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그리스어: Λουκάς 루카스[*], לוקאס, 공동번역), 루카(가톨릭), 누가(개신교)는 기독교의 전승에 따라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의 편집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루가

히에로니무스유세비우스 등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그가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모두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곧 신약 성경의 전체 분량 중 4분의 1 이상을 작성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러나 이 두 책 저자가 루가라는 결정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두 책 저자에 관한 논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짧게 몇 번 언급하는데,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4절에서는 루가를 의사이자 바울로의 동역자로 기록하고 있다.

초대 교회부터 성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순교자로 추정하며, 올리브 나무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전승이 있다. 가톨릭을 비롯하여 성인 제도 있는 기독교 교단들은 그를 복음사가이자 예술가, 의사, 미혼남성, 의사, 학생, 도축업자의 수호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루가 상징은 인데, 이는 침착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축일은 10월 18일이다.[1]

행적 편집

전승에 따르면 루가는 복음사가 중에서 유일한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이며, 시리아 속주안티오키아 출신이며, 의사 출신이었으며, 미혼이었고, 84살에 아카이아(비티니아 혹은 이집트)에서 죽었고,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하지만 신학자 중에는 루가가 노예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로의 두 번째 전교 여행 중에 나타나는데 루가는 바울로의 인간적 인품에 매료되어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 바울로가 세 번째 전교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몇 해 동안 필리피에 머물다가 바울로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바울로가 카에사리아에 수감되어 2년간 미결수로 있었을 때 그의 곁에 2년간 머물렀다. 이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루가가 복음서를 쓴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성서학자들은 루가가 루가복음서를 쓰면서 예수의 어록문서로 추정되는 문서인 Q문서마르코의 복음서을 자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로마로 향하는 바울로의 위험한 여행에 동반했으며 바울로의 충실한 동료가 되었다. 바울로는 "루가만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시오,"(2디모 4:11)라고 기록했다.

루가의 직업은 의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4장 14절)에 보면 그를 "사랑하는 의사 루가"라고 불렀으며, 루가복음서에는 많은 의학용어가 등장한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 대한 공관복음의 서술에 보면, 유독 루가복음서만 "용하다는 의원들은 다 찾아보았으나 돈만 날리고 말았다"는 서술이 없다. 이를 의사로서 자신의 직업을 옹호하려는 의도라고 풀이한다.

서기 70년과 85년 사이에 루가는 신약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을 저술하였는데, 그는 이 두 책에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리스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도한 것이다. 루가의 복음서을 보면 루가가 고전 그리스 문체에 매우 뛰어났으며 유대교의 원전에 대한 지식도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두 그가 실제로 본 것을 쓴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바울로에 대한 전승을 수집하여 편집한 신학 문서들이다.

전설에 따르면 루가는 맨 처음 성모 마리아를 그린 사람이라고 한다. 루가가 그린 최초의 성모화는 폴란드 체스트호바의 야스나고라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는 루가가 직접 그렸다고 전설의 ‘로마 백성의 구원(Salus Populi Romani)’이라고 불리는 성모 마리아 이콘이 있다. 몇몇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서기 590년에 로마에 흑사병이 창궐할 적에 이 역병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행렬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모시고 간 성화 즉, 이콘이 성모 성화상이였다고 한다.

각주 편집

  1. “The Calendar”. 《The Church of England》 (영어). 2021년 3월 2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