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가,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10.26사태)에 피의자 (1926–1980)

김재규(金載圭, 1924년 4월 9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김재규
1968년 타이완 방문 당시 모습
1968년 타이완 방문 당시 모습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차장
임기 1973년 1월 6일 ~ 1973년 9월 6일
대통령 박정희
총리 김종필
장관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

대한민국의 제11대 건설부 장관
임기 1974년 9월 18일-1976년 12월 5일
전임 이낙선
후임 신형식
대통령 박정희
총리
역대 국무총리

대한민국의 제8대 중앙정보부장
임기 1976년 12월 6일-1979년 10월 26일
전임 신직수
후임 윤일균 (직무대행)
대통령 박정희
총리 최규하

이름
별명 덕산(德山; 호)
신상정보
출생일 1924년 4월 9일(1924-04-09)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사망일 1980년 5월 24일(1980-05-24)(56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소속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정당 무소속
부친 김형철
모친 권유금
형제자매 김항규(남동생)
김재선(여동생)
김재숙(여동생)
김정숙(여동생)
김단희(여동생)
김순희(여동생)
김영규(남동생)
배우자 김영희(정실), 장정이(내연녀)
자녀 3남 1녀(딸 김수영, 양자 김민수)
종교 불교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6년 ~ 1973년 4월 25일
최종계급 중장(中將)
지휘 6사단
보안사령부
3군단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전국구),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동안 대표적인 최측근으로 있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등을 암살한 10.26 사건을 일으켰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생애 편집

군인 생활 편집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편집

군부에서 신임 편집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으로 부임한다. 1964년 6ᆞ4계엄령이 선포되어 이 6사단은 서울의 계엄을 책임지게 된다.[1] 이때 6사단장은 김종필 제거에 앞장서고 계엄령하의 경찰업무에 군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한다.[1] 그리고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1월 6일 중앙정보부 차장 직책에 취임하였으며 해당 직책 재직 중이던 1973년 4월 25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에 기여 편집

국회 입문은,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입문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74년 9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중동진출 과정에 기여를 하며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2]

군사 정권에 반발의 표면화 편집

건설부 장관때 이미 유신정권이 독재를 유지하는데 대해 회의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한 점은 대학생들이 데모로 연행되거나 구속되는 것 등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석방시킨 사례도 있는 것으로 보이며, 방송에 따르면 건설부 장관 재직때 박 대통령을 독대하는 상황을 맞아 암살을 시도하려고 전역당시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소지하였지만 이유는 불명이지만 불발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기관장 취임 편집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박정희 암살과 사형 편집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궁정동 안가에 남겨둔 박 전 대통령을 국군병원으로 옮긴 것을 몰랐으며, 김계원 비서실장이 시신을 옮기는지 알았다면 허락 안했을 것이라며 "혁명의 실패는 김계원 비서실장 때문이라고 말했다.[3]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의 생존 루머 편집

사형 집행이 끝나고 김재규의 시신을 바꿔치기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4] 친동생 김항규씨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설은 루머이며, 시신을 받아서 혹여나 시신이 바뀌었는지 탐독했던 탐정 소설에서처럼 여기 저기 살펴본 결과 형이 틀림이 없었고 시신의 목에는 교수형 때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고 한다.[5]

군사법원에서 재심의 여지 편집

비록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혁명 시도가 설혹 혁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부마항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그나마의 형식적 민주주의마져 파괴되고 캄보디아와 같은 극한의 내전상태가 초래되거나 북한 김일성의 남침이 촉박되었을 개연성도 있다고 보이며, 결국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비록 권력의 핵심부인 중정부장이지만, 그 역시도 찬밥대접을 받던 상황에서 정규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는 민간인으로서 구테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선택지는 암살뿐이었으리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비록 살인의 죄책을 받고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선고된 죄명인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는 적법한 범죄구성요건이라고 할 수 없어보이며, '단순 살인'(박정희, 차지철)으로만 처벌되었어야 한다고 보이며, 재심을 통해 육군고등계엄군법회의의 선고를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학력 편집

박정희 암살의 동기 편집

민주화 혁명 편집

YH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포하는 기자 회견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라 발표한다.[6]

김재규 본인의 변론 편집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자유당때는 최인규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사형집행 했는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을 사형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어’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7]

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거사 전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 민주주의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출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4월 4일 (일) 제 78 회 ▣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 “장준하-김재규 '거사' 밀약 했다” | 일요신문 ]

암살 당시에 안가의 '가'동에는 육군 참모총장이 만날 약속이 잡혀서 정보부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신옥 변호사에게 정승화 총장도 자신에게 속아서 궁정동으로 왔다고 답한다.[8] 그곳엔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도 함께 대기한 바 있었다.[1]

NPT 가입 후에도 핵개발 추진 편집

박정희 정부는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서명하였지만 북한이 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NPT 비준을 미뤄왔다.[9] 1975년 4월 23일에 한국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은 조약 서명 후 7년 만에 NPT 회원국이 되었다.[9]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NPT 가입 후에도 지속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였다.[9][10] 박정희 정부 관계 부처의 의견 변화를 살펴보면 박정희 정부는 NPT 가입 후 오히려 핵능력을 증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가입을 결정했다.[9] NPT 가입이 핵 포기를 의미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합치하지 않는 사례이다.[9]

전 정보기관장의 개인 재산 동결 편집

1978년 10월말 한미관계조사보고서(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씨티은행이 미국과 해외계좌에 있는 그의 재산 총액이 1500~2000만 달러로 추정된다는 자료를 제출했다.[11] 그 자료가 제출되기 전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하원 청문회장에 증언대에서 260만 달러를 미국으로 가져와서 그 절반은 도박으로 날렸다고 시인했다.[11]

박정희는 미국으로 망명한 최측근 김형욱에 격노하며 상소금지, 재산몰수, 궐석재판에다 외국 도피자·거주자 처벌 등 초법적 내용을 담은 ‘특별조치법’ 제정을 지시한다.[12] 그에 따라 1982년에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반국가특별법) 위반죄로 김형욱은 재산 몰수형까지 받게 되고 1998년에야 재산 몰수형이 취소되어 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재산을 모두 돌려 받는다.[13]

최태민 박근혜 문제 편집

부동산 1천억원, 동산 2천억원이던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의 개인 재산 편집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 시기에 김재규 일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최태민의 비리가 시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14] 최순실이 이복 동생 되는 최재석은 2017년 PD수첩 방송에서 아버지 최태민의 개인 재산이 1994년 5월 사망 시점에서는 부동산으로 1천억원, 동산은 개인 금고에 2천억원해서 모두 3천억원 정도 되었다고 알린다.[15] 최재석은 네번째 부인, 최순실은 다섯번째 부인의 자녀인데 최태민이 노란 봉투 2개에 담긴 등기부 등본 등의 서류를 최재석 자신에게 보여주는데 부동산 재산 목록이었다고 한다.[15] 그런데 최태민의 사망직후 친척들이 다 모이고 2~3일 후에 최순실의 친모인 임선희는 에어콘까지 뜯어서 이사를 갔는데 그 금고의 돈도 모두 사라졌으며, 깡패 3~40명이 최재석에게 와서 살해 위협을 하길래 112에 신고하였는데 경찰 조차 오지 않았다.[15]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사이비목사 최태민이 자칭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기횡령 등은 물론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며 반문해서 김 전부장이 놀랬다고 한다.[14]

우발적 범죄설 편집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한다.

김재규의 1·2·3심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에게 김재규는 10·26 이전에도 서너 차례 대통령 시해 준비를 했지만 결행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8]

전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던 "혁명을 했다"는 메시지 조차 김재규는 옥바라지했던 동생에게 다급하게 전해야 했다.[16] 12·12 군사반란은 공조직을 병들게 하고 무력화한 군부 안에 암세포 같던 사조직이 반란의 주체였지만 당시 국민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17] 12월12일이 수요일이었으나 전두환씨는 12월 12일이 토요일이어서 휴일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 지을 작정이었다고 말한다.[18]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 편집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19]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9]

비교적 최근인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20]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기타 범죄 편집

김형욱 살인교사 편집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옆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21][22]

2020년 2월 3일 김재규의 셋째 동생 김정숙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우리가 아는 한 고인이 관여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23] 이스라엘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암살 훈련을 받은 요원이 중앙정보부 암살 실행조 일원으로 같이 있었으며, 1979년초 청와대 별관으로 불려 갔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술을 손수 따라주며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하고 통탄을 하였다고 언급하였다.[24]

예산 유용해 박정희 뇌물 시계 제작 편집

1979년 8월 하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 선물용 시계를 제작하기로 하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김모 행정비서관을 통해 주제네바대표부 N서기관에게 「일요일 오전 10시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 편으로 긴급문서를 보내니, 기장으로부터 직접 문서를 수령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취리히 공항의 KAL 사무소장은 N서기관이 도착하자 <사진과 같은 회중시계를 파텍 필립사나 피아제사에 주문하되, 11월 중순까지 물건이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 회중시계는 18K로 하고, 시계 전면과 후면의 도안은 나중에 보내겠다>라는 내용이 담긴 중앙정보부의 김모 행정비서관이 작성한 편지와 파텍필립사에서 제작한 회중시계 사진이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25]

N서기관은 봉투를 건네 받은 다음 날 아침 파텍필립과 피아제를 차례로 방문하였는데, 파텍필립의 영업 담당 책임자는 「시계의 금형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 시계 표면의 조각과 부속품 제작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해서 빨리 만들 수 없다. 시계를 만들고 나서 한국의 기후와 습도 등을 고려해 한 달 동안 시험 가동을 해야 한다.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주문해야 한다」는 설명을 하며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측에서 원한 11월 초순까지는 시계를 만들기가 어렵겠다고 하였다.[25]

같은 날 오후 피아제를 방문한 N서기관은 극동지역 영업 담당자에게 중앙정보부의 주문 내용을 전달하였고, 다음 날 아침 『시간이 너무 빠듯하지만, 한국과의 거래 관계 등을 고려해 시계를 제작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피아제는 당시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자신들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25]

이같은 사실을 N서기관으로부터 보고받은 김갑수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은 <시계 제작 문제는 김재규 부장님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 시계는 반드시 파텍 필립사에서 제작하되, 기일 내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는 피아제사에서 시계를 제작하는 것은 안된다는 내용의 전문과 제작할 시계의 도안을 주제네바대표부에 보냈다. 시계 도안은 회중시계 덮개에 봉황 문양의 대통령 문장이 새겨지고, 가운데에는 훈장을 패용한 박정희의 반신상 사진이 들어가도록 도안되어 있었으며 회중시계 뒷면 좌우 양쪽에는 여러 개의 무궁화가, 가운데에는 「근축 탄신 1979」라는 글씨가 새겨지게 되어 있었다.[25]

다음 일요일 N서기관은 김갑수의 전문을 전달받았고, 파텍필립의 영업 책임자를 다시 만났다. 파텍필립 측은 시간 외 작업을 하겠다며 김재규가 주문한 시계 제작을 맡기로 하였다. 주문액 보증금은 제네바 대표부 관인을 날인한 작업요청 공한으로 대신하였다.[25]

1979년 10월 중순 파텍필립은 1만 9000달러의 제작 비용을 청구하는 송장을 주제네바대표부에 보냈고, N서기관은 제네바 현지 시각 기준 10월 26일 오전에 외교 행낭 편으로 송장을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 시간으로는 10월 26일 오후 무렵에 해당하였고, 주문한 시계 가격인 1만 9000달러는 N서기관의 1년치 봉급과 각종 수당을 합친 금액과 비슷하였다.[25]

송장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0월 26일 오후 9시경(제네바 현지 시각 기준), 영국 BBC 방송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긴급 뉴스를 내보냈고 제네바 대표부 직원들은 대개 이 방송을 청취하였으며, 얼마 뒤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사실도 전해졌다.[25]

이에 시계의 필요를 상실한 중앙정보부와 제네바대표부는 주문 취소를 고려하였으나 시계 완성을 앞두고 있던 파텍필립 측은 제작 계속 의사를 밝혔다. 1980년 4월 10일경, 중앙정보부 본부는 「회중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가격과 물품 인수 가능 일자를 보고하라」는 전문을 제네바대표부에 보냈고, 중앙정보부는 중도에 구입을 보류하였다가 다시 시계 구입 결정을 확정하였다.[25]

중앙정보부의 담당 국장은 파텍필립으로부터 받은 시계를 전두환에게 전달하였고, 전두환은 보안사령부를 통해 1980년 경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게 전달하였다.[25]

평가 편집

긍정적 평가 편집

2019년 5월 1일 부대관리훈령 개정을 국방부 차원에서 마무리 하였다고 밝혔다.[26] 그에 따라 육군 3군단과 6사단의 역대 지휘관으로 사진이 게시되며, 부대의 역대 지휘관 명단에도 40여년 만에 다시 올라간다.[26]

강창성 민주당 국회의원은 미국의 압력으로 핵무기 개발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박 대통령의 시해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27]

함세웅 신부는 "우리 시대 가장 큰 희생자는 김재규 부장이다. 김재규 부장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때 한국의 민주주의가 확인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것을 언론에서는 민주 인권의 상징이라는 존재의 발언으로 보도했다.[28]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매제인 오수춘 전 육군 중령은 김 전부장이 간첩사건을 조작하던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며, '동백림 사건' 같은 종류의 '한 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밝혔다.[14]

박정희 대통령을 규탄하던 부마사태 시기에 마산에서 시위대에게 대열을 갖추라고 하고 구호를 외치게 하던 경남대 여대생 2명은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서, 시위 주동자로서 성고문을 받으며 취조 시설에 수감되어 있었다.[29] 그런데 박 대통령 서거후 한달 반이 지난 후에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으며, 부마사태 1번째 시위 주동자의 긴급조치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이 났으며, 어느 시위 참가자의 무죄 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며 피고를 격려한 바있다.[29]

신군부는 김재규를 패륜아로 만드는 언론 보도 관제(검열 및 대응) 프레임을 진행했다.[30] 김재규의 여동생 김단희는 언론에 '(부마항쟁 등에) 민란이 일어나면 대통령 가족들을 그냥 두겠느냐, 박근혜와 (박정희)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김재규가 안타까워했었다고 했다.[31]

부정적 평가 편집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89년 5월 19일 TV방송에서 옛날에는 독을 앞에 놓고도 임금에게 상소라는 것을 했었고, 아버지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정보부장이라는 높은 자리를 주었는데 유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했다면 한번이라도 어떻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하는 것은 패륜이라고 말한다.[32]

10·26 사건 김재규 재심 여부 심리 편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김재규씨 여동생의 10·26 사건 재심 청구를 4년만에 2024년 4월 17일에 심리할 예정이다.[33]

상훈 편집

충무무공훈장,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국선장·광복장·통일장과 킹압둘아지즈훈장(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받았다.

가족 관계 편집

  • 아버지: 김형철(1907년 ~ 1975년)
  • 어머니: 권유금(1905년 ~ 2001년)
  • 아내: 김영희(1930년 ~ )
    • 딸 : 김수영(1953년 ~ )
  • 남동생: 김항규(1928년 ~ 1997년)
  • 누이동생: 김재선(1933년 ~)
  • 누이동생: 김재숙(1935년 ~ 2019년)
  • 누이동생: 김정숙(1939년 ~ )

장남 김성신 장녀 김성은

  • 누이동생: 김단희(1943년 ~ )

장남 오현석 장녀 오영민

  • 누이동생: 김순희(1946년 ~ )

장녀 이영신

김재규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김광희 (2021년 11월). “인간 김재규와 10ㆍ26에 대한 재인식”. 《한국학연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63: 409–434. ISSN 1225-469X. 
  2. “김재규 (金載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12월 28일에 확인함. 
  3. “김재규 "유신헌법은" 재판관 "그만하십시오"···10·26의 최후”. 중앙일보. 2020년 6월 1일. 
  4. “24일 사형 당한 '박정희 시해' 김재규, 하루전 조카에게 한 말은”. 아시아경제. 2017년 5월 25일. 
  5. “친동생이 바라본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 사건의내막. 2017년 5월 26일. 
  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7회 "101호 작전" SBS 2021-04-22
  7.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주간경향 2005년 11월 4일 2011-10-25 확인
  8. “[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연합뉴스. 2019년 10월 25일. 
  9. 주경민 박정희 정부의 NPT 가입 요인 분석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8년)
  10. ““박정희, 핵무기 공개 뒤 하야하려 했다””. 중앙일보. 2010년 11월 8일. 
  11. “김형욱 “난 부자 아니다” … 씨티은행 “재산 2000만 달러””. 중앙일보. 2015–06-12. 
  12. “[오래전 '이날']8월28일 박정희 '배신'한 김형욱의 무죄”. 경향신문. 2016년 8월 28일. 
  13. “김형욱씨 재산 몰수 부당, 가족에 300억대 반환판결”. 중앙일보. 1998년 1월 23일. 
  14. “박근혜 탄핵 마주한 김재규 일가의 반응 뉴욕거주 김재규매제 오수춘 박사 단독 인터뷰”. 선데이저널. 2016년 12월 15일. 
  15. PD수첩 1114회 최순실 재산, 또다시 대물림되는가 MBC 2017-01-24
  16. “친동생이 바라본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 사건의내막. 2017년 5월 26일. 
  17.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한겨레신문. 2015년 12월 6일. 
  18. ““軍에 법을 무시하는 오점 남겨””. 시사저널. 1990년 1월 21일. 
  19. 「www.한국현대사.com」(김진국, 민연, 2000) 229페이지
  20.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68380
  21. 지일우·정준영 (2005년 5월 26일). “김재규 지시로 파리근교서 김형욱 권총살해”. 《연합뉴스》. 
  22. 미디어칸 뉴스팀 (2005년 5월 26일). “김재규 지시로 김형욱 살해했다”. 《경향신문》. 
  23. '남산의 부장들' 본 김재규 유족 "폄하도 미화도 원치 않는다". 《중앙일보》. 2020년 2월 4일. 
  24. ““김형욱은 내가 죽였다””. 《시사저널》. 2005년 4월 11일. 
  25. 배진영 (2005년 3월). “[추적] 10·26 직전 金載圭가 朴正熙 생일 선물로 준비한 2만 달러짜리 파텍 필립 시계의 행방”. 《월간조선》 (2005년 3월호: ㈜조선뉴스프레스). 
  26. “[단독]‘10·26’ 김재규 사진, 출신 부대 다시 건다”. 경향신문. 2019년 5월 2일. 
  27. “5공, 핵개발 포기”. KBS. 1995년 10월 5일. 
  28.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회 '극비해제' 10.26과 전두환! JTBC 2019-05-28
  29. 《2부 잊혀진 영웅들》. 창사60주년 특집 기억하라 1979 2부작. 부산MBC. 2019년 4월 29일. 
  30.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회 '극비해제' 10.26과 전두환! JTBC 2019-05-28
  31. "박근혜 아꼈던 우리 오빠를 패륜아로 부르다니...". 오마이뉴스. 2012년 5월 27일. 
  32. “뉴스타파 26회 시선 - "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전문]”. 뉴스타파. 2012년 9월 14일. 
  33. “‘10·26 사건’ 김재규 재심 여부 다음 달 심리…청구 4년만”. KBS. 2024년 3월 13일. 

외부 링크 편집

전임
(육군방첩부대장)박영석
제15대 육군보안사령관
1968년 2월 17일 ~ 1971년 9월 23일
후임
강창성
전임
김치열
제6대 중앙정보부 차장
1973년 1월 ~ 1973년 9월
후임
(제1차장)이상익
(제2차장)이철희
전임
이낙선
제11대 건설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후임
신형식
전임
신직수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6일
후임
(직무대행)윤일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