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진주교방굿거리춤

마지막 의견: 4년 전 (InternetArchiveBot님) - 주제: 외부 링크 수정됨 (2020년 4월)

저작권? 편집

디지털진주문화대전에 있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의 저작권 정책에 따르면 위키백과에서는 사용하기 어렵습니다.--아들해 (토론) 2008년 12월 20일 (토) 16:06 (KST)답변

정리를 한다는 것이 깜빡하고 넘어갔습니다. 일단 정리를 끝냈습니다. Asfreeas (토론)
글의 내용을 다듬는다고 해서 저작권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개작이니까요) 저작권 침해가 맞다면 이 문서는 삭제되어야합니다.--아들해 (토론) 2008년 12월 20일 (토) 21:22 (KST)답변
이미 최순이 씨나 김수악씨 등에 대해 진주검무 등에 썼던 내용을 기억 속에서 정리해서 다시 쓴 글입니다. 개작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Asfreeas (토론)
디지털진주문화대전에 쓴 글이 강병기님의 본인의 글인가요? 그 점이 궁금합니다.--아들해 (토론) 2008년 12월 20일 (토) 21:59 (KST)답변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글입니다. 역사적 사실, FACT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건 왜곡이 되겠지요? 역사적 사실까지 창작하라는 말씀은 아닐테고, 어떤 부분이 위키백과의 어떤 정책에 배치되는지 알고 싶군요. 문제를 제기할 때 어떤 부분에 어디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말씀해주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만, 또 어떤 정책에 위배된다는 말씀도 같이 해주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Asfreeas (토론) 2008년 12월 21일 (일) 03:05 (KST)답변
Fact가 문제가 아니겠지요. Fact가 문제라면 위키백과에 두산 엔싸이버나 브리태니커 한국어판을 싣는것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위키백과의 저작권 정책에 따르면 GFDL 1.2이상의 라이센스로 배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영리적인 용도까지 포함한 자유로운 사용과 재배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의 저작권 정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콘텐츠는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무단 복제 및 배포를 원칙적으로 합니다. 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개인적 이용 및 이에 준하는 이용에 한해서는 이를 허용합니다. 회사를 포함한 기타의 단체에서 내부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복제하는 경우에는 그 회사가 영리 회사가 아니더라도 사전 협의 없는 복제 및 배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마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의 저작권 정책을 그대로 적용한 것 같네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개인적 이용 및 이에 준하는 이용에 한해서는"이라는 조항 때문에 위키백과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위키백과에서 사용가능하려면 영리적인 목적이라 할지라도 사용이 가능해야만합니다.--아들해 (토론) 2008년 12월 21일 (일) 03:17 (KST)답변

구체적인 부분을 지적해 주시죠. 분명 Fact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위키와 브리태니커 한국어판, 두산 엔사이버 모두 내용이 일치합니다. 아무리 이것들을 보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asfreeas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초판유래부분의 세문장이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의 진주교방굿거리춤의 "개설"부분의 세문장과 정확하게 일치하네요.--아들해 (토론) 2008년 12월 21일 (일) 12:08 (KST)답변

고려 문종 때 들어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1900년대 이후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여기(女妓)들에 의해 교방에서 예술적으로 다듬어졌다. 고종 황제 때 여기(女妓)로 활동했던 최완자가 1940년대부터 당대 명기들로 하여금 판소리와 함께 공연하도록 지도하였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의 춤사위 이름도 음악의 창법이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쓰게 되었는데,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교방은 고려 문종 때부터 관기제도에 의해 존재했으며, 연등회 등의 행사에 가무를 선보였고, 이 교방이 조선시대로 이어져 왔고,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승무와 더불어 무속금지령에 의해 교방에 들어온 무속인들과 여기(女妓)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로 태어났다.

고종 때 진연도감청에서 궁중무희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로 인해 낙향을 했던 최순이(일명 최완자)가 1940년대부터 권번을 결성하여 이곳에서 당대 명기들에게 판소리와 함께 교방에 굿거리춤을 지도하였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의 이름도 창법이나 굿거리 장단의 가락의 호칭과 혼합하여 사용되었는데,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내가 쓴 것)


이것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진주디지털 문화대전은 진주교방굿거리춤이 고려때부터 전승해 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것은 교방이 고려 때 부터 존속을 해 왔고, 조선시대 무속금지령에 의해 무속인들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예술로 태어났다고 기술을 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과 내용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작권 문제를 건다면 위키 자체의 역사나 과학 관련 부분은 모두 삭제되어야 합니다. 삭제를 하던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위키백과의 어떤 규정과 근거에 의해 삭제하는 지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Asfreeas (토론) 2008년 12월 22일 (월) 12:54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20년 4월) 편집

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진주교방굿거리춤에서 1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봇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주 묻는 질문을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20년 4월 7일 (화) 22:04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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