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일본의 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1918–1993)

다나카 가쿠에이(일본어: 田中 角栄, 1918년 5월 4일 ~ 1993년 12월 16일)는 16번 중의원 의원에 뽑히고, 64·65번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일본정치인이다. 니가타현에서 태어나 총리 재임중이던 1972년에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교를 수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총리 사임 후 록히드 사건으로 복역했다. 장녀인 다나카 마키코는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田中 角栄
내각 공보실에서 공표한 초상
내각 공보실에서 공표한 초상
일본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1972년 7월 7일~1974년 12월 9일
전임: 사토 에이사쿠(제61·62·63대)
후임: 미키 다케오(제66대)

신상정보
출생일 1918년 5월 4일(1918-05-04)
출생지 일본 제국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1]
사망일 1993년 12월 16일(1993-12-16)(75세)
사망지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정
정당 자유민주당

생애 편집

정치 입문 전 (1918년 ~ 1945년) 편집

정치 입문과 수상 취임 (1946년 ~ 1972년 7월 6일) 편집

총리 시절 (1972년 7월 7일 ~ 1974년 12월 9일) 편집

총리 퇴임 후 (1974년 12월 10일 ~ 1993년 12월 16일) 편집

사후 편집

공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 편집

사회 기반의 정비 편집

  • 중의원의원으로 있으면서 100개가 넘는 의원 입법에 참여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주도하여 전면개정을 실현한 도로법이나 도로·항만·공항등의 정비를 위해 제정된 특별회계법 등은 일본의 사회 기반 정비에 큰 영향을 남겼다. 행정 공무원을 능가하는 방대한 지식과 실행력이 돋보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단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그에 관계된 건설성이나 운수성 등에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또한 자신이 장관으로 있었던 통상산업성이나 우정성 등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해 정치가에 의한 행정 공무원 컨트롤의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 자신의 선거구였던 니가타현의 사회 기반 정비에도 충실해, ‘설국(雪國)과 도시의 격차 해소’,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등을 주창하며 간에쓰 자동차조에쓰 신칸센 등의 대규모 사업에서부터 나가오카시오지야시 등의 제설장치 설치, 산간지역의 터널 정비와 같은 생활밀착형 사업까지 다양한 공공사업의 유치에 성공했다. 조에쓰 신칸센의 우라사 역(미나미우오노마 시) 동쪽 출구에는 지금도 다나카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월산회와 자금 조달 편집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뒤 악수를 나누는 다나카.
  • 니가타현에 존재했던 정치단체 에쓰잔카이(越山會)는 일본 정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후원회로, 전성기에는 회원수가 9만 5천여 명을 헤아렸다. 1990년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정계를 은퇴했을 때 해산했다. 월산회는 건설업자에 의한 공공사업의 수주와 선거 때의 표심을 거래하는 교환거래의 창구가 되어 지역사회를 지배했다. 이는 지역 주민의 생활 향상에 공헌한 유용한 조직이 된 반면, 자민당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으며, 공공사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왜곡된 산업구조를 남기기도 했다.
  •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직에서 사퇴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게이슌주의 논문제목인 《외로운 에쓰잔카이의 여왕》에서 ‘에쓰잔카이의 여왕’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비서였던 사토 아키라의 별칭이다. 그녀는 또한 에쓰잔카이의 통괄 책임 등으로 활동하면서 ‘에쓰잔카이의 금고담당’이나 ‘에쓰잔카이의 여왕’등으로 불리며 활약했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해고되었다.

정치 편집

  • 고등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니가타에서 상경해 실업계 및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둔 경력때문에 태합으로 불리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지금 태합”이나 “서민재상”으로 불리며 취임 당시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기록했다. 하지만 다나카가 주창한 일본열도 개조론 등이 지가의 폭등이나 인플레이션을 부르면서 지지율은 급속히 감소했다.
  • 록히드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당내에서 가장 큰 파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특히 오히라 마사요시·스즈키 젠코·나카소네 야스히로총리로 취임하는 데에는 다나카가 큰 영향을 끼쳤고,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그림자 쇼군(闇將軍)이라고 불렀다. 결국 그 거대한 영향력은 자신은 선거구에서 압승한 반면에, 당은 참패하는 이율배반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참고로 그의 록히드 사건이 지네딘 지단이 경기 도중 박치기를 한 사건처럼 비디오게임으로 재현되었다. 록히드 사건을 비디오 게임으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게임 회사인 세가사의 《아임 쏘리》였다.
  • 재임중이던 1974년에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함께 사용하는 선거제도의 도입을 제창했지만, 야당과 여론의 맹반발을 받고 철회했다. 일반적으로 이 선거제도 개혁을 게리맨더링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가쿠맨더링이라고 부르고 있다.
  • 자신이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의 파벌에서 자민당의 총재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정권제조자로 군림하는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는 결국 총리의 권위를 실추시켜 정치권력구조의 불투명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축적된 불만은 최종적으로는 다케시타 노보루가 다나카파에서 이탈하면서 파벌이 붕괴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 자신의 선거구에서도 후계자를 정하지는 않고, 자신이 계속 군림하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990년에 은퇴할 때에는 월산회를 해산해 각자가 의향대로 투표하게 되었지만, 1993년의 중의원 선거에서는 해산된 월산회 회원의 대부분이 다나카 마키코를 지지했다.

외교 편집

  • 다나카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토 에이사쿠는 오히려 타이완중화민국 정부를 중시하고 있어, 다나카 자신은 친중파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2년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이나 미키 다케오가 총재선거에서 다나카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중·일간의 수교방침을 내건 것 등으로 인해 중·일간의 국교 수립을 시급하게 추진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다나카의 가장 큰 공적이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이때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게 된 것은 아직도 비판받고 있다.[출처 필요]
  • 재임중에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중동정책을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측 지지로 전환하고, 중동 이외의 지역에서 에너지를 직접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나카의 지지자 일부는 이로 인해 미국의 석유 자본의 침체를 불러, 록히드 사건에 의한 사실상의 실각으로 연결되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인해, 주권침해와 한국측의 일방적인 정치적 결론을 수락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 이때 적절한 대처를 취했다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관련 인물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다나카가 태어날 당시에는 가리와군 후타다촌이었다.

외부 링크 편집

전임
사토 에이사쿠
제64 · 65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1972년 7월 7일 ~ 1974년 12월 9일
후임
미키 다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