집

1519년에 있었던 황제선거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당시 줄리오 추기경)는 카를 5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523년에 콘클라베에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에 줄리오 추기경을 지지하여 큰힘을 실어주었다.[2] 새로운 교황이 즉위하자 카를 5세는 전임교황 하드리아노 6세때 체결한 반-프랑스 방위동맹의 갱신을 요구하였다.[3]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카를 5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프랑스, 베네치아,밀라노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25년 2월,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스페인에 포로로 사로잡히자 교황은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2월 9일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되자 다시 변심하여 카를 5세를 멀리하며 프랑스,밀라노등과 반-합스부르크 방위동맹인 코냑동맹을 추진하였다.

1526년 9월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를 무력으로 장악한후[4] 가진 협상에서 코냑동맹에서 탈퇴를 약속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물러나자 약속을 저버렸다. 1527년 3월중순에 밀라노의 제국군이 로마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교황은 동맹국과 상의도 없이 나폴리 총독과 평화협정을 맺었다.[5] 이를 통해 제국군의 남진을 막아보려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는 이내 4월 25일에 다시 코냑동맹에 재가입했다.[6] 이런식에 지나칠정도로 갈팡질팡하는 교황의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등 파벌이 탄생하도록 만들었고 로마귀족들과 추기경들의 심한 반발과 혼란을 부추겼다.

 

코냑동맹 결성편집

1526년 5월 15일에 코냑동맹이 결성되었다. 방위동맹의 결성을 주도한것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이지만 최종적으로 밀라노 공국의 스포르차 가문에 의해 체결되었다. 동맹참여국은 프랑스, 교황령,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등이였다. 교황은 프랑수아 1세가 스페인에 감금되어 있을때에도 비밀리에 프랑수아 1세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동맹에 프랑스가 참여할것을 독려하였다. 잉글랜드에서 조약이 체결되길 바랬지만 실현되지 못하자 헨리 8세는 동맹참여를 거절하였다.[7]

동맹의 목적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는것이였다.  1521년부터 1526년까지 일어난 이탈리아 전쟁(제4차 이탈리아 전쟁, 4년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키며 북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카를 5세가 차지하자[8]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고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제 카를 5세는 이미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왕국과 시칠리아를 다스리는 군주였다.

초기 움직임편집

전쟁의 시작편집

베네치아가 롬바르디아에서 동맹군과 합류하기 위해 서진하며 1526년 6월 신속하게 로디(Lodi)를 점령하였다. 로디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불만이 많던 로디의 육군 지휘관이 베네치아군에 성문을 열어주었기에 비교적 손쉽게 로디를 차지할수 있었다. 제국군은 밀라노로 진군하여 스포르체스코 성을 포위한후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밀라노 공작에게 통치권을 포기하도록 압박하였다. 1526년 7월 15일, 밀라노 공작(프렌체스코 2세 스포르차)은 항복하고 말았다.[9]

프렌체스코 2세가 4살 되던해인 1499년 10월, 프랑스 루이 12세에 의해 밀라노가 함락되자 그는 망명을 하였는데[10] 망명생활 20년만인 1521년에 그를 밀라노 공작으로 복위시켜준 사람이 바로 카를 5세였다. 그런데 이번에 배신[11]을 하며 참전하자 카를 5세는 격노하였고[12] 제국군에게 통치권 회수를 명했다.[13]

동맹에 합류한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파기하고 밀라노를 다시 정복하기를 원했으나 전쟁초반에는 소극적이였고 프랑스가 동맹에 가담하여 전쟁에 임한다는 사실도 숨기려고 하였다. 마드리드 조약서에 서명을 한것이 4개월도 채 안된 같은해 1월이였고 국가간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것으로 명분이 부족했다. 또한 자신을 대신하여 어린 두 아들이[14] 볼모로 스페인에 억류되어 있었기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

분열하는 코냑동맹편집

1526년 8월, 황제 카를 5세는 로마의 교황에게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다. 교황에게 전달된 서신은 표현만 점잖았을뿐 분노에 찬 황제의 협박이 담겨져 있었다. 공의회를 개최하여 루터의 종교분열 문제와 성직매매등 교황의 각종비리에 대해 처리하며 개혁을 감행하겠다고 압박을 가했다. 지난 서방교회 대분열사건(1378~1418)이후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선한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있었고,[15]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킬수도 있었기 때문에 교황들은 공의회 개최를 매우 싫어했다.

황제의 위협을 받은 교황은 프랑스군이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에 막 도착할 때에 교황령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일로 인해 동맹군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지난 이탈리아 전쟁 기간동안 전 국토가 유린당하여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핑게를 내세워 추가파병을 거부하였다. 프랑스는 다른 동맹국들의 거부로 밀라노를 재정복하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군대를 돌려 롬바르디아를 떠났다.

카를 5세의 고충편집

황제 카를 5세는 이탈리아 상황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지난 4차 이탈리아 전쟁 말기인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 승리하며 사실상 종전 되자 병력을 급히 독일로 투입했다. 1524년 8월에 시작된 독일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반란은 1525년 5월경 진압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1517년에 시작된 루터의 종교분열로 인해 여전히 시끄러웠고 권력누수 현상이 심했다. 프랑스와 종전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중에 프랑수아 1세의 모후 루이즈는 왕의 석방을 위해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을 충격에 빠트리는일이 발생하였다.

오스만의 술레이만 대제는 이를 구실삼아 유럽원정을 선언하였고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카를 5세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은 급팽창하며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동남부 유럽을 점령한후 지속적으로 유럽대륙을 향해 서진을 하고 있었다. 쇠약해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혼인동맹[16]을 통하여 공동방위망을 구축하여 오스만을 견제하였다. 이에대해 오스만은 발칸에서 이 동맹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분쇄시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오스만의 유럽원정편집

1526년 4월 16일에 유럽침공을 위한 약 7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스만군이 이스탄불을 출발하였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같은해 6월, 북이탈리아 로디를 코냑동맹군이 점령하였다. 전선이 두군데 형성되어 카를 5세가 난처하게 되었다. 8월 29일, 합스부르크의 동맹국인 헝가리에 도착한 오스만군에 의해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헝가리가 대패하면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말았다. 카를 5세측 입장으로 볼때 다행스러운것은 7월중순에 제국군이 밀라노 탈환에 성공하였고 오스만은 그해 9월에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이스탄불로 퇴각했다는 점이다.

폼페오 콜론나의 로마장악편집

1526년 9월 20일 새벽, 평소 메디치 가문을 혐오하였던 폼페오 콜론나[17] 추기경이 교황청을 급습한후 로마를 장악하였다. 황제의 사절인 돈 우고 디 몬카다의 사주를 받았던 것이다.[18] 산탄젤로성[19]으로 도피했던 교황은 협상을 통해 코냑동맹에서 탈퇴를 약속했다. 그러나 쿌론나 추기경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서 물러나자 약속을 파기한후 콜론나 추기경을 파문하고 교황군을 동원하여 그의 재산과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황폐화 시켰다. 또한 황제령인 나폴리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20]. 이 소식을 접한 황제 카를 5세는 이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였다. 독일농민반란도 수습되었고 오스만군도 9월에 퇴각하였기 때문에 카를 5세에게도 반격을 가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로마약탈편집

남진하는 제국의 용병들편집

카를 5세는 그의 충복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에게 용병소집을 명했다. 노병 프룬츠베르크는 적그리스도에게 복수하고 부유한 도시 로마를 약탈하자고 독일남부 바이에른과 프랑켄 지방의 루터파 출신 용병들을 선동하였다.[21] 독일농민반란(1524~25)과 모하치 전투(1526년 8월) 이후 할일이 없었던 독일 용병들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알프스의 브레너 고개[22]를 넘어 롬바르디아로 모여들었다. 독일용병 란츠크네히크는 피안첸차에서 스페인군과 합류한후 주둔하게 되었고 두 부대의 지휘는 샤를 드 부르봉[23]이 맡게 되었다. 프룬츠베르크가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쓰러져 독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듬해 1527년 3월이 되자 스페인에 머물고 있던 카를 5세는 스페인-제국 용병들에게 전례없는 로마 침공을 명령하였다. 아직 추위가 덜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제국군은 샤를 드 부르봉의 지휘하에 남진을 시작하였다. 제국군은 피렌체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볼로냐쪽으로 우회하여 교황령으로 진입하는 이동로를 선택하였다. 꽃샘 추위도 문제였지만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행군을 방해했다. 대포를 실은 마차가 진흙속에 자주 빠지자 어쩔수 없이 무거운 대포들은 도중에 버릴수 밖에 없었다.

로마로 진격하는 제국군에게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용병료가 계속 체불되어 용병들은 불만에 가득차 있었다. 행군을 거부하며 항명이 이어졌고 폭동의 조짐도 보였다. 임금 체불은 용병들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였기에 용병들은 로마 약탈을 샤를에게 요구했다. 그들을 달래기 위해 샤를은 어쩔수 없이 로마약탈 요구를 수용할수 밖에 없었다. 약탈이 공식화되고 그 소문이 퍼지자 도적떼들도 행군에 합류하며 총 2만명이 넘는 인원이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로마 침공편집

5월 4일, 제국군 2만여명이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밑에 도착하자 크게 당황한 교황은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시의회를 열어 시민들에게 동맹군이 올때까지 3일정도만 싸워줄것을 간청했다. 교황의 호소로 인해 급조된 시민군 5,000명이 농성전을 대비하게 되었다. 5월 6일 새벽이 되어 테베레 강에서 안개가 피어오르자, 제국군은 교황령 성도 로마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성전중에 지휘관인 샤를(구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이 총에 맞아 전사하자[24] 제국군 용병들은 흥분하였고 지휘체계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용병료 체불로 인해 불만이 가득했는데 존경하던 지휘관마저 사망하자 용병들의 분노가 폭발한것이였다. 샤를은 비록 조국 프랑스를 버리고 망명한자였으나 훌륭한 군인이였고 용맹하고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용병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로마 약탈 (1527년 5월 6일)편집

로마시내로 진입한 황제군중 독일 루터파 출신 용병들은 도시를 점령한후 무자비하게 약탈을 일삼았다. 살인,강간,파괴,방화가 자행되면서 로마는 도시기능이 마비되며 무정부상태에 이르렀다. 생포된 포로 1,000명에 대한 참혹한 공개처형이 진행되었고 처음 일주일 동안에만 해도 수천명에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폭도로 돌변한 용병들은 통제가 되지 않았고 지휘관들에게 항명하며 폭동마저 일으켰다. 제국군의 상당수는 독일 루터파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그 어떠한 일말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약탈을 자행했다.[25]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급히 베드로 대성당을 통하여 산탄젤로성[19]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후 항복을 선언했다. 교황이 피신하는 과정에서 스위스 근위대 500명의 희생이 있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으나 충성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오히려 교황에게 피신할것을 당부한후 베드로 대성당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대와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5월 10일, 클레멘스 7세와 적대 관계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8,000명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왔다.[26] 이들은 지난 1526년 교황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것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27] 그러나 막상 로마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 콜론나 추기경은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저택에서 수많은 로마 시민을 보살폈다.

동맹군 총사령관 우르비노 공작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계속 은신하며 동맹군이 나타나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6월 1일이 되어서야 동맹군 총사령관 우르비노 공작이 로마 북부 몬테로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던 이들은 광폭한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르비노 공작은 동맹군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매우 소극적이였다. 그는 1517년에 메디치 가문 출신에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21)와 갈등끝에 우르비노 전쟁을 치룬후 우르비노 공작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다.(우르비노 전쟁 참고)

이런 악연 때문으로 이번 전쟁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 주도하여 벌어진 전쟁이다보니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1521년에 공작위를 되찾기는 했으나 다시 메디치 가문 출신에 교황이 즉위하자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28] 또다른 이유는 전쟁 초반기에 이미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제국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동맹국 베네치아와 프랑스가 전쟁에 소극적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출하는 교황 (1527년 12월 7일)

산탄젤로성에 은신해 있는 교황에게 나쁜소식만 들려왔다. 페라라 공작이 배신하여 모데나를 점령했고 동맹이자 우방으로 여겼던 베네치아는 라벤나와 체르비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최악의 소식은 피렌체인들이 로마함락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켜서 메디치가문을 피렌체에서 추방했다는 소식이였다. 교황은 갇혀있는 신세와 마찬가지였기에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12월 7일에 교황은 제국군 지휘관들을 매수하여 몰래 산탄젤로성을 탈출한후 오르비에토[29]로 도피했다. 제국군은 이후 9개월[30][31] 가량 로마를 점령하다가 1528년 2월이 되어서야 퇴각하였다. 1527년 인구조사에서 유아를 제외한 로마 인구는 약 5만 4천명[32] 정도였는데 이중에 4만 5천명 정도가 사망,부상,국외탈출하였다고 한다. 금번 로마 점령은 코냑동맹전쟁에서 제국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음이 드러났다.

헨리 8세의 이혼편집

로마약탈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 잉글랜드로 튀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그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재위1509-47)다. 왕비 캐서린과 이혼(혼인무효선언)[33] 허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보통의 경우에 교황들은 왕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에 대한 지지와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높이는 방편으로 삼는 편이였으나 이번 만큼은 그럴수 없었다.[34][35]

그 이유는 헨리 8세의 왕비인 캐서린(생몰 1485-1536)이 바로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주도하여 카를 5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로마가 점령당하고 자신은 포로와 같은 신세에 처해있었고, 카를 5세는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만일 이혼을 허락한다면 황제 카를 5세는 폭도로 돌변한 용병들을 이용해 산탄젤로성을 함락시키고 자신(클레멘스 7세)을 폐위시킨후 새로운 교황을 옹립할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8세의 청원서를 지닌 특사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을 처음 알현한 것은 1527년 12월초로 아직 교황이 산타젤로성에 은신해 있을 때였다.[36][37] 교황은 직접적인 답변을 피한체 1503년에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3)가 관면혼을 허락했음으로 혼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헨리 8세는 1528년 2월에 두번째로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로 임명된 에드워드 폭스와 스티브 가드너가 교황을 만난 시기는 3월이였다. 교황이 로마를 탈출하여 오르비에토의 오래되어 다 낡은 포폴로 성에 머물고 있을때였다.[38]

물론 답변은 1차 알현때와 동일하였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의 타이밍은 최악이였다. 만약 헨리 8세가 1527년 5월 6일 이전에 이혼허락을 요청 하였더라면 원하는 것을 얻었을 것이다. 아무튼 화가난 헨리 8세는 측근들과 논의 끝에 1533년에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말았다. 수장령을 통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교회와 분리시키고 자신의 이혼을 합법화한후 앤볼린과 재혼하였다. 그러나 1533년 7월 11일, 교황은 헨리 8세에게 파문을 내렸다.[39]

나폴리 공성전편집

로마가 함락되면서 전쟁에 있어서 동맹군의 리더로서 교황만이 발휘할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사라지자 프랑스는 소극적인 자세를 벗어던지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은 국가간 약속이자 국왕이 서명했던 마드리드 조약(1526년 1월)을 일방적으로 폐기하며 이행거부를 했다는 비난때문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수 없었다. 또한 국왕대신 두 왕자가 스페인에 볼로로 잡혀있기에 운신이 폭이 적었던것도 사실이였다. 그러나 이대로 종전이 되면 유럽의 패권을 다투는 전통의 강대국이자 동맹국의 일원으로서 프랑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아울러 카를 5세의 이탈리아내 지배력이 극강해지며 상대적으로 국제외교무대에서 프랑스의 입지가 너무 좁아질수 밖에 없게 된다.

프랑수아 1세는 오데 드 푸아페드로 나바로가 이끄는 군대를 제노바에 보냈다.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프랑스에 가담해 상당한 수의 제노바 함대를 파견한후 나폴리 해상을 봉쇄하였다.[40] 그러나 1528년 4월에 시작된 공성전은 8월말에 프랑스가 공성전을 포기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 진영에서 치명적인 전염병(흑사병)이 발생한것이 가장 큰 원인이였다.

1528년 여름에 프랑스군은 나폴리 수비대의 식수를 차단하기 위해 볼라 수로교를 파괴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주변 지역을 습지대로 바꾸어, 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합쳐져 프랑스 진영에 전염병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프랑스 지휘관들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사망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안드레아 도리아는 용병료 갈등끝에 프랑스와 결별하며 카를 5세와 계약한후 7월초에 나폴리 해상봉쇄를 풀어 버렸다.[41] 이후 그는 제노바의 항구 봉쇄를 뚫고 사보나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나폴리 공성전에서 실패한 프랑스 군은 철수 하던중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전으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로인해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을 하였다.

란드리아노 전투편집

1529년 6월경에 프랑스군은 파비아 인근의 롬바르디아 지역인 란드리아노에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1529년 6월 21일 생폴 백작 휘하의 프랑스군과 테라노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42]가 이끄는 스페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43]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전멸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 지휘관 생폴 백작(프랑수아 드 부르봉)은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는 카를 5세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회복하려던 프랑수아 1세의 희망은 끝이 나고 말았다.[44]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강화조약에 나설수 밖에 없었다.

강화조약편집

 
교황 클레멘스 7세.
 
루이사 디 사보이아.

부인들의 평화편집

나폴리와 제노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평화를 모색했다. 협상은 1529년 7월 국경 도시 캉브레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측 대표인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루이사 디 사보이아와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 사이에서 주로 이뤄졌다. 그래서 이를 '부인들의 평화'(Paix des Dames)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직접 회의 직전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로 배를 타고 갔다.

캉브레 조약 (1529년 8월 5일)편집

협상의 최종적 조건은 3년전 마드리드 조약이 크게 반영이 되었는데, 프랑수아는 아르투아, 플랑드르, 투르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그의 아들들을 풀어주기전 몸값으로 2백만 황금 에퀴를 지불하기로 하였다.[14][45] 부르고뉴의 굴욕적인 포기와 2년전(1527년 5월 6일 로마탈환 공성전) 전사한 샤를 드 부르봉(구 부르봉 공작)에 관한 여러 의견을 다루며 프로방스 왕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후보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46] 마침내 캉브레 조약이 8월 5일에 체결되었으며,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볼로냐 조약 (1529년 8월 12일)편집

1529년 8월 12일, 카를 5세는 제노바를 통해 볼로냐로 이동하여 교황을 만났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마 약탈의 참여자들을 용서하였고 카를 5세는 피렌체를 탈환하여 교황의 출신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복귀를 약속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황제 대관식을 치루어주기도 했다. 교황은 라벤나체르비아를 받았고, 베네치아의 도시들은 마리냐노에서 얻은 것을 유지하는 걸 허용해주는 대가로 아풀리아에 있던 베네치아의 잔류 지배지역들과 함께 카를 5세에게 항복하였다.[47]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밀라노 공작 자리에 앉히려했으나 베네치아의 반대로 계획을 포기하였다. 대신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로부터 900,000 스쿠디를 받고 밀라노 복귀를 허용했다.[48]

마지막 황제 대관식편집

1530년 2월 24일 카를 5세의 3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볼로냐에서 교황은 그를 위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이로써 양자간에 제대로된 화해가 이루어졌다. 1356년에 금인칙서가 발표된이후 황제 대관식은 필수적인 의식이 아니며 교황은 더 이상 황제에 대한 승인권자도 아니였다. 카를 5세의 조부인 막시밀리안 1세도 대관식을 치르지 않고 황제의 소임을 다 했었고 카를 5세 역시 교황의 승인없이 지난 10년 세월을 통치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직접 황제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카톨릭 세계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것이 필요했기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치루어졌다. 전통적으로 대관식은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난 1527년에 파괴된 도시 복원이 미진하였고 로마시민들의 민심을 고려하여 볼로냐에서 진행되었다. 볼로냐의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 치루어진 대관식은 역사상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마지막 행사로 기록 되어있다.[49]

피렌체 공성전편집

목표는 통치권 회복편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동맹국들이 항복한후 전쟁에서 이탈하였고 코냑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지난 1527년 5월에 있었던 로마약탈이후 반 메디치 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고 메디치 가문은 다시 한번 더 추방을 당했다. 로마가 제국군에 의해 점령당하며 메디치 가문의 구심점이였던 교황이 전쟁에서 대패하며 항복하였기 때문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출신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을 원했고 황제 카를 5세는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무력을 통해서라도 피렌체 정벌과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돕겠다고 약속을 한바가 있다.

피렌체의 전쟁준비편집

피렌체에 대한 공격이 임박하자 교황에게 항복하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끝까지 투쟁하자는 세력이 우세하였다. 지난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했던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란을 뒤로 하고 피렌체는 전쟁준비작업을 진행했다. 군지휘권은 페루자의 장군 말라테스타 바블리오니에게  위임하였고 10,000명 가까운 민병대를 모았다.  도시 방어를 위해 다수의 외진 곳에 있는 수녀원과 수도원,별장들 그리고 성벽 외각에 있는 도시의 일부를 파괴하였다.[50]

새로운 요새와 성채강화 작업은 미켈란젤로(1475~1564)가 맡았다. 그는 산 마니아토 언덕까지 축성한후 성벽안쪽을 진흙벽으로 두텁게 보강하여 포탄의 충격으로 부터 성벽이 충분히 버틸수 있는 지지력을 가지도록 하였다. 외벽은 침대요나 벼짚과 밀짚등으로 두텁게 역은것을 늘어트려서 역시 포탄의 충격이 완충되도록 보강을 하였다. 이런 조치는 15세기 말부터 전장에서 본격적인 공성장비로 사용하게된 대포의 위력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것들이였다.[51]

피렌체에도 한가지 믿는 구석은 있었다. 오스만의 30십만대군이 1529년 5월에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탈환을 위해 행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적의 적이 협력자가 되는 순간이다. 8월에 헝가리를 점령한 오스만 군은 9월에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가가 있는 곳이므로 카를 5세의 입장에서는 두곳에 전선이 형성되어 피렌체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였다.(빈 공방전 참고)

공화국 피렌체의 종말편집

1529년 10월 24일 오랑주 공(필리베르 드 샬롱)과 피에르 마리아 3세 데 로시가 이끄는 제국군은 피렌체를 포위한후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후 피렌체가 함락되기 까지는 예상과 달리 열달이 넘게 걸렸다. 마침내 1530년 8월 10일 피렌체는 제국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동맹국들이 모두 이탈한 상태라 홀로 남은 피렌체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수 없었고 고용된 용병들이 배신을 일삼았다. 제국군이 고립작전을 펴며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상황은 점차 피렌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국군에 의해 볼테라가 점령당하고 1530년 8월 3일 가비아나 전투에서 피렌체의 유능한 장수 프란체스코 페루초가 전사하자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남은 것은 교황에게 항복하는 것뿐이였다.

종전과 사후수습편집

피렌체 공성전을 끝으로 1526년에 시작된 코냑동맹전쟁은 4년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통치권을 회복했으며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재종손자(再從孫子)[52]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세습 공작으로 임명하여 피렌체를 통치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정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1536년에 알레산드로를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 마르게리타(1522~1586)와 결혼하였으며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의 통치에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카를 5세가 독일에서 루터파에 대해 강경한 행동을 취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공의회를 열자는 카를 5세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533년 자신의 손녀 카트린과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교황은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프랑수와 1세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교황은 이 결혼을 통하여 코냑동맹전쟁 이후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36년에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의 손녀 카트린은 왕세자비가 되었으며 훗날 1547년에 프랑스 앙리 2세가 국왕에 오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카트린은 교황의 재종손녀이다.)

폐허에 가깝던 로마의 재건사업은 클레멘스 7세(219대 1523~34) 교황의 재임시대에 완수되지 못했고 후임 바오로 3세(220대 1534~49)의 재임시대에 지속되었다. 1536년에 카를 5세는 직접 로마를 방문하였고 교황 바오로 3세와 시민들의 환대를 받은후 재건중인 로마시내를 돌아보았다. 이때 카를 5세는 교황과 추기경회 앞에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일대일로 한판 겨루는 개인적인 싸움을 제의하는 유명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53] 이런 제의를 한 이유는 1536년 3월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다시 침공하여 토리노를 점령했기 때문이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주경철의 유럽인이야기, <휴머니스트>
  2.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68 페이지
  3. 218대 교황인 하드리아노 6세 재임시기에 소데리니 추기경이 나폴리를 프랑스에 넘기려고 프랑스 왕과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서 그를 체포한후 프랑수아 1세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프랑수아 1세는 롬바르디아 침공준비를 진행하였고 그전까지 정치적인 중립을 고수하던 하드리아노 교황은 1523년 8월에 신성 로마제국, 잉글랜드, 베네치아, 밀라노등과 반-프랑스 방위동맹을 체결하였다. <옥스포드 교황사전>
  4.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372–375.
  5.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80 페이지, 당시 나폴리 총독은 '샤를 드 라누아' 였다.
  6.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82 페이지
  7. Guicciardini, History of Italy, 369.
  8. 스포르차 가문의 프렌체스코 2세가 1521년 밀라노 공작에 올랐으나 카를 5세가 파견한 관리들에 의해 권한은 많이 제한받았다.
  9. 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 연대기, 567 페이지
  10. 프렌체스코 2세의 사촌누나 비앙카 마리아(1472-1510)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두번째 부인이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궁에서 망명생활을 할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1세와 비앙카는 부친 루드비코 스포르차의 중개로 1494년에 혼인하였다.
  11. 프렌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기는 했으나 그의 권한은 밀라노에 상주하는 스페인 관리들에 의해 많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카를 5세로 부터 벗어나고자 코냑동맹전쟁에 참전하였다.
  12. 프렌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카를 5세의 조부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언 1세의 도움을 받아 합스부르크 본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언 1세의 손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으로 밀라노 공작에 복위되었는데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을 하자 카를 5세가 분노했던것 같다.
  13.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0.
  14.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2월에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한후 석방되었다. 이때 국왕인 자기 대신에 장남 프랑수아(1518-36)와 차남 앙리 왕자(1519-59)를 볼모로 스페인에 보내졌었다. 두 왕자의 나이는 각각 8살고 7살에 어린 나이였다. 이 시기에 부모를 떠나 낯설은 스페인에서의 볼모생활로 인해 두 왕자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5. 일명 공의회 수위설 혹은 공의회 우위설을 말한다.
  16. 1521년 오스만에게 베오그라드와 샤바츠를 점령당하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재위 1516~26)는 1522년 카를 5세의 여동생인 마리아와 결혼하여, 서서히 다가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부인은 러요시 2세의 친 누이 안나이다.
  17. 친 황제파에 속하는 추기경이였다. 성직자이기 보다는 용병대장에 가까웠다. 메디치,오르시니 가문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1527년 5월 6일 로마약탈로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사실상 로마를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1530년 카를 5세에 의해 나폴리 왕국의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었다.
  18. 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300페이지, 생각의 나무
  19. 산탄젤로 성은 AD139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묘지로 건축하였다. 5세기에 군사 요새로 개조되었으며, 이후 교황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더 탄탄한 방어 설비가 보강되었다. 1277년 교황 니콜라오 3세가 교황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국과 요새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 통로와 성벽을 짓게 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 통로를 이용한바가 있다. 전임 교황들의 선견지명이 있었던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20.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78페이지, 도서출판 마티
  21. 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301 페이지, 생각의 나무
  22. <두산백과> 브레너 고개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있는 고개로 알프스 산맥에 있다. 해발고도 1,375m. 이탈리아어로는 브렌네로 고개(Passo del Brennero)라고 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볼차노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를 연결하는 도로가 통한다. 북쪽의 흑해 사면과 남쪽의 아드리아해 사면과의 분수령을 이루며, 이곳을 경계로 알프스와 동알프스로 나누어진다. 이곳은 알프스를 횡단하는 고개 중 가장 낮기 때문에 예로부터 남북교통상 중요시되어왔다. 이미 로마 시대부터 군사도로가 통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유럽의 중요한 상업 루트를 이루었다.
  23. 샤를(1490-1527)은 프랑스 출신으로 부르봉 공작이였으나 1523년 프랑스 국왕의 모함으로 작위와 영지를 억울하게 박탈당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황제 카를 5세의 군대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충성을 하였다. 샤를은 부르봉 가문의 후손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부르봉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그런나 1521년 법적 상속인이였던 부인이 사망한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그의 모후가 부르봉 영지에 대해 상속권을 주장하며 모함을 씌운후 영지와 작위를 몰수 하였다. 작위를 몰수 당했으므로 1523년 이후 '부르봉 공작 샤를 3세'라는 호칭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샤를이란 이름은 독일어로 카를이 되므로 카를 5세와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샤를'이나 '샤를 드 부르봉' 정도로 표기 하는것이 합리적으로 사료된다.
  24. 화가이자 자서전 작가인 벤베누토 첼리니(1500~71)는 자신의 총으로 제국군 지휘관인 샤를을 저격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사자의 일방적인 주장일뿐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 1527년 5월 6일에 있었던 전투에 로마 수비군으로 참전했던것만은 사실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25. 1510년 27살에 젊은 마틴 루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에 관련된 문제로 로마를 방문한적이 있다. 그때 루터는 큰 충격을 받는다. 로마에 7,000명의 창녀가 있으며 교황청에서 그들에게 세금을 징수 하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로마에는 성직자들을 위한 창녀촌까지 있었다고 회고록에 밝히고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가 생각하는 로마는 악의 소굴이고 교황은 적 그리스로라고 보았다. 루터가 소속되었던 수도원은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그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검은 수도원이였다.
  26. 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 연대기, 574 페이지
  27.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340 페이지,밀비오 다리옆 교황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키고 마리오 언덕에 있는 메디치 가의 별장 마다마 빌라에 불을 질러 얼마간에 소심한 복수는 하였다.
  28.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83 페이지
  29.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265 페이지,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 테르니 현에 있는 도시로 로마에서 북으로 직선거리 약 93km 떨어져 있다. 교황은 이곳에 있는 포폴로 성에 약 6개월 머물다가 생활고 때문에 '비테르보'로 거처를 옮겼다. 도시자체가 해발 315m에 위치해 있기에 식수부족으로도 고생했다고 한다.
  30.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5권 162페이지, 대광서림
  31.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355 페이지
  32.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287 페이지
  33. 교회법상 결혼은 칠성사에 하나로 이혼은 불가하였다. 그래서 편법적으로 혼인무효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34.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8세의 이혼문제이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만 살펴보기 쉽다. 이혼을 허가해주어야 할 교황이 머물고 있는 로마의 정치상황을 살핀다면 교황이 결코 이혼을 허락할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수있다. 캐서린 왕비가 황제 카를 5세의 숙모라는 이유만으로는 이혼불허 결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교황이 이혼을 허락한다는것은 곧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결코 허락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혼을 허락할 경우에 스페인이 교황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그 정도가 염려될 사항이라면 교황이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코냑동맹전쟁)을 일으킬수 없는 노릇이다.
  35. 헨리 8세가 이혼하려는 이유는 왕비 캐서린과 20년 가까운 결혼생활을 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미전쟁을 통해 힘겹게 시작한 튜터 왕조의 2대 국왕으로서 남손직계를 통한 왕통계승은 왕조를 튼튼하게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재혼을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다.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장성한 메리공주가 있었으나 여왕등극의 전례가 없고 잉글랜드 정서상 여왕통치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물론 헨리 1세 사후에 마틸다가 즉위시도를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헨리 8세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다.
  36. 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352 페이지
  37. 엘리슨 위어 <헨리 8세와 여인들> 243 페이지
  38. 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309페이지
  39. 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 연대기, 580 페이지
  40.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1.
  41. 카를 5세와의 해군용병 계약시 도리아는 파격적인 조건과 함께 자신의 조국인 제노바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제노바는 14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외세의 지배를 받아오고 있었다.
  42. 1525년 밀라노 공국의 황제군 총사령관 자리를 페스카라 후작에게서 이어받았다. 마지막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공작인 프란체스코 2세가 1535년에 사망하자, 카를 5세에 의해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43. Cadenas y Vincent p.290
  44.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3.
  45.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8; Hackett, Francis the First, 356.
  46.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7.
  47. Norwich, History of Venice, 443–444.
  48. Blockmans, Emperor Charles V, 64.
  49. AD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가 프랑크 왕국의 카를 1세에게 처음으로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50. 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311페이지
  51. 어니스트 볼크먼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153페이지
  52. 재종손자(再從孫子)란 6촌 손자를 말한다. 재종(再從)은 서로 6촌지간을 말한다. 알레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7세의 사촌형인 '피에르 2세 데 메디치' (1471~1503)의 손자이다. 클레멘스 7세의 큰아버지의 큰 아들이 낳은 자식의 아들이다. 즉 알레산드로의 아버지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53. 주경철 <서양근대 인물 열전> 네이버 캐스트 카를 5세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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