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 최씨(通川 崔氏)는 강원도 통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통천 최씨
通川 崔氏
나라한국
관향강원도 통천군
시조최경현(崔景賢)
집성촌전라남도 장흥군
전라남도 해남군
함경남도 함흥시
경상남도 창원시
주요 인물최탁, 최운해, 최윤덕, 최립, 최계월, 최남현
인구(2015년)11,178명

시조 최경현(崔景賢)은 정종 때 정의대부판밀직사사(正義大夫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1]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역사 편집

시조 최경현(崔景賢)은 고려 때에 정의대부동판밀직사사(正義大夫同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감찰어사(中書左常侍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일부 문헌에서는 경주 최씨에서 분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2]

시조 최경현은 두아들 최사순과 최우순을 두었는데, 통천최씨 족보인 <<통천최씨 추원록>>에 따르면 현재 통천최씨 후손들은 최우순의 후손이다.[3]

성씨의 기틀은 고려말 공민왕시대에 활약한 중시조인 7세 최록부터 10세 최숙손까지 4대에 걸쳐 무인 가문으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며 15세기에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거족 성씨가 될 정도로 명문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받던 8세 최운해장군[4]와 9세 최윤덕[5]에 의해 조선 초기의 명문가문의 입지를 다졌다.[6]

그러나 정렬공 최윤덕의 사후 10여 년 만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등극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의 아들 최숙손과 장손 최맹한과 손자 최계한은 사육신 사건에 이개와 연루되었고, 4남 최영손은 금성대군 사건으로 피화되었다. 첫째동생 최윤복의 손자인 최로를 비롯한 후손들은 계유정난으로 피화되었다. 둘째동생 최윤온과 조카들은 계유정난에 김종서의 절친으로 정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문경으로 피신 후 해남으로 낙남하였다. 성종조에 사망한 정렬공의 아들 최숙손과 생존해있던 손자들, 최윤복의 손자 최로등이 복권되었으나 연산조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단종의 충신이자 최윤덕의 장손인 최맹한이 전한 단종의 사후에 대한 말을 듣고 사초에 기록한 <김일손의 사초사건>으로[7] 전체 가문이 단종에 충의를 보이다 큰 화를 입었다. 이후 정조대에 단종의 충신단에 최윤덕의 4남 최영손과 최윤복의 아들 최로, 최로의 여동생 내은덕이 함께 별단에 배향되었다.

성종조에 사육신사건으로 유배되었던 인물들이 사면, 복권 되면서 후손들이 벼슬길에도 나서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간이당 최립과 그의 아들 최동망, 이천전투에서 분전하고 부상으로 사망하여 선무원종공신과 북도병마사에 추증된 옥포공 최산정등 나라를 구하려 노력했던 인물들의 활약으로 사육사건으로 받았던 역적의 멍애를 어느정도 벗어났으나, 사면 복권은 되었지만 당시의 타격으로 조선건국과 세종조까지 이루었던 명문가문의 융성함은 복구하지 못하고, 크게 현달하는 인물들이 나타나지 못했다. 이후 고종조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최성온과 중추부동지사에 오른 최이헌 등이 가문을 알렸다.

인구 편집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 통천최씨는 8,144명으로 조사되었다.

인물 편집

과거 급제자 편집

통천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최동망(崔東望) 최립(崔岦) 최세진(崔世津)

무과

최암(崔嵓) 최영길(崔永吉) 최윤덕(崔潤德) 최태강(崔泰剛)

생원시

최립(崔岦) 최자립(崔自立)

진사시

최동망(崔東望) 최립(崔岦) 최세진(崔世津)

의과

최세담(崔世淡)

항렬자 편집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항렬자 성(性) 진(鎭) 근(根) 병(炳) 규(圭) 석(錫) 순(淳) 정(楨) 환(煥) 재(在) 현(鉉) 영(永) 식,치(植) 희,이(熙)
오행자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 항렬표는 오행을 따르며, 위의 항렬표는 정렬공 윤덕계열의 항렬표이다. 근제공 윤온계열은 이 항렬표에서 2세를 더하면 된다. 세파에 따라 항렬자를 오행상의 다른 글자로 변환하기도 한다.

세거지 편집

전북특별자치도 편집

경상남도 편집

전라남도 편집

경기도 편집

부산광역시 편집

함경남도 편집

유적 편집

  • 서울 종묘(세종묘) - 정렬공 최윤덕 배향.
  • 최윤덕 장군묘(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 - 1992년 10월 21일에 지정.
  • 최윤덕 장군 생가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 - 1995년 5월 2일에 지정.
  • 최윤덕 정려각(경상남도 창원시)
  • 관곡서원(전북 임실) - 정렬공 최윤덕배향.
  • 정렬공 최윤덕 부조묘(전북 장수군)
  • 단종 장릉 충신배식단(강원 영월) - 최영손, 최로, 내은덕(최로의 여동생) 별단에 배향.
  • 해남 대산사(삼충사) - 최운해, 최윤덕, 최윤온, 최산정 배향.

각주 편집

  1. 통천 최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2. 경주최씨 족보인 <아동최씨보>라는 책에 의하면 통천최씨 중시조이자 7세인 평장공 최록이 고운 최치원의 장손파의 12대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통천최씨는 고려 초중기(정종(靖宗), 1018~1046, 재위 1035~1046)에 창성된 창성 기간에 비해 후손들이 분포는 미약한 편이다. 이것은 시조로부터 창성된 이후 거듭된 참화로 후손들의 많은 실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천최씨 최초의 실전은 2세 최사순의 후손이다. 그것은 3세인 최탁(崔卓,?~1126년)장군이 이자겸의 난에서 인종의 명을 따랐다 피화된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7세 최록(崔祿,1325년 ~ 1362년?)장군이 장사성 토벌전쟁인 고우의 전투에 호군으로 참가하여 공민왕으로부터 록(祿)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고, 홍건적의 침입시에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전쟁 중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후손은 최운해(崔雲海, 1347년 - 1404년)장군과 따님 한분만을 남겼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고려말 대장군을 지냈던 7세 최비(崔裨)장군(최록장군의 동생이다.)의 계열인 최언관(崔彦觀)의 후손이 실전되었다. 8세인 최운해장군이 고려말에는 왜적토벌로 문하평리에 오르고, 조선에 들어서는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에 오르고, 태종과 세종대에는 9세인 최윤덕(崔閏德, 1376년 ~ 1445년)이 좌의정에 오르고, 형제들과 손자들이 대부분 관직에 진출하여 가문이 융성하였으나,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발생한 계유정난과 사육신사건, 연산조의 두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많은 후손들이 피화되고 실전되었다. 근대에는 한국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북한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지파중에서 함흥에 세거하던 극히 일부만 확인하고 있다.
  4.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던 양장공 최운해장군의 사망으로 조선 개국 이후 법으로 고위관료에 대한 예장과 시호법을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장(襄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인 중 최고(最高)의 공을 가진 인물이라는 평이 남아있다. 사후 세종 16년에 아들 최윤덕장상이 정승에 오름에 따라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5. 태종의 큰 은혜를 받았으며, 세종시대에는 대부분의 국방정책을 주관하였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이만주를 정벌하고 압록강변의 4군을 설치하였고, 전쟁에 대비하여 축성의 중요함을 항상 강조하고 전국을 돌며 많은 성들의 축조를 감독하여 축성대감이라고도 불렸다. 시호는 정렬(貞烈)이고 종묘의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선 최초로 무관이면서 정승이 된 인물이다. 참고로 조선조에 무인 출신 정승은 총 5명이 배출되었다.
  6. 최윤덕의 장자 최숙손은 세종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도절제사(종2품)에, 문종의 승하시에는 궁성사면절제사가 되었고,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에는 사은정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에 중추원부사에 제임하였다. 최경손은 세종조에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최광손은 문종조에 용천군사(정4품), 최영손은 단종조에 사복시정(정3품)에 있는 등 최윤덕의 아들 4형제가 모두 4품 이상의 벼슬에 있었다. 둘째 동생 최윤온은 태종대에 사헌부감찰을 시작으로, 세종조에는 함흥소윤, 사헌부집의, 성천도호부사, 승정원 우승지, 충청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단종조에는 판전농시사에 있었다. 그의 아들 최교는 이미 20대 초반인 세종14년(1432년) 능성현감을 지내는 등 많은 인물들이 조정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7. 사육신사건으로 유배형을 당했던 정렬공 최윤덕의 장손 최맹한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한을 가지고 사림들에게 널리 토로하였고 이것을 전해들은 김일손은 이 내용을 사초에 추가하였다. 이후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일손의 공초에서 김일손은 '고 최맹한은 진실한 사람이라 그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맹한의 장자이자 정렬공의 종손인 최륜이 무오사화에 현감으로 재임하다 장수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갑자사화에는 유배지 장수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처음에 정렬공 최윤덕장상 부조묘가 고향인 창원에 세워졌는데 정렬공의 종손인 최륜이 무오사화에 유배를 가면서, 정렬공의 제사라도 받들기 위해 유배지인 장수로 이건하였고, 결국 선영이 있는 창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졸하여 현재는 장수군에 위치하고 있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