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카르 2세

오타카르 2세(체코어: Přemysl Otakar II., 1233년경 ~ 1278년 8월 26일)는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253년 ~ 1278년)이다.

오타카르 2세

생애 편집

보헤미아의 국왕인 바츨라프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츨라프 1세는 원래 자신의 첫째 아들인 블라디슬라프(Vladislav)를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 둘째 아들인 오타카르를 교회 행정관으로 키우려고 했지만 1247년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하면서 오타카르가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자가 된다.

1248년에는 귀족들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아버지였던 바츨라프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는 몇몇 귀족들이 오타카르를 보헤미아의 군주로 선출하고 바츨라프 1세를 축출하기도 했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오타카르를 파문시키면서 패배하고 만다. 반란군을 진압한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를 프르짐다(Přimda) 성에 유배시켰지만 1251년에 석방시켰다.

1246년 바벤베르크 가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라이타강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베르크 가가 끊기고 만다. 바츨라프 1세의 장남이자 오타카르의 형이었던 블라디슬라프는 오스트리아의 공작 부인이었던 게르트루데(Gertrude)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공작임을 선언했지만 1247년에 사망하고 만다.

1251년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블라디슬라프의 동생인 오타카르를 오스트리아에 초대했다. 1252년 2월 11일 오타카르는 하인부르크안데어도나우(Hainburg an der Donau)에서 프리드리히 2세 공의 언니인 마르가레테(Margarete)와 결혼했다. 1253년 바츨라프 1세가 사망하면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254년에는 독일의 국왕이었던 콘라트 4세의 뒤를 이어 독일의 국왕으로 즉위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국왕에 즉위한 이후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를 모라바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프리울리 변경백국, 빈디셰마르크(Windische Mark)로 확장해 나갔다. 오타카르 2세는 프로이센의 십자군을 지원하면서 이교도가 소유하고 있던 도시들을 점령했다. 1255년에는 튜턴 기사단이 오타카르 2세를 기념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다. 1266년에는 에게를란트(Egerland)를 점령했고 1268년에는 케른텐의 울리히 3세(Ulrich III)와의 상속 계약을 체결하면서 케른텐, 크라인, 빈디셰마르크를 획득했다. 1272년에는 프리울리를 획득했다.

1273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황제로 선출되지는 않았다. 1274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회의에서 루돌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이후에 바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영토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것을 명령했다. 1275년 루돌프는 오타카르 2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의 호프부르크(Hofburg)에 있던 오타카르 2세의 거처를 포위했다. 1276년 11월 오타카르 2세는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공작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오타카르 2세가 소유한 영지는 보헤미아, 모라바만 남게 되었다.

1278년 8월 2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1세와의 마르히펠트 전투(Marchfeld)에서 전사했다. 그의 왕위는 바츨라프 2세가 승계받았다. 그는 후세 시인들 사이에서 황금과 철의 왕, 불세출의 영웅으로서 칭송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연옥편의 제7장에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영웅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전임
바츨라프 1세
보헤미아의 국왕
1253년 ~ 1278년
후임
바츨라프 2세