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박정희/보존1

마지막 의견: 14년 전 (쥐박멸전담반님) - 주제: 여성 편력 부분에 대해서

박정희의 만주 주둔 시절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창씨개명했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근거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인데 여기의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표기 자체가 오류이다. 즉, 오카모토 미노루로 잘못 표기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자칭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에 대한 증오나 편견이 역사를 얼마나 오도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알려진 이름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수학시절의 6등6급 교유(기숙사 사감)에서 연유한다. 이 사람은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에서도 학생들을 진압한 공로로 공훈 정7급을 받아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아니다. 오카모토라는 성을 가진 대구사범학교 교유가 어쩌다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과정은 참으로 고소를 금치 못할 한편의 코미디이다.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개인을 마음대로 폄하하는 조희연이나 김삼웅같은 역사학자, 그들을 비판없이 따르는 군상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힌트를 제공한다. 박정희의 한자 '熙'는 일본어로 '히로시'로 읽힌다. '히로시'로 읽히는 다른 한자를 찾아보기 바란다. 박정희의 원래 창씨명은 高木正雄이다. 그런데 박정희에 대한 온갖 왜곡으로 범벅된 김형욱 회고록에는 高本正男으로 나온다. 여기에 朴正熙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코미디의 비밀이 있다.(토론의 방식을 몰라 편집화면에서 바로 입력하였습니다. 저는 Homo Mediocris입니다)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1:52 (KST)답변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서 진보에서는 일본군 장교 시절 독립투사를 잡기도 한 반민족 행위를 하였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박정희를 지지하는 보수측에서는 반대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를 참고로 넣었으면 합니다. 또 행적 중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였던 사실, 그리고 현대사에서 아직도 중요한 인물인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넣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김종필과의 관계도.

'만주 군관학교를 420명 중 1등으로 졸업'이라고 되어 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곳을 참고한 것 같습니다만, 다른 자료로 볼 때 240명이 맞지 않을까요? --정안영민 2006년 5월 16일 (화) 19:46 (KST)답변

박정희 소속군대는 그시절 독립투사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팔로군이 독립투사라면 좀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박정희는 참전기회조차 없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bkmmm)
동감합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8일 (일) 00:03 (KST)답변
박정희가 어느 독립군, 누구를 어떻게 살해했는지도 구체적인 증거도 못대면서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했다 하는 것은 허위사실 유포나 모독 아닌가요? 이곳 분들 중에 박정희에게 원한가진 분들이 많군요. 그만큼 김일성이나 김정일에게도 잣대를 들이댔으면 하는데 그점이 아쉽네요 --Antinobba 2007년 6월 6일 (일) 12:27 (KST)답변

만주 군관학교 수석은, 만군계에 한한 것입니다. 당시 전체 인원은 480명이었고, 일계와 만계 생도가 각 240명이었습니다. 조선계는 모두 11명으로 만계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인권, 《박정희 평전》, p.86~89 참조) -- 이 의견을 2007년 6월 11일 (월) 23:03에 작성한 사용자는 Utopistics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240명이 맞다는 말씀이시죠? 어찌되었든 이 편집으로 인해 지금은 지워져버렸네요. --정안영민 2007년 12월 27일 (목) 09:00 (KST)답변

사전에서 언급된 나구모 쥬이치는 해군중장인데 무슨 근거로 육사 교장으로 서술되어 있는건지요? 더군다나 나구모 쥬이치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만주에서 행정장교로 활동하던 박정희와는 일절 만날 기회조차 없다고 보여집니다만? -- 이 의견을 2008년 6월 8일 (일) 20:54에 작성한 사용자는 Kbr0706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박정희 재학 중 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와 해군 중장 나구모 쥬이치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해군 중장 나구모 쥬이치는 사이판 함락 후 자살고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는 종전 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 산들바람 (토론) 2008년 6월 8일 (일) 20:57 (KST)답변
나구모 쥬이치에 대해 따지고 싶다면 인용된 저작물의 저자인 조희연씨에게 따지세요. adidas (토론) 2008년 6월 9일 (월) 09:25 (KST)답변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이름의 창씨 개명을 했다는 내용의 출처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박정희에 대한 정보가 있는곳은 박정희 기념관입니다. 그곳엔 오카모토 미노루에 관련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낭설일 가능성이 농후하여 논란 부분으로 오카모토 미노루 건을 이동합니다. 오카모토 미노루에 관련된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분은 이곳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Arbi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1:53 (KST)답변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되 있네요.(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5일 발간) --Shin mincheol 2007년 5월 13일 (월)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의 본문의 그대로 복사한 그림을 게재했는데 도쿄대학출판회에 대한 저작권 침해인데 그림을 제거했습니다.----hyolee2♪/H.L.LEE 2007년 5월 14일 (월) 11:08 (KST)답변

진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인지 아니면 제3자인 누구인지 어떻게 구분해서 알수있는지 게재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은 또 하면 안되는지도 알고 싶네요. 창씨개명을 하면 또 다시 못할정도로, 일본이름이 그렇게 소중한 건지도.. :) - bkmmm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1:55 (KST)답변

육해군 총합사전에 오카모토 미노루란 자가 한국의 대통령이었으며 암살당했다고 적시되어있네요. 동일한 제3자가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죠. 충분히 구분 가능하죠? 생년월일도 동일하구요. 자발적 제2의 창씨개명을 하든 말든 오카모토 미노루가 단순한 사인이라면 자기 선택이고 자기 마음이지만, 공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Shin mincheol 2007년 6월 10일 (일) 04:39 (KST)답변

원본을 올려주세요. 일본-웹사이트/출처포함하고.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일개 군인일적에도 공인이였군요. 시대와 그 상황을 이해하는 상식부족인거 같네요. 그때는 당연히 공인이 아니니 이야기가 달라지지는 않는군요.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는 이중적 잣대는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대성하면, 무명시절 까지도 공인이라는 주장은 황당함을 넘어 엉뚱하게 들리는군요. bkmmm

뭔소립니까? 내가 언제 누구한테 이중적 잣대를 사용했다고 함부로 넘겨짚는겁니까? 내가 언제 박정희가 군인이었을때도 공인이었다고 했나요? 왜 당신 멋대로 해석하냐구요. 당신 나 알아요? 어이없군요. 그리고 일국의 수장이었던 사람한테 이정도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것도 싫은겁니까? 당신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고 불쾌하군요.--211.207.249.141 2007년 6월 23일 (토) 02:13 (KST)답변

괜히 신경질을 내지 맙시다. 공인이건 일국의 대통령이건 같은 인간입니다. 대통령은 무슨 인간 이상 이여야한다는 식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윤리적 잣대를 하려면, 제대로 사용합시다. 창씨개명은 조선인 80%가 했던 겁니다. 그런식으로 하면 곤란하죠. 박정희가 싫다고 무조건 매도하는 태도가 아쉽네요. 한인간을 평가하려면 그 시대상을 이해하는 눈을 키워야죠. bkmmm

시대상 운운하셨는데, 그 시대상에 대해 약간 부연설명을 해드리자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등 창씨개명이 반강제적, 혹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사실입니다. 박정희 가문은 전부 다카키로 창씨개명되었는데, 다카키로 창씨개명이 된 것은 아마도 반강제적, 강제적인 창씨개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2차 창씨개명까지 한 건 자발적인 창씨개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박정희는 다카키라는 성이 조선인스럽다 여겨 스스로 오카모토로 개명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만화 박정희 참조) 그 주장 자체의 신빙성을 떠나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2차 창씨개명을 한 건 근거가 분명한 사실이지요. 지금 문서는 단순히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하였고 오카모토 미노루로 2차 창씨개명을 하였다고만 쓰여 있죠. 창씨개명과 관련하여 현재의 문서가 문제 될 건 없습니다. lamiru 2008년 1월 6일 (일) 01:51 (KST)답변

[참고자료 : -교사시절에 관한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평소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 선생님이 만주 군관학교에서 군도(긴 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 순사가 박 선생님 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 선생님이 오가와 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 정순옥씨의 증언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 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 주영배씨의 증언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 전도인씨의 증언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라고 내몰았습니다."-


■ 황광실씨의 증언

-"박 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 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 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증언을 넣으려면 이런 증언도 같이 넣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긍정적인 평가글은 계속 수정하면서 부정적인 평가글은 어떻게 그렇게도 떳떳하게 올려놓으시는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98223

그리고 박정희의 병적기록에서도 박정희는 1945년 3월까지도 '다카키 마사오'란 창시개명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나옵니다. 병적기록에서도 다카키 마사오라는 창시개명만 사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럼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창시개명 뭔지요? kbr0706 (토론) 2008년 9월 2일 (일) 05:27 (KST)답변


서명 사용해 주시고요. 오카모토 미노루에 관해서는 근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해당 근거를 뒤집을 만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으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현재 내용에 반대하는 증언도 넣으셔도 됩니다. 다만 출처 표시를 잘 해주세요. adidas (토론) 2008년 6월 11일 (수) 07:07 (KST)답변

45년 3월의 병적기록부에도 '다카키 마사오'를 사용한 것으로 나옵니다. 박정희 본인의 병적기록부까지 부인할 수 있는 근거라는게 어떤건지요? (토론) 2008년 6월 15일 (수) 02:37 (KST)답변

지금 참고도서로 제시되어 있는 조희연의 저서에 따르면 1942년을 전후로 오카모토 미노루로 한번 더 창씨개명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조희연씨의 해당 서적은 제가 읽을 수 없는 수많은 일본어 서적들을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1945년에는 다카키 마사오를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1942년을 전후로 오카모토 미노루를 사용했다고 명시되어 있는 대학교수의 저작물이 시중에 분명히 나와 있으며, 이것이 틀렸다는 공신력 있는 출처는 현재까지 제시된 것이 없습니다. 조희연의 저서를 비판하고 싶다면 본인의 의견이 아닌 공신력 있는 논문이나 저서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박정희가 그 시절 다카키와 오카모토 둘 다 병용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adidas (토론) 2008년 6월 15일 (일) 16:17 (KST)답변

고작 일개 대학교수의 책이 '공신력있는' 저작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오카모토 미노루로의 창시개명'을 올리신겁니까? 조희연이라는 저 교수의 책이 공신력이 있다면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대안교과서의 내용도 공신력이 있는 내용일테군요. 또 두 이름을 함께 병용을 했을꺼라 추정된다고 하셨습니까? 군장교가 자기 이름을 병용한다는게 말이나 된다고 보시는지요? 도대체 박정희 본인의 병적기록부를 보여줘도 사실을 부인하시는 의도는 뭔지요? (토론) 2008년 6월 16일 (월) 22:50 (KST)답변

고작 일개 대학교수라니요. 그정도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잘데 없는 소규모 언론보다는 훨씬 공신력 있습니다. 그 사람 저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1942년을 전후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지요. 님의 자료는 1945년에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였다는 자료이지,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쓴 사실이 전혀 없다'라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안교과서는 현재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이므로 공신력 있는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냥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이라는 '한 단체'의 의견 정도이지요 adidas (토론) 2008년 6월 17일 (화) 01:15 (KST)답변
만약 조희연씨만큼 공신력 있는 사람이 논문이나 단행본으로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라는 내용을 증명한다면, 해당 내용이 삭제될 수 있겠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도저히 삭제할 근거가 없어 보이는군요. adidas (토론) 2008년 6월 17일 (화) 01:16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조선총독부직원및소속관서 직원록에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1935년, 대구사범고등학교 기숙사 학생감(學生監)으로써 경북 대구에 근무하고 있는 6등급 공무원으로 나오고 있습니다.(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JW/viewSearchResultJW.jsp?pQueryEmp=%28META.TITLE+%3A+%22%E5%B2%A1%E6%9C%AC%E5%AF%A6%22%29++%26+%28SYS_TYPE+%3A+T%29&pSearchJWName=%E5%B2%A1%E6%9C%AC%E5%AF%A6&pSearchJWGre=&pSearchJWYear=%EB%85%84%EB%8F%84%EC%84%A0%ED%83%9D&x=16&y=6)이 시기는 박정희가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정식교사로 임관하기 2년 전의 기록이며 이 시기의 박정희는 분명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조희연씨의 저서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물이 더욱 공신력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조희연씨가 그의 저서에서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를 사용했다고 주장한 것을 근거로 삼으시려면 최소한 조희연씨의 주장을 뒷받침해줄수 있는 다른 근거도 첨부해야 하는것 아닌가요? kbr0706 (토론) 2008년 10월 27일 (월) 17:40 (KST)답변

좌파들의 유언비어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창씨개명했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근거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인데 여기의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표기 자체가 오류이다. 즉, 오카모토 미노루로 잘못 표기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자칭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에 대한 증오나 편견이 역사를 얼마나 오도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알려진 이름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수학시절의 6등6급 교유(기숙사 사감)에서 연유한다. 이 사람은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에서도 학생들을 진압한 공로로 공훈 정7급을 받아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아니다. 오카모토라는 성을 가진 대구사범학교 교유가 어쩌다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과정은 참으로 고소를 금치 못할 한편의 코미디이다.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개인을 마음대로 폄하하는 조희연이나 김삼웅같은 역사학자, 그들을 비판없이 따르는 군상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힌트를 제공한다. 박정희의 한자 '熙'는 일본어로 '히로시'로 읽힌다. '히로시'로 읽히는 다른 한자를 찾아보기 바란다. 박정희의 원래 창씨명은 高木正雄이다. 그런데 박정희에 대한 온갖 왜곡으로 범벅된 김형욱 회고록에는 高本正男으로 나온다. 여기에 朴正熙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코미디의 비밀이 있다.(토론의 방식을 몰라 편집화면에서 바로 입력하였습니다. 저는 Homo Mediocris입니다)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1:58 (KST)답변

박정희에 대해서는 낭설이 많습니다. 좌파들이 증명도 되지 않은 소설을 진실처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혈서를 써서 보도 되었다는 만주일보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신문입니다. 창씨개명도 두번하면 친일파라는건지, 그것도 증명도 못하면서, 너무 엉뚱하더군요. 또한, 목격자도 하나도 없는데, 일제시대에 입었던 군복을 청와대에서 입었다???? 이런 소설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도 만화 읽고 올린 모양인데, 이처럼 명예훼손과 역사왜곡이나 하는 소설은, 명색이 백과사전인데, 올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 bkmmm

'냉정하고 중립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분께서 불특정 다수에게 의미부터 엄청나게 광범위한 '좌파'라는 낙인을 붙이는 것은 무리수라고 보이고요. bkmmm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문구나 자료가 있다면, 증거를 수집하여 편집하시면 됩니다. 조갑제씨의 저서에서 따 온 것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시면, '조갑제의 저서가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시고 해당 문구를 삭제하시면 되는 것이고, '만주일보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 2회에 걸친 창씨개명이 친일파로 분류될 요건이 아닌 이유,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일본 군복을 입은 적이 없는 증거'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만화 읽고 올린 모양인데'라고 하셨는데, '만화'가 신빙성이 없는 이유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만화라는 표현 형태는 공신력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공과 과는 문서에 공히 적혀 있습니다. 공이 너무 적게 서술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자료를 찾아서 업적 부분을 보강하시면 됩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설마 해서 컨트롤 F 눌러서 친일파 찾아보니 평가란에 단 1개밖에 없더군요. 평가란의 내용만 손을 보시면 문제가 없겠네요. bkmmm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위키백과는 절대적인 지식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실에 가까운 것은 있겠지만요. 그리고 그 과정은 엄연히 증거물을 수집해서 이루어지고, 개인적인 판단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고치는 권한은 당신들 마음이니 맘대로 하라'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보다는, 직접 본인이 '좌파'들이 반박하지 못할 내용을 작성하면 해결될 문제겠죠. 잘 아시리라 여기지만, 여기는 '누구나 편집할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서술의 원칙을 지키면서 문서를 작성하시면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고, 마음대로 지울 수도 없습니다.--Astroboy (토론) 2008년 5월 19일 (월) 03:00 (KST)답변
청와대에서 일본군 군복을 입었다는 이야기의 출처는 전 보안사령관 강창성의 증언입니다. 소설이나 만화가 아닙니다. 오늘은 늦어서 이만 자고 다음에 그 부분을 보강해 올릴 생각입니다. adidas (토론) 2008년 5월 19일 (월) 03:11 (KST)답변

I'd like to reiterate in English, since some people made baseless accusations in English at the bottom, calling President Park genocider, murderer among others. If you are a reader with fair mind, you will notice immediately that these leftist militant spammers do not provide any kind of evidence to back their stories up. And, if they ever do, those are fabricated stories, as Korean Leftists are very well-known to do, and they use far-fetched logics that only Ponzi schemers can make. Readers, especially young college students, should be aware of the dangers posed by these militant Korean leftists propagandists. And, be wary of those who are filled up with so much un-founded hate that they spew lies upon lies about President Park. Please, be critical and ask a lot of questions in your mind before accepting anything as facts. - bkmmm

혈서 작성은 조갑제씨가 쓰고 조선일보사에서 펴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제기한 내용입니다. 〈만주일보〉에 대한 부분은 당시의 〈만선일보〉와 〈만주신문〉 중 후자의 경우에서 혼동으로 인해 만주일보로 전파된 듯 싶은데, 만주신문이 맞습니다. 창씨개명을 두번하면 친일파라고 하는 이유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강요에 의한 창씨"의 경우에는 보통 고령박씨의 경우는 고령의 高와 박씨의 木을 따서 "고목씨", 일식으로 읽으면 "다카키"라고 하는 성을 이용하는데, 박정희 일가의 경우 1940년도에 이러한 형태로 창씨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육사 시절때 박정희가 "오카모토"씨로 한번 더 개명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한국의 성씨에서 변환하여 창씨한 경우가 아니라, 완전한 일본식으로 창씨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또한 논란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겠지요. 괜히 무조건 뭔 일만 있으면 좌파 운운하는 이런 괴이한 형태의 말씀은 삼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Gksdnf1999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Gksdnf1999께: 혈서에 대해서는 만주신문인지 만주일보인지에서 퍼와야지, 왜 조갑제씨를 들먹입니까? 신문을 찾긴 찾았나요? 기록에 없어요? 기록에 없는데 그게 사실인양 왜곡해서는 안되겠죠? 명백한 명예회손이고,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주장이 있는데" 라는것을 마치 사실인 척하면서 쓰면 되겠습니까? 그 주장의 근거를 말해야지요. 거기에 대한 카운터 포인트 또한, 이것이 마치 사실인척 하면서 상상을 썼더군요. 그리고, 창씨개명 첫번째는 자진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두번째 서부터 자진? 좀 희극적입니다. 백과사전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아, 그리고, 일본이름도, 불완전한 일본식과 완전한 일본식이 있었군요(웃음). 무조건 일만 있으면 좌파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중립적 시각이면, 이런 증명도 안된일을 마치 사실인양 올릴수없습니다. 마치, 만화 보고, 유언비어 올리는 그런식의 역사왜곡 그만 하시길 바랍니다. 단순한 어거지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목격자가 없는데도 그가 청와대에서 일본군복을 종종 입었다고 하는것은 창작소설 수준입니다. (이의 제기한이, - bkmmm)
토론의 내용과 상관없이 "역겹다"와 같은 인신공격적인 태도는 차단의 소지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4일 (월) 15:56 (KST)답변
쬐끔 황당하네요. 본인께서 "좌파들이" 운운하시면서 해당 내용을 말씀하시길래 해당 내용 중 이러한 내용은 "좌파들이" 주장하는게 아니라 조갑제가 말했던 거다, 해서 말씀드린겁니다. 혈서 이야기는 제가 쓴게 아닙니다. 일본이름이 아니라 정확히는 창씨에 의한 성씨의 부류입니다. 백과사전에서도 "한국인들의 창씨 경향은 아주 왜식으로 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개는 자기의 관향(貫鄕)을 땄으며"라고 지칭함으로써 속칭 "왜식" 창씨와 한국식 창씨를 구분합니다. 위에서 칭한 첫번째 창씨, 즉 "다카키" 창씨는 당시에 구미 상모동 지역의 박씨 일가가 전부 다카키 씨로 바꾸었습니다. 《日本陸海軍総合事典》에서 또한 오카모토 미노루로 확인 됩니다. 주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기록이 계속 나오고 연구가 나오는데도, "왜식과 조선식"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박정희는 왜식 창씨를 한 적이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주장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거지요. "왜식과 조선식"도 구분못하면서 무슨 훼손에 왜곡을 논합니까. 처음 시작부터 좌파들의 유언비어 운운해놓고는 일만 있으면 좌파라고 하는게 아니라니 황당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만화보고 유언비어를 올린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만화 박정희"를 염두에 두신 모양인데, "만화 박정희" 이전에도 해당 사실을 지적한 경우는 많습니다. 중립적 시각 아래에 기술된 것이므로 저러한 표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 중립적 시각때문에 저만큼 기술된 것이 아닙니다. --천어 2006년 12월 24일 (월) 19:56 (KST)답변
  • 황당하다니요? 황당한것은 오히려 저입니다. 여순사건에 대해 연행된일에 대해서, 황당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거든요. 그러나, 혈서는 증명된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백과사전에 올려야 할까요? 그리고, 창씨개명이 어느것은 일본식이고 조선식이라는것은 너무 터무니 없습니다. 일본식이면, 친일파고, 조선식이면 친일파가 아니라는것은 유치하다 못해 너무나도 엉뚱한 겁니다. 게다가 증명 조차도 못했군요. 아무나 아무렇게나 주장하면, 백과사전에 써 넣을수가 있는건가요? 이렇게 사실로 확인도 안되고, General Consensus 조차 없는 내용들을 마구 올리면, 이것은 분명한 명예회손이면서 왜곡입니다. 미국교포들이 미국와서 이름을 미국이름으로 바꾸는 분들이 많은데, 친미파이군요. 한 2번~3번 바꾸면, 미국사람이겠군요. 그리고, 바꿨는지도 증명 못하면서, 왜 바꿨는지도 상상력으로 소설을 써서 올리는군요. 그런식으로 본다면, 좌파들이 혐오하는 방응모씨는 애국자중 애국자 입니다. 창씨개명을 안했거든요. 어쨌든, 마음데로 하십시요. 어짜피 저는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편집은 당신네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맘데로 하십시요. 그리고, 누가 뭐라고 또 유언비어식 주장하면 사실인척하면서 반론까지 꾸며가면서 올리기 바랍니다. 실망했습니다. - bkmmm
  • 도요다 Toyota (豊田)라는 일본이름에 대하여: Gksdnf1999 님께.. 또 올립니다. 님은 창씨개명 이름을 한국식(?) 일본이름 과 일본식(?)일본이름 으로 구분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둘다 일본식(?) 이던데, 구분법이 좀 그렇네요. 바꿨다고 예전에 주장한 분이 장준하 라고 알고있는데, 그분도 창씨개명을 했다고 하네요. 난 한번했는데, 넌 두번해서 (증거도 없지만) 친일파라고 주장하는것은 너무 허망합니다. 아무튼간에, 도요다 (豊田) 라는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 아에 일본인 이름입니다. 일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한국인 정치가도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분들은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건 아닐겁니다. 근거없는 낭설을 가지고 억지로 accuse 하면서, 창작 소설쓰는것 보다, 오직 밝혀진 진실만 쓰고, 나머지는 독자가 판단하게 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대는 접었습니다. - bkmmm
논점을 파악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日本陸海軍総合事典》에서 "또한" 오카모토 미노루로 확인 됨.
  • 밀양박씨 일가는 "다카키(高木)"로 창씨를 하였는데, 박정희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 되었음. (그리고 본문에는 저 내용이 친일을 나타낸다고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 도요다 씨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김대중씨의 도요다 다이츄를 지칭하신것 같은데, 언급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내용과 관계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이름 그대로 쓴 정치인이나 장준하 선생의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 맨 처음에 "좌파들의 유언비어"라고 제목을 쓰셨기에 당신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일명 "좌파"들의 유언비어가 아니라고 제일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이건 "우파들의 유언비어"라고 칭해야겠지요.
  • 혈서에 관한 건은 "가장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조갑제가 증언으로 수록한 이야기입니다.
  • 이름을 바꾸는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적인 사고하에서 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한국인이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이 틀리는 맞춤법이 "훼손"같습니다. "회손"이 아닙니다.
  • 기왕이면 중간에 영어는 쓰지말아 주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입니다. 영어실력이 일천하여 선생의 말씀을 곡해할까 약간 걱정이 있습니다.
--천어 2006년 12월 25일 (화) 15:52 (KST)답변
  • 증명되지 않은설을 "논란" 이란 식으로 올려가면서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이같은 사소한 일까지 "논란" 으로 몬다는것을 보면, 박정희를 친일파로 어떻게 해서든 몰아봐야겠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절망적 행동으로까지 보여집니다. 박정희가 하면 친일이고, 남들이 하면 괜찬다는 식의 태도는 자신도 모르게 중립적시각에서 벗어나게 하는겁니다.
  • 그리고, 만약에 우파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면, 당연히 "우파들의 유언비어" 라는 식으로 제목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 목격자도 없고, 증명도 안됐는데,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일본군복을 입고 다녔다는것은 명백한 유언비어, 낭설, 더나아가 명예훼손입니다. 이글은 님이 단게 아니겠지요.
  • 몇번을 말해야 알아들을지 모르겠네요. 왜 명확한 증명도 없이 올리죠? 최근 박정희 전기를 쓴 어느저자는 그게 확인이 안되어 자신의 책에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자기가 쓴글에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고향식으로 창씨개명하면 한국식(?) 일본이름이고, 아니면 일본식(?)이란 기준은 뭔가요? 일본이름을 일본식이네, 조선식이네 하는것도 참으로 처량하게 보입니다.
  • 그가 만약에 바꿨다면, 왜 바꿨는지도 억지추측한글 ("조선인 냄새가 난다며") 을 명색이 백과사전인데 여기에 올렸다는것은 명예훼손으로 보여집니다.
  • 논란이 있으면, 다른 사이트에서 토론을 하던가 하고, 백과사전은 백과사전 답게 (General Consensus) 에 만족하거나, 증명된 사실만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영어를 사용하고 안하고는 개인 취향입니다. 그렇다면, 관향같은 한자표현은 그만 해 주십시요. 죄송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중학교밖에 안나와서 한글이 그 수준입니다. - bkmmm
  • 관향같은 한자표현이 아니라, 관향 자체가 우리말입니다. 貫鄕으로 쓰지도 않았습니다만. "일제시대에 태어난 분들은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건 아닐겁니다"라고 하시길래 창씨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이지, 한국식이 잘했네 일본식이 잘했네가 아닙니다. 창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만약에 우파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면, 당연히 "우파들의 유언비어" 라는 식으로 제목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시면서 "좌파들의 유언비어"라고 쓰셨으니 황당하네요.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는 어떻게든 안몰아도 친일파입니다. 이 사항은 사용자토론에 쓰시는걸 권장합니다.)--천어 2006년 12월 26일 (화) 01:45 (KST)답변
  • 고정관념이 심한것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박정희 혐오병을 들어내는군요. 일방적이고 그릇된 시각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구체적 증거도 못데면서 "안몰아도" 친일파라는 비상식적인 말 말고, 그가 친일파라는 근거를 명확하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요즘에, 국회의원들중 많은 이들이 정치적인 적이라고 친일파 사냥 하다가 자신이 오히려 망신 당한 일이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배우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싫어한다고, 감정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소설을 퍼가면서 명예훼손하는것은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문 문서의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언젠가 책임지길 바라겠습니다. 허위소설유포를 누군가가 보겠지요. - bkmmm
그럼 한 번 증명해 보십시오. 저는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믿습니다. 그의 딸 박근혜도 사실 친일파의 후손입니다. 저는 박정희 문서는 훼손 안하지만,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루스 2006년 12월 26일 (화) 12:13 (KST)답변
믿는것은 자유이고, 착각도 자유입니다. 그냥 그렇게 살기 바랍니다. 문제는 자신이 믿는것을 사실인것 처럼 남들에게 주정하는 버릇입니다. and, I really appreciate you people for proving my point. :) - bkmmm

위키백과의 문서에는 사실이면 적고, 그렇지 않으면 적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적고, 아니면 안 적는 것입니다. 저는 ‘친일파’라는 말 자체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단체가 있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단체가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렇게 적어주는 것이 중립적 시각을 지키는 길입니다. 여기에 사학자들의 주장과 증거가 뒷받침되면 더 좋겠죠. --Puzzlet Chung 2006년 12월 26일 (화) 12:28 (KST)답변

물론입니다. 사실만 적으면 됩니다. 문제는 두번째 창씨개명은 증거도 없고, 사실도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마치 박정희 생각을 자신이 아는것처럼, 소설을 써가면서 적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되는겁니다. 물론, 무슨 사설을 쓴다, 소설을 쓴다,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위키사전은 명색이 사전입니다. (물론, 저는 이걸 경험하고는 이제는 사전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낙서일뿐이지..) 그리고 그가 친일파라면, 누가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겠죠? 그리고,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단체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 주장을 그들의 주장데로 올려야겠죠? 또한, 청와대를 일본군복입고 거늘고, 어쩌구 하는식은 목격자도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아무리 사자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소문가지고, 그게 사실인척하면서 반론까지 그럴듯하게 소설을 쓰니 문제가 되고, 명예훼손이 되는겁니다. 여기오는것도 지겹네요. 본문도 못고치고 변론도 못달게 하면서 무슨 중립적 시각인지? - bkmmm

박정희와 군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이 "오카모토 미노루"를 증언하고,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에서 "박정희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오는 데 자꾸 증거가 없다고 하시니 곤란합니다. 선생께서는 박정희가 "내가 이리 창씨를 했다"고 증언해야만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습니다. 박정희 혐오병 운운하시는데 중간에 있는 내용은 다 빼고 마지막의 괄호안의 문구에만 신경쓰시니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천어 2006년 12월 26일 (수) 18:16 (KST)답변
  • 누가 그렇게 증언 하던가요? 무슨 삐라같은것을 인용하는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부류들의 주장은 대부분 박정희 혐오자들과 그것을 인용한것 기사(?) 뿐입니다. 그래서, 의심이 가는겁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만든 사전은 믿을만한가봐요? 그게 사전에 나왔다고, 누가 주장하는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인용해서 기사쓴 사람은 말고요). 또한, 거기에 박정희와 동일인이라고 진짜로 나왔습니까? 얼마전 실록 군인박정희라는 책을 쓴 정운현씨는 두번째 창씨개명은 어떤 문서로도 증명이 안되어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우현씨 또한, 박정희를 아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이 저자가 증명 못한일을 추가 반론으로 써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관련인물 100명이나 인터뷰한 사람이 증명을 못한다는데, 그것도 박정희 비판론자가 말입니다...
  • 그리고, 이런 창씨개명을 두번 바꿨다 라는 것은, 형식적인것으로 아무런 문제가 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소설을 쓴겁니다. 누가, "도요다" 라고 창씨개명한 정치가를 보고 "그냥 첨부터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위해서 그렇게 했다"... 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중립적 시각은 지켜줘야지요. 참고: http://www.khistory.or.kr/book/read.asp?num=9&page=1 - bkmmm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1:58 (KST)답변

이런 식의 논쟁은 감정적이면서 끝도 없어보이는데, 그냥 각자 근거가 있는 사실을 편집해서 넣고 출처를 달면 안될까요? 만약 출처가 의심스럽다면 "사실"이라는 말보다 어느측에서 "주장"한다고 쓰면 되고요. -- 클스 2007년 2월 8일 (목) 00:33 (KST)답변

문제는 좌파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근거가 없고, 그냥 "이러이러 하더라" 라는 내용입니다. 그런거를 일일히 반박하나요? 누가 어디서 어느 짓을 하더라...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출처를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주장" 한다라는것을 백과사전에, 그것도 한 인물기술에 넣는다는것은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누가 주장하면, 근거를 말해야지요. (bkmmm)

좌파들의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논란" 이란 식으로 올린것은 객관성이 하나도 없고, 근거도 없기에 삭제합니다. (bkmmm)

근거는 있지만 bkmmm 님이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좌파"이기에 그가 친일파라고 가치판단을 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이 주장을 쓰고,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였음에도, 그 주장이 객관성도 없고, 또한 근거도 없다고 말씀하시면 그 자체가 "가치중립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중립적 시각"이지도 않습니다. 남이 쓴 주장과 그 근거에 대해서 논증을 하지 않고 단순히 말로만 객관성이 없다느니 근거가 없다느니 하는 말은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8일 (일) 00:01 (KST)답변
KST 님의 말씀이 더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Burden of Proof 는 항상 Accuse 하는 사람에게 있는것입니다. (bkmmm)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되 있네요.(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5일 발간) 파일:Okamoto.jpg--Shin mincheol 2007년 5월 13일 (월) 16:51 (KST)답변
그림이 안보이네요. 로그인하지말고 볼수있게 해주십시요. bkmmm

박정희를 증오하는 측이 좌파라고 뭉뜽그리기엔 부적합해 보입니다. 박정희를 싫어하던 계층들 중에는 미국에 사대주의적일 만큼 친미적 민주주의자들, 에릭 홉스붐이나 노암 촘스키류의 논리를 무조건 맹추종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좌파라기보다는 좌파 및 자유주의자나 친미적 민주주의자들의 시각이 아닐까요? --Antinobba 2007년 6월 6일 (일) 12:21 (KST)답변

민족해방 타령하던 애들이나 극좌파들 중에 있을수 있겠지만, 박정희가 남로당을 배신, 탈당한 경력이 있는데 그른 경력때문에 감정이 섞인 평가는 하지 않는지 박정희 문제는 지금 속단하기 보다는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해 다시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좌파와 탈민족주의자들의 시각 정도가 적합할것 같습니다. 박정희라는 한사람에 대해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많은 지금으로서 어떻게 속단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못하다고 생각되네요. --Antinobba 2007년 6월 6일 (일) 12:23 (KST)답변

외환위기 이후의 평가에 대해

그러나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이후,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시켰고, 이렇게 성장한 대기업과의 정경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위의 본문을 보면 외환위기의 원인을 말그대로 아주 먼 곳에서 찾는 듯 합니다. 재벌이 있기전에 사실 한국에는 외화라는 것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경제성장이 없었으면 외환시장도 없고 외환위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의 외환시장도 없었고 외환위기도 없었겠죠.

좀 더 설명을 추가하거나 범위를 좁혀 서술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부실기업의 처리에 있어서 시장의 판단과 어긋나게 대한민국 정부가 부실기업을 보증하므로서 대한민국 자체의 신용도가 낮아졌다라던가 또는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을 해결할 대안을 가지지 못하였다던가 또는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환율을 방어하려다가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라던가. 이런 식의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독재국가나 정경유착이 있는 나라에서도 외환관리를 잘하고 외환위기를 겪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한국재벌의 총체적 부실'이라지만 살아남은 재벌도 꽤 있고요. --diabetes333

외환위기가 박정희가 위발했다는 식의 글은 뺍니다. 어거지 주장은 하지 말고, 사실만 적어야 합니다. 만약 15년 전 사망한분을, 그후 대통령 3명이 통치하고 나서, 일어난 사건에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주장이 없지요. 오직 사실만 씁시다. -bkmmm

하지만 IMF 산하의 아시아개발기금을 받아 쓴 적은 있습니다. 중립적이라면 이 사실도 적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시아개발기금은 IMF와는 다른 기구입니다. 물론 그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만... --Knight2000 2007년 4월 8일 (일) 00:05 (KST)답변
그런것은 IMF 에 관한 문서에 올리세요. 괜히 그 사태 15년 전에 서거한분 붙잡지 말고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태조 이성계 잘못이라고 하는것도 과히 논리적 비약은 아닙니다. 이성계가 없었다면, 조선도, IMF 도 없었겠지요? 억지주장에 매달리는것을 보면, 조금 어이가 없네요. -bkmmm
외환위기의 근본 원인이 박정희식 개발 모델에 있다는 입장은 존재해왔습니다.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견해가 있었다면 적어주는 겁니다. 어떤 견해도 notability를 획득하면 언제든 적을 수 있고요--Hun99 2007년 5월 12일 (일) 16:39 (KST)답변
위키백과의 중립성과 논리 전개의 중립성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논리 전개에서는 가치중립을 말하지만, 위키백과에서는 기술의 균등함을 말할 뿐입니다. --Knight2000 2007년 5월 13일 (일) 13:02 (KST)답변
박정희정권부터 지속되어온 관치금융이 외환위기의 주 원인 중 하나입니다. 정설이구요. 난데없이 이성계가 왜 나옵니까? --Shin mincheol 2007년 5월 13일 (월) 17:10 (KST)답변
박정권 부터라니요? 그럼 이승만 대통령 시절은 그렇게 깨끗했나보네요. 누구누구 부터..라는 말을 쓰면서 억지로 박대통령을 가져다 붙이니, 이성계가 나올만 합니다. 단군시절부터 라는 말이 안나온게 다행인줄 알기바랍니다. 그리고, 소위 민주화 시절인 지금은 어떤가요? 억지논리로 누구를 탓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함정에 빠지기 말기를.. bkmmm

Bag Jeongheui did three great evilness

Firstly He was a dictator and killed lots of people without any mercy.

Secondly He was an invador of Vietnam and lots of Vietnamese were killed or raped by brutal Korean army soldiers.

Finally He was a real chinilpa.He said to Ishihara Shintaro that he thanks Japan Empire for colonization of Korea.It is true and Ishihara used this episode to justify Japanese occupation of Korea.222.225.181.227 2007년 5월 19일 (일) 23:19 (KST)답변

Bag Jeongheui is a dictator for Korea, invador for Vietnam, genocidor for Korean common people,and traitor for Korean people under colonial regime.222.225.181.227 2007년 5월 19일 (일) 23:33 (KST)답변

さすがに我慢ならぬ発言ですな。ブロックも検討する必要あり。----hyolee2♪/H.L.LEE 2007년 5월 20일 (일) 13:05 (KST)답변

>Mr.Hyolee2

Why do you think so? It is true that Bag Jeongheui is a dictator and killed lots of people without any mercy.He also sent army to Vietnam and the army killed lots of Vietnamese people and raped lots of Vietnamese girls without any mercy.

Do you want to defend these deeds on him?

Bag Jeongheui is in fact a genocidor and a dictator and an invador.222.225.108.113 2007년 5월 20일 (월) 20:00 (KST)답변

>PLEASE, STOP LYING. IF HE KILLED ANYONE, NAME THEM AND LIST THE REASONS. DONT SPREAD THE LIES WITHOUT ANY BASE. >AND, IF AIDING YOUR ALLY IS AN INVASION, 16 OTHER UN NATIONS WHO HELPED OUT KOREA WERE INVADERS ACCORDING TO YOUR SCREWED UP LOGICS - bkmmmm

경제성장에 대한 다른 생각

일본은 1955년부터 15년간 연평균 15.1%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으로서 당시 세계가 놀랐으며, 이후 세계경제대국 2위에 도약, 서구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하자는 열기가 일어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동경의 기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음. 2000년 아시아 개발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시아 주요국의 연평균 GNP 증가율은 싱가포르가 10.1%로 가장 높았고 대만이 9.8%, 한국 9.5% 그리고 홍콩 8.6%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위 국가들의 실질경제성장률은 일본 10.4%이고 싱가포르는 8.5%, 대만 7.5%, 한국 6.8%, 홍콩은 6.2%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경제성장률은 전두환 시기에 더 높았습니다. 전두환 시기 경제성장률은 10.1%입니다. 단순한 경제성장의 업적만으로 따지자면 전두환 전 대통령 시기가 더 높습니다. 그것도 1979년~1982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한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도 우리에게 유리한 경제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북한은 어땟나요? 필리핀은 어땟고? 중국은? 일본/싱가포르/대만은 처음 시작부터 잘사는 사람이 많거나,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한국은 경험도, 자본도, 자원도 없고 거기에다 전쟁에 황폐화된 나라이지요. 대만, 싱가포르같은 도시국가들과 비교하는것은 무리입니다. 비교하려면 일본에 해야 하는데, 일본은 인적자원과 경험이 무척 풍부했던 나라이고 그 당시에는 한국보다 100년은 앞서갔던 나라입니다. 아시아포함 전세계에서 과거 50년동안 한국의 성장이 제일 놀라운 성장입니다. (bkmmm)

1948년 대한민국이 들어섰을 때 1인당 GNP는 50달러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물러날 무렵에는 200달러를 넘겼죠. 단순히 1953년부터 계산한다면, 박정희 시절보다더 더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5월 20일 (화) 21:25 (KST)답변
1961년 1인당 GNP가 87달러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PPP인가요?--Astroboy (토론) 2008년 5월 20일 (화) 21:38 (KST)답변
유신으로 제대로 탄압하기 전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죠.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원조받고, 북한은 세계무역시장에서 고립되고.. 5개년계획, 새마을운동은 북한에서도 비슷한 것을 한 것이고.. 박정희의 경제업적을 칭송하려면 김일성의 경제업적도 칭송해야하는 점이 있습니다. adidas (토론) 2008년 5월 20일 (화) 23:16 (KST)답변


1960년의 국민소득은 87$였습니다. 이승만이 물러날때 200$를 넘었다는 내용의 출처는 어딘지요? 그리고 1979년의 국민소득은 1,676$였습니다. 박정희가 처음 집권하던 1963년에 비해 20배가 성장했습니다. 당신의 출처로 비교해도 박정희 재임시의 경제성장율이 더 높았습니다만?
1960년의 국민소득은 87$라는 말은 맞지만, GNP가 87달러라는 말은 틀립니다. GDP가 87달러입니다. GDP=GNP-부채 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7월 26일 (토) 11:57 (KST)답변

경제성장에 대한 포괄적 의논도 필요할것 같습니다

토론을 본바 경제에 대한 평가도 경제성장이라고 하는 국한된 분야에만 치우쳐 있읍니다. 이를 테면 건강보험, 당시는 의료보험이라든지 아니면 농지개량조합, 철도, 도로항만 등 사외간접자본 시설에 대한 국영화 민영화 등 국영 내지는 국유화적 경제정책에 관련된 평가와 토론 자료제시 등도 포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00범 (토론) 2008년 7월 7일 (월) 16:07 (KST)답변

맞춤법에 맞게 "같읍니다"를 "같습니다"로 바꿈니다. --은종현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6:02 (KST)답변

박정희의 대한 비판

박정희 시대에 분명 경제발전이 이룩된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과거와 같은 왕조체제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민주공화국에서 무력을 동원한 쿠데타 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어렵기로서니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혁명공약 6번 째의 조항을 어기고 대통령에 출마했습니다. 당시 혼란이 심각했던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그저 조그마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할 때 중앙정보부, 경찰 등에 비밀리에 부정선거를 지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3선 개헌, 10월 유신 등을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 마음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독재정치를 자행합니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최소한이라도 보장해야 할 정부가 이를 저버렸고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납니다. 한편 그의 재직시 자신에게 광신적인 충성을 한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이 정권의 실세에서 밀려나자 반감을 품고 미국 의회에서 박정희를 비판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한국의 정보요원에게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재야의원 장준하가 의문사, 서울대 법대교수 최종길 피살사건, 인민혁명당이라는 허위 조작으로 8명이 무고로 처형, 사카린밀수사건, 한일국교수립 때 우리측의 지나친 양보, 월남민 이수근이 이중간첩이란 억울한 누명으로 사형,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주도, 지역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등(영·호남 이간질)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경제발전계획은 사실 자유당 말기에 계획이 수립됬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되지 못하였고 제2공화국에서도 신·구파 대립으로 인해 시급하게 이루지 못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모든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 것처럼 허위선전합니다. 경제발전은 그 당시 어느 정부라도 반드시 이룩해야 할 필연적인 과제였습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어도 언젠간은 이룩될 것이었습니다. 고로 박정희는 역사 앞에서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특히 반역을 도모하여 대통령을 하고 반대파를 제거, 독재를 자행했으니 부관참시를 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1.170.120.12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그래서, 님이 서술하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서술해야 되죠? 비판부분은 강화해서 서술해야 됩니까? .. 그리고, '부관참시'라는 말은 약간 도를 넘는 발언이신것 같습니다.--Kys951 2007년 9월 21일 (금) 23:18 (KST)답변
'그로부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 이 말은 그냥 나쁜 아이들을 혼내주던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그냥 아무나 다 때렸다는 말인데요? 이걸 어째서 영웅적인 급장으로 미화하는 건지? 그리고 '남로당 연루 장교들을 폭로'했다. 좌파를 자처하다 자신이 위험해지자 동료들을 배반하고 자기만 살았군요. 이런 사람이 과연 한 나라의 대통령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태일 열사가 어째서 불타죽었는지 그 배경에 대한것은 하나도 안나왔군요. 노동자가 분신시위를 할 정도로 일반 노동자들의 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이 의견을 2007년 11월 9일에 작성한 사용자는 64.180.79.32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위키백과는 모두 좌파, 박정희까들만 있나? 대중이 검색하는 사이트에 ~불구하고, 고문하였다 등의 미사여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집하는데는 어이가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명하는 것이 먼저일진대, 문장을 읽어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박정희를 친일 매국 앞잡이로 묘사하고 싶은 충동이 곳곳에 드러나 보인다.

--Stonepc 2008년 3월 12일 (수) 11:38 (KST)답변

그걸 누구든지 '사실'에 맞게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위키백과의 장점이지요. adidas (토론) 2008년 5월 19일 (월) 02:18 (KST)답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과감히 편집하시면 됩니다. 물론 신뢰있는 출처는 기본이고요.--Astroboy (토론) 2008년 5월 19일 (월) 02:23 (KST)답변
당신같이 막말만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제대로 문서를 꾸려갈 수 없는겁니다. 제대로 된 증거자료도 없이 무조건 '좌파박정희까'라니요? 218.232.194.146 (토론) 2008년 7월 7일 (월) 16:53 (KST)답변

같이 보기 항목

지나치게 많을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만 정리하는건 어떨까요 adidas (토론) 2008년 7월 10일 (목) 02:12 (KST)답변

많다고 꼭 삭제해야할까요? 저는 길게 남겨두는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토론을 거쳐 삭제하게 될경우에는 박정희 관련 같이 보기 목록과 같은 문서를 만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은종현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2:52 (KST)답변
아디다스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은종현님께서 제안하신 방식으로 추가로 문서를 만들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백:아님#웹목록과 비슷한 논리로 지나치게 많은 링크나 목록은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아들해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3:01 (KST)답변
핵심적인 몇개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본문에서 다루면 되니까요. adidas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5:19 (KST)답변
같이 보기를 핵심적인 항목만 남겨두고 정리하는 쪽에 공감합니다. --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5:32 (KST)답변
일단 정리해 두었습니다. adidas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6:01 (KST)답변

ref name=박기념관

본래 주석이 없어지면서 이 부분이 에러를 내고 있는데요, 박기념관을 ref name으로 하는 주석 다신 분께서 수정 바랍니다. adidas (토론) 2008년 8월 26일 (화) 05:21 (KST)답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 이름.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창씨개명했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근거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인데 여기의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표기 자체가 오류이다. 즉, 오카모토 미노루로 잘못 표기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자칭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에 대한 증오나 편견이 역사를 얼마나 오도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알려진 이름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수학시절의 6등6급 교유(기숙사 사감)에서 연유한다. 이 사람은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에서도 학생들을 진압한 공로로 공훈 정7급을 받아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아니다. 오카모토라는 성을 가진 대구사범학교 교유가 어쩌다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과정은 참으로 고소를 금치 못할 한편의 코미디이다.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개인을 마음대로 폄하하는 조희연이나 김삼웅같은 역사학자, 그들을 비판없이 따르는 군상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힌트를 제공한다. 박정희의 한자 '熙'는 일본어로 '히로시'로 읽힌다. '히로시'로 읽히는 다른 한자를 찾아보기 바란다. 박정희의 원래 창씨명은 高木正雄이다. 그런데 박정희에 대한 온갖 왜곡으로 범벅된 김형욱 회고록에는 高本正男으로 나온다. 여기에 朴正熙가 오카모토 미노루가 되는 코미디의 비밀이 있다.(토론의 방식을 몰라 편집화면에서 바로 입력하였습니다. 저는 Homo Mediocris입니다)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2:01 (KST)답변

조희연씨가 저서에 분명히 언급하고 있고, 참고도서에 수많은 일본어 저서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무슨 기록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조희연 교수가 충분히 신뢰할만한 저자인 만큼(블로그나 떠도는 풍문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님), 그 자체로 의문을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직접 조희연 교수에게 연락을 해서 물어보는 것이 적절한 대응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27일 (월) 18:37 (KST)답변

조희연 교수의 주장은 '연구'인데 반해 현재 오카모토 미노루에 관한 편집은 '독자연구'이므로 삭제하겠습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27일 (월) 18:38 (KST)답변
해당 부분을 찬반 양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게 고쳤습니다. 아울러 제가 파악하기로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만큼 많이 쓰이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날조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양쪽의 의견을 모두 제시하여, 독자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adidas (토론) 2008년 10월 28일 (화) 18:27 (KST)답변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2:01 (KST)답변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면,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을 백과사전에 올리기는 무리가 아닐까요 ...? 두번째 이름에 대해선 기사 정도로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기사에 인용된 듯한 책은 논문집이라고 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29일 (수) 21:50 (KST)답변
그 이후에 나온 기사에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2:01 (KST)답변
몇 가지 지적하자면, '교수'라는 직책이 전문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공이 아닌 이상,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공분야라면 매우 조심스러운 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당 주장의 순서를 보면, 1) 일본 언론가(1999) -> 2) 일본 대학출판사의 사전 (2005) -> 3) 사회학과 교수 (2007) 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세 주장이 독립적이라면 나름대로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위키백과는 출처만 확실하면 게재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의심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00:14 (KST)답변
일단 교수라는 직책은 전문성이 보장 되며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출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오마이뉴스 기사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지금의 '독자연구' 부분을 넣는 것은 '블로그'에 떠도는 말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02:52 (KST)답변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의 내용을 참조하면, 한 분야에서의 권위가 다른 분야에서의 신뢰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출처 제시'가 요구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주장되지 않는 내용이라면 삭제 대상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창씨개명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06:48 (KST)답변
어떤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어떤 말이 있었다 정도가 적합할텐데 특정한 가치관을 가진 사용자들에 의한 상습적인 문서훼손과 반달행위가 계속되고, 일부 박정희에 대한 감정적 사용자들에 의해 편파적으로 편집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창씨개명도 사건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규명되지 않은 하나의 설 아닙니까? - 100범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5:15 (KST)답변
비전공자의 주장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의 경우도 저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해당 내용은 장황한 내용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간단한 언급 정도만 남겨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7:47 (KST)답변
애초에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하나의 설'을 마치 정설인양 주내용으로 편집하는 게재자의 주관적인 편집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애초에 게재자분이 객관적으로 편집을 하셨다면 제가 굳이 저런 부분을 추가할 이유도 없었겠죠? 편집방향을 객관적으로 하시면 해결될 문제를 왜 이렇게 고집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kbr0706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7:53 (KST)답변
비전공자의 주장이라서 일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똑같은 근거로 문명자나 조희연의 주장도 받아들일수 없는 겁니다. 그들이 박정희 생존당시에 살았읍니까?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창씨개명하였다는 출처를 그들의 책에 댔읍니까? -100범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8:53 (KST)답변
토론 내용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23:09 (KST)답변
그러한 문제는 당사자에 맡길 수 밖에는 없습니다. 위키백과에는 편집자의 성향을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습니다. 일단, 본 문서에 대한 토론은 마무리된 듯하니, 비중을 고려하면서 편집하면 될 듯합니다. (누구나 가치 판단의 오류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8:03 (KST)답변
 의견 편집방향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먼저 주장된 학설이나 먼저 발표된 내용이 좀 더 객관적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중에 주장된 내용은 앞서 주장된 내용을 반박하는 형식이 많습니다. 현재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 이름은 독자 연구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저명성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박정희 연구에 대해 전문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는 부류는 우선 역사학자이며, 정치학자(정치사학자 등 포함), 사회학자 등도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사회학 전공인 조희연 교수는 충분히 전문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8:21 (KST)답변
좀 더 넓게 본다면, 창씨개명을 제도로 보아 법학자도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고, 법학에 대해 사회학자(사회학 법과 전공 등)도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전문성이 의외로 넓게 적용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8:24 (KST)답변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출처에 보다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제시했듯이, 이 경우는 하나의 잘못된 정보가 전파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들을 무색하게 하는 문서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 판단할 내용이 아닌 만큼, '~한 주장이 있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거가 되는 문서도 없는 주장에 큰 비중을 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8:28 (KST)답변

제가 애초에 지적한 것은 처음에 kbr님이 '독자연구'로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근거가 없다'고 단정짓는 표현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오카모토 미노루 설의 비중이 낮으면 낮게 편집하면 그만입니다. 왜 특정 사용자가 마음대로 '독자연구'를 해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까? 특정 사용자가 무엇을 근거로 언론에 난 사실과 사회학 교수의 주장을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남의 정치성향을 의심 + 간접적 공격까지 하고 있습니다(제가 언제 kbr님과 100범님의 정치 성향 자체를 문제삼은 적 있었나요?). 저는 박정희 무지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연구'로 박정희에 대한 악의적인 편집을 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독자연구'로 박정희를 옹호하는 편집을 시작하신 것이 누구인가요? 제발 박정희에 대한 '기존의 연구'만을 참조하여 편집해 주시길 바랍니다. 본인의 '독자연구'는 블로그로 충분합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23:25 (KST)답변

애초에 [1] 이런 편집은 자제 바랍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23:27 (KST)답변
제가 보기엔, 아디다스님이 약간 부적절한 반응을 하신 것 같네요. 뭐뭐라는 설은 근거가 없다. 이렇게 서술하신 것을 그냥 실수로 보아주시고, 반면에, 뭐뭐라는 설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문장을 좀 고쳐주시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던 것 같네요. 그쵸? :) kbr님의 독자연구는 아닌거 같은데 말이죠. 다만, 남의 글을 인용하면서, 백과사전에 맞게 말을 좀 고쳐주셨어야 했다고 보입니다만. -- WonRyong (토론) 2008년 11월 1일 (토) 08:37 (KST)답변
편집 내용을 보세요. 애초에 독자연구라서 삭제했더니 저를 박정희를 까내리려고 안달난 사람으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저 편집이 독자연구가 아니라면 근거만 갖춰서 주장하면 여느 블로그의 주장을 담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됩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1월 1일 (토) 12:40 (KST)답변

저도 Adidas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이 내용이 삭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단 여론 조사는 근거가 있지만, 그 여론 조사가 박정희가 "완전한 일본식 이름을 추구" 하지 않았다는 관련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하지 않다고 해서 일본식 이름이 아닌 겄은 아니니까요. 세계일보의 기사만으로도 박정희가 완전한 일본식 이름을 추구하려 오카모토 미노루 를 했다는 주장은 위키백과에 올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yhpdoit (토론) 2008년 11월 3일 (월) 16:04 (KST)답변

언급할 필요성이 있을 지는 몰라도, 저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분량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jtm71 (토론) 2009년 1월 4일 (일) 21:59 (KST)답변
애초에는 조희연의 저서를 근거로 들어 한두줄 정도로 서술한 것인데, 그에 대한 반박 내용이 덧붙여져서 지금처럼 길어진 것입니다. 사실 잘 쓰이지도 않는 이름이고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월 4일 (일) 22:47 (KST)답변

최소한 출처는 있어야 하지 않나요?

박정희는 최초에 민족주의적이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이 있으며, 만주군 장교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밝혀진 것은 없다. 광복 직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향을 선언하였는데 진정한 전향인가 여부도 밝혀진 것은 없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미국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며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

라는 문장에서 전혀 출처가 없습니다. 출처 틀만 달면 되겠지만, 현재 박정희는 문서는 사실관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문서로 3개월 가량 기다릴 겨를이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이 부분을 퍼가서 마치 현재까지 박정희가 진정한 전향이 아니기 때문에 빨--라는 ‘색깔론’을 덧씌우고 있습니다. 확실한 출처가 있거나 아니면 수정을 하거나 혹은 삭제 처리를 해야하는게 아닐까요? 박승현 (토론) 2008년 11월 18일 (화) 21:31 (KST)답변

남로당 활동 등은 문서의 다른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최초에 민족주의 어쩌구 하는 부분도 문서에 어느정도 나와 있는 것 같고요. 다만 미국이 박정희를 의심한 부분, 사상공세를 당한 부분은 출처가 없어 보이네요. adidas (토론) 2009년 1월 4일 (일) 22:48 (KST)답변
이 내용들은 아주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김형욱 회고록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만, 지금 그 책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성자가 그 책을 참조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김형욱 회고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도 있습니다만.--WaffenSS (토론) 2009년 1월 8일 (목) 09:53 (KST)답변

박정희는 한국의 혁명가?

박정희 문서에 사용자:100범이 계속 분류:한국의 혁명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행 국사 교과서는 516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등 군부 세력의 정변으로 (개혁 정책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26쪽) 그 외에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도 516을 '쿠데타'로 표현하고 있음이 각종 언론보도에 나온 바 있습니다. 물론 박정희 본인과 박정희의 후계자들은 516을 '혁명'으로 불렀습니다. 박정희 point of view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국의 혁명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분류는 특정 시각을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adidas (토론) 2009년 1월 7일 (수) 19:51 (KST)답변

각종 헌법 교과서에도 혁명은 시민이 중심이 되는 것이라 말하고, 쿠테타는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에 의한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516은 이에 따르면 쿠테타이지 혁명이 아닙니다. --hun99 (토론) 2009년 1월 8일 (목) 12:08 (KST)답변
516은 분명히 군사 정변, 즉 프랑스어로 쿠데타로 명시되어 있고 국사 교과서에도 그리 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집단인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관점에서 본 그 "혁명"은 소수의 관점이지 다수의 관점이 아닙니다. -- 윤성현 (토론) 2009년 1월 8일 (목) 14:35 (KST)답변
516은 쿠데타지 절대 혁명이 아닙니다. --개마리 (토론) 2009년 1월 13일 (화) 20:16 (KST)답변

오카모토 미노루

본문 주석 중 오카모토 미노루에 관련된 한겨레나 오마이뉴스를 확인했다는 자료나 설명 부탁드립니다. --100범 (토론) 2009년 1월 16일 (금) 22:08 (KST)답변

오마이뉴스가 아니고 세계일보 뉴스로 일본백과사전에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되어있다는군요. 박정희의 일본식이름은 왜 두개였나 - 세계일보 2006.08.09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22:03 (KST)답변
일본에서 1990년대에 편찬한 백과사전하고 박정희가 군인으로 있을 당시의 병적기록부 중 어느쪽이 더 신뢰할수 있을까요?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굳이 일방적, 악의적으로 서술할 필요는 없지 않는지?? --100범 (토론) 2009년 2월 10일 (화) 12:02 (KST)답변
군인으로 있을 때의 병적기록부 기록을 봤으면 싶군요. 전해지는 기록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주군관학교에 있을 때는, 고향에서 박정희의 형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다카키 마사오'로 작성한 자료만 남아 있지요.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 혹은 《일본백과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기록돼 있다는 건 공식적인 확인이 있지만 말 입니다. YoungOne (토론) 2009년 2월 10일 (화) 13:15 (KST)답변
못보셨다구요? 오마이뉴스 정운현이 기사 퍼오지요. 정말 한번도 못보셨을까요? 박정희의 일본군 병적기록 60년만에 '햇빛' 오마이뉴스 2005-02-02 12:10자 기사, 손병관 기자, 정운현 자료 인용

-100범 (토론) 2009년 2월 11일 (수) 16:51 (KST)답변

아예 그림을 스냅샷해드리지요. 자 1944년까지 다카키마사오로 했고 호주는 다카키토히로라고 되어 있읍니다. -100범 (토론) 2009년 2월 11일 (수) 16:51 (KST)답변

<img src="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patrick21_209418_1[278805].jpg">

허경영, 박근혜 관련

허경영, 박근혜 관련 내용은 해당 항목에서 다루지 이것을 박정희 문서에 삽입하는 의도는? --100범 (토론) 2009년 1월 27일 (화) 19:17 (KST)답변

박정희의 사후 영향력과 박근혜는 큰 관련이 있고, 허경영은 스스로 '제2의 박정희'를 칭하고 있으므로 다룰 만한 필요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월 28일 (수) 00:54 (KST)답변
허경영이나 박근혜의 결과까지 박정희와 상관있던가요? --100범 (토론) 2009년 1월 28일 (수) 00:57 (KST)답변
허경영은 왜 지우시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2의 박정희 자칭은 물론, 공화당이라는 당명도 지키고 있으며, 법원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박정희의 비밀보좌관을 지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박정희와 큰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 확실하죠. 허경영 부분 삽입 = 박정희 비하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아닌지요? adidas (토론) 2009년 1월 28일 (수) 00:59 (KST)답변
박정희와 연관있는 정치인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월 28일 (수) 00:59 (KST)답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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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외국 언론 기관에, 미국 국회 의원들한테, 어느 학자들한테, 무슨 정치인들한테…, 그것도 사실을 사실대로 써서 보내면 좋겠는데 전혀 허위 날조된 그런 사실을 가지고 우리 정부가 마치 무슨 인권을 크게 침해하는 것처럼 이렇게 선전을 해서 외국에서 어떤 세력을 끌어들여 가지고 우리 정부에다가 압력을 넣어서 그 사람들을 석방시키겠다 하는,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데 대해서 나는 지극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솔직이 말하면 이것은 사대주의 근성입니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좋지만, 우리 나라가 하나의 자주 독립 국가로서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뻗어 나가자면, 우선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사대주의 근성을 뽑아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민주주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또 몇 마디 언급을 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2차 대전 후 이 지구상에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많이 생겼습니다. 내가 알기에도 한국 전쟁 당시 유엔 회원국이 한 50여 개 국이었는데 지금 현재는130여 개 국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에 공산주의 국가를 빼놓고 기타 서방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서구 민주주의를 자기 나라에 받아들여서 시행을 해 보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것을 직수입해서 성공해 가지고 지금 잘 해 나가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몇 개나 되느냐, 여러분들 한 번 꼽아 보셔요. 지도를 내놓고 보십시오.

동남 아시아든지 중남미라든지 아프리카라든지…, 내가 알기로는 거의 한 번씩 다 홍역을 치르고 중병을 앓았어요. 지금도 민주주의 소화 불량증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는 나라가 한두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조금 잘 해 나가는 나라는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되, 자기 나라의 실정을 감안해서 가급적 실정에 알맞게끔 이것을 잘 조화해 나간 나라는 비교적 잘 하고, 그렇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직수입을 한 나라는 열이면 열 전부 다 민주주의 병에 한 번씩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민주주의 제도라고 하는 것도 민주주의가 그 나라에서 자랄 수 있는 토양과 풍토가 조성되어야만 자라나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그냥 갖다 심어 가지고는 잘 자라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우리 한국 내에 있지만 제주도에 있는 밀감나무를 서울 근처에 심어 보아도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같은 국내라도, 서울에 갖다 놓고 밀감나무가 자라나게 하려면 특별히 防風을 잘 한다든지, 온실을 만든다든지… 무언가 제주도하고 비슷한 토양이나 기후나 이런 조건을 갖추어 주어야지, 서울의 영하 20도가 되는 데다 그냥 갖다 놓았다면 당장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이라도 자기 체질에 맞지 않으면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좀 쑥스러운 얘기입니다마는, 나는 지금도 목장 우유라든지 끓이지 않은 우유를 먹지 못합니다. 왜냐?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깡보리밥에 깍두기를 먹고 자란 뱃속이 되어서 그런지 목장 우유라든지 생 우유는 맞지 않아 먹으면 배탈이 나고 설사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집 아이들은 잘 먹습니다. 어릴 때부터 먹어서 훈련을 시켰으니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해방 후에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가지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별별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자유당 때 헌법, 민주당 때 헌법, 또 5·16후에 민정 이후 제3공화국 헌법, 다해 보았지만 우리 나라의 특수 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우리의 풍토에 잘 맞도록 조정을 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자라날 수 없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지 않았습니까?

일부에서 유신 헌법을 철폐하고 옛날 헌법으로 다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옛날 상태로 돌아가서 나라가 잘 되고 국민들이 모두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겠느냐…, 몇몇 정치인들은 좋아할 것입니다. 옛날 그런 헌법 체제로 돌아가면 정치인 만능 시대가 되고 그들이 활개를 치고,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을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것이 국민 전체의 행복이 되고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 사람들은 우리 나라 건국 이후에 어느 헌법이 제일 좋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제2공화국 헌법이 제일 좋았다고 그래요, 즉 민주당 때의 헌법이지요. 그것이 자유 황금 시대라 그 말이에요. 그런데, 요즈음 여러분들이 그 시대의 기록을 보십시오. 내가 본 어떤 기록에는, 어떤 날은 하루에 전국에서 데모가 1천 여 건이나 일어났어요. 국민 학교 아동들까지도 거리에 나와서 데모를 하고, 이러한 무질서, 자유를 빙자한 방종, 혼란, 비능률, 또 선거 때만 하더라도 과거의 그 선거 제도를 우리가 다 여러 번 겪은 것 아닙니까. 얼마나 거기에서 많은 돈이 낭비되고, 사회적인 혼란, 국민 도의의 타락, 또 그 병폐라는 것은 일일이 우리가 열거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고 지금 체제를 철폐해 버리고 그런 낭비와 혼란을 되풀이하면서도 자주 국방도 잘 되고, 자립 경제도 잘 되고, 민주주의도 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병폐를 깨끗이 일소하고 국민의 모든 능력을 한 곳에 집중해서 국력의 가속화를 해 보자는 것이 유신 체제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도 서서히, 착실히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아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현행 헌법은 고쳐서는 안 되겠다, 유신 헌법을 철폐하고 옛날 헌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나라 망하는 길이다, 나는 이렇게 단언하여 얘기하고 싶습니다(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5449&C_CC=AC) -Sage-I (토론) 2009년 2월 8일 (일) 13:42 (KST)답변

위 전제한 글은 박정희 대통령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토론 문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케골 (토론) 2009년 4월 1일 (수) 17:24 (KST)답변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문서와의 균형

박정희 문서에는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때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에 관련한 기술들이 상당히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내용들이 다수 들어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제3공화국, 제4공화국으로 일부 내용을 옮기고, 박정희 문서에는 박정희가 사적(私的)으로 행한 내용 위주로 기술하고,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문서를 "참조" 혹은 "본문"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Nichetas (토론) 2009년 2월 10일 (화) 13:42 (KST)답변

백범님

오카모토 미노루 관련 내용은 박정희의 청년기를 서술하는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왜 똑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18 (KST)답변

아까 어떤 사용자분이 시비를 거셨군요. 그 시비에 대한 증거자료로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Pudmaker님은 그 주석을 ref name로 주석을 정리하면 되지 왜 일방적인 삭제만 하시는지요? --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1 (KST)답변
아울러 박근혜를 왜 의도적으로 지우시는 지도 해명하시기 바랍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19 (KST)답변
연좌제이십니까? 이건 연좌제도 아니고 영향력에다 굳이 두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5.16을 혁명으로 보든 정변으로 보든 폭동으로 보든 그건 평가부분에 적합한 내용 아닙니까? 생물학적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굳이 박근혜를 박정희와 엮으려는 님의 의도가 더 수상하군요. --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1 (KST)답변
박근혜가 박정희와 무관한 인물이 아닌 이상, 일부러 지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연좌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닌가요? 백범님께서 예전부터 수차례 박근혜 관련 내용을 '일부러 지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3 (KST)답변
굳이 박근혜를 의도적으로 엮으려는 님도 딱히 이해가 되지 않읍니다. 김구이승만이나 김일성, 김대중 등 기타 여러 세대를 이어 정치하는 다른사람들도 자녀들과 그렇게 엮던가요? 다른 백과사전의 평가처럼 객관적으로는 못해도 개인적 감정을 반영하실 필요는 없으실텐데요? 계속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고 다른 사람들, 박근혜나 허경영을 박정희와 엮으시려고 하시는데, 이곳은 개인블로그는 아니니 좀 중립성을 지켜주셨으면 하는데요. --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6 (KST)답변
평가 부분을 지우고 넣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사용자가 시비를 걸었다고 해서 같은 내용을 '중복 서술'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청년기' 부분에서 다뤄주세요. 그리고 김정일-김일성, 김영삼-김현철 등은 당연히 엮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발 감정적인 발언을 그만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이 시비를 걸었다며 '중복 서술'을 하거나, 백범님의 독자연구로 관련있는 정치인인 박근혜, 허경영 부분을 없앤다거나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8 (KST)답변
무슨 독자연구요? 있는 자료 갖다 대는게 독자연구라? 그럼 독자연구 아닌 기준좀 물읍시다. --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30 (KST)답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를 운영한 경력이 있고, 박정희의 고향에서 박정희 지지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박정희의 '친딸' 박근혜가 어째서 박정희랑 무관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박정희랑 박근혜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29 (KST)답변
그래서 마녀사냥이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박정희는 박정희고 박근혜는 박근혜입니다. Pudmaker님은 항상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던데 계속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을 계속 삽입하시는 것을 볼때 님이야말로 감정적으로 편집하는것 같읍니다. 박정희에 대한 어떤 안좋은 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31 (KST)답변
저는 박정희를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거의 부정적인 내용만 편집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을 다른 사용자들이 서술하고 있는데 굳이 제가 일부러 긍정적인 면을 서술할 이유는 없습니다. 위키백과의 중립성은 문서 전체에서 기능하는 것이지, 개별 사용자가 편집할 때마다 부정적인 것 한번, 긍정적인 것 한번 편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넣으면, 긍정적으로 보는 다른 사용자들이 균형이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보며, 아울러 여론 호도를 위해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근거 없이 제 판단만으로 편집한 부분은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36 (KST)답변
제가 감정이 있다고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무슨 감정이 있는 것처럼 감정적인 편집을 하는것처럼 몰고가시는 겁니까. 본인이 감정적으로 편집하는 것처럼 몰고가는 것이 더 의심스럽고, 게다가 다른 사용자가 시비를 걸어서 주석을 복사했으면 주석정리기능이 있는데 그것으로 정리하면 되는 문제고, 평가에 관련된 것은 평가로 올리고 뒤에 님이 박근혜 현재 활동을 삽입했으면 됐지 왜 계속 시비를 거시는지요? --100범 (토론) 2009년 4월 7일 (화) 18:39 (KST)답변

[2]

박정희의 경제파탄

박정희 시대 무역적자

박정희 정부때 무역적자가 233억 달러였다. 그리고 전두환 정부떄 59억달러 적자, 노태우 정부때 120억 달러적자 김영삼 정부때 150억달러 적자를 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때 무역흑자가 944달러 노무현 정부때 980억 달러였다.[1]


박정희 시대 외환위기

첫번째 외환위기는 1960년 1억 5천만 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1961년 약 2억 달러로 증가한다 그러나 1962년 외환보유고가 1억 6천만 달러 1963년 6월 외환보유고가 1억 3천만 달러로 줄어드면서 첫번째 외환위기가 시작되었다. 1964년 1억 2천 8백만까지 떨어지다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1억 달러를 받으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2]

두번째 외환위기는 1968년에 시작된다. 외환보유고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자 1972년 박정희 정부는 8.3 사채동결조치라는 꼼수적인 방법으로 극복했다.[3]

세번째 외환위기는 1973년에 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시작되었다. 1974년 나라가 부도났고, 시티은행과 체이스맨해튼 은행으로 부터 2억달러를 급히 대출하면서(점보론) 국가부도를 막았다. 이 대 오일 값이 폭등하면서 중화학 공업의 인기가 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이 때를 기회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엄청난 외채와 경상적자가 있었고, 훗날 1979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된다. 또 브라운 각서로 토대로 베트남 특수를 누렸고, 또 오일 쇼크로 떼돈을 번중동 국가들이 인력난을 겪고 있을때 부지런한 직원을 둔 한국 회사에 공사를 맡김으로써 중동 특수를 누려서 1974년 외환위기를 극복했다.[4]

네번째 외환위기는 1979년에 시작되었다.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 의하면, 기름보유고는 7일치 밖에 안남았으며 GNP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1979년에 시작된 외환위기는 YH공업이 폐업하면서 YH여공들이 집단 항의를 하였다. YH여공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커지면서 유신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10월 26일, 김재규 열사가 박정희를 쏘는 의거를 하므로써, 유신 정권은 종말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60억달러를 급히 구하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5]



경제성장률

박정희 정권은 해마다 약 7~8%대 경제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기간 동북아시아는 일본,마카오는 10%대 대만,홍콩은 9% 후반대 70년대 경제를 개방한 중국도 7~9%대 경제성장을 했다. 가장 환경이 비슷한 대만과 비교하면 연평균 7.5%대 경제성장을 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률은 대만보다 2.5%낮았고 8.3% 경제성장을 한 전두환은 대만보다 0.2%낮았고 4.4%대 경제성장을 한 김대중 정권의 경제성장률은 대만보다 1.3% 높았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 초기에는 동북아시아 유일 IMF구제금융 받은 나라였다. 박정희 정권박정희 정권때 유일하게 따라잡은 동북아시아 경제성장률은 불법국가인 북한이다.[6].

물가상승률

박정희 시대 물가가 평균 16.5%의 상승률을 보였다. 지난 10년 민주당정권에서 1998년을 제외해서 2~5%의 물가상승률과 대조적이다.[7]

-위에 어이없는 내용에 대해 비판: 민주당이 아무것도 없는데에서 이런 성장이 있었나? 민주당은 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존하는 우파 정당이다. 다 박정희 대통령이 쌓아놓은 것이 지금에 와서 이루어지는거지. 그리고 고도 성장때 인플레이션과 지금같은 시기의 인플레이션이 같냐?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8.235.142.178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 민주당은 최소한 외채 끌여들여 국가부도 시키지도 않았고, 돈 찍어내서 인위적으로 경제부양 시키지도 아니하였고, 저임금-저곡가 정책해서 농민, 노동자 안죽여도 경제성장 잘만했다. 평균 5% 최대 10.5$ 경제성장한 지난 10년정권 물가상승률과 비교해도 20% 가까이 물가상승한건 그만큼 경제 파탄이다.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02:23 (KST)답변

박정희 시대 부동산

이승만 정권때 연평균지가상승률이 21.6%였고 박정희는 33.1%, 전두환은 14.9%, 노태우는 17.7%, 김영삼 정권은 -1.2%, 김대중 정권은 -0.6%, 노무현 정권때는 4.5%였다. 불로소득은 이승만 정권때 0.514, 박정희는 326, 전두환은 368, 노태우는 926, 김영삼 정권때는 -106, 김대중 정권때는 -18, 노무현 정권때는 294다. 그러나 불로소득/생산소득 비율은 김영삼 정권때 -5.2%, 김대중 정권때 -0.6%, 노무현 정권때 9.3%, 전두환 정권때 68%, 이승만 정권때 43%, 노태우 정권때 약 100% 였으나 박정희 정권때는 248.8%였다. 부동산 거품시대 였다는 노무현 정권때와 비교해도 약 25배의 차이가 난다. [8]

[3] 이 자료는 추후에 더 보완될 것이고. 나중에 박정희때 조작된 자주국방에 대한 치적 대해서 서술할겁니다.--양심있는사람 (토론) 2009년 4월 11일 (토) 20:19 (KST)답변

프리메이슨과 무슨 관련이 있는거죠? 그리고 디씨인사이드 같은 것은 출처로 쓸 수 없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11일 (토) 23:35 (KST)답변
신뢰할 수 있는 출처 가 없는 내용이라면 위키백과의 누구든지 해당 내용을 지울 수 있을겁니다. --Enigma7 (토론하기) 2009년 4월 11일 (토) 23:49 (KST)답변
저건 디시인사이드가 아니고 유투브고, 거기에 SBS보도자료 있습니다. 가보지도 않고 딴지걸지 마시죠, 박사모씨???--김씨가문의사 (토론) 2009년 4월 12일 (일) 18:49 (KST)답변
논란이 될 부분은 지웠습니다. --김씨가문의사 (토론) 2009년 4월 12일 (일) 19:04 (KST)답변
다른 출처는 역사에서 찾으세요.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김씨가문의사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유튜브도 출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올려진 동영상은 저작권 위반 자료네요. (원출처가 제시된다면 출처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경우에도 사실이 아닌 하나의 주장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4월 12일 (일) 20:16 (KST)답변


저건 SBS자료입니다. 왜 허경영 말이나 어중이떠중이 떠도는 박사모 회원의 유언비어는 천명같이 받아들이면서 SBS같은 공신력 있는 보도는 왜 부정합니까???--김씨가문의사 (토론) 2009년 4월 14일 (화) 20:26 (KST)답변
sbs의 보도 내용은 sbs에서 찾으셔야지 유튜브에서 찾으시면 안되죠. 해당 출처는 저작권 위반자료입니다. sbs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찾아오세요.--Dllsgh1130 (토론) 2009년 4월 14일 (화) 20:29 (KST)답변
그건 유투브 사용

자주국방?? 안보노력??

박정희가 자주국방 했다??

그저 해양경찰이나 미사일 몇 개 쏴 올렸다고 그게 자주국방입니까??? 박정희가 5.16 반란을 일으켰을때 박정희가 주일미군이 불편하다며 이승만때 서울기준점으로 한 시간을 박정희가 도쿄기준점으로 했습니다. 시계 2개만 있으면 해결될 일을 박정희는 미군을 위해 시간까지 일본에 내어주었습니다. [4]설마 KBS도 부정하지도 않겠죠??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박정희가 인권탄압 멈추지 않으면 미군 철수한다고 했을때 박정희가 반대했습니다.(이건 위키백과 본문에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육군에 지나치게 중점을 두어서 어느 날 갑자기 미군철수하면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이 해안 봉쇄해도 이렇다 할 대책도 세우지 못합니다.(요것도 위키백과 본문에). 그리고 한일협정,독도밀약으로 동해 전체를 일본과 공동으로 하거나 아예 일본한테 주어서 많은 전략 영해를 잃었습니다. [5]--김씨가문의사 (토론) 2009년 4월 14일 (화) 20:43 (KST)답변

정확한 출처가 있는 내용은 본문에 기여해 주셔도 됩니다. 다만 기존의 문장들과 조화가 잘 이뤄져야겠죠?--Dllsgh1130 (토론) 2009년 4월 14일 (화) 20:46 (KST)답변
아, 문서가 보호되어 있었군요. 보호조치가 풀릴때까지는 토론방에 올려놓으셔야겠네요.--Dllsgh1130 (토론) 2009년 4월 14일 (화) 20:47 (KST)답변

박정희가 핵개발을 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했다??? 이휘소 박사님이 지하에서 통곡하십니다. 당시 무역수지 233억 달러 적자에 4번의 외환위기에 7일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기름에 1979년 역대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적자로 핵을 만들 돈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반 유신정권 했던 사람입니다. 미국이 줬던 탱크도 팔아넘긴 넘이 핵만들었다는 어처구니 없는소리가 박사모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군요--김씨가문의사 (토론) 2009년 4월 17일 (금) 19:12 (KST)....(추가)이휘소 박사님이 핵 개발했다는 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저자는 유족들에게 고소당했습니다.답변

증거를 대시죠. 카더라설만 장황하게 늘어놓지 마시고 --판델라 (토론) 2009년 5월 23일 (토) 15:24 (KST)답변

독재자

객관적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은 자기 힘으로 개헌을 하며 쿠테타를 일으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등, 독재자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항이 본문의 첫 문단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Didgogns (토론) 2009년 4월 27일 (월) 13:18 (KST)답변

동의합니다. 은종현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14:21 (KST)답변
상대방을 끌어내리면 다 독재자군요. ㅎㅎㅎ 그러니까 님들 말씀은 내생각을 강요하지 못해서 아쉽다 이거군요. --판델라 (토론) 2009년 5월 23일 (토) 15:23 (KST)답변
독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adidas (토론) 2009년 5월 23일 (토) 17:01 (KST)답변

박정희 대통령을 살인마라는 유언비어 퍼뜨리는 기독교인들

박정희 대통령이 시위하는 사람 죽였나? 당신들이 박정희 대통령때 안 살았다고 해서 마구 그를 근거 없이 비방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이 존경하는 이승만, 전두환 따위 살인마들한테는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말 안 쓰면서 박정희 대통령한테는 민주주의 탄압이라고 매도하나?

그리고 김영삼을 박정희 대통령하고 대적했다고 좋아하는 기독교인들 있는데

그건 김영삼이 친미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주 국방을 지향하던 박정희 대통령한테 대적했던거다.

마치 이명박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반대했기 때문에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의 농간하고 똑같은거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한테 반기든 인간들 대부분 전두환한테는 협조했다. 김영삼, 이명박 이런 인간들. 전두환은 기독교인이라서 그런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기업 위주 정책 비방하는 친북 기독교인들 많은데

박정희 대통령 정책으로 경제발전하고 있는 브라질, 중국은 뭐냐?

등신들아 박정희 대통령 정책 아니었으면 너거들 이렇게 먹고 살 수도 없어.

박정희 대통령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노무현이 그 시대 대통령했어봐라 나라 다 말아먹었지.

그리고 박정희 앞에 이승만 시절에 경제 정책 봤냐? 이승만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정책을 완수 하지 못 하고 돌아가신거야. 대기업 위주 정책들은 이후에 고치면 되는거고.

박정희 대통령 경제 정책이 몇 단계나 있는 줄 알기나 하냐? 아무대나 매도하는 친북 기독교인들아.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8.235.142.178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에휴 박정희 처럼 무식해서 어떡할려고

박정희 대통령이 시위하는 사람 죽였나? 당신들이 박정희 대통령때 안 살았다고 해서 마구 그를 근거 없이 비방해서는 안 된다.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말 안듣는 사람 다 죽였다.

당신들이 존경하는 이승만, 전두환 따위 살인마들한테는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말 안 쓰면서 박정희 대통령한테는 민주주의 탄압이라고 매도하나?

그리고 김영삼을 박정희 대통령하고 대적했다고 좋아하는 기독교인들 있는데

그건 김영삼이 친미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자주 국방을 지향하던 박정희 대통령한테 대적했던거다.

마치 이명박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반대했기 때문에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인들의 농간하고 똑같은거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한테 반기든 인간들 대부분 전두환한테는 협조했다. 김영삼, 이명박 이런 인간들. 전두환은 기독교인이라서 그런건가?

→ 기독교가 3선 개헌 지지성명 같은 것으로 박정희 밀어줬다. [6]

→ 박정희 싫어하는 사람중에 전두환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 되겠냐??

→ 그리고 이명박은 박정희 좋아한다. 생긴 것도 박정희같이 생겼고 하는 짓도 박정희 같이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기업 위주 정책 비방하는 친북 기독교인들 많은데

→ 같은 기간 중소기업 위주 정책한 대만, 일본은 더 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 정책으로 경제발전하고 있는 브라질, 중국은 뭐냐?

등신들아 박정희 대통령 정책 아니었으면 너거들 이렇게 먹고 살 수도 없어.

→ 공산주의자답게 박정희 하는 짓이 모택동 시절 중국이랑 비슷하군.

→ 박정희 아니었으면 더 잘 먹고 잘 살았다.

박정희 대통령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노무현이 그 시대 대통령했어봐라 나라 다 말아먹었지.

→ 박정희가 국가부도 내고 그 뒤 추가로 나라 말아먹은 이래 전두환 역시 저질 정책으로 나라 말아먹고

 그 뒤를 이은 김영삼 역시 IMF 일으켰지만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은 IMF 극복했다. 

그리고 박정희 앞에 이승만 시절에 경제 정책 봤냐? 이승만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아.

→ 박정희 앞에 이승만은 몰라도 제2공화국때 5년 경제개발정책, 국토종합개발 계획 세움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정책을 완수 하지 못 하고 돌아가신거야. 대기업 위주 정책들은 이후에 고치면 되는거고.

박정희 대통령 경제 정책이 몇 단계나 있는 줄 알기나 하냐? 아무대나 매도하는 친북 기독교인들아.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8.235.142.178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 19년 동안 안고친것은 앞으로도 고칠 가망이 없네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3일 (토) 20:59 (KST)답변

여성 편력 부분에 대해서

무조건 찬양하는 편집도 문제지만, 무조건 비하적인 편집도 문제라고 봅니다. 여성 편력 부분의 출처는 전체적으로 만화책을 출처로, ‘박정희는 모 연예인을 성폭행하고 납치하여 살해했다.’하는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아무런 논의 없이 삽입하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것도, 출처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 ‘만화 박정희’을 바탕으로 편집한 것 같은데, 같은 만화 박정희를 바탕으로 편집한 친일 부분도 볼 필요 있다고 봅니다.PSH (토론) 2009년 6월 12일 (금) 19:32 (KST)답변

만화책이라서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 근거없는 발생학적 오류인데요.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3일 (토) 21:17 (KST)답변
근거가 있습니다.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는 전문가 검토(peer review)를 거친 학술지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도서, 대학교 수준의 교과서, 평판 있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잡지, 정기간행물, 도서입니다. 통상적으로, 사실의 확인, 법적인 문제의 검토, 특정한 일에 대한 증거와 논의를 세밀하게 검토를 한 출처일 수록 더욱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학술적이고 상호검토된 정기간행물은 높이 평가되며, 이를 찾아볼 수 있는 역사나 의학, 과학 같은 분야의 경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됩니다. 이러한 분야의 출처로는 신뢰할 수 있는 비학술적인 출처도 사용될 수 있는데, 특히 이들이 높이 평가되는 주류 출판물인 경우에 그러합니다. 출처의 적절성은 늘 문맥의 영향을 받습니다. 출처마다 서로 주장하는 내용이 다를 경우, 어느 쪽이 어느 견해를 가지는지 문서에서 명확히 다뤄야만 합니다. 사실 확인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거나 편집상의 감독이 없는 출처는 문서 스스로에 대한 근거로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출처에 대한 내용은 그 주장이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도 출간되지 않는 한, 제3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주장을 되풀이하면 안 됩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3일 (토) 21:51 (KST)답변

안타깝습니다. 애석하게도 사실 확인에 대한 평판도 좋고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4일 (일) 15:33 (KST)답변

박정희 X-파일, 여자관계에서 ‘기자박치기’까지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박정희 거쳐간 '궁정동 여성'은 200여 명

10.26 사건 이후 최초 전면공개 채홍사 박선호의 군법회의 녹취록

‘더’ 애석하게도 해당 출처에는 만화책에 나온‘박정희는 모 연예인을 성폭행하고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내용이 없으며, 육영사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내용은 없으며, 경호실장 차지철이 TV 보다가 골랐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또한 해당 내용은 신뢰할만할 출처로서가 아니라, 주장입니다. 주장도 딱 이 부분입니다.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 가량 되는데, 이 때문에 박선호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었다. 당시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이 모두 사실이었다

이 출처 어디에 연예인을 납치하고 살해했는지, 육영사가 술잔을 던졌는지 여부, 박정희의 '채홍사(기생을 징발하는 관리)'였던 박선호 중정 의전과정의 증언이 있는지 명백하게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4일 (일) 20:51 (KST)답변

이해력이 안좋군요. 기사 다시보시지요. 게다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차지철이 TV 보다가 골랐다는 내용이 없다는 얘기군요. 그리고 동아일보가 원래 신빙성없게 생겼지만 그래도 이 기사는 조갑제보단 신뢰할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오해할지 모르니깐 기사 다 붙이죠.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02:13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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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X-파일, 여자관계에서 ‘기자박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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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와대 출입기자 등 인터뷰 “마담 추천 중정 면접, 입 무거운 여성 뽑아”



“다양한 직업여성 100여명 보유” 인터뷰 |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


10·26의 무대였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는 어떤 곳일까. 안가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박선호 과장은 이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궁정동 안가에 대해 설명을 하려다 법무사의 제지를 받았다.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서울에는 궁정동 말고도 5∼6곳의 안가가 더 있다는 것’과 ‘대통령만 이용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가에서 대통령이 모임을 여는 사실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만 아는 1급 비밀이었다. 안가 관리를 책임진 의전과장은 중정에서 잘나가는 요직에 속했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다루는 업무의 특성상 승진이 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가는 YS 정권 때 모두 헐렸는데,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21>은 수소문 끝에 70년대 한때 한 안가에서 근무했던 전 중앙정보부 직원을 찾아내 어렵사리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 박정희가 시해된 궁정동 안가 현장. 청와대와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했다.




안가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원래는 대통령 경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 술자리를 하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다. 10·26 사건으로 여성이 접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가의 운영 목적이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외국에서도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안가를 운영하면서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고 왜 중정에서 직접 관리했나.

경호실은 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적인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함으로써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주변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대통령은 안가를 돌아가면서 이용했나.

10·26이 난 궁정동이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안가 가운데는 아예 가지 않은 곳도 있다.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처럼 여자들을 합숙시키는 곳은 없었다.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들을 활용했다. ‘손이 컸던’ 마담 2명 정도가 주거래처였는데 그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100여명씩 보유하고 있었다.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정 직원이 ‘면접’을 봤고 외모와 경력 등을 따져본 뒤 입이 무거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위주로 선택해 수발을 들게 했다.

연회 원칙 같은 것은 없었나.

술과 음식은 경호실에서 선택하고 준비까지 책임진다. 안가에는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해온다.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

안가에서 대통령은 주로 누구를 만났나.

무척 다양해 특정할 수 없다. 수출을 많이 했거나 해외에서 큰 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하기도 했고,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학자 등을 불러 얘기를 듣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한 그룹 총수와 자주 접촉했는데, 그 총수는 대통령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지원을 부탁해 기업을 눈부시게 키워나갔다.

안가 관리자들의 근무 형태는 어떠했나.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 청소를 비롯한 관리 상태는 항상 최상을 유지해야 했다.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 망중한을 즐기는 박정희 대통령.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와 김재규쪽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인간 박정희’

‘독재자’와 ‘영도자’ 사이에 ‘인간 박정희’가 있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극단적 평가를 내리듯,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그의 독재에 맞섰던 사람들은 “교활하고 야비한 냉혈한”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미 넘치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진정한 영웅”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과연 ‘인간 박정희’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유명 여자탤런트, 한 100명쯤 된다”


‘인간 박정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중 가장 입길에 오르는 것은 그의 여자관계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두 여인의 술시중을 받았던 사실이 말해주듯, 말년에 그의 여자관계에 대한 추문은 사그라지는 권력과는 정반대로 무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여러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유신 말기 무렵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증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이다. 10·26 재판 녹취록(<대통령의 밤과 여자> 김재홍, 1994년 발간)에 따르면 1979년 12월11일 열린 10·26 사건 1심 재판(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박 과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의 ‘안가’(안전가옥) 담당 직원들 사이에서 “대통령만 참석한 행사는 소행사,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참석하면 대행사라는 용어를 쓴다”는 등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한 증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과장은 10·26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직전에 김 부장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지난 1월27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과장이 여인들에 대한 질문에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김 부장이 ‘야, 얘기하지 마’라고 뒤에서 가볍게 소리쳤다”며 “그러자 박 과장은 움찔하더니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과장은 항소심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해 1심 때보다 상세한 진술을 한 것이다.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박 과장은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는 좀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온전하게 끝나지 못했다. 법무사(당시 군사법정의 판사)가 “재판과 관계없는 내용”이라며 그의 진술을 제지하고 나섰다.


△ 김재규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


당시 변호인단은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을 주요 변론 전략 중의 하나로 삼았다. 강 변호사는 “접견 때마다 김 부장에게 여자관계를 물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며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박선호 과장도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변호인들은 피고인 접견을 통해 ‘여인’들의 이름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 변호사는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신 말기 무렵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다. 그 내용도 ‘로맨스’부터 추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근혜와 구국여성봉사단의 잡음


이런 ‘약점’은 박 대통령이 근혜씨와 지만씨를 둘러싼 ‘잡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원인이 됐다. 근혜씨는 당시 최태민 목사(사망)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총재를 맡은 최 목사가 각종 비리에 연루돼 큰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근혜씨가 관여한 단체라는 이유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김 부장이 재판 당시 제출한 ‘항소이유 보충서’에는 당시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김 부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건의에 따라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근혜씨를 불러 직접 ‘친국’을 한 뒤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파악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여성·종교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한수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은 당시 굉장한 조직이었다.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인 근혜씨가 관여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모였다”며 “근혜씨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제기한 비서관은 사표를 써야 했다”고 회상했다.

최 목사는 5공화국 출범 직후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풀려났다. <한겨레21>은 최 목사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가기록원에 수사기록 공개를 요청했으나, 국가기록원은 “보존 기간이 지난 문서로 현재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김 부장은 지만씨 문제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장은 항소이유서에서 “지만군은 2학년 때부터 육사 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 박 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한수씨는 “지만씨 문제는 (청와대에서) 당시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 만연된 일종의 낭만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추종자들과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돼 있다. 그를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지난 1971년 프로권투 헤비급 타이틀전 무하마드 알리-존 프레이저 경기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좋은 사례로 든다. 세계 권투사에 길이 남은 두 선수의 격돌은 당시 국내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끌었는데, 국내 시각으로 한낮에 벌어진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박 대통령은 갑작스레 청와대 기자단과의 점심을 제안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기자실에서 자연스럽게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공무원은 근무 규정상 일과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규정도 지키고 경기도 보기 위해 짜낸 묘안이었던 셈이다.



△ 어린이 행사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 그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검소한 식생활


박 대통령은 점심을 먹은 뒤 기자실에 돌아와 경기를 함께 보면서 승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유명세에서 앞선 알리에 돈을 걸었지만 박 대통령은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결과는 박 대통령의 ‘독식’이었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그러나 기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었다. 기자들은 박 대통령이 3천원의 ‘상금’을 기자실에 놓고 갈 줄로 예상했으나, 그는 자신의 낡은 지갑을 꺼내 이 돈을 고스란히 집어넣고는 유유히 기자실을 빠져나갔다. 당시 ‘일개’ 국장급에 불과한 공무원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접대 고스톱’을 치거나 수시로 촌지를 건네던 관행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박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나눴다. 1974년 육영수씨가 죽기 전까지는 한달에 한 차례 정도 출입기자들과 식사 모임을 했다. 이는 언론 관리와 정보 수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었다. 기자들은 중정 등 박 대통령의 정보 라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짭짤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정보장교 출신답게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박 대통령은 기자뿐 아니라 대학교수 등 민간인들과 비공식적 모임을 많이 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런 모임에서 얻은 정보를 고위 공직자를 ‘관리’하는 데 자주 활용했다. 지난 1971년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경질한 정래혁 당시 국방부 장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를 동시에 출입하던 한 기자로부터 취재 내용을 자세히 ‘보고’받은 뒤 정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이후락 중정부장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그의 인척이 마포서장으로 있으면서 폭행 사건을 일으켰는데, 피해자의 투서를 본 육 여사의 건의로 박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지시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마포서장을 파면했다”며 “공직자의 비리를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설립이 불가능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증언이다. 황연대(67)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은 “당시 정부 관료들에게 장애인 복지 얘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장애인 복지냐’며 면박을 주던 때였다”며 “청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립회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걸리가 시바스리갈로 바뀌기까지…


장애인 복지사업에 대한 청와대의 지원은 영부인의 각별한 관심에서 나왔다. 육 여사 집안에는 소아마비를 앓던 친조카 3명이 있었다. 황 부회장은 “1965년 육 여사의 초청으로 소아마비 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육 여사가 자신의 조카 얘기를 꺼냈다”며 “그때는 소아마비 자식을 둔 고위층 인사들이 그런 사실을 숨기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육 여사는 황 부회장에게 20만원을 건넸고 황 부회장은 이 돈으로 정립회관 터를 계약할 수 있었다.

육 여사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립회관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황 부회장은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와대는 1967년 걸스카우트회관 건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영화관 입장료의 일부를 떼어내 모아둔 돈을 정립회관 건립에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걸스카우트 총재를 맡고 있던 육 여사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육 여사가 사망한 뒤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도왔다. 197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공사 중단 위기를 맞은 정립회관을 위해 2억원의 ‘하사금’을 내렸는데, 이 돈은 당시 공식적인 대통령 하사금 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975년 정립회관 개관식 행사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씨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 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갔던 것이다. <한겨레21>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인 여배우 어머니, 박선호 찾아와 항의 ● 군 병원 간호장교들도 궁정동 안가 불려가 ● 김재규,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비리 보고했다가 박정희 핀잔 들어 ● 김재규, 사관생도 박지만 비행도 뒷조사해 보고



“대통령의 사생활도 역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安東壹·65) 변호사의 말이다.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10·26은 역사가 아닌 현실”이라고 규정한 그가 최근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김재규가 안 변호사를 통해 밝힌 박정희의 여성편력이 실려 있어 관심을 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좋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려고 쓴 책이 아닙니다. 최근 일고 있는 박정희와 김재규의 재평가 움직임과 관련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는 게 첫째 목적이고, 둘째 목적은 우리 현대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든 대사건의 공판조서를 토대로 기록을 남겨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김재규가 안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는 말이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한사코 밝히기를 꺼렸던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변호인 접견을 통해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자신뿐만 아니라 박선호(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사형집행)가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해 진술하려는 것도 막았어요. 1979년 12월11일 제4차 공판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박선호가 ‘그날(10월 26일) 오후 4시경 (여자를 데리러) 프라자호텔에 간 일이 있느냐’고 묻자 ‘예’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등에 대고 ‘야, 얘기하지 마’ 하고 짧게 명령조로 말했죠. ‘호텔에 간 것은 그날 연회장에 보낼 여자를 구하러 간 것이냐’는 변호인 신문이 이어졌지만, 박선호는 김재규의 뜻에 따라 ‘상상에 맡기겠다’고만 대답했어요.”

김재규의 말 한마디가 박선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박선호는 자신의 변호를 맡은 강신옥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명색이 중앙정보부장 의전과장인 자신이 이른바 채홍사(採紅使) 노릇을 한 것에 대해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저도 김재규를 접견할 때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물었는데 김재규가 ‘남자의 벨트(허리띠) 아래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라고 합디다. 김재규뿐 아니라 검찰관과 재판부도 이 얘기가 나오는 것을 꺼렸죠. 특히 박정희 여자 문제의 ‘뇌관’을 쥔 박선호에 대한 입막음이 심했어요.”

연예계 여성이 가장 많아

-김재규에게서 언제 처음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김재규는 항소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박정희를 두 번 죽일 수 없다’면서 그 얘길 꺼내지 않았죠.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80년 2월19일 접견 때 항소이유보충서에도 차마 담지 않은 얘기를 뒤늦게 털어놨어요. 박정희의 치부를 공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어렵게 입을 뗀 거죠. 그날 그럽디다.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를 찾아오는 빈도가 높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고. 상대하는 여자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해요. 그 숫자가 200명을 넘었대요.”

궁정동 안가 술자리는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와 10·26 그날 밤처럼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 4명의 최측근이 함께하는 대행사로 나눠졌다고 한다. 대행사에서 박정희가 맘에 드는 여성을 ‘뽑아’ 따로 즐기는 일을 소행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합디다. 박선호는 말이 의전과장이지 궁정동 안가를 관리하고 소·대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쓸 만한 여자를 찾아내 바치는 게 주임무였습니다. 김재규는 ‘박선호가 자식 키우는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 된다며 몇 번이나 내게 사표를 냈는데 만류했다’고 하더라고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누가 맡느냐’면서.”

  (계속)

1심 재판에서 김재규의 제지로 입을 다물었던 박선호는 1980년 1월23일 열린 항소심 2차 공판에서 “대통령의 여자 문제에 대해 진술할 경우 일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고 고인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므로 진술을 피한다”고 진술했다. 그의 진술을 통해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정희의 은밀한 사생활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박선호는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잠깐 언급했어요. 전날 공판에서 ‘그 집(궁정동)이 사람 죽이는 집이냐’는 검찰관의 신문에 열 받은 박선호가 박정희의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작심했는지 언성을 높였어요. ‘(궁정동을 다녀간 여배우들의) 명단을 밝히면 시끄러워지고 궁정동 안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밝히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진술하자 재판부가 다급히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말하라’고 제지했죠.

김재규는 ‘박선호가 법정에서 한 증언이 죄다 사실’이라고 합디다. 당시 웬만한 연예인은 다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거예요.”

화제를 돌렸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안 변호사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되긴 했지만 대체로 사실에 근접한 영화”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대통령 살해사건에 가담하거나 휘말려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배우 윤여정과 한석규(박선호 역)의 대화로 시작된다. 다음은 유명 탤런트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한 윤여정의 대사다.

“새벽에 언뜻 깨보니 (대통령이) 자기 몸을 쓰다듬고 계시더래요. ‘곱다. 정말 곱다’ 이러시면서. 한없이 계속. 온몸을. 글쎄 쟤(딸)가 배시시 웃으니까 그때서야 멋쩍게 옷을 주섬주섬 챙기시는데. 아, 지(딸)가 그냥 자빠져 있을 수 있겠어요. 어르신(대통령) 옷 먼저 입으시라고 쟤는 벗은 채로 수발을 들었대요. 벗은 채로. 그러다가 결국 어르신이 쟤를 한번 다시 품어주시고. 그 어른 참 대단하세요. 예~에. 그 연세에! 쟤를 꼭 품으신 채로 그러셨대요. ‘꼭 다시 놀러오라’고. 제가 청와대고 어디고 쫓아다닌 건 죄송합니다. (한석규가 봉투를 내밀자) 이런 거 바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밑에 분들 힘든 거 알아요. 아는데 어쩌겠어요. 그분 심중을 헤아려 드려야지. 그분이 원하시는데.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거…. 우리 애 이렇게 따돌리는 거 큰 실수하시는 거예요.”

‘김재규 가슴속에 뭔가 있구나’

세간에 널리 알려진, 그러나 ‘헛소문’ 취급을 당했던 영화 속 ‘연예인 모녀’ 이야기에 대해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딸이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된 사실을 알게 된 모 여배우의 어머니가 박선호를 찾아와 ‘아랫사람들이 대통령과 내 딸이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항의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우리 딸이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랍니다. 아마도 그 여배우 어머니는 든든한 ‘빽’ 하나 생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대통령의 품에 안겼으니 톱스타 되고 출세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항간에 ‘간호장교’ 이야기도 떠돌았는데요.

“군 병원의 간호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해요. 사단과 군 병원 등에서 ‘괜찮다’ 싶은 여군이 있으면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는 거죠. 그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세상에 어떤 여자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걸 달갑게 여기겠어요. 더군다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협박성 주문도 뒤따랐고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김재규와 실제 김재규의 모습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화에서는 김재규가 유약하기도 하고 조금 냉소적인 인물로 그려졌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도 상당히 고압적이고 강인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그렇게 온화하고 겸손할 수가 없더라고요. 속으로 ‘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살해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1회 군법무관 시험을 거쳐 국방부 법무관을 마친 뒤 1978년 개업한 안동일 변호사는 원래 이기주(중정 경비원)와 유성옥(박선호의 운전기사)의 국선(國選) 변호인이었다.

그런데 1심 4차 공판(1979.12.11)에서 김재규가 대규모 사선(私選) 변호인단의 변호를 거부하고 국선 변호만 받겠다고 요청하고 재판부가 안동일 변호사를 국선변호인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김재규의 변호를 맡게 됐다.

“이기주, 유성옥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됐을 때만 해도 김재규가 박정희와 함께한 만찬석상에서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싸우다가 욱 하는 마음에 총질을 했겠거니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판이 시작된 직후 김재규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반체제인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김재규가 변명하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김재규의 진술이 당시 반체제 인사로 구성된 사선 변호인단의 조언에 따라 각색된 것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검찰 신문 때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최고 권력을 탐해 자신을 총애한 대통령을 배은망덕하게 살해한 패륜아로 여기기엔 너무나 논리가 정연하더라고요. ‘김재규 가슴속에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계속)

박근혜, 최태민의 자리바꿈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불미스러운 사생활과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 보호가 도를 넘었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국정운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여자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나’ 하고 늘 고민했다고 합디다.”

당시 김재규는 육사 생도이던 박지만의 행동거지에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딱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한 게 있어요. 김재규가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를 제 책에 옮기면서 한 단어를 고쳤거든요. 김재규는 지만군 문제를 지적하면서 ‘육사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해 여의도 등지에서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OO’을 하고 다녔다’고 썼어요. 김재규는 ‘OO’이라고 했는데, 이걸 제 책에선 ‘행동’이라고 옮겨 적었어요. 이제 지만씨도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OO이라는 단어는 뺐어요. 제가 그렇게 고쳐도 하늘에 있는 김재규가 ‘잘했다’고 할 것 같아, 고민고민하다 마지막에 고친 겁니다.”


“지만군을 유학 보내십시오”


-김재규가 지만군의 행실에 대해서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나요.

“그렇다고 합디다. 김재규는 ‘육사의 명예나 지만군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간곡히 건의했대요. 그런데 박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에게 자식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물론이죠. 김재규는 ‘각하 아들과 딸의 행동이 이렇습니다. 국사에 도움이 안 되니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보고했다고 했어요. 대통령에게 욕을 먹더라도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 직언을 했다는 겁니다. 지만 군의 불량한 행동에 대해서는 구두로 보고했고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일은 서면으로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후에 자식들 문제를 몇 번 언급했는데 박정희가 막무가내로 감싸고돌자 ‘더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해요.”

-김재규에게서 둘째딸 근령(최근 ‘서영’에서 ‘근령’으로 개명)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둘째딸 이야기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책에 박정희의 사생활과 자녀 이야기를 언급했잖아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썩 달갑지 않게 여길 것 같은데요.

“박근혜 대표가 트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왜죠?

“숨기지 않고 깨놨잖아요. 박 대표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해요. 박정희의 장점은 취하되 단점은 과감히 버려야지요.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죠. 오히려 (박 대표가) 저에게 아주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좋지 않은 사생활인데….

“사생활이라 해도 개인이 아닌 대통령의 사생활이잖아요. YS가 다 없애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시절 궁정동에는 대통령 안가가 있었고, 그날 밤 두 명의 여자를 불러들여 벌인 술자리에서 대통령이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게 우리 역사예요. (박근혜 대표는) 오히려 자신이 까발리지 못하는 것을 제가 대신 해준 셈이니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지금 ‘유신’이 좋았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10·26 직전까지만 해도 다들 유신을 치켜세웠어요. 박정희가 죽기 전날까지 유신체제가 좋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박정희가 죽고 나자 제 일성으로 한 얘기가 ‘민주절차 밟고 개헌하겠다. 긴급조치 해제하겠다’였어요. 이게 뭘 뜻하는 겁니까. 유신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끽소리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제가 책을 펴낸 취지는 박 대통령의 나쁜 점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자는 뜻일 뿐이에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고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한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현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시 김재규도 요정 마담을 첩으로 뒀다는 소문이 떠돌지 않았습니까.

“김재규에게 그 얘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사실이라 해도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에 비밀 안가를 만들어놓고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나요.

“아뇨. 없었어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어요.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어요.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안 변호사는 “책을 펴내 26년 동안 미뤄둔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 든다”며 홀가분해했다.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김재규는 변호인 접견에서 살해 동기에 대해 “독재와 야당 탄압,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그에 따른 판단력 마비가 또 다른 이유였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10·26 이후 해마다 5월24일이 되면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공원묘지 맨 윗자락에 자리잡은 김재규 묘역을 찾는다는 안 변호사. 그는 올해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김재규의 묘역을 찾았다.

“제가 변론한 사람이 사형을 당했는데, 그것도 우발범이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그랬다는데….”

김재규의 무덤 앞에서 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밝힐 수 없다. 10·26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끝)

박정희 거쳐간 '궁정동 여성'은 200여 명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자신의 변호인에게 박 대통령의 여자관계를 털어놓은 정황이 밝혀졌다.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65)는 10.26 사건 26주기를 앞두고 사건 및 재판 과정을 담은 저서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랜덤하우스중앙)를 펴냈다.

안 변호사에 따르면, 김씨는 80년 2월 19일 변호인 접견에서 박 대통령의 여성편력과 큰 영애 박근혜양의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 등 민감한 현안들을 털어놓았다.

김씨는 79년 12월 11일 1심 공판에서 박선호 의전과장의 관련 진술을 제지하는 등 박 대통령의 사생활을 감싸려고 했지만, 1·2심에서 잇달아 사형선고를 받게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안 변호사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 가량 되는데, 이 때문에 박선호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었다. 당시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이 모두 사실이었다."

92년 동아일보사가 펴낸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이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 된다"고 밝힌 것이 이 부분에 대한 정설로 굳어져있지만, 생전의 김씨는 두 배의 숫자를 제시한 셈이다.

김씨가 '거사'를 실행한 데에는 자식들의 문제에 냉정하지 못했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도 일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근혜양이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을 조사해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것까지 하냐"고 몹시 불쾌해했다고 한다.

김씨는 "박 대통령이 근혜양과 지만군 등 자식들의 문제가 나오면 아예 처음부터 말도 못 붙이게 싸고도는 바람에 사태가 계속 악화되어가도 더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77년 9월 중정의 보고를 받고도 근혜양의 구국봉사단 활동을 조건부로 계속 허락했다는 <월간조선> 최근호의 보도내용과도 일치한다.


▲ 안동일 변호사의 저서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 표지

ⓒ 랜덤하우스 중앙 그러나 안 변호사는 "여기에 옮기기엔 부적절하고 더 심한 얘기도 있었지만, 변죽만 울리는 것으로 그치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며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김재규의 부탁대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옮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 변호사는 저서에서 김씨를 국선변호인으로 처음 만난 이후 1심부터 3심 재판,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을 관련 사진과 김재규의 상고이유서, 대법원 판결문 등과 함께 담담히 적고 있다. 법정진술 중 불충분하거나 누락된 부분은 수사기록과 관련자료 등을 참조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려고 애썼다.

안 변호사는 "재판기록의 누락부분을 원본과 대조하기 위해 육군 법무감실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지만 거부당하는 바람에 다른 길을 통해 확인하느라 출판이 늦어졌다"며 "참여정부라지만 아직도 변호인이 청구하는 해당 재판기록에 대한 정보공개에 인색한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비화]10·26사건이후 19년만의 최초 전면공개

‘채홍사’박선호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대통령 박정희의 ‘大行事’‘小行事’

◇10·26사건 19주년이 지났지만 사건동기는 아직 석연치 않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적 모습이 의문을 푸는 최후의 열쇠가 될지 모른다.「신동아」는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정보통치, 언론통제, 북한과의 대결주의를 다룬 「박정희의 유산」(김재홍著·도서출판 푸른숲 근간)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원으로 10·26사건에 가담했던 박선호의 군법회의, 증언을 토대로 한 「박정희의 술과 여자」를 소개한다.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현직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감행한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은 실로 누천년의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처구니없는 돌발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 긴급조치로 통치되던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온 국민에게 경악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오랜 철권통치자의 죽음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해방감도 워낙 컸던 놀람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역사의 뒤편에는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업보가 감추어져 있었다. 박정희 시대사의 막후에서는 설마하던 일들이 실제 벌어지고 있었다. 국정 최고책임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중앙정보부 부속 비밀연회장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다.

그날 사건도 대통령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이렇게 4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79년의 일이다. 그 자리에는 여자 둘이 동석했다. 한 여자는 유명가수였고 다른 한 여자는 여대생으로 아르바이트 패션모델이었다.

이런 식의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 박정희의 채홍사는 증언했다. 대통령의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됐다.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즐기는 것이고, 대행사는 측근 권력자 3~4명이 함께 하는 것을 뜻했다. 최후의 그날 술자리는 대행사였다.

다음은 1979년 12월11일 군법회의 제1심 4회 공판에서 박선호 피고인에게 처음으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시중 여인들에 대한 증언을 유도한 강신옥 변호사의 신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문제를 더욱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어린애들을 갖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고 하소연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으나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제가 근무하기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부장님에게 계속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몇 번 올린 바가 있습니다.

변호사: 결국 정보부장님이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또 그렇게 해서 할 수 없이….

박선호: 네, 저를 신임하시어 자꾸 계속적인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당신이 고르라』고 말했더니 『청와대에서 고르는 걸 국민들이 알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그러면 골라 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정인형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으로 박선호와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박선호가 소개받아 데려오는 여자에 대해 미인이 아니라거나 품위가 너무 떨어진다는 차지철의 지적을 정인형이 전달하곤 했다. 이에 박선호는 크게 반발했다. 그러잖아도 관립요정 관리자로 전락해가는 처지에 수치를 느끼는 판이었다.

그는 정인형에게 처음 경호실이 했던 것처럼 각하의 술시중여인 조달을 맡으라고 했다. 그러나 경호실측은 펄쩍 뛰었다. 골치아프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떠안게 될까봐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육여사, 박종규 뒷조사 지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은 각하의 심기관리에서부터 술자리까지 챙겼다. 군대에서 부관이나 전령병이 지휘관을 잘못 모시면 전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는 말은 금언에 속한다. 그런 군사문화에 젖은 경호실장 박종규는 각하의 심기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삼았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어허, 음, 흠…』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게 해주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육여사는 박종규 거세계획에 착수한다. 이 계획에 동원된 사람이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수석비서관 홍종철이었다. 육여사는 홍종철을 은밀히 불러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규탄했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은 각하 곁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이래서 홍종철은 극비리에 박종규 비리조사에 착수한다. 본인과 형제 친척들의 이권개입과 인사청탁 여부에서부터 사생활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막강한 경호실 안테나에 안 걸릴 리가 없었다. 박종규의 귀에 사정수석실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내사하고 있으며 홍종철이 직접 지휘한다는 정보가 들어갔다. 박종규는 흥분했다. 그는 경호실에 있던 엽총을 집어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냐』

박종규는 분에 못이겨 엽총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러나 총구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가 냅다 갈긴 엽총 탄알은 홍종철의 머리 위 천장에 맞고 튀었다. 홍종철은 박종규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분신으로 누가 무슨 보고를 해도 경호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문책인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이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술자리 마련과 여자 조달하는 일을 청와대에서 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날이면 큰 낭패라는 생각에서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이 있는데다 공식적인 방문객도 많아 비밀스러운 일이 노출될 위험이 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일을 맡기엔 중정이 안성맞춤이었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

박종규가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으로 물러난 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육여사는 그렇게 싫어했던 경호실장을 생전에 밀어내지 못하고 죽어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따지고 보면 10·26사건의 먼 원인은 8·15저격사건이 된다. 이때 박종규가 문책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으로 들어갔으며, 차지철의 횡포에 김재규가 자극받은 것이다. 사건 당일도 만약 임무수행에 철저한 박종규가 경호실장이었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김재규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박종규의 엽총난사 사건을 보아도 박정희의 주색탐닉이 육여사가 죽은 후 홀아비 고독 때문에 생긴 일만은 아니었다. 육여사가 살아있을 때도 주색으로 충돌이 잦았다. 다만 홀아비가 된 후 그의 사생활이 더욱 절제없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그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10·26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과 판단력 마비가 직접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 박선호의 증언 내용이다.

변호사의 술자리 여자문제에 대한 신문에 박선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듯 작아졌다.


박선호: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변호사: (한참 묵묵히 있다가) 피고인은 1978년 8월11일에 의전과장이 되어서 1979년 10월27일 면직될 때까지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말에 추석이나 정초 휴일까지 포함되지요?

박선호: 그렇습니다.

변호사: 휴일을 포함해서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고 계속 출근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네. 부장님의 언제 어떤 지시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매일 나갔습니다.

변호사: 피고인은 어제 말한 소행사나 대행사, 이게 하도 빈도가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같이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라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일년 중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고위층이 사생활을 즐기는 데 그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고 그것이 공무였다. 의전비서나 의전과장이란 본래 그 조직과 외부간 접촉에서 절차와 일정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고위층일수록 만나고 싶어하는 외부인사는 많고 시간이 부족한 법이다. 여기서 의전비서에게 세도를 부릴 권한이 생기게 된다. 즉 고위층과 만나는 시간을 잡아주는 역할이 상당한 영향력을 파생하는 것이다. 또 의전비서는 대부분 고위층의 심복이다.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훤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비서가 나중에 수틀려서 자신의 행적을 폭로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평생동지를 의전비서로 삼는 것이 통례다. 특히 독재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하는 역시 경호실장과 의전수석비서관이었다. 개인생활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는 부하인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의전과장은 부장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 맡게 돼 있었다. 대통령과 중정부장의 내밀한 사생활을 관리하는 직책이 되면서부터였다. 국가기밀과 정보관리를 내세워 일반 국민의 눈에 완전히 가려져 있는 중앙정보부에 대통령을 위시한 최고권력자들의 환락생활을 뒷바라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 실무 책임자가 의전과장이었다.

박선호가 이따금 함께 신세타령을 했다는 남효주 사무관은 궁정동 안가 비밀요정의 관리자였다. 대통령 전용 관립요정을 두고 그 관리자에게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직급인 사무관을 부여한 것이다. 남효주 얘기가 나오자 군검찰관은 당황했다. 대통령 사생활의 가장 깊숙한 비밀얘기가 노출될 위기였다. 검찰관은 급히 제동을 걸었다.

검찰관: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본건 변호인은 본건 공소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제한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무사: 사건과 관련 있는 건만 신문해 주십시오.

변호사: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관련이 없다면 재판부에서 대답하지 않게 해도 좋습니다만….

법무사: 피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무상 비밀 등에 대해서 진술 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고지한 바와 같습니다.

변호사: 어떻습니까.

박선호: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변호사: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는데….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변호사: 있죠.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 때만 해도 박선호는 박정희의 주색문제에 대해 공개진술을 꺼렸다. 그것은 고인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지만 자신도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문제를 토로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 재판에 들어가서다.



돈 많이 들어도 좋은 여자를


채홍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 그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다.

항소심에 들어가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으로 하여금 채홍사 일을 진술하게끔 강력한 신문전략으로 나간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판과 여자를 폭로하는 증언이었다. 대통령의 주색중독과 그로 인한 판단력 마비, 그리고 국가안보 위기, 이것이야말로 「10·26거사」의 정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변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10·26거사」의 정당성이 인정되면 김재규와 박선호 등 피고인들의 죄는 내란 목적 살인에서 단순 살인으로 정상 참작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피고인들에게 극형을 면하게 해주는 길이었다.

항소심으로 가기 전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인 이날 강변호사는 여자문제 신문이 군검찰관의 제지로 벽에 부딪힌데다 박선호도 답변을 거부하자 김재규의 생활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변호사: 피고인은 김부장님이 대통령 앞에서도 아첨하는 법이 없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거나 대통령과 전화를 할 때도, 피고인이 연결을 시켜주는 관계로, 들은 일도 있다는데 그런 경우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그것은 급한 연락사항이 있을 때 부장님께서 각하실로 전화 대라고 하면 연결해 주고 한 일은 있습니다.

변호사: 글쎄, 그때 전화를 듣고 역시 김부장님은 대통령 앞에서도 솔직하게 무슨 말을 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좀 몇 가지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모든 사항을 서슴지않고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여러 가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 다른 분 같으면 대통령 앞에서 그런 투로 말하지 않을 텐데 아주 의사를 분명하게 솔직하게 말한다 하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예, 그래서 항상 제가 존경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변호사: 또 한번 검찰신문 때도 그렇게 몇 가지 충고와 훈계를 해주었다고 했는데, 특히 피고인에게는 운동도 테니스나 하라고, 피고인에게는 그게 좋다고 훈계했다면서요.

박선호: 수시로 부장님께서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고, 운동 같은 것도 화려함보다는 정구 같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겸손하라는 말씀을 수시로 하시고 저희들에게 지도의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박선호는 상당한 심경변화를 일으켰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역사적 증언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치 주색에 빠져 나라를 빼앗긴 군주국의 마지막 왕들을 연상케 하는 얘기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각하의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계 여인들의 명단을 두고 고민했다. 다음은 10·26사건이 일어난 해를 넘긴 80년 1월23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 설치된 계엄사 고등군법회의 2회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1심에서 변호인이 그날 당일 여자 두 사람을 인솔해 온 것을 물었을 때 대답을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 심정입니까.

박선호: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 혼란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

변호사: 지금도 그런 심경입니까.

박선호: 예, 그 문제를 가지고 제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호사: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 때문에 내 자신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잖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이번에 부장님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행위에 가담하게 된 사정 속에는, 사람의 행동 속에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결정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런 사정들도 이번 행동에 가담하게 된 어떤 숨은 동기가 되느냐 이겁니다.

박선호: 제가 무슨 동기가 있었다기보다, 저는 하여간에 1년 내내 하루도 근무를 쉬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불시에 오시기 때문에 그랬는데, 저는 그때 동기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존경하는 부장님의 지시면 무조건 한다는 것 외에는 없고, 만약 그때 다른 지시를 했어도 응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후처 노린 여배우


박선호의 답변은 완전히 핀트를 벗어나고 있었다. 강변호사가 사전에 준비한 신문과 답변 내용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강변호사는 1심인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와 박선호를 교도소에서 접견하면서 이들이 심경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느꼈다. 법정에서는 각하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진술하지 않던 김재규도 80년 1월 중순 어느날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을 보냈다. 김재규는 깊은 비화를 털어놓았다. 궁정동 안가를 거쳐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사후에도 그대로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비밀저장고 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왔다.

변호사는 박선호보다 앞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채홍사역을 했던 윤모, 이모, 김모 씨(육사 15기,예비역 대령)와 만나 이 증언들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1, C2, L, L1, W 양 등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각하의 술자리 여인을 동원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첫째 단독후보는 안되며 반드시 복수로 부르는 것이고, 둘째로 결코 동일인을 두 번 이상 들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복수후보로 하는 것은 그의 선택 폭을 보장하기 위함이었고, 한 여인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는 것은 각하의 이상한 인연이 깊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각하의 양 옆에 앉히는 두 여인 중 대부분의 경우 한 사람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타였고, 다른 하나는 연예계 지망 신출내기로 선택됐다. 각하는 술이 취하면 으레 둘 중 마음에 드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경호실장과 이 관립 비밀요정의 담당자만 아는 비화속에 묻혔다.

한번 「인연」을 맺은 뒤 퍼스트 레이디 후임을 노리는 야심파도 나타나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번 술자리에 참석한 뒤 각하의 후처가 되겠다고 나선 출세지향파는 유명한 은막의 스타 C양이었다. 이 바람에 박선호와 궁정동 안가 요원은 여배우의 「후처소동」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궁정동 행사에 참석했다가 각하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된 그 여배우는 행사에 연속출연을 요구해왔다. 중정측은 물론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이를 잘랐다. 그러자 어느날 그녀의 어머니가 박선호 의전과장을 찾아왔다.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

대통령의 연심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스타의 어머니는 중앙정보부 간부에게 큰 소리를 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 밖에도 박대통령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계 지망생의 부모가 사후에 그 사실을 알고 항의해와 돈 주고 달랜 일 등이 옛 궁궐 속의 비밀처럼 묻혀 있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진술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걸려 김재규 부장에게 「이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두어번이나 사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절대권력자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토로였다.



여자조달 증언 『상상에 맡긴다』


10·26 당일 대통령의 최후를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가장 확실하게 보았던 증인도 그렇게 불려온 두 여인이었다. 술자리에 두 여인이 동석했다는 사실도 박선호가 처음 공개했다. 여기서 각하 전용 비밀요정의 구조와 소행사·대행사, 각하의 연회주선이 주임무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직책도 밝혀졌다. 1979년 12월11일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 전반부의 변호사신문에서였다.

변호사: 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의 임무는 정보부 궁정동 사무실에 있으면서 궁정동에 있는 다섯 개 연회장을 관리하고 정보부장을 보필하는 비서까지 겸하고 있다는데요 ?

박선호: 네.

변호사: 궁정동 다섯 개 연회장은 피고인이 의전과장이 되기 전부터 있던 구관과 현재는 가동이라 부르는 신관, 세검동 및 피고인이 와서 새로 건축한 나동 다동을 말하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이번에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식당은 위에 말한 나동입니까, 그게 ?

박선호: 네.

변호사: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김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궁정동 연회가 있게 되면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인 정인형이 피고인에게 전화로 연락을 주는데, 대통령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는 표현을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관계는 참고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선호의 진술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소행사라는 말이 경호실과 궁정동 안가에서만 쓰는 비밀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짝 다그쳤다.

변호사: 아까 검찰관 신문할 때, 얘기하다 말았는데 그날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네.

변호사: 그때 플라자 호텔에 간 것은 바로 그날 연회장에서 도와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변호사의 이 물음이 나온 후 박선호는 머뭇거렸고 군사법정에 긴장이 흘렀다. 그때 박선호의 등 뒤에서 작은 외침이 터졌다.

『야, 얘기하지 마』

피고인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는 목소리였다. 김재규는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그는 유신체제와 박정희의 영구집권 욕심에 대해서만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 이외의 사생활은 거론하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호칭할 때마다 깍듯이 존칭을 썼다. 그런 그가 이날 공판에서 박정희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부하의 진술을 막기까지 한 것이다. 오랜 기간 모신 각하에 대해 애증이 엇갈리는 모습이었다. 이에 박선호도 잠시 「양심선언」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법정에는 잠시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무언가 최고권력자의 내밀한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법정에서도 공개적으로 말 못하는 사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10·26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대통령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정치적 비판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생활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유신권력의 수혜자이기도 했던 중앙정보부장이 그를 쏘아버린 사건의 동기가 설득력있게 규명되기 어려웠다.

김재규의 제지에 박선호는 더욱 증언을 자제했다.

박선호: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박선호는 답변 말미에 살짝 웃음기를 띄웠으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이날 준비해온 대로 밀고 나가기로 맘먹었다.

변호사: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플라자나 내자 호텔은 박선호가 소개받은 연예계 여인을 만나 데려오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거듭 증언을 거부하며 『상상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상 시인으로 박정희의 술자리와 여자조달 행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박선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변호사: 그래서 도착한 것은 몇시였죠?

박선호: 제가 오니까 이미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6시30분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최후 술판의 두 여인


이날 변호사 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관 사실신문에서는 연회장의 여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끊어지곤 했다. 박선호 피고인이 대통령의 주연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처음부터 군 검찰관은 사실신문에서 피고의 진술을 통제하고 나섰다. 박선호가 10·26 당일의 행적에 대해 진술하면서 「대행사」 얘기를 꺼내자 검찰관은 재빨리 『네 알겠어요』라며 말을 더 이상 못하도록 끊었다. 또 행사준비차 플라자 호텔에 갔었다면서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검찰관은 급히 『네 알겠습니다』고 말을 막았다. 이는 군검찰관이 피고인을 신문하는데 있어 사건발생의 전후관계를 따져 밝히는 것보다 각하의 사생활 보호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 그런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찰관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 군사재판은 법정의 옆방에 보안사령부 파견관이 대기하면서 수시로 지시메모를 전달한 이른바 「쪽지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김재규는 주로 고도의 정치문제를 진술한데 비해 박선호와 박흥주 피고 등 그의 부하들은 핵심권력자들의 사생활과 권력투쟁상을 묘사했다. 당시까지 그런 비화는 국가기밀의 너울을 쓰고 바깥에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이 알건 모르건 그날의 궁정동 행사는 결국 「절대권력은 절대로 타락한다」는 금언을 실증하는 최후의 자리였다.

검찰관: 지난 10월26일 대통령 각하 주재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언제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박선호: 26일 오후 4시 25분경에 청와대 경호처장으로부터 『오늘은 대행사가 있다. 장소는 나동이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연락을 받고 바로 나동을 관리하는 남효주 사무관에게 나동에서 대행사가 있다,… 대행사가 있다고 그러면….

검찰관: 네, 알겠어요. 김재규 피고인이 남산분청에서 본관 집무실에 몇 시에 도착했습니까?

박선호: 4시 30분경으로 생각됩니다.

검찰관: 피고인이 식당관리인이 남효주에게 만찬준비를 시킨 후에 시내에 손님을 만나러 간 사실이 있죠?

박선호: 네.

검찰관: 몇 시에 나갔다가 몇 시에 돌아 왔나요?

박선호: 부장님이 4시 30분경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행사관계를 보고드리고 제가 차를 가지고 바로 플라자 호텔을….

검찰관: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18시 25분경 위 식당으로 되돌아 왔습니까?

박선호: 네.

검찰관: 피고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찬은 시작됐죠?

박선호: 네, 제가 오니까 이미 만찬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박선호의 이 증언으로 10·26사건 당일 밤 박정희의 양옆에 앉았던 두 여인은 법정 증언대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두 여인이 법정에 출두하는 날 보안사가 주도하는 합동수사본부는 이들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도록 크게 신경을 썼다. 이들이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사건 뒤의 여자」로 비쳐 세간의 눈길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엄이었기 때문에 언론은 이 여인들에 관해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으나 시중엔 여러 소문들이 나돌았다. 두 여인의 프라이버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 보호가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 여인은 유명가수로 대중문화의 스타여서 일반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박정희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부상할 수도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합수부는 언론보도에서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만 게재하도록 제한했으며 이름도 가명을 쓰게 했다. 시중에는 이미 손금자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가수가 누군지 알리는 정확한 「유비통신」이 퍼져 있었다. 유수대학의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며 모델노릇도 한다는 정혜선양의 신원도 언론보도만 막는다 해서 감추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미 알려진 대로 가수 손금자는 심수봉씨, 정혜선은 신재순양이었다 <편집자>).

12월17일 오후 4시 15분경, 두 여인은 감색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보통군법회의 8회공판이 열린 군사법정 앞에 도착했다. 이들은 별관에 별도로 마련한 소법정에서 수시간에 걸쳐 따로 증인신문에 답변했다. 두 여인을 신문하기 위한 별도법정에는 재판부와 검찰관, 변호인 그리고 보도진은 4명, 방청인은 기관원으로 제한됐다.

정혜선(H대 연극영화과3년. 패션모델): 처음 총소리가 난 후 화장실로 피신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총소리가 났습니다.

검찰관: 그 때 대통령 각하는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정: 쓰러져 있었는데 식탁 옆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검찰관: 총소리가 난 후 불이 나갔나요?

정: 불이 꺼진 뒤 손양과 둘이서 각하를 부축했습니다. 그 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원, 경호원』 하고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었습니다.

검찰관: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 식탁에 엎드린 각하를 일으켜 부축했는데 그 때 김재규 부장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각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 나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아 나와 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각하를 업고 나갔습니다.

검찰관: 차실장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정: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차실장이 문가에 쓰러진 채 살아 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부축하면서 일어나라고 했더니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라고 하기에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옆 사람이 안내해 줘 어느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음소리도 났고 조금 후 총소리가 계속해서 일곱 발 정도 났습니다. 그 방에 전화가 몇 번 왔는데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요.



팁도 다 계산해 보냈다


이어 변호인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변호사가 먼저 물었다.

안동일변호사: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정: 6시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었습니다.

안변호사: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정: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안변호사: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정: 없습니다.

신호양 변호사: 대화 중 차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정: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이병용 변호사: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정: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을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변호사는 『검찰신문의 신빙성에 관한 질문이다』고 응수했다.

이변호사: 그날 김계원 청와대비서실장이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선가요?

정: 무언가 초조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변호사: 그 날 저녁 손양이 자리에 들어가니 대통령 각하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고선 얼마 전 작고한 총무처장관과 본이 같다고 했다는데….

정: 맞습니다.

이변호사: 각하가 총에 맞았을 때 비명소리가 있었나요?

정: 숨소리가 좀 거칠었습니다.

이변호사: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날 김계원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정: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안동일 변호사: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정: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대생 패션모델 정혜선은 어린 나이에 비해 의외로 침착하게 진술했다.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증언이었다. 현장에서 넋이 빠져서 허둥대거나 겁 먹었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텐데 상당히 자세히 돌발상황을 설명했다. 오히려 나이가 위이고 유명가수여서 사회경험도 많은 손금자는 진술이 엉성했다. 그런 정혜선이 당시 술자리를 가진 방의 조명 얘기가 나오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실내가 밝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진술이었다. 권력자들이 여자와 술을 희롱하는 관립비밀요정도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했다는 얘기다. 이어서 가수 손금자가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그 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손금자: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만찬석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세요.

손: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실장은 『시간이 되면 제가 켜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10분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니다. 그후에 나갔던 김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그때 상호간에 주고받은 얘기는 없었습니까?

손: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대는 걸 보고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의 진술은 사건 당일의 현장목격담이었다. 거기에 관립 비밀요정의 풍속도를 전해준 증언이었다. 두 여인은 사건 당일 밤 11시경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박선호는 이들에게 팁을 주어 내보냈다. 다음날 김재규가 국방부에서 헌병과 보안사요원들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중앙정보부는 평소대로 움직였다는 증거다.

다음은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만찬에 참석한 여자 둘을 몇 시에 보냈습니까?

박선호: 제가 11시경에 보냈을 겁니다.

변호사: 11시경에, 그러니까 거사가 있고 난 뒤에 그날 보냈죠? 그날 돈도 주어 보냈죠?

박선호: 네, 완전히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여인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으로 쳐서 보통 50만~100만원 선이었고 이름 있는 스타인 경우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술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의 상상보다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급이 많으니 가격이 비쌀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도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면 종종 김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고 변호사 접견시 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대통령이 영화나 TV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다만 유부녀로서 본인이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놀랄 일류 연예인들이다』


재판정에서 하는 것으로 마지막인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박선호 피고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랐던 배경과 함께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 확실한 피고인의 최후진술마저도 남기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채홍사였기에 할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다음은 19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결심인 3회 공판에서 박선호가 남긴 최후진술이다.

법무사: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박선호 피고인 앞으로.

박선호: 제가 지금 여기에서 최후진술을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존경하는 김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제가 아직까지 원망이나 비관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금 저희가 거기서 근무하면서 부장님께서 구국을 위해 민주를 위해 수시로 청와대에 들락날락하시면서 간혹 저희에게 주시는 그 정보를 들어보면, 숨통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저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고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되도록 길러주신 데 대해서 제가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당일에 있었던 상황은 1심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긴박한 상황에서 아마 어느 누구도 100명 중 90명은 반드시 그 행동을 그대로 취하리라 믿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제가 그 진행과정에서도, 어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궁정동 일대 모든 건물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 밑에 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완전히 사살을 목적으로 했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저는 구두로 지시만 했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부장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사살하고 누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흔히 각하 정도는 납치하면 될 일이 되지 않을까 항상 속으로 염려했습니다만 웃분이 하는 일을 제가 알 바도 아니고 하달하신 명령만 충실하기 위해서 했고, 전우를 살리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희생시킨 데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박선호가 말하는 전우란 청와대 경호처장이던 정인형이다. 사건 당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권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자 정인형과 경호처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눈길을 마주치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재송은 속사권총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경계되는 인물이었다. 두 경호간부는 권총을 빼려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박선호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꼼짝 말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움직이면 쏜다』고 위협했다.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눈 채 박선호는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정인형은 너무 당황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몇 초가 지나는 사이 정인형과 안재송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역시 안재송이 속사권총의 행동을 취하려 했다. 순간 박선호의 총이 안재송과 정인형을 향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제손으로 동기생을 쏘아 죽인 데 대해 여러번 자책했다. 박선호는 계속되는 최후진술에서 중앙정보부 부하인 경비원들에 대해서도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박선호: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제가 그 장소를 피했어도 될 것을 살려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여기에 지금 제 부하였던 이기주 유성옥 유석술 김태원, 이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나왔고, 제가 지시한 대로 한쪽으로 몰아라, 왜냐하면 제가 총소리가 났을 때 일단 저희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부장님이 희생당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염려해서 한 군데로 몰라고 지시했고, 이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고 따라 했다가 이 법정에 서게 됐다는 데 대해서 가슴 아픕니다. 아무튼 이 부하들에 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제 여기에서 검찰관께서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냐 하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도 받았습니다만,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건물은 대여섯 개가 있는데, 이것은 각하만이 전용으로 사용하시는 건물로서….

그가 대통령의 술자리 행사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하자 법정에 파란이 일었다. 방청석은 숨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으나 재판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잖아도 시중에는 별별 얘기들이 다 나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여인 명단을 적은 괴문서가 풍선에 실려 북악산 근처에 뿌려졌다는 소문도 퍼졌다. 괴문서는 북한측에서 만든 것이라는 미확인 풍문까지 나돌았다. 신문 도중이라면 검찰측이 이의 제기를 하거나 피고의 답변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최후진술이란 재판부가 피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검찰이 나서서 제지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재판부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는 법무사가 나섰다.


법무사: 피고인, 범죄에 관계되는 사항만….

순간 박선호는 멈칫했다. 최후진술조차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 그는 그러나 할 말을 이었다.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에 대해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

박선호: 예,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면 서울시민이 깜짝 놀랄 것이고, 여기에는 여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밝히면 시끄럽고 그와 같은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이것은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나오는데, 이것을….

법무사: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박선호: 예 ?

법무사: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진술하시오.

박선호: 예. 그래서 제가 1년 연중 하루도 쉬지않고 열심히 근무했고 상관의 명령은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박정희의 채홍사는 의외로 간단히 할 말을 줄여버렸다. 마치 무슨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재판부가 한 마디만 하면 맘먹었던 증언을 얼버무리곤 했다. 이는 박선호 뿐아니라 김재규 피고인의 경우 더 눈에 띄었다. 변호사들은 그것이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박선호는 80년 5월24일 오전 서울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서 자신이 상관으로 존경했던 김재규 등 4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눈을 감았다. 5·18 광주시민항쟁이 터져 27일 새벽 살상진압되기 전 극도의 정국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신군부는 또다른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유신체제의 반민주성에 대한 부산·마산 시민항쟁과 미국측의 압력과 함께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도 10·26사건의 원인(遠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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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슬쩍 추가기사를 집어넣으시는 것을 보니까 어이 없어서 웃음만 나옵니다. ^^ 기록이 다 나오는데 참;;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출처로 두신 주요 내용이 실제 올리신 ‘여성 편력’부분과 맞냐는 말입니다. 추가 출처를 몇 가지 더 말씀하셨지만, 그 속에는 육영사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내용도, 여성 연예인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무슨 ‘연예인 100명’이 나온다고, 출처로 다 되나요? 출처와 내용이 완전히 맞아야죠. 게다가, 기사들의 전부는 인터뷰를 통한 한 개인의 주장 기사지,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인정한 기사는 아닙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0:56 (KST)답변

이해력이 좋지 아니하시군요. 변호사 몇 명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표준, 정설, 객관적으로 된 내용을 재구성한 사실인데요. 기사 다시보시죠.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2:54 (KST)답변
그러니까 국가인권수호님부터 기사를 차근차근 다시 읽어 보시죠. 어디에 육영사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내용이 있는지, 여성 연예인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처는 해당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진정한 출처이지, 해당 내용도 없으면서 출처인냥 올리는 건 얄팍한 술수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올리신 기사는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저작권 위반입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3:08 (KST)답변
그리고, 토론 과정에서 본인을 추켜세우기 위해 자꾸 상대편을 깎아내리거나, 비하하는 발언은 삼가길 부탁드립니다. 차단이 될 수 있습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3:18 (KST)답변
기사들의 전부는 인터뷰를 통한 한 개인의 주장 기사지,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인정한 기사는 아닙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신가요?? 그리고 중심내용은 만화 박정희와 박정희의 정신병입니다. 그리고 조갑제 저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5:30 (KST)답변
할 말 있습니다. 주장은 주장입니다. 아무리 공신력 있는 출처라도 한 개인의 주장이라면 주장이라고 묘사해야지 사실이라고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조갑제 저서에 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고, 논점이 아니니 언급하지 않겠으며, 토론 과정에서 자꾸 상대편의 사상을 검증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꾸, 논점을 회피 하지 마시고 어디에 육영사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내용이 있는지, 여성 연예인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신 후에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6:22 (KST)답변
다들 답답하네요 여성편력에 관한 루머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도 화려한데 케네디 문서에는 그런내용이 없네요... 근데 자국의 대통령 문서에는 그게 그렇게 문제가되서 열띤 토론들을 벌이고 있으니... 그 내용들이 전부다 박대통령의 반대중의 반대파들이 퍼트린 이야기들인데도.... 그 내용이 맞는 말이던 틀리는 말이던 어찌 됐든 자국의 대통령이었고 싫든 좋든 지금도 자국의 역대 대통령 목록에 ㅇ올라있는 인물입니다. 다들 자중좀 합시다. 지금 자라고 배우고 있는 아이들도 보고, 또한 여러나라 사람들이 보는 문서입니다....하나더 제가 알기로 위키는 백과사전이고요 백과사전은 인물의 걸어온길, 업적에 대한 과오 부분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지 그 인물에대한 개개인별 평가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평가는 그 인물에대한 평전에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가지 대통령의 종교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엄연히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니까요.. Blue Sky (靑天) (토론)
한 개인의 주장이 아닙니다. 법원 녹취록 입니다. 물증도 있지요. 그리고 조갑제보다 훨씬 공신력 있는 여러 사람의 증언입니다. 내가 왜 조갑제를 거론하는 지 이유는 그 쪽이 더 잘 아는게 정상적인 토론의 흐름일텐데요. --국가인권수호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02:21 (KST)답변
같은 주장을 반복하게 만들지 마세요. 육영사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내용이 있는지, 여성 연예인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공신력 있는 출처’를 대세요. 위 출처는 ‘연예인 100명이 궁정동을 오갔다’는 내용이 전부이며, 현재 기술되어 있는 문서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법원 녹취록이라고 해도 그 형식이 주장이라면 주장이라고 밝혀야 옳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조갑제 운운하면서 마치 조갑제가 상기 내용을 부정하니까, 오히려 신빙성이 있는 것 처럼 발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자꾸 회피하시지 바시고 어떤 ‘공신력 있는 출처’에서 술잔을 던졌고, 연예인을 살해했다고 나오는지 밝혀주세요. PSH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10:17 (KST)답변
법원 녹취록이라는데 직접 들었나요. 참고로 전 박통 저 생애 최고의 대통령 입니다. 지금 이 토론 하는 분들 다들 들은예기 떠들고 있고 당신들 격은 얘기 하나도 없이 조갑재 나쁜놈입니다 기회주의자고 떠들줄만알고, 다 필요 없어요 인물 평가는 여기서 하면 않되요. 전 개인적으로 우리사는 이 사회 이대한민국 만든 살마이나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하지만 그건 개인적입ㄴ;다. 역사는요 객관적인게 중요해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봐야 되요 내맘에 않들어도 객관적으로로 평가하는게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의 자새고 그렇게하는게 역사를 고웁하고 역사를 알릴라고 하는 사람에 입장입니다.

아무리 드러워도 역사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생각을 보이면 않되요 BLU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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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그 글을 작성했습니다. 만화 박정희는 충분히 출처가 될 수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앞의 내용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 등의 내용은 사용자:박승현에게 논증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토론 벌이지 말고 먼저 만화 박정희가 사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라든지 편집상의 감독이 없었다는 내용은 사용자:박승현쪽에서 증거를 대시죠. --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19:28 (KST)답변

만화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토론을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키백과는 정책에 따라 운영됩니다.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용자 이름에 아무런 존칭이 없는 것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아 매우 불쾌합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19:34 (KST)답변


그 쪽에서 만화 박정희를 불신하고 있는데 그러면 사실 평판이 좋지 않다. 또는 편집상의 감독이 없다 이런 내용은 그 쪽 사용자가 증명해야지 다짜고짜 저 쪽 사용자에게 그런 말 하면 안되지요. --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0:06 (KST)답변

《만화 박정희》 불신하지 않습니다. 제 사비로 사서 본 만화이며, 나름 흥미롭게 봤습니다. 물론 후속작인 《만화 전두환》도 봤고요.(참고로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은 안 봤습니다.) 하지만, 만화책을 불신하냐,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냐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지 여부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내 무덤의 침~》 또한 신뢰 가능한 출처인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문서의 내용의 신뢰성은 편집자에게 물어야지, 문제제기를 한 자에게 묻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0:35 (KST)답변

만화 박정희는 사실 확인과 정확성의 명성이 있는 백무현 작가의 출판물이므로 신뢰할 수 있는 출처 입니다. 문제는 문제제기 한 사람에게 논증 책임이 있습니다. 나한테 계속 논증 책임의 전가를 하지 마세요.--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1:04 (KST)답변

그리고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정희의 정신적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므로 저런 기사 즉, 가까운 사람의 증언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1:07 (KST)답변
출판물이었다고 전부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은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나오며, 만약 전부 신뢰가 가능하다면 시중에 나와있는 루머들을 다 작성할 수 있습니다.(특히 역대 대통령의 루머) 또한, 조갑제를 비롯한 특정 세력의 서적 또한 인용 가능하고요. PSH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1:16 (KST)답변
만화 박정희는 만주국 자료 등과 근거를 가지고 쓴 책이고 시중에 나와있는 루머는 근거가 없어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고, 조갑제 것 역시 진중권 교수한테 자가당착적 내용을 지적당한 책입니다. 만화 박정희가 사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라는 문제는 문제제기한 그 쪽에서 논증 책임이 있습니다. --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1:52 (KST)답변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화 박정희’의 1차 출처를 편집한 분이 대시라는 것입니다.(만화 박정희는 1차 출처를 바탕으로 2차 출처물 입니다.) 아니, 연예인을 납치해서 살해했다는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판단 만으로 만화 박정희를 덜컥 출처로 대는 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PSH (토론) 2009년 6월 16일 (화) 22:13 (KST)답변
난 연예인을 납치해서 살해했다는 내용을 쓴 적이 없습니다. --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23일 (화) 19:30 (KST)--쥐박멸전담반 (토론) 2009년 6월 23일 (화) 19:30 (KST)답변

뉴라이트 기독교인들이

자꾸 불교 박정희 대통령을 개신교로 만들어 버릴라 그러네? 그런식으로라도 이명박 똥고 빨고 싶냐? 211.117.177.130

저작권 침해 부분

토론 문서도 저작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3379638판 이후의 세판의 삭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편집에 해당 기사들이 필요하면 링크를 이용해 주세요. --케골 (토론) 2009년 6월 15일 (월) 10:06 (KST)답변


평론

지금 보면 만화잭, 조갑재 그 ㄱ기사들 가주고 말들 많은데 여기 글 올리시는 분들 그사람들 떠드는 말들 뻐꾸기처럼 읇지말고 재대로들 공부 하세요 박정휘 뿐만 아니라 모든글들 검증 안ㄷ된 글들 내 맘에 않들면 아니 내가 모르르는 글 올라오면 꺽을 생각들 하지 말고 어찌보면 여기 참여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아니 이 사회를 그계 역사지요 객관적으로 평가를 합싣자. 내주장 펼치지 말고 ......BLUE SKY2009년 6월 17일 (수) 00:25 (KST)

본 아뒤로 접속이 않되서 ... 우리모두 나름대로 위키 꾸려나가는 목적이 어느 한 물 악평하는게 목적은은 아닌거 같아요. 역사 학도 이장은 객관성입니다. 여기 올리는 글들 말장난 아니고요 최소한 역사를 공부 하는 사람들은 내 주간 버려야 합ㄴㅣ다. 또한 남의 말 허튼소리 귀담아 ㄷ ㅡㄹ으면 않되요....프랑키아 (토론) 2009년 6월 17일 (수) 00:41 (KST) BLUE SKY답변
제가 보는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영웅이다 이사람이 죽일 놈이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사람을 죽일농으로 만들라고 하는게 고작 개인적인 치부 들춰내서 아니 이사람 나쁜놈 만들게 고작 여자관계 ??? 과연 이나라 대한민국 그자리 있는 양반들 여자관계 깨끗한 양반 누가 있을까요? 그 사람 독재자로 몰을라면 그거 않되죠 더 한거 찾으세요프랑키아 (토론) BLU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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