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 최씨

한국의 성씨

탐진 최씨(耽津 崔氏)는 전라남도 강진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탐진 최씨 (耽津 崔氏)
관향전라남도 강진군
시조최사전(崔思全)
집성촌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월동
전라남도 여수시, 강진군, 담양군, 영암군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충청남도 예산군, 청양군
충청북도 단양군, 옥천군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주요 인물최상, 최부, 최홍전, 최흥종, 최은희, 최정기, 최길선, 최순식, 최장현, 최민호, 최성, 최영호
인구(2015년)92,341명

역사편집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시조(始祖)인 최사전(崔思全1067~1139)은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다.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1]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세적[世跡]

崔氏의연원은 신라 유리왕이 6부 촌장에게 사상[賜姓]할 때 돌산 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인 소벌도리[蔬伐都利]가 崔姓을 받았기에 그분을 모든 崔氏의 원조[元祖]로하고있다. 경주최씨 상계세보에 의하면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의 상대에서 분파된 관향으로는 개성 삭령 동주 전주최씨 일파등이 있고 여타의 최씨는  그 이후에 분파되었거나 또 거기에서 지파로 분파되었다한다. 그러나 우리 탐진최씨느가 우리 상대선조의 어느분이 어느파에서 분파되었다는 고증이 아직 밝혀지지 않음은 유감스런일이다.

탐진최씨관광의연혁[沿革]

고려 탐진현[耽津縣]은 백제때에 동음현[冬音縣]또는 도무군[道武郡]인데 신라때(757년 경덕왕 16년)에 탐진현[탐진현]으로 개명하여 양무군[陽武群]에 소속하였으며 고려때에는 영암군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장흥부에 이속되었고 조선 태종17년에 도강현[道康縣]과 탐진현을 합병하여 강진[康津]이라 하였다.

상조4세5위[上世五位]의세적[世跡]

1 고려사에서 2세3위[二世三爲]의 세적이 발현되시다.

우리上代 선조에 대한 세제문헌이 유감스럽게도 전래되지 않았는바 그 이유을 추측건데 장경공[莊敬公]께서 고려 인종조에 위대한 공적을 세웠기에 자손 대대로 조정에입사[入仕]하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음로 보아 대대로 고려조의 은총을 누렸을터인데 조선의 역성혁명이 될 때 불복하였을 것임은 필연적일 것이며 그에 따른 수난에 원인하지 않을까한다. 다행하게게도 고려사기에서

장경공 휘 사전[思全]께서 고려 인종조때에 이자겸[李資謙]란으로 고려 종사가 풍전등화격으로 멸망의 처에 있었을 때 만조 백관이 역도에게 아부하였으나 公은 홀로 왕을 시위하고 훌률한 묘책으로 역도당을 소탕하고 고려조를 구출해낸 위훈을 세웠기에 왕의 은총을 한몸에 모았으며 관직은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훈작은 최고위인 상주국[上柱國]이며 삼한후벽상공신[三國後壁上公臣]으로써 인종묘정[仁宗墓庭]에 배향되시었다는 사적과 두 아드님이 계신데 휘 변[弁]이부상서[吏部尙書]공과 휘 효인[孝仁]공이심이 밝혀젔기로 모든 탐진최씨의 상조로 받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변[弁] 효인[孝仁]공 이하의 여러 세수[世數]가 미상하여  어느파가 어느분의 후예인지 몰라 각 파는 소지의 중조[中祖]로부터 갱기일세[更起一世]하여 내려오는 심정으로서  이로 인해 전체 족친의 돈목이 원할치 못함은 유감스럽기 짝이없다.

※이와같이 장경공 이상 선대가 불분명하고 상조 삼위묘소와 탐진최씨분파 근거 고증이 미상인 상태에에서 강진문중에서는 관향지임을 합리화하여 장경공의 묘소가 강진 비파산에 있다했고 장경공이 장경공이 탐진백에 봉작되어 해주최씨에서 분파해서 되시었다 주장해 왔으나 이에 완전 무 근거함이 다음에 기술한  공의 묘지 명이 발현 되므로써 입증되었었다.

※본 항은 후편 세덕지[世德誌]장경공열전을 참고

2 장경공묘지[莊敬公墓誌]에서 장경공 부조[父祖]양위분의 사적이 새로 발현되어 上祖는 四世五爲가 되시다.

전항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상대 선조 사적이 그 이상 문헌무증[問獻無證]으로 상세치 못하여 통탄스렀튼바 1919년기미[己未]년에 다행하게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摠覽]이란 우리나라 금석문을 권위있는  사학가들을 총동원하여 감정수록한 서책에서 장경공묘지명[壯敬公墓誌銘묘 ㅁ밑에 사적을 새긴 돌에 있는글]이 발견되어 전번 고려사기에서 밝혀진  상조 사적외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이 더 밝혀졌다.

첫째 /장경공의 父祖[아버지와아들]양세의 휘[이름]자와 관직[공무원]발현되었으니 아버님은 휘 정[靖]. 장작감[將作監]이시고 조부님은 휘 철[哲] 상약국직장[尙藥局直長]이시다. 이로써 상조는 四世五位[4세5위]로 밝혀지시다.

1세 휘 철[哲] 상약국직장[尙藥局直長]

2세 휘 정[靖] 장작감[將作監]]

3세 휘 사전[思全] 수태위[守太尉] 시호 장경공[莊敬公]

4세 휘 변[弁] 이부상서[吏部尙書]

4세 휘 열[烈]효인[孝仁]어필사명(御筆賜名]

둘째 /장경공 묘소는 개성성남장미시산록와곡[開城城南奬麓山瓦谷]임이 밝혀젔다 이로써 강진 군동묘는 무근거함이 들어 났다.

셌째 /장경공의 자[字]는 휼세[恤世]이시고 휘자 사전[思全]은 선종왕의 어필사명이며 63세에 퇴조하시고 71세에 서거하심이 아룰려 밝혀 지시었다.

넷째 /장경공의 그선대가 탐진현인[耽津縣人]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父祖 양위가 따로 발현되었으니  公의 분파설은 어불성설임이 밝혀젔다. ※본항은 후편 장경공묘지[墓誌]를 참조하세요.

3 상조 四世五位 봉향[奉香]

가 /강진문중에서는 1800년경 강진 비파산에 소위 장경공묘를 설정하여 봉향을 해온바 혹자는 참여하고 혹자는 부인하고 참여치 않았었다. 그런데 전술 한바와 같이 역사적인 엄연한 고증인 묘지명 발현으로 강진묘는 무근거함이 명백해젔기에 묘지명에서 밝혀진 개성묘가 실전되었으며 다른 상조 四위 묘도 미상이니 강진묘는 정리하고 五위설단[設壇]봉향함이 지당하며 묘지명 발견직후에 개최된 전국 대종회에서도 이와갇이 결의했었다. 처음에는 광주 수원 강진에 분산 설단키로 합의하였지만  결국은 관향지인  강진에다 五위를 설단 봉햘키로 모았으나 강진문중의 무원칙한 방해고집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궐향의 죄과를  무룹써 오다가 강진과 합의 . 설단은 백년하청이기에 더 이상 천연할 수 없어  묘지명 발현후의 대종회 결의에 의하여 이미 설단해오던 장경공壇이 소재한 무양서원옆에 1979년 가을에 四위단을 가설하여 매년 음력 3월6일 장경공 기일에 참여 문중이 합동봉향하고 있다.

나 /묘지명 발현후에 유림제현의 발기로 1928년 무진년에 광주광역시 [광산군 비아면 월계리 무양서원陽書院]을 건립하고 장경공을 주벽으로 음력9월6유림 향사하고  있으며 강진군 군동면 라전리 소재 강덕사에서도 장경공주벽으로 향사

※일반 사당은 도내 4대 향교 찬동을 얻으면 건립할 수 있으나  무양서원은 전국 2백여 향교의 찬동으로 건립한 이유는 충효 사상이다.

다 /강진문중에서 종의되로 五위 설단을 하였드라면 사리에 합당하고 전국 탐진최가 족인은 강진으로 머리 숙이고 단의 봉향에 참여 할 것이며 따라서  전국 탐진최씨는 대동 단결되었을것이다 또한 수년전에 강진문중에서 대동보편수를 제의했을 때 오위 설단을 할 용단을 내렸더라도 만사지탄은 있으나 대도보도 성립되고 대동답합될 절호의 기회를 마련 됫을것이다,

분파편집

  • 진사공파(進士公派)
  • 효종공파(孝宗公派)(金浦)
  • 부호군파(副護軍公派)(莘里)
  • 도정공파(都正公派(三槐)
  • 만호공파(萬戶公派)(新平)
  • 임한공파(臨漢公派)(陽城)
  • 정민공파(貞愍公派)(高陽)
  • 청양예산판서공파
  •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
  •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 금남파(錦南派)
  •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 일산당산파
  • 보작파
  • 손암공파(遜菴公派)

본관편집

최사전(장경공) 묘지(莊景公墓誌)

장경공의 휘자는 사전(思全)이요.자(字)는 휼세(恤世)니,성(姓)은 최씨이며 그 선대가 탐진현(耽津縣)사람이라. 조부는 상약국직장(尙藥局直長)으로 이름은 철(哲)이요 부친은 장작감(將作監)으로 이름은 정(靖)이니, 의술로써 조정에 벼슬하였다. 장경공은 성질이 충성스럽고 곧으며 지모(智謀)가 띄어났고, 어릴 때부터 의술(醫術)에 능통하였다. 공의 나이 15세에 고려13대왕 선종(宣宗)때 부름을 받아 궁전에 들어갔다. 선종은 公에게 「의술은 정의로 통하고 십전(十全)이라는 약이 으뜸이라 너는 참으로 명의(名醫)이다. 그러므로 너의 이름을 사전(思全)이라 하라」하고 친히 글씨를 써서 내렸다. 그후 여러해에 걸쳐 왕(선종부터 헌종.숙종.예종.인종조까지)을 섬겨 항상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인종때에 외척인 이자겸(李資謙)이 왕의 권한을 제멋되로 하고 정부의 명령은 자기 유리할대로 내리며 그 악한 정치를 안밖으로 방자하게 행하니 부인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모두 미워하고 걱정하며 슬퍼했고 그 해독은 견딜수가 없었다. 인종왕은 이를 걱정하여 1126년(병오)봄 2월에 한두 대신(錄事 安甫當과 내시 金蔡)과 이작겸 역도들을 제거하려다가 사전에 역도에 탄로되어 역도의 병사들이 궁궐속에 침입하여 궁궐을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니 인종왕은 의지할곳을 읽고 사제(私第)에 피신하여 외가(이자겸)의 제재(制裁)를 받게되었다. 그때 역도에게 아부한 사람은 공상(功賞)을 받고 왕을 호위한 사람은 도리어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하니 조정의 백관이 거의 역도에게 아부하나 公만은 홀로 오직 충성심으로 시종일관하였다. 당시에 적당들의 세력이 더욱 커저 그들이 장차 어떠한 흉악한 행동을 할지 예측을 불허하니 인종왕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려 이자겸에게 왕위를 양보할 의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公은 왕에게 충고하기를 『고려는 어디 까지나 고려의 고려요 폐하(陛下)개인의 고려가 아닙니다. 고려를 창건하신 태조(太祖)께서 일생동안 고난을 겪고 창업하여 수백년을 경과한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역신(逆臣)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가볍게 행동하지 마십시요』하니 왕이 소리를 내어 울고나서 말씀하시기를『만약 너의 힘으로 이 어려운 고비를 극복 한다면 생사간에 골육의 이초를 지키겠다』 고 하였다. 公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한 후에 은밀하게 모책(謨策)을 아래고 난후에 적당의 참모격인 탁준경(拓俊京)을 의리로 설유하여 유인하는데 성공하니 마침내 이자겸 일당은 소탕되었다. 인종왕이 말씀하시기를『고려가 다시 안정되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케 된것은 모두 공(장경공)의 공로로다』하고 특히 소명(訴命)을 내려 국가 최고의 영예인 삼한후벽상공신호(三韓後壁上功臣號)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공의 자손들 까지도 조정에 벼슬하도록 하였다. 公은 이러한 공로로 수태위(守太尉)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의 높은 자리에 계시었는데 63세에 노령을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나 불법을 깊이 밑고 산업에 돌보지 않으시었다.

1139년(己未)3월6일에 노환으로 별세 하시니 곧 유골을 거두었다가 이듬해 2월27일에 성남장미산록(城南薔薇山鹿)와곡(瓦谷)에 안장(安葬)하고 그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와같이 새긴다.

一,公은 높은 덕을 갖추었으며. 성품은곧고 지모가 띄어 나셨네

一,소시부터 의술에 정진하여 띄어난 의술가 이더라.

一,십전(十全)의 약리(藥理)가 절묘하여 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一,왕의 침전(寢殿)을 항시 지켜 모시어 잠시도 비운일이 없었고

一,여러대 왕을 섬겨 시위(侍衛)하여 언제나 곁을 떠나지 않았네.

一,왕은 오랫동안 친신(親信)을 하였으며, 公은 더욱 충성을 다짐하더라.

一,公은 굳게 충절을 지켰으며, 어떤 어려운 때에도 변함 없었다.

一,나라가 어지러울때 꼭 모책을 아뢰고 왕을 위해 점괘도 풀어보았다.

一,마침 병오년에 이르러 외척이 제 멋되로 하니

一,모두 적당에 아부하나 공만은 홀로 그렇지 않으시었다.

一,병오년 2월의 변란때에는 왕앞에 죽음을 맹세하고

一,병오년 5월의 변란때에는 모책이 성공하여

一,적당을 즉시 제거하여 모든 재난이 끝났었다.

一,나라를 완전히 안정케학 종묘의 제사도 받들게 되었더라.

一,돌이켜 보건데 이렇게 된 까닭은 오직 公의 공로에 힘입음일세.

一,충위정신이 지극한 모습, 뭇사람의 다시없는 모범일러라.

一,한사람의 거룩한 힘으로 이룬 크나큰 공적을 공적을 높이 치하하노라.

一,자손에게까지 왕의 은총이 내렸으며 公의 초상을 벽에 새겨 후세에 전하였네.

一,이제 公이 세상을 떠나니 그 영예 더욱 빛나구나.

一,거룩한 공적 영원히 전하고자 이돌에 새기노라.

※참고

상약국직장(尙藥局直長);상약국은 궁전에서 의료을 담당하는 기관이며 직장은 正七品

장작감(將作監);장작감이란 관서는 나라의 건축등 공사를 담당하며 監은 둘째관위이며 正四品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국가의존망의 위기를 구출한 위대한 공훈이 있는자에게 내리며 지정된 궁궐벽위에 초상을 새겨 영원히 찬양하였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浪平章事;문하省은 국가의 행정을 총괄한 기관이며 平章事는 수장관인 侍中 다음가는 관직 正二品.

수태위(守太衛);국가 최고원로에게 내리는 왕의 자문역 영예직이며 從一品

※참고

지석은 가로 9치3푼 세로 1자2치이며 글자는 표면은 4푼 이면은 6푼이고 해서체이다.이글은 조선금석총람 102번에 실려있다. 이지석이 동경제국대학 문리과대학 박물관레 고고학 연구자료로써 소장되어 있던것을 탐진최씨 전국족인38975人이서명날인하여 동대학에 반환청원서를 제출하였든바1921년(신유년)에 드디어 추환 봉안케 되었다. 현재 광주국립박물관에 봉안하여 전국 족인들이 봉람하도록 하고있다.

※부록

상조 사적에 대한 강진문중 주장의 이설(異說)에 대한 고찰

강진문중 주장의 해주최씨 분파설과강진묘는 무근거성이 명료하게 들어났는데도 현재까지 고수하기 때문에 일족이 분열되고 무분별한 족친들을 환란케하고 있기에 여기에 해명코저한다.

가,해주최씨 분파설에 대하여

장경공이 해주최씨 유길(惟吉)의 아드님이고 충(冲)의 손자인데 탐진백(耽津伯)에 봉작되어 탐진최씨로 분파했다는 주장이다 한데

첫째,장경공이 탐진백에 봉작된 고증이 아무데도 없으며 오히려 고려사길례대사편(高麗史吉禮大祀編)공신 배향자기에 인종실(仁宗室)배향자는

수태부(守太傅)중서령(中書令) 낙랑후(樂浪候)문열공(文烈公)김부식(金富軾)

수태위(守太衛)평장사(平章事) 장경공(莊景公)최사전(崔思全)으로 기록되어 있어 김부식은 낙랑후란 작호가 있으나 장경공은 작호가 없으니 이로써 해주최씨 분파설을 뒷받침하는 탐진백의 수작은 완전 무근거함을 알 수 있으며

둘째,묘지명에 장경공에 아버님이 유길(惟吉)이고 조부님이 충(冲 )으로 되어 되어있다면 긍정되지만 엄연한 고증인 묘지명에 아버님이 정(靖)公이시고 조부님이 철(哲)公으로 따로 계시다. 또한 묘지명에 公의 선대 어느분이 경주최씨 또는 그 지파에서 되었겠지만 고증이 없고 공이 해주최씨에서 분파되었다고 볼수없다.

셌째,해주최씨 계보에 분파 기록이 있더라도 이상과 같은 명백한 고증으로 부인되겠지만 해주최씨 계보에도 기록이 없는 것을 굳이 고수하기 위하여 엄연한 역사적인 고증을 부정하고 남의조상인 해주최씨 惟吉과 충(冲)을 내조상이라 하고 내 조상인 靖공과 哲공을 부인하는 결과의 비리를 지속하고 있음은 가탄스럽다.

나,장경공 강진묘에 대하여

첫째,강진 비파산에 최정승등이라 구전되어 온곳이 있는데 강진에는 최정승이라 칭할만한 분이 없기에 장경공이 정승에 해당하기로 1800년경 公의 묘라 추단하고 개사 입비하고 봉사해왔다지만 존엄한 내 조상묘를 그런 희박한 근거로 단정할 수 있을것인가? 또한 변(弁),열(烈)이하대가 중절하여 소지의 중조로 갱기일세할 상태였다면 선대묘의 수호는 단절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묘소도 실전함이 당연할터인데 확실한 물증표시가 없는한 어떻게 실묘라 주장할 수 있을것인가?

둘째,장경公의 부조 양위분이 조정에 입사하였으니 공은 개성에서 출생성장 입사하시어 개성이 고향이 되었고 부조 양위 묘소도 개성일 것이며 자손 대대로 입사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니 도성인 개성에 거주하면서 공의 묘소를 당연히 개성에 모셔 수호하였을 것이며 뿐만아니라 인종왕이 골육과같이 예우하였고 공이 서거하자

3일간 조정 정무를 쉬고 애도하였다니 국장 예우로 묘지 역시 국립묘지 역내에 정해졌음이 상식적이지 어떻게 천여리의 그때 교통상황으로 관향지란 이유로 운구하여 장사하였겠는가.

셌째,강진에서 근년에 개성에서 이장 해 왔을것이다는 주장을 강력히한다하나 지금으로부터87년전 묘지명이 발현되기 전에는 개성묘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장해 왔을것이며 또 이 주장은 묘지명의 인증을 전제로하여야하는데 그렇다면 공의 부조 양위분을 인증하여야 하고 해주최씨 분파설도 철회해야하는데 현재까지 고집하고 있음은 전후가 맞지 않은 이율배반이라 하겠다.

다,배위(配位)순천김씨설에 대하여

장경公의 배위가 순천김씨로써 신라경순왕 십세손이라 하나 장경공과 경순왕과의 연대차이가 153년 밖에 안 되는되 약 300년의 차이가 있어야 할 십세손이란 모순될뿐 아니라 순천김씨 족보에도 아무런 근거 기록이 없다 한다. 후손 幸錫씀

※참조 묘지석 발현

一세; 최철(崔哲) 상약원직장

二세; 정(靖)장작감

三세; 사전(思全)1067년생 1139년3월6일 卒 문화시랑평장사 삼한후벽상공신. 수태위 묘 개성 장미산

四세; 변(弁)이부상서,,,,,,,,,,,,,,열(烈) 효인(孝仁 어필사명)

음력 3월6일 장경공기일에 四位단 무양서원內 설단봉향(1975년부터)

음력 9월6일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무양서원에서 유림향사(후손 최윤덕 최부 나덕헌 유희춘)

음력 10월15일 강진군 군동면 라천리 강덕사에서 주벽으로향사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의 옛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다. 고려에서 영암(靈岩)에 속하였다가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쳐 강진(康津)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정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탐진(耽津)의 성(姓)으로 최(崔)·(曺)·유(兪)·(安)·정(鄭)·하(河) 6성(姓)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개편하였다.


인물편집

  • 최상(崔尙) : 1035년(고려 정종(靖宗) 1년) 과거에 급제하여 1056년(문종 10) 예부낭중으로 칠도순무사(七道巡撫使)로 파견되었다. 1068년(문종 2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2]
  • 최부(崔溥, 1454년 ~ 1504년) : 1482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6년 문과중시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監察)·홍문관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냈다.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표류했다. 반년 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표해록(漂海錄)》를 저술하였다.
  • 최부 금남선생행록;원작자 眉岩 유희춘 금남선생(錦南先生)최공(崔公)의 휘(諱)는 부(簿)요, 자(字)는 연연(淵淵)이며 나주태생이고 탐진인(耽津人)으로서 장경공(莊景公)의 후예인 바, 진사(進士)휘 택(澤)의 아들이다.그는 타고난 재질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다방면에 정통하였고 영민(怜敏)하였다. 장성하여 치세경륜(治世經倫)에 능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을 잘지었다. 나이 24세때 진사제삼(進士第三)에 합격하였고 29세때 즉 성종3년(1482)봄에 시행한 알성과(謁聖科;임금이 친이 보이는과거)에 정통책(正統策)이라는 과제로써 제三에 등제(登第)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사생(上舍生)으로 성균관에 있게 되었고 그때 재명(才名)을 크게 떨첬으며 신종호(申從護)등과 교우하였다. 초임에 조정에 출사하게 된 그후 여러 관직을 거처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또 공의 저론(著論)일백수십편은 그 논리가 명백하고 정확하여 당시의 평론에서 추앙을 받은 바되어 병오년(1486)에는 중시(重試;과거에 이미 급제한 자를 특별우대하기 위한 과시)의 아원(亞元)에 등제하였다.이로부터 사헌부 감찰에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기고 곧 수찬으로 승진되었으며 정미년(丁未年)에는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다. 당년9워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각도의 政務검사관)의 임무를 띠고 제주에 갔는데 이듬해인 무신년 윤정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듣고 황망히 도해(渡海)하다가 폭풍을 만나 중국 대주(절강성)에 표착되었다가 그해 6월에야 환국하여 한양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였다. 그때 주상(主上)의 명령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지어 오렸다. 그후 연이어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임자년(壬子年,1492)면상(免喪)된 뒤에 간관(諫官)인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앞서 주상의 명령에 의해 찬술된 표해록이 과실이라 논박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주상께서는 이 사태를 심상치 않게 여겨 친히 선정전(宣政殿)에서 공을 일견하시고 표해당한 전말을 하문하니 상세히 아뢰었던 바, 주상께서 그 시종(始終)을 듣고 찬탄하면서 말씀하시기를 『공은 사지(死地)에서 허덕이면서도 국위를 선양하는데 진력하였도다.』하시고 의복한벌을 하사하시었다. 이해에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에 다녀왔으며 계축(癸丑)년 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에 四월에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은 또다시 앞서 이썼던 트집을 거론하니 옥당(玉當)의 여러학사(學士)들은 주상께 아뢰기를『최부(崔簿)는 연상(連喪)四년에 한번도 집에 가지 않고 려막(廬幕)에서만 수상(守喪)한 효행의 극진함은 가상할만하니 동료들과 재임할 수 있게 하여주십시요』라 하였다. 성종(成宗)은 공경(公卿)들과 의논한 뒤 그대로 재임케 하였다. 五월에 병으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떠났다가 갑인년(1492)五월에 다시 홍문관교리로 복직하였고 八월에는 부응교(副應校)겸. 예문관응교(藝文官應校)로 승진되었다. 예문관응교에의 등용은 파격적인 것이며 장차 문형(文衡;大提學의 별칭)의 재목이 아니면 오룰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을묘년(1495)봄에는 생원회시(生員會試)의 참고관(參考官)이 되었는데 명참고관으로 알리어졌다. 이듬해 병진년五월에는 호서지방에 대한발이 있어 연산(燕山)은 공을 호서지방에 보내어 수차(水車)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해 九월에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공은 十一월에 상례(相禮)에서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정사년(丁巳年;1497)二월에 부태묘(부太廟;임금의 三년상을 마치고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신다는 말인데 이때는 시호 성종때의 일)한후에 공은 연산의 실정(失政)을 극간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고 또한 공경대신들에게도 호된 비평을 가하였다. 이달에 상례(相禮)로 강등되고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돌아와 예빈사정(禮賓寺正)이 되었는데 이처럼 강등된 이유는 권귀층(權貴層)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병오년 七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나 공과 신종호등 八인은 일찍기 문과에 급제하여 출중한 인재들인바 연산은 점필제(점畢齊;김종학)에 이어서 그들의 집을 수색케 하였는데 유독 공의 집에서만 점필제집(점畢齊集)이 발견되어 공은 고문을 당하고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남도 단천으로 유배당하였다. 공은 단천 적소(謫所)안에 갖힌 몸이었지만 담담한 자세로 지냈으며 갑자년(1504)十월에 이르러 연산의 명으로 투옥되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바로 그 전날밤 김전(金銓)공과 홍광필(洪光弼)공등도 경죄(輕罪)로써 같은 옥내에 갖혀있었는데 그들이 전별주(餞別酒)를 주니 선생은 일일이 잔을 받아 마시고 결별하면서도 끝까지 정중하였고 조금도 신색(神色)이 흐트러지지 아니하여 이해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다. 공은 갑술년(1454)에 출생하여 이해 51세였고 병인년에 중종 정국(靖國)후에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로 추증되었다. 선생은 모든 견문이나 학문에 있어 그 해박함이 과인하였고 특히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후생들을 교도(敎導)함에 있어서도 진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해남현(現해남군)은 해남벽지에 위치하여 있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 예의 또한 밝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선생의 처가댁이 이곳이라  다년간 머물면서 정론으로써 누속(陋俗)을 개선하였으며 또한 윤효정(尹孝貞),임우리(林遇利)와 같은 두 수재와 내 선인(先人;柳眉岩의 부친)을 자산을 기울여서까지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교도를 받으려는 학생이 향내에서 모여들어 마침내 이곳을 문필향(文筆鄕)으로 만들었다. 한양에 있을 때에도 권우란(權遇鸞)등은 자주와서 질의하는 등 더욱 많은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은 엄격하며 근면하고 염결(廉潔)하였으며 절제가 있어 거가(居家)할 때에는 사리(私利)를 탐하지 않았고 대간(台諫),시종(侍從)등 권세있는 벼슬에 재임시에도 보국(報國)만을 우선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분발할 뿐아니라 누차 정론(正論)을 간(諫)하여 대의의 부식에 진력하였다. 소시부터 품은 포부와 경세제민(經世齊民)의 백분의 일도 펴보지 못하고 비운을 만나 끝내는 무고하게 세상을 떠났기로 사림(士林)들은 통석을 금치 못하였다. 처형당한 후 선생이 소유한 것은 몰수당하였고 후사도 없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저술한 것이 거의 산재영락(散在零落)되고 十에二,三밖에 남아 있을 뿐으로 희춘(希春ㅡ柳尾岩)공이 公이 별세한지 60년후에야 수습하니 겨우 소기(疏記)와 비명칠수(碑銘七首)와 아울러 동국통감 120수를 얻었으며 二권을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기로 했다. 그의 기개(氣慨)와절개(節介)의 곧음과 특히 경륜의 규모와 논리의 정심(精深)함이 이 문집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일단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참고사항 저자 유희춘(柳希春);字는 인중(仁中)호는 미암(眉岩)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隣) 부인은 여류시인 송덕봉(宋德奉) 금남 최부(錦南 崔簿)외손주 처음엔 최산두(崔山斗)에게 배우고 뒤에 김안국(金安國)에게師事했다. 1538년별시문과급제,1546년 을사사화때 파직귀향 1547년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사건 연루 제주도유배,함경북도 종성으로 이배(異配 )19년유배생활 퇴계 이황과 주자학 서신교환 토론하고 1567년 선조 즉위후 석방 지제교(知製敎),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전라도 관찰사(觀察使),대사헌(大司諫),예조참판,이조참판,贈좌찬성 광주광산 무양서원,담양 의암서원,종성 종산서원,무장 충현사 배향 시호 문절공(文節公)
                                                            미암일기 참고※사항 금남선생 가계(家系)무계(誣系거짓 가계)에 대하여 금남선생은 이조시대에 있어 우리 탐진 최씨 거성이며 비록 품은 큰 포부와 경세(經世)의 펴보지 못하고 비운으로 종세(終世)하시었지만 선조 장경공의 기개와 절개를 승습(承習)한 분이므로 숭앙과 아울러 사표(師表)로 하고자 그 행록을 해역하는 바이다. 여기에 처기할 것은 금남선생이 무오사화로 비명에 가시고 후사가 없었고, 또 선생의 조부 이상의 세계(世系) 내력이 무징(無徵)하고 선생과 부조 양위가 형제가 없는 까닭에 그 외손인 나금호(羅錦湖,士침),유미암(柳眉岩.希春),김침랑(金寢郞.道齊)제공(諸公)이 공력으로 문집의 편수와 분묘의 수호를 해왔음이 명백한 사실인데도 강진문중에서 소위 경신보(庚申譜1800)를 편제할 때 선생의 진의부위(進義副尉) 휘 정원(井元)공을 강진문중의   중조(中祖)준량후(浚良后)운룡(雲龍)의 제二자 자호(自湖)라 무계(誣系.거짓으로) 하여 三형제가 된다하였고, 아버님 휘 택(澤)공을 자호(自湖)의 제三자라하여 四형제가 되는것 같이 허위조작한 환란처사(幻亂處事)에 대해 분개해 마지 않는 진사공파 최유해(崔維海)공 외 16인은 신유년(1801)에 예조(禮曺)에,임술년(1802)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이와같은 난륜사실(亂倫事實)을 의법시정(依法是正)하도록 신판장(伸辦狀;진정서)을 제출하였든바 화기서인기인(火其書人其人;위계,僞系 거짓족보를 수집하여 소화무효화하고 계보대로 환원) 하라는 제사(提辭;판결문)가 내려졌었다. 그후 의벌처결을 확인하러 강진에 갔었는데 강진 대표들이 파보(破譜)하겠다고 누누히 간청하므로 돌아 왔었지만 현재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다 현재 강진최씨로 변형시켜 조상을 욕되게 하고있다. ※참고사항 최정원(崔井元)진의부위 묘 나주시 南榮山鹽倉洞 配 永川崔氏 최택(崔澤)진사 配麗陽陳氏 묘 무안군 몽탄면소재 최부(崔簿)묘 上同  配 해남정씨 묘 해남 壻(사위)유계린(柳桂隣)나질(羅질)金雰 외손주;유성춘.유희춘(柳希春무양서원 유림향사)나사원 나사돈 나사침 나사척 金道濟 金德濟 증손;柳公漑(진사)柳景염(찰방)羅經 羅德純 羅德연 나덕명(都事)나덕준(현감)나덕윤(감찰)      나덕헌(충렬공 무양서원 유림향사)
  • 최학령     栗亭先生行錄 선생의 휘자는 鶴齡(학령),字는 雲老(자 운로),號는 栗亭(호 율정)이시며 中祖 進士孝老公(중조 진사 효로공)의 高孫(고손)이시다. 증조부님은 휘 閏元(윤원) 성균 생원공, 조부님은 휘 鎭(진)성균진사공,將士郞(장사랑) 古阜訓導公(고부훈도공),아버지는 휘 淑(숙)성균진사     啓功郞(계공랑)井邑訓導(정읍훈도)공이신바  아버님 훈도공께서 비록 成名(성명)은 얻지못하였으나 孝友와行誼(효우 행의)가 일향에 명성이 높았고 소년때부터  詩作(시작)에 능하여 효우 행의는  안 진산의 淑行錄(숙행록)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시문은 김 상국의 珍館(진관)현판에서 그 명시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훈도공의 전취는 광산김씨요 후취는 하동정씨 迪順副尉(적순부위) 承孫公(승손)의 따님으로써 백씨 휘 鳳齡(봉령) 箕子殿參奉(기자전참봉)공과함께 하동정씨의 소생으로써 중종칠년壬申(1512)에 나주 초동에서 출생하시었다     선생은 품성이 효성지극하여 소시부터 부모님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항상 즐거이 섬겨 받드는 모습이 성인과 같으시었다. 총민함이 과인하며 재질 또한 뛰어난바  아버님 훈도공은 경향 각지로 원유하시기에 겨우 십세에서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을유년(14세)가을에야 아버님이 환가하시어 다시 학업을 시작한 두철만에 진전하였고 시가와 문장을 휼륭하게 짓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학업이 일취월장 하던차 司馬鄕試(사마향시.지방에서 진사와생원을 뽑는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이시었다. 그리하여 부모님께서는 더욱 貴愛(귀애)하시어 田土(전토)을 상급하려 했는데 先生은 『소자가 향시에 합격한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오직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하는 世業(세업)을 계승하기 위한 것입니다. 재산은 마땅히 고루 나누어 받아야 할 것이며, 소자가 더 많이 받음으로서 다른 동기들에게 飢寒(기한)을 끼칠까 걱정이 됩니다. 따라서 부모님 명령이라 하더라도 사양하겠읍니다』고 아뢰고 끝내 사양하시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를 가상히여겼다. 先生은 일찍기「입신양명으로써 부모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효도에 있어서 최상의 길이다」라 말씀하시고 그와 같이 實踐躬行(실천궁행)하기 위해 학업에 더욱 열중하시고 德行(덕행)을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勉勵(면려)하셰다. 嘉靖(가정)갑오년(1534)에 司馬進士(사마진사)에 합격하시었고 기해년(1539)의 여름에는 廷試(나라의 경사때 궁전내에서 보이는 과거)에 으뜸으로 급제하시었는데 내려온 紅牌(홍패,합격증서)에 格(격)이 틀렸기에(廷試가 別試로 적혀저 있었음)先生께서 탄식하시기를 『立身(입신)초기에 위격한 것을 구차스럽게 받는것은 불가하다』하고  王께 상소하여 홍패를 반납해 버렸는데 이와 같은 介潔(개결)한 선비의 처사에 대해 칭송이 일국에 자자하였다.訓導公(훈도)은 이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시면서도 아드님의 결백함에 희열을 느끼시고 家庄(가장)을 내리려하니,先生은『옛 때에는 九세도 동거하였는데 소자만이 어찌 따로 살겠읍니까』하고 또 사양하시었다. 先生은 아버님 訓導공과 어머님 鄭씨(정씨)부인이 연로하시니 출세의 뜻을 끊고 부모님 봉양에 전념하시던 차,경술년 가을에 어머님이 별세하시었다. 원래 집안이 소박하고 淸寒(청한)하게 지내기에 장례를 제대로 갖출수 없는 형상이었으나 본 道 관찰사를 비롯하여 각고을 수령들과 遠近(원근)의 고을 친구선비들이 先生의 빈안함을 알고 재물을 내어 조력하고 先生의 명성을 듣고있는 향인들이 弔慰(조위)하는 서한과 賻儀品(부의품)을 보내왔다. 先生은 葬儀(장의)와 祭享節次(제향절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므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치 않은사람이 없었다. 이때 葬地(장지)을 정함에 있어 訓導공께서『내 조부 生員공께서 珍原縣竹林寺(진원현죽림사)법당 뒤에 계시었는데 절은 이미 없어저 구애치 않으니 그곳에 너희 모친의 장지를 정하고 우편에 내 묘를 정하라』는 말씀이 계셨기에 이에 따랐다. 때마침 늣은 겨울이어서 土役(토역)하는 사람들이 혹한에 고생스러웠는데 先生은 몸소 탕과 술을 마련하여 손수 役夫(역부)들에게 먼저 대접하니 역부들은 감격하여 힘을 다하여 完葬(완장)하였다. 그날부터 先生은 廬幕(려막)짓고 侍墓(시묘)하기 시작하시었는데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병을 얻게죄었다. 이에 아버님께서 잠시라도 환가하여 몸조리를 하라하였으나 先生은 울면서『死生(사생)은 나면서부터 정해진 것으로서 마음이 편해지면 몸도 안정될것이나 환가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치 못하면 병이 더 커질것입니다』라 아뢰고 응하지 않으시기로 아버님께서는 안타깝게 여겼으나 더 권치 않았다. 先生의 친구인 李 千榮(이천영)공이 病狀(병상)을 보고 책망 하기를『생명을 이즈러지게 함은 성현들도 경계하는 바인데 자네가 아버님 먼저 별세하면 그것도 효도가되것는가』하며 타일럿으나 先生은 답하여『내가 불초하여 어머님을 영화롭게 봉양 못하여 어머님이 돌아가실때 둘째아들(先生을가르킴)의 영화를 못보고 죽은 것이 한스럽다고 말씀하셨네 내가 홍패를 반납한 후에 출세를 絶意(절의)하였으니 부모님의 소원을 못풀어 드렸을 망정 三年喪禮(삼년상례)만이라도 내몸이 自盡(자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작은 정성을 바치려하네』하시니 千榮(천영)공도 감음하고 墓廬(묘려)를 떠났다. 先生은 朝夕上食(조석상식)을 정결하게 지성을 다하시니 지어 鹽醬(염장)까지 祭用(제용)은 따로 간수하는데 하루 아침에 쥐가 漿水(장수)를 더렵혔으므로 통곡하며 자책해 마지 않고 있던차 갑자기 큰 쥐한마리가 구멍에서 나와 머리를 흔들며 사죄 하는듯 하므로 려막에서 기르던 개가 물어 죽이고 그후 다른 쥐 열두마리도 따라 나왔기로 죽이니 근처에 쥐의 흔적이 없어젔다. 이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이는 先生의 효성이지극한 소치라 감탄하였다. 하루는 아버님이 려막에 오시었기에 아버님 친구분들을 청하여 술을 대접하려는데 려막중이라 찬이 없음을 한탄학 묘에 가 울면서『어머님 생전에는 아버님께 찬을 갖추어 공대하였지만 지금은 막막하다』슬퍼하고 있으니 개가 숲속으로 들어가 꿩을 잡아 왔기에 이것으로 대접하였더니 座中客(좌중객)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先生의 효행에 찬탄해 마지 않았다. 三년탈상으로 궤연(영위상)을 치웠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애통을 그치지 않으셨다. 三년동안 려막에 계시면서 한번도 환가하신 일이 없어 初喪(초상)때 末女(말녀)를 낳아 수일밖에 안되었는데 三년후 처음 보시니 한달이 되도록 아버지라 부르지 몼하였다한다. 그후 癸丑(계축)년九月에 아버님 訓導공이 작고하시니 애통해하시는 情狀(정상)이 더욱 형용할 수 없었고 전번 先 비喪때와 같이 본도 관찰사를 비롯한 각고을 수령과 원근의 인사들의 격별한 원조가 배가하여 어머님 우편에 雙墳(쌍분)으로 장례하고 다시 侍墓(시묘)하시면서 哀哭(애곡)을 끝이지 않으시었다.이 듬해 학자三,四人이 려막에 찾어와『연병이 한창 막연하여 모든 사람이 걱정하고 있는데 공만이 태평하게 있을것인가』하면서 그곳을 피하라 권고하였으나 先生은『내 자식의 도리로써 아버님을 위해 墓廬(묘려)에 있는데 편리를 쉬함은 부당하다』고 끝내 피하지 않으셨으나 근처 많은 사람이 병에 감염되었는데 先生은 무사하였기로 鄕隣(향린)에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연병도 처음부터 달라 붙지 못했다고 감탄하였다. 시묘하기 전후 六년간의 지극한 효성은 天下世人의 칭송하는 바 되었으며 지금도 그 곳을 侍墓洞(시묘동)이라 일러 오는 터이다. 선비와 선고喪때 나주에서   장성까지 백여리를 운구하는데 하룻밤을 유숙하는 마을에서 우막을 치고 불을피어 주었을뿐아니라 도중에 치전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한다. 이는 선생의 지효학덕이 널리 알려진 소치라 할 것이다. 珍元縣監(진원현감)인 金萬溢(김만일)은 先生의 이와같은 行誼(행의)를 가상히 여겨 전라감영에 褒報(포보)를 올리니 이 소식을 들은 先生은 감사하는 서한을 현감에게 보냈는데 그 글속에는 비통하기 이를데없는 내용의 술회가 담겨저 있었다. 그후에 전라감사 兪紳(유신)이 사람을 보내어 賻物(부물)을 후하게 보내면서 위로하였다. 김하서선생(河西先生)은 褒詩(포시,칭찬하는 시문)하시기를 타인이 따를 수 없는 出天(출천)의 효행을 찬양하였는바 先生은 和答(화답)하시기를『六년간 묘려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손수 松樹(송수)를 심어 부모님 묘가 그늘지도록 하였지만 그 일천삼백오일간에 부모님 망극한 은혜를 갚기에는 미흡했다』고 하였다. 아버님 訓導공은 첩을 두었는데 성질이 교할하여 가끔 先生을 괴롭혔으나  아버님이 작고하신후 아버님이 所愛(소애)하신 분인데 안 계신다하여 박대할 수 없다 하여 재산을 고루 나누어 주었든 바 마침내는 慈母(자모)가 되었다한다.         을묘년(1555년)여름에 敵變(적변,영암 달랑포에 왜적이 침입한)이 있자 先生은 분개해 마지 않으시고 적을 방어할 대책이 소홀함을 걱정하여 방어방책을 도면으로 그리고 방략九조를 감사에게 헌책하였다. 즉 (一)군사가 출병하기 전에 군량미부터 보내야 할것(二) 여러 고을에 있는 말들은 내지를 지키는데 지원해야한다.(三)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따르게해야 적을 물리칠수 있다(四)각 수령과 장병들로써 각자 마을를 지키게한다.(五)土兵(토병,지방병사)들로써 변방을 수비토록한다.(六)성을 쌓고 헐어진 곳을 수리하고 곡식과 포목을 많이 저장해야한다.(七)나루터를 잘 지켜 왜적선이 상륙치 못하도록한다.(八)적병이 출현하기를 기다리지말고 미리 水戰에 대비한다.(九)   僧徒(승도)들로 하여금 성을 쌓게할것 등이었다. 마침 적이 물러가 이 방략이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그 경륜은 훌률하여 글만 아는 유학자만이 아니고 평소에 나라에 대한 훌륭한 경륜책을 간직하고 계심을 여실히 나타낸 일면이라 할 것이다. 일상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근엄하시었고 한 말씀, 한 거동에 절도가 있었다. 일찍기 말씀하시기를『우리집안은 대대로 孝友의 家憲(가헌)을 지켜왔기에 나 역시 일신만을 위주로 하지 않고 선대의 교훈을 두렵게 생각하고 실천해왔다』고 하였다. 자손들을 훈계하는 유서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입신양명하는 이상의 충효는 없다. 충효의 깊은 경서를 기본으로 하여야 하며 거기에 밝혀진대로 부모를 섬기며 인군을 섬길지니 그것이 바로 학문하는 최고의 목적이니라. 나는 평생에 오직「子張書紳之目.자장서신지목」이라는 경서에 쓰여저 있는데로 처신해왔다. 너희들도 그렇도록 노력하라. 그릭 나의 아버님이 출생하시어 八개월 밖에 안되는 어릴때 동성인 敎授(교수)諱(휘) 淡(담)공의 收養(수양)으로 교수공이 양육하여 주신 특별한 은공이 있었기에 우리 가족이 유랑의 신세를 면하게 된것으로 그분을 추모하고 보은하는 성의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는니라』 하시었다. 先生의 언행은 후생들에게 垂範(수범)할만 한 것이 많을 터인데도 기록이 멸실 되었음을 실로 애석한일이다. 다만 시묘 때 쓰신 일기 居憂錄(거우록)이 자손에게 전해저 오고있다. 명종十七년 임술(1562)十二月초六일에 나주 초동자택에서 考終(고종)하시니 향년 五十一세이시었다. 집 뒤 良積山(양적산) 艮坐(간좌)에 장례를 모시었다. 부인 광산이씨는 翰林(한림) 元徽(원후)ㄱ고의 따님이시며 三男三女를 두시었으니 장자는 휘 三省(삼성)진사공.차자는 휘 四勿(사물)문과정언(文科正言)공,삼자는 五紀(오기)公이시고 따님은 崔 希說(최희설)문과현감(文科縣監)공과 金元慶(김원경)主簿(주부)공,柳恒司猛(류항사맹)공에게 각각 출가하시었다.             先生이 별세하신 후 宣廟(선묘) 을유년(1585)에 朴 思菴(박사암)휘 淳(순.본관 忠州,영의정을 지냄)공,정송강(휘 澈 본관 延日,우의정지내고 星山別曲,思美人曲으로 유명한시인)공 등이 先生의 높은 학덕과 지효 行誼(행의)를 왕에게 장계하여 通訓大夫(통훈대부)弘文館校理(홍문관교리)에 特贈(특증:생전에 벼슬이 없는 분에게 특례로 내리는 벼슬)되시었다.肅宗(숙종)무인(1698)년에 유림 제공의 공의로 장성 慕岩書院(모암서원)에 배향되시었는 바 주벽인 절효(徐節孝)선생과 행의가 동일하시어 효행은 百行의 근원으로써 이분들의 행의는 만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할 것이다. 先生의 학문은 가히 경서를 自得(자득)하였다 할 수 있는데도 이와같이 立志(입지)하여 학덕이 훌륭하시었는데 만약 大賢(대현)에게 수학을 하셨드라면 반드시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리라는 세평이었다. 그 학문의 논리내용에 대한 문헌이 전래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비록 格致(격치)의 性理(성리)를 통달치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떻든 김 하서(金河西),기 고봉(奇高峯) 노 옥계(盧玉溪),양 송천(梁松川)제공(諸公)과 같은 당대 名世(명세)한 현철들과 친교를 맺었고 先生의 명성이 百世에 혁혁하게 남는 것으로 보아 그 인격과 학문,덕행 경륜을 가히 추찰할만 하고 또 名賢錄(명현록)에나 邑誌(읍지.나주 장성)에 두루 재록(載錄)되어있으니 얼마나 큰 인물인지 짐작하고 남음이있다 하겠다. 先生의 유고(遺槁)는 멸실된것이 많으나 잔여한것만으로도 이를 넉넉히 뒷받침 할만하다.                                                                                     자료:진사공파 族譜  

항렬자편집

  • 강진금천파
  • 윤덕파

탐진최씨 진사공파 항렬표[耽津崔氏 進士公派]

8세부터기록합니다

[08세,八世]진o(震o)벼락진 [18세,十八] o규(o奎)별규

                 o철(o喆)밝을철

[28세,二十八]o균(o均)고를균

                  o중(o重)무거울

[09세,九世]o중(o中)가운데중 [19세,十九] 석o(o錫)주석석

                 종o(o鐘)쇠북종

[29세,二十九]진o(鎭o)진합할

                   연o(鍊o)단련할연

[10세,十世]인o(人o)사람인 [20세,二十] o수(o洙)강이룰수

                 o한(o漢)한수한

[30세,三十世]o원(o源)근원원

                   o섭(o涉)건널섭

[11세,十一]o제(o齊)엄숙할제 [21세,二十一]병o(秉o)잡을병

                   동o(東o)동녁동

[12세,十二]세o(世o)대세 [22세,二十二]o환(o煥)불꽃환

                   o렬(o烈)세찰열

[13세,十三]수o(壽o)목숨수 [23세,二十三]재o(在o)있을재

                   기o(基o)터기

[14세,什四]o흠(o欽)공결할흠 [24세,二十四]o현(o鉉)술기현

                   o호(o鎬)호경호

[15세,十五]락o(洛o)물락 [25세,二十五]윤o(潤o)윤택할윤

                   순o(淳o)순박할순

[16세,十六]o상(o相)서로상 [26세,二十六]o식(o植)심을식

                   o주(o柱)기둥주

[17세,十七]영o(榮o)꽃영 [27세,二十칠]병o(炳o)을병

                   희o(熙o)빛날희

※참조 탐진최씨 진사공파(耽津崔氏 進士公波,)병신보(炳申譜)2016년

과거 급제자편집

탐진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3]

고려 문과

최상(崔尙)

문과

최병룡(崔炳龍) 최부(崔溥) 최사물(崔四勿) 최신(崔信) 최재철(崔在澈) 최홍전(崔弘甸)최홍(泓)

무과

최귀석(崔貴碩) 최길선(崔吉善) 최대립(崔大立) 최대영(崔大英) 최대항(崔大恒) 최덕립(崔德立) 최덕보(崔德福) 최덕보(崔德福) 최덕중(崔德重) 최덕훈(崔德勳) 최동문(崔東文) 최두극(崔斗極) 최발(崔) 최복원(崔復原) 최빈(崔濱) 최상륜(崔尙崙) 최상악(崔相岳) 최석륜(崔碩崙) 최선립(崔善立) 최세기(崔世機) 최세익(崔世益) 최수천(崔壽天) 최승현(崔承賢) 최여곤(崔汝崑) 최여준(崔汝峻) 최여태(崔如台) 최영걸(崔英傑) 최용(崔勇) 최원립(崔元立) 최유림(崔有霖) 최지천(崔至天) 최진익(崔振翼) 최찬경(崔纘慶) 최창술(崔昌述) 최충신(崔忠信) 최치운(崔致雲) 최탁(崔琢) 최태제(崔泰齊) 최필영(崔弼榮) 최한(崔漢) 최호중(崔好重) 최화제(崔華齊) 최후립(崔厚立) 최후진(崔厚鎭)최사물(崔四勿)

생원시

최경기(崔景驥) 최대현(崔大顯) 최부(崔溥) 최석춘(崔錫春) 최억첨(崔億瞻) 최언호(崔彦虎) 최익중(崔翼中) 최정연(崔挺然) 최준학(崔儁學) 최직량(崔直良) 최청(崔淸) 최치영(崔致永) 최태주(崔台柱) 최화(崔俰)

진사시

최극충(崔克忠) 최기룡(崔基龍) 최기종(崔起宗) 최덕준(崔德峻) 최명호(崔明濠) 최병칠(崔炳七) 최부(崔溥) 최삼성(崔三省) 최영(崔渶) 최윤식(崔允湜) 최윤형(崔閏亨) 최응두(崔應斗) 최재철(崔在澈) 최주(崔澍) 최택(崔澤) 최효로(崔孝老) 최학령(崔鶴齡)최숙(崔淑)

문화재편집

  • 무양서원(武陽書院)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 강진 강덕사
  • 모암사
  • 보산정사
  • 죽림



집성촌편집

  • 전라남도 영광군염산면

2000년 지역별 인구는 서울 16,833명, 부산 1,903명, 대구 510명, 인천 3,304명, 광주 11,030명, 대전 1,473명, 울산 445명, 경기 13,465명, 강원 666명, 충북 593명, 충남 2,373명, 전북 6,330명, 전남 7,012명, 경북 521명, 경남 1,182명, 제주 487명이다.

해주 최씨와의 관계편집

탐진 최씨는 장경공 최사전의 선대를 모르던 1921년까지는 장경공이 해주 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고 왔으나 개성 장미산에 있던 장경공의 묘소가 일제강점기에 도굴되고 묘지명(墓誌銘)이 발현함으로써 해주 최씨 분파설은 효력을 상실하였다. 장경공의 조부는 상약국직장 최철, 부친은 장작감 최정이며 모두 의술로 고려 조정에 입사하였다고 한다. 그 선조는 탐진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其先耽津縣人也) 이것으로 볼때 최사전의 선조부터 탐진에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탐진백(조선과환보 인용)에 봉해지면서 탐진최씨의 시조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경공 최사전의 묘지명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인구편집

  • 1985년 14,609가구 61,841명
  • 2000년 21,191가구 68,127명
  • 2015년 탐진 최씨 89,943명 + 강진 최씨 2,398명 = 92,341명

각주편집

탐진최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